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간 [162.9]
특집 대교당 100주년
천도교중앙대교당의 건립
- 중앙대교당 건립 100주년(1)
편집실
올해로
천도교중앙대교당이 건립 100년주년을 맞는다.
본 건축물은
1921년 2월 28일 준공하여
교당으로서의 기능 뿐 아니라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각종 의미있는 행사를 개최하며
우리 역사의 명암과 함께하고 있다.
1978년 12월 18일에
서울시유형문화재 제36호로 지정되어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다.
중앙대교당 설립 이전의 총부와 교당
포덕47년(1906) 1월,
일본에서 귀국한 의암성사는 3월,
전국에 72개 대교구를 조직하여
원직과 주직을 임명하는 동시에
제일 먼저 추진한 사업이 바로 교당 건축이었다.
그동안 중앙총부는 1906년 2월 16일에
상다동(上茶洞-무교동) 홍문석골(紅門洞),
1907년 2월에는 대사동,
9월에는
중서中署 정선방貞善坊 면주동(綿紬洞-돈의동),
1908년 4월에는
남부南部 대평방大平坊
홍문동弘門洞 5통으로 이전하였다.
그러다 1910년 가을에는 송현동 34번지에
2층 건물을 지어 이전하였다.
중앙대교당이 건립되기 까지
천도교중앙총부는
1918년 4월 5일 천일기념일을 기하여
의암성사를 비롯한 교역자들이 참석한
부구총회部區總會를 개최하고
교당 건축을 협의하였다.
교당 신축자금은
전국 교인들의 성금으로 충당할 것을 결의하고,
전 교인에게
호당 10원 이상을 성금으로 낼 것을
종령으로 반포하여 모금을 시작하였다.
1918년 8월부터 12월까지
전국 각 교구에서 모금하여 중앙총부에 납부한 금액은
8만 6천여 원에 달하였다.
일제는 교당건축 성금을 독립자금으로 의심하고
이를 기부행위금지법 위반이라 하여
교당건축에 관한 지출부를 압수해 가고
이미 모금된 성금을
각 교구에 되돌려 주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총부에서는 1919년 2월에 4만원을 돌려주고
나머지는 4월 5일 천일기념일까지 납부되는
연성미와 상계하였다.
1916년 10월 30일
경운동88번지의 대지 1,397평(가옥 9채포함)을
2만 원에 매입하고 인접 대지도 매입하여
모두 1,606평의 교당건축 부지를 마련하였다.
교당이 완공된 후에도 1923년 9월까지
주변의 대지를 매입하여
총 1,832평의 교당 부지를 넓혔다.
대교당은 1918년 12월 1일
교일 기념일에 맞춰 개기식을 갖고 공사를 시작하여
1920년 4월에 낙성할 계획이었으나
1919년 3.1독립운동으로 공사는 지체되었다.
원래 4백평 규모의 대교당을 계획하고
건축허가를 신청했으나
일제는 ‘중앙에 기둥이 없어 위험하다.’,
‘지나치게 교당이 크다’ 등의 이유로
허가를 내어 주지 않았다.
규모를 절반으로 축소하여 허가를 받았고
1920년 2월에서야 겨우 공사를 시작하였다.
설계는 일본인 나카무라 요시헤이의가
시공은 중국인 장시영이 맡았다.
일본인에게 설계를 맡긴 것은 당시 기술 있는
조선인 건축가를 찾기 어려웠던 것보다,
조선총독부 산하의 건축가를
고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결정한 고육지책이었다.
공사기간 중 시공자인 장시영이 구속되면서
벽돌수급이 어려워져 애를 먹기도 하였다.
교당 건물 기초는 화강석으로 쌓았고
벽체는 붉은 벽돌,
지붕은 철근앵글로 지어
기둥을 쓰지 않아도 되게 하였다.
화강석은
동대문구 창신동에서 채석한 것을 사용하였다.
완공된 중앙대교당 건평은 1층 212평 여평,
4층까지 모두 280여 평이었다.
중앙총부 청사는
본관2층 199평과 숙직실과 창고 두 개,
화장실 2개 등 모두 262여 평이었다.
건축양식은
2층 사무실을 탑 모양의 바로크 풍으로 하는 등
복합적인 아르누보 형식을 띠고 있다.
건축물은 1920년 12월에 준공되었다.
이듬해 2월 28일에는
송현동에 있던 중앙총부를 비롯한
교회월보사, 청년회, 개벽사 등을
경운동 신축 총부본관 건물로 이전하였다.
(다음호에 계속)
참고자료
∎천도교홈페이지
∎보국안민 발길로 서울을 걷다(이동초 지음)
∎네이버블로그 문화지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