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주교구의 성인(7위)
신리골 : 손선지. 한재권. 정문호.
성지동 : 이명서. 조화서. 조윤호. 정원지
성 이명서 베드로(1821~1866)
일명 ‘재덕’으로도 불리는 성 이명서 베드로는 충청도 공주 출신으로 대대로 내려오는 구교우 자손이었다. 부친과 함께 박해를 피해 여러 지방을 유랑하다가 병인박해가 일어나기 몇 해 전부터 전주 지방의 교우촌인 성지동에 정착했다. 1866년 병인박해의 여파가 지방으로 퍼지고 전라도 지방에서도 전라 감사의 지시로 전주 부근의 교우촌인 성지동과 대성동이 제일 먼저 피해를 입게 되었다. 12월 5일 포졸들이 성지동을 습격할 때 이명서는 조화서의 피신 권유를 뿌리치고 병든 몸으로 체포되어 전주 감영으로 끌려갔다. 전주 감영에서는 병자인 이명서를 배교시키기 쉬울 것으로 생각하고 재일 먼저 신문하고 혹형과 고문으로 배교를 강요했으나 “내가 몇 번 죽는 한이 있어도 결코 나의 하느님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하고 배교를 거부하고 함께 체포된 교우들과 부지런히 기도하며 순교를 준비했다. 드디어 12월 13일 5명의 교우와 함께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참수형을 받아 46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성 이명서의 유해는 소양면 유상리 막고개에 안장되었다. 그런데 손자 이준명이 어렵게 진안 어은동 모시골에 4정보 가량의 땅을 사 1920년 3월 22일에 할아버지를 이장하고, 부모는 그 발치에 모셨다. 이준명은 치명터에 치명비를 세울 꿈을 가지고, 1929년 전주로 이사하여 치명터 두어 마지기를 구입하였지만, 비를 세울만한 경제적 능력이 되지 않았으나 같은 문중의 이춘화가 200원을 들여 1935년에 화강암으로 된 십자비를 세웠다. 이렇게 하여 치명터를 교회 소유로 마련하는 첫 계기가 되었다. 성 이명서의 유해는 시복되던 해인 1968년 5월 10일 절두산으로 옯겼다가 1984년 5월 6일 성인품에 오른 후 12월에 전주교구로 다시 모셔와 1988년 10월 1일에 천호 성지에 안장되었다.
성 손선지 베드로(1820~1866)
‘성운’(成云)으로도 불리는 성 손선지 베드로는 충청도 부여군 충화면 지석리 흔히 ‘괴인돌’이라고 부르는 곳에서 태어나 어려서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품행이나 재주, 신앙심이 남달라 어린 나이인 18세 때 정 야고보 샤스탕 신부에 의해 전교회장으로 임명되어 순교할 때가지 직무를 충실히 이행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손선지는 전주 지방의 교우촌인 대성동 신리에 살며 자신의 집을 공소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12월 5일 전라 감사의 체포령으로 대성동과 성지동을 급습한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정문호,한재권 등과 함께 전주 감영 옥에 갇히게 되었다. 체포될 때 칠순 노모가 따라오며 울자 잘 다녀오겠다는 말로 위로하며 담담하게 떠났다. 곧 이은 신문 중에 회장의 신분이 탄로나 공소를 거쳐간 서양 신부와 교회서적의 출처를 대라는 관장에게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아야 했다. 오사현은 손선지에게 배교한다는 말 한마디만 하면 돈 안들이고 석방될 것이니 천주학을 따르지 않겠다고 한마디만 하라고 일렀다. 그러나 손선지는 천부당만부당한 말이라며 그의 말문을 막았다.
손선지는 회장답게 혹형과 고문을 이겨내며 함께 체포된 교우들을 위로하고 권면했다. 다음날 처형된다는 말을 듣고 함께 갇혀있던 김사집(필립보)에게 웃옷을 벗어주며 “내일이면 죽으러 가네. 죽을 사람에게 이 옷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옥에 남아 있을 자네 옷이 시원찮아 추울 테니 자네나 입게.”하며 벗어주었다. 전교회장으로 일해 오면서 실천을 통해 이웃사랑을 가르치던 일이 몸에 배었던 것이다. 드디어 12월 13일 예수, 마리아를 부르면서 대성동과 성지동에서 체포된 5명의 교우와 함께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참수되어 47세로 순교했다. 시신은 오사현의 노력으로 범바위(부엉바위)에 가매장 되었다가 장남 손순화에 의해 부엉골에 매장되었고 다시 천호성지로 옮겨졌다.
첫댓글 마당재님 감사
합니다
꼭 알아야할 정보
올려주셨군요
감사드립니다
수고많으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