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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서정주
내 마음 속 우리 임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나르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해설> 이 시는 1966년 현대문학에 발표되었으며, 1968년에 시집 <동천>의 표제시이다.
이 시에서 가장 핵심적인 이미지는 '우리 님의 고운 눈썹'과 '매서운 새'이다. 시적 자아는 이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차갑고 투명한 겨울 하늘동천(冬天)에 매달아 놓는다. 이로써 '고운 눈썹'은 '초승달'의 이미지와 중첩되며, 시적 자아의 마음 속에 갇혀 있던 '님의 눈썹'은 '즈믄 밤의 고운 꿈'으로 맑게 씻겨짐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보편적인 존재로 승화된다. 차가운 겨울 하늘을 배경으로 하여 달을 향해 날아 오르던 '매서운 새'조차도 그것을 알고 '시늉하며 비껴' 가는 것이다.
이 때 '매서운 새'는 무한과 영원을 동경하는 인간의 정신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거니와, '초승달'은 이 '매서운 새'조차 비껴 가지 않으면 안 될 절대적인 가치를 상징하는 것으로서의 초승달과 그것에 대한 외경 때문에 그것을 비껴 가는 새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는 천상과 지상, 영원과 찰나, 혹은 절대적인 진리와 인간의 유한성 사이의 극복할 수 없는 단절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현대시목록, 인터넷)
* 이 시 동천이 쓴 시기는 작가의 초기 시에 보이던 생명력에 대한 갈구나 병적인 징후가 『귀촉도(歸蜀途)』와 『신라초(新羅抄)』의 단계를 거침으로써 어느 정도 사라지고, 동양적 체념과 안식의 자세를 취하며 마음의 평정을 도모하던 때이다. 서정주 시의 전개 과정에 있어서는 사상적 원숙미와 시적 구성력이 가장 고조된 시기라 할 수 있다.
물론 『동천』에 실린 작품들이 불교의 인연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들이 대부분이어서 『신라초』의 연장선상에 놓인다고도 볼 수 있지만, 불교적 설화조의 바탕에 짙은 유미주의적 인식이 착색되어 있음을 그 차이점으로 지적할 수 있다.
또한 설화조의 시들이 긴장감 어린 압축미보다는 이야기와 결부된 사색의 깊이를 추구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그러한 산문적 서술시와는 달리 짤막한 단시의 형식을 통하여 한순간의 정신의 긴장과 감정의 응축을 포착하고자 한 작품들도 많이 보인다. 이 시기의 그러한 성향을 대표하는 시가 바로 「동천」인 것이다.
이 시는 전부 5행으로 되어 있으며, 각 시행은 7·5조를 기반으로 한 3음보의 율격 구조를 가진 것으로 율독(律讀)이 가능하다. 그만큼 이 시는 우리 고유의 민요나 시조 같은 전통적 시가 형식과의 상관성을 짙게 나타낸다. 그것은 곧 이 시의 근저에 동양적 형식미와 정신세계가 잠겨 있으리라는 판단을 내리게 한다.
이 시에서 중요한 해석의 열쇠 구실을 하는 것은 님의 눈썹과 새의 관계이다. 겨울 하늘의 투명하고 삽상한 공간에 시의 화자는 자신이 사랑하는 님의 눈썹을 천(千)날 밤의 꿈으로 씻어서 걸어 놓았다고 진술한다. 그랬더니 추운 겨울밤을 나는 새도 자신의 지극한 정성을 알아보았는지 그 눈썹의 모양과 비슷한 모습으로 피해가더라는 것이다. 이러한 진술은 정신과 정신의 마주침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님을 사랑하는 마음의 간절함은 추위도 무서워하지 않는 겨울새에게까지 감동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은 불교의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는 개념을 연상시킨다. 이 짧은 시 한편에도 시인의 불교적 사유가 은밀히 담겨 있음을 엿볼 수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하늘’, 그 영원과 형이상의 발견 (발췌)
땅에 엎드려 있거나,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걷거나, “사향 방초ㅅ길”을 “꽃대님보다도 아름다운 빛”을 두르고 가는 삶의 고초와 숙명에 매여 있던 『화사집』의 시적 자아는 『귀촉도(歸蜀途)』와 『신라초(新羅抄)』를 거쳐 『동천(冬天)』에 이르러서 홀연 하늘의 높이로 빨려 올라간다. 하늘은 천문지리의 발생론적 자리며, 영원의 형이상학이 회임(懷妊)되는 시공간이다. 혼돈과 무질서의 에너지로 충만한 『화사집』의 세계는 『동천』에 이르러 맑게 삭혀지고 걸러져서 달관의 투명성과 승화의 높이, 우주적 질서의 형이상으로 나아가는 길을 연다.
현세적 질곡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 영원주의를 찾은 것은 “신라적(新羅的)인 정신태(精神態)”에 빠져들었던 서정주의 불가피한 귀결이다. 이를 두고 현실의 세목에 대한 성찰을 버리고 허황한 신비주의로 도피한다는 비판을 못 할 것도 없지만, 「동천」에서의 시적 성취를 곰곰이 들여다보면, 시인이 더욱 유장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삶을 통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인의 상상은 땅 위의 번민과 들끓는 정념이 맑게 삭혀지고 걸러지고서 “하늘”로 옮겨간다. “우리님의 고은 눈썹”과 같이 소중한 것을 맑게 씻어 간직하는 장소라면 깨끗하고 신성한 곳임이 틀림없다. “하늘”은 시인이 찾은 순수한 피안이다. 아울러 “하늘”에 비친 영원과 형이상에 대한 새삼스런 자각과 인식이며, “동천”을 둘러싼 조화와 질서의 느낌, 평화로움과 고요의 느낌은 “단생중심(單生中心)”의 현실적 사관을 버리고 불교적 삼세인연설(三世因緣說)과 윤회전생관(輪廻轉生觀)을 취한 데서 말미암은 것이다. “우리님의 고은 눈썹”은 정념과 현세적 삶의 인연을 보여주는 기호다.
『화사집』의 “푸른하눌이다…… 물어뜯어라, 원통히 무러뜯어”와 같은 정신 상태라면 이 정념은 원초적 충동과 공격적인 에너지로 말미암아 괴로움의 원인이 되었을 터다. 하지만 나름대로 초월과 해탈의 여유를 얻은 시인은 그것을 “즈문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겨 심는다. 하늘은 탈물질화한 공간이다. “하늘의 푸르름”은 “순결함, 높음, 투명함”의 시적 표상인데, 그 푸르름 속에서 “다가적(多價的) 신화”들이 잉태된다.
하늘은 현세적 삶의 원리나 욕망 따위는 걸러지고 삭혀져 무(無)에 가까운 텅 빈 바탕이다. “눈섭”은 그 하늘로 옮겨지며, 차갑고 푸른 겨울 하늘의 궁륭에 뜬 초승달로 바뀐다. 이것은 욕망의 미적 승화로 읽을 수 있겠다. “동지섣달 나르는 매서운 새”도 이걸 알고 비켜 날아간다. 동지섣달의 초승달과 그 옆을 나르는 매서운 새는 기실 아무런 연관도 없다. 다만, 우연히 “동천”이라는 한 공간에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시인은 놀라운 직관과 상상력으로 현세적 삶의 인연을 초승달과 비끼어 나는 새의 인연으로 엮어놓는 마술을 부린다. 그리하여 단번에 쓸쓸하고 허허로운 “동천”의 풍경을 삼세인연설의 의미로 가득 찬 장소로 바꿔놓는다. (장석주/문학평론가, '나는 문학이다')
* 발아를 예비하는 땅 속 씨앗들
이미 설악산 대청봉에 첫눈이 오고 서울에는 첫얼음이 얼었다. 작은 동네 서점에 들렀더니, 주인아저씨가 반갑게 맞으며, “올해는 왜 이렇게 빨리 지나갔는지 모르겠다”고 푸념을 한다. 문득 마지막 달이 코앞에 닥친 것을 실감하며 그 말에 맞장구를 쳤다. 나이 들수록 세월이 빨라지는 것은 왜일까?
동짓달은 음력으로 11월이다. 태양의 남중고도(南中高度)가 가장 낮고, 낮은 짧고 밤이 가장 긴 동지(冬至)가 든 달이다. 삭풍이 불고 한파가 몰아친다. 식물들은 성장을 멈추고, 야생 짐승들은 먹이를 구하는 일이 난감하다. 양서류와 파충류들은 아예 땅속으로 숨는다. 동짓달은 추위와 배고픔이라는 시련 속에서 너도나도 한껏 제 존재를 낮추고 웅크리는 고난의 시절이다.
누리에는 빛이 줄고 어둠이 많으니 음의 기운도 가장 세다. 일조량이 줄 뿐만 아니라 긴 밤들이 온다. 낮과 낮의 시간 사이에 낀 밤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빛의 세상으로 나오기 전까지 사람은 어둠의 동굴인 엄마의 자궁에서 열 달을 보낸다. 자궁 속에서 태아는 자율신경의 지배만을 받는 식물적 존재로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 태아는 자궁에서 인류의 전 역사를 제 뇌 속에 새긴다. 밤은 어린 몸과 정신이 자라도록 온갖 자양분을 흘려보내주고, 그런 까닭에 우리는 밤에 빚지며 삶의 절반을 빚는다. 주로 낮에 움직이며 낮에 노동을 하니, 사람은 굳이 구분하자면 낮의 생물이다. 하지만 지구 바깥의 광활한 우주를 지배하는 것은 어둠이다. 태양과 지구는 오로지 캄캄한 밤과 밤으로 이어지는 우주 공간에서 외롭게 제 궤도를 도는 별이다.
책을 읽다가, 막 태어난 새끼 고양이는 어미가 충분히 핥아주지 않으면 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흠칫 놀랐다. 새끼 고양이는 신경 말단이 깨어나는 데 꼭 필요한 촉각의 흥분이 없으면 혼수에 빠진다고 한다. 아아, 모든 생명은 이 세상에 오는 순간부터 환대받아야 한다. 어미가 갓 태어난 새끼의 몸통을 핥아주는 것은 “그래, 이 세상에 잘 왔구나!” 하고 어미가 새끼에게 보내는 환대의 신호인 셈이다. 프랑스 작가 로멩 가리는 에밀 아자르라는 가명으로 내놓은 소설 ‘자기 앞의 생’에서 “사람은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단호하게 썼다. 아기는 품고 쓰다듬고 어루만져 주지 않아도 죽지는 않지만 이 세상에 도착할 때 사랑을 받지 못하고 무관심과 냉대로 팽개쳐져 생긴 상처를 무의식에 각인한 채 평생을 살아간다. 사랑을 받지 못했으니 남과 사랑을 나눌 줄도 모른 채 다른 인류에게 해악을 끼치며 인생을 헛되이 낭비한다.
삭막한 밤과 어둠의 시절이라고 사랑의 불씨 한 점조차 없는 것은 아니다. 동짓달은 역경(易經)의 12괘 차례 중에서 복괘(復卦)에 해당하는데, 이 괘는 “천지가 만물을 생성하는 마음을 볼 수 있다”고 일러준다. 사랑은 만물이 생성하는 기초 조건이다. 음의 기운으로 덮인 세상이 춥고 어두워도 생명은 태동하고 땅속 씨앗들은 발아를 예비한다는 것을 옛사람들도 알았다. 서정주는 ‘동천(冬天)’에서 시인의 빼어난 직관으로 그 사실을 꿰뚫어보고 이렇게 옮겼다. ‘내 마음 속 우리 임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동지섣달 날으는 매서운 새가/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키어 가네.’ 음의 기운이 극에 달해 반전(反轉)을 한다. 누리에 찬 음의 기운이 줄고 꿈과 사랑의 불씨를 지피는 양의 기운이 차오른다. 이런 동지섣달의 곡절을, 시인은 제 마음이 품은 사랑의 씨앗을 맑고 곱게 키우는데 천 날 밤을 빌려 쓰는 사랑의 드라마로 옮겨 적었다. 과연 동천에 심은 사랑의 인연(因緣)은 숭고한 것이어서 매서운 새조차 감히 비켜가는 것이다. (장석주/시인, 한국경제 '씨줄과 날줄')
◇ 서정의 날개 맞아 하늘 다가오다
고운 눈썹 그것은 미인의 표상이 될 수 있다. 변영로 시인의 시 '논개'에 '아리따운 그 아미(蛾眉·눈썹) 높게 흔들리우며 석류 속 같은 그 입술' 이라는 구절이 있다. 동양적인 미인을 그리는데 초승달 같이 여리고 예쁘게 휘어진 눈썹을 문인들은 흔히 등장시켜 왔다. 또 불교 경전에는 부처님의 특출한 모습 32가지(三十二大人相)가 있는데 그 형상 중에 아미수양상(蛾眉垂楊相·빼어난 눈썹 모습이 휘늘어진 수양버들 같은 모습)이란 말이 있기도 하다.
그렇게 고운 우리 님의 눈썹을 눈 앞에 두어서 보고 기뻐하기만 하기엔 너무 곱고 고매하여 내 마음 속으로 아예 깊이 품어 들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님의 고운 눈썹과 내가 둘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시인은 둘 아닌 하나가 된 지금에도 그 눈썹을 두고 만족하여 가만 있기만 할 수는 없어 님의 고운 눈썹에게 무언가 해줄 수 있는 길을 찾아 궁리하다 보니까 꿈으로 맑게 씻는 작업을 하게 된 것이다. 꿈이란 내 마음과 사유(思惟)의 반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항상 마음을 님의 고운 눈썹에 쏟아부을 수밖에 없게 되었으므로 꿈으로는 언제나 고운 눈썹을 씻어 맑게 하는 일을 놓아버릴 수 없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 해가 떠서 밝은 낮에는 끊임없이 님의 고운 눈썹을 위하여 배려하고 간절히 생각하는 의식적 작업이 있기에 안식의 장막 천지에 내려진 밤에는 꿈이라고 하는 무의식 작업, 한결같이 님의 고운 눈썹을 맑게 씻는 일을 저절로 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의 꿈으로 더 없이 맑게 씻은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시인은 새로운 생명체로 어여쁘게 가꾸어 기르고 싶은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하늘에다 옮기어 심는다'는 대목에 해당된다. 묻는다고 한 것이 아니라 '심는다'고 했다. 생명이 다한 것 또는 돌 같은 무생물을 땅 같은 곳을 파고 넣는 것을 묻는다라고 한다면 새로운 생명이 예약된 씨앗이나 꽃나무 같은 것을 싹 틔우거나 뿌리내리게 하기 위해서라면 심어야 하는 것이다.
심는다는 행위는 '내 마음 속'에 그렇게 오래 품었던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떠나보내는 행위 곧 회자정리(會者定離·만난 것은 헤어지게 되어 있음)의 법리(法理)를 말하는 동시에 새로운 생명체의 탄생을 기약하는 윤회전생의 한 단계를 보이고 있다. 텅 비어 푸르기만한 하늘·천공(天空)에다 심었다는 것이다. 언제 어떻게 어디쯤에 심었는지 묻는다면 당사자 시인도 선뜻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도 독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바로 언어를 소재로 하여 펼치는 시인의 마법이라 할 만하고 아리송하고 어렵게, 또 비유법 등을 운용하는 것이 특권처럼 되어 있다. 새가 난다. 동지 섣달, 절박하고 심각하여 노래 잃고 오직 일심으로 하늘에 심어진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의 그 모습을 따라 시늉하며 날아 갈 수 밖에 없는 새인 것이다. 나는 새가 있어 '고운 님의 눈썹'의 모습이 비로소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우리 님의 고운 눈썹'과 '매섭게 날으는 새'를 같은 선에 나란히 병치시키며 활짝 펼쳐 솟아오르는 서정의 날개를 향해 자유의 하늘이 다가오고 있다 할만하다. (능지스님/천룡사 주지, 국제신문 '능지스님의 자유')
<전북 고창군 아산면 선운사가는 길 서정주 시비, 시제는 '선운사 동구에서'>
* 선운사 동구에서/서정주
선운사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안 했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읍디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었읍디다
♣ Lara's Theme/Andre Rie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