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 새봄이 눈뜨기 시작되던 2월 초순경이다. 우연히 집 사람이 설사가 난다면서 동네 의원을 가더니 ‘장염(腸炎)’이라는 진단으로 약을 한 봉지 받아왔다. 그렇찮아도 수년 전부터 식도역류성으로 고생했는데, 다행히 단골 의원 원장님이 ‘내 졸업논문 제목이 그건데…’ 하면서 열심히 돌보아 준 덕분에 겨우 완치단계에 접어들고 있는 때라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이미 동네 목욕 여탕의 터줏 할매들이 유경험자인 듯 ‘동상아! 그거 오래 간데이…’, ‘성님요! 그거 짧아도 한 달은 간다카디요.’ 하면서 주의를 겸해서 겁도 줬는데 진짜였다.
두 달 가까이 흰죽을 먹으면서, 가끔 수액(링거)처방을 받았지만, 완전하지가 않았다. 평소 고기나 생선을 좋아하고 야무진 체질인지라 크게 염려하질 않았는데, 역시나 굶는 데는 장사가 없었다. 결국 맥이 빠져 종합병원에 입원, 며칠 동안 링거를 집중적으로 맞고 겨우 일어났다.
원래 집 사람이 ‘아담사이즈(?)’에다 통통한 편이라 팔뚝에 정맥이 잘 드러나지 않아 링거 처방을 할 때마다 간호사가 애를 먹었다. 통상 의·병원의 간호사이면 아무나 처리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여러 명 가운데서도 경험이 많은 간호사를 선발해 둔 곳도 있고 아니면 처방 때마다 잘 놓는 간호사를 불러오기도 했다. 어떤 경우에는 수액이 흘러 들어가는 중에도 다시 빼고 꽂는 일도 있었다.
1982년도인가 대서양을 항해 중 원인불명의 어지럼증으로 쓰러져, 독일 함브르그의 이비인후과 전문 병원에 입원 중 경험한 일인데, 매일 1~2회 정기적으로 수액을 놓을 경우 매번 침을 꽂았다 빼는 것이 아니라 뚜껑 달린 플라스틱제 바늘을 정맥에 꽂아두고, 액(液)을 주사하고는 굳어지지 말라고 증류수를 조금 주입한 다음 뚜껑을 닫아두는 것이었다. 때마다 팔을 고무줄로 묶고는 혈관이 보이도록 탁탁 치는 것은 고사하고 날카로운 바늘이 살갗과 핏줄을 뚫을 때 그 따끔하던 것이 없어 편하다는 생각을 했었던 기억이 있는데, 이걸 하루나 이틀만에 꽂았다 뺐다 하려니 환자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곁에서 보는 사람도 간호사도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이 어려운 일을 의사도, 간호사도 아닌 내 자신이 부하 직원을 상대로 처방을 했으니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기도 하지만, 그걸 무사히 성공하여 사람을 구했으니 또한 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 생각해도 내 재주가 좋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처방받은 당사자의 운(運)이 억세게 좋았거나, 저 위에 계시는 분들의 도움이었다고 믿을 수밖에 없다. 물론 육상에서 했더라면 틀림없이 불법의료행위로 고발당할 수도 있겠지만 돈을 받고 한 것이 아니므로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고….
링거는 19세기 영국의 의사 시드니 링거(Sydney Ringer)에 의해서 발명된 치료용 수액(水液)을 말한다고 한다. 용도에 따라 종류도 많지만, 실제 병원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수액은 생리식염수 또는 포도당 수용액임에도 불구하고 병원가서 수액을 맞으면 무조건 링거를 맞았다고 표현하고 있다. 링거는 결코 수액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가 아니라고 한다. 이렇건 저렇건 주사기로 액상(液狀)을 정맥혈관에 꽂아 주입하는 방법이다.
수액봉지들. 요즈음은 인터넷판매에서도 파는 것을 보면 누구나 가정에서도 쉽게 취급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 이야기는 내 “흔적(痕迹 : 80옹 회고록)”에 쓴 적이 있었기에 ‘신항해일지’에는 예정돼 있지 않았는데, 이번 집사람의 경우를 보고 새삼 느낀 점이 있어 올리고자 한다.
1983년도 저물어 가던 11월. 아프리카 황금해안에 자리잡은 코트디부와르(프랑스어로 Ivory Coast의 뜻)의 아비쟝(abidjan)항(港)에서 바나나를 적재하고 대서양 아프리카 서안(西岸)을 따라 유럽으로 북상하던 중이었다. 싸롱보이(Salon boy) 김 군의 발병이 보고되었다. 그는 취사부 소속으로 싸롱(Salon)식당에서 고급사관 5명(선장. 기관장. 통신장. 1등 항해사와 1등 기관사 : 이들을 Salon Class라 함)의 시중을 드는 직책이다.
행동이 약간 굼뜨지만 입이 무겁고 키가 좀 작은 편이나 당차게 생겨 성실하게 일하는 스타일이다. 모두가 그의 서비스에 만족했다. 그런 그가 누워 일어나지 못하니 그제서야 그의 역할이 더없이 크다는 것을 절감하면서 불편함을 참을 수밖에 없었다.
편도선이 부어 있어 담당 항해사가 적절한 투약을 해왔는데, 우선 먹지를 못했다. 굶어서 기운 나는 사람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더구나 육상과 달라 흔들리는 선상(船上)이라 서 있기도 힘든 상황에서 굶으면 우선 어지럽고 정신을 못 차린다. 우선 먹어야 체력을 유지한다.
다부져 보이면서도 보기보다 물렁한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선창(船倉)의 온도조정이 불확실한데다 각 선창의 오수(汚水) 때문에 또 한바탕 소동이 있었기에 잠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팽팽한 긴장의 연속 중인데 또 하나의 문제가 싹을 틔운 셈이다.
이틀이 지나도 병세에 호전이 없다. 오후에 테라마이신을 주사한 후 호소하는 심한 복통에 놀라움과 신경이 곤두서기도 했다. 상황에 따라 가까운 세네갈의 다카(Dakar)항에 긴급입항을 고려하여 벨기에인(人) Super-Cargo(감독)와 의논했다. 사람이 죽어간다는데 어쩔 것인가. 급하면 헬리곱터라도 불러야지 도리 없지 않은가. 아무래도 증세가 이상하고 원인을 모르겠다.
자신의 병 뿐만이 아니라 어떤 개인적 사정으로 혹시나 도중에 혼자 하선하여 귀국이라도 하게 될까 봐 겁이나 미리 사실대로 이야기하지도 않은 것이 일을 덧나게 한 사례는 어느 선박에서나 가끔 있는 일이다. 이번의 경우도 그런 것 같다.
우선 편도선이 곪아 있는 것은 분명한데…. 복통이라니? 잠시도 그의 옆을 떠나지 못하게 사람을 붙였다.
“오! 하나님, 부처님이시여, 끝까지 이렇게 시험하시렵니까?”.
양하항이 스케쥴(Schedule)대로 확정되어 관계 회사에 전송(Cable)했다만 응답이 오려면 3-4일은 걸릴 것 같았다. 아직도 해야 할 일은 많은데 D-day가 미정이라 손을 델 수가 없다.
“이 마지막 한 주일은 살신성인(殺身成人)의 정신으로 임하자. 그것이 곧 내 운명이라면…” 내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이었다.
발병 4일째인데 여전히 병세(病勢)가 시원찮다. 오전부터 목의 통증은 거의 없어졌다고 했다. 가끔 병원에서 Doctor가 조그만 손전등을 켜고 아아! 하고 입을 벌리게 하고 입안을 비춰보던 생각이 떠올라 그렇게 해 봤다. 입안 군데군데가 심하게 곪아 헐었더니 그 상처가 터져 없어진 모양이다.
그렇다면 이제 원기만 회복하면 되겠는데…. 영 파김치처럼 늘어져 꼼짝달싹을 못 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간 물 한 모금도 제대로 마실 수 없었지 않은가? 영양실조나 지나친 허약함이 전혀 다른 합병증의 원인이 된 경우를 여러 번 보아왔기에 여간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최후의 방법을 써 보기로 했다. 정맥을 통한 생리식염수(링거) 주사를 해보자는 것이었다. 모험이 아닐 수 없다만 담당 항해사도, 다른 누구도 해본 적도, 자신도 없다고 하지 않으려니 내가 직접 하는 수밖에 없어 서둘렀다.
가끔은 맞아 봤고, 곁에서 놓는 것도 봐왔지만 실제로 해본 적은 없는데도 될 것 같기도 했다. 우선 살려놓고 봐야 할 일이었다. 미리 Super-Cargo에게 얘기하고 어차하면 헬기라도 부르겠다고 배수진도 쳤다.
돌팔이 의사(?) 행세지만 할 것은 다 했다. 내 손과 주사바늘 소독부터 하고, 만일을 위해 담당 항해사와 조리장 등 두어 사람을 곁에서 돕도록 수배했다. 마스크도 쓰고 미리부터 흘러내릴 땀을 방지하기 위해 머릿수건도 둘렀다. 의무실이 아니고 김 군의 침실이었기에 가운은 입지 않았다. 그거라도 걸쳤으면 돌팔이지만 의사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첫 번째는 실패. 팔뚝에 피만 묻히고 말았지만 두 번째는 성공했다. 어떻게 시작했고 진행됐는지 전혀 기억이 없다. 팔뚝 위를 고무줄로 묶고 주먹 쥐라고 한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만….
그냥 집중했을 뿐이다. 바늘 끝이 어찌 그리 날카롭고 강한지… 피부에 건들리기만 해도 피가 난다. 그런데도 무심코 풀잎이 스치기만 해도 쉽게 갈라지던 살갗은 왜 또 그리 질기고 두껍던지…. 바늘끝이 살갗과 핏줄을 쉽게 뚫지 못했다.
그의 침실이 기관실과 비교적 가까운 곳이라 기관(機關) 진동에 의한 소음과 선체의 움직임 등이 끊이질 않아 긴장의 연속이었다. 전신에 진땀이 났다.
그래도 링거액이 방~울~방~울 떨어져 혈액 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새삼 신기하기만 했다. 한참이나 위로하고 격려하는 체하며 곁에 앉아 이런저런 얘기로 보냈지만 실은 이상 유무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두어 시간 걸려 3분의 1 정도 들어갔다. 한결 눈망울이 제대로 구르는 듯도 하다. 일어나야 할텐데….
본인이 기분도 괜찮고 혼자 있어도 되겠다고 했다. 내 자신도 확신이 서자 담당 항해사를 남기고 나도 쉬었다. 긴장이 풀어지자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는다. 이러다간 내가 탈이 날 것만 같았다.
다행히 냉동기관(Ref. Machine)의 성능이 좋아 화물 온도에 신경을 쓰지 않은 것만 해도 한결 수월했다. 감독(Super-Cargo)란 녀석도 온도 유지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내 말에 수긍하며 따라주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눈 뜨자마자 주방(廚房)에 전화기를 돌렸다. 어찌 되었는지 부서장인 조리장에게 물어볼 참이었다. 그런데 뜻밖에 수화기에서 그 김 군의 목소리가 들린다.
“엉? 야! 니 우짠 일이고?”
“괜찮아져서 일하러 나왔심더.”
“뭐라꼬?”
놀람과 기쁨이 교차한다. 역시 기운을 차린 모양이다. 당장 뛰어 내려가 보았다. 그릇을 닦다 히죽이 웃는 그 녀석의 얼굴에 핏기가 돈다. 어깨를 쳐주고 당장 들어가 좀 더 쉬라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엊저녁에 용감하게(?) 실시한 정맥주사가 성공한 것이다. 정말 내가 나은 기분이다. ‘어느 님’이신지는 몰라도 암튼 ‘감사합니다’는 기도가 절로 나왔다.
이와 비슷한 경험이 있긴 하다. 70년도 초 북태평양 트롤선 항해사 시절, 곰 같이 미련스러운 김X태군이 관자노리(눈과 귀 사이의 움푹한 곳)가 곪아 팅팅 부어올라 직접 양면 면도칼을 들고 찾아와, “항해사님 이거 좀 째 주이소”하면서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거야 내 자신이 겪은 경험이 있는지라 쉽게 칼로 쫙 그어 준 것이다. 그때는 살갗도 두껍고 더 질겼는데도 아주 쉬웠는데….
항해 중의 사고나 발병은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지는 수가 많다. 지금 생각하면 겁도 없이 설친 돌팔이 의사 노릇이 아찔한 기억이다.
이 기구도 어쩌면 가정용이 아닌가 싶다.
집사람 덕분(?)에 입원해 있는 또래의 노인들이 링거처방으로 줄을 달고 있는 것을 보자, 앗차! 싶기도 했다. 건강에는 비교적 신경을 쓰는 편이지만 그게 마음 같지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나이만큼 아픈 것은 아픈 것이 아니다’고 한 옛 어른들의 말씀이 이제야 이해가 되는 듯도 하다.
어릴 때 고향 선배이기도 하며, 유명한 신경과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인 이시형 박사는 ‘인간의 건강은 완전무결 할 수는 없으며, 누구나 한두 가지 병은 가지고 있기에 이를 반(半)건강 상태’라고 했다.
조물주가 처음 인간을 만들었을 당시는 완전했을런지도 모른다. 가끔 종교적 글 속에서 인간은 원래 125세까지가 수명인데, 인간들 자신이 관리를 잘못해서 80세도 제대로 못 채우고 죽는다고 한 얘기를 접하기도 했다. 그러기에 현대의학은 현재의 인간수명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원래의 상태로 되돌리려고 한다는 것이다. 맞는 말 같기도 하다. 헐헐헐~~~
첫댓글 늑점이님은
교사. 항해사보다 작가가 딱 어불립니다.
글을 술술 재미있게 엮고 있으니까요.
뎃글이 오판?ㅋㅋ
항해사였기에 이색적인 글 자료가 많고
교육자였기에 표현력이 짱짱한 것을.ㅎㅎ
하늘이시여
소금에 절여진 탓인지 부작용 없이
동료들의 생명을 구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허구를 좀 넣어 재미를 더하면 소설이 되겠습니다.
건강과 행운을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