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은 사람을 움직이는 근육질의 단어다.
[시민포커스=조한일 기자]
발가락 낙관
김영숙
볕 좋은 주말 아침 운동화를 빠는데
물에 불린 깔창 두 장 비누칠하다 보니
과묵한 열 개의 눈이 나를 빤히 보지 뭐야
아무 일, 아무 일 없다고 모닝키스 해놓고선
구조조정 그까짓 것 아무것도 아니라고
나 믿지, 큰소리치며 출근 인사 해놓고선
몇 번이나 참을 忍자 마음에 새겼으면
이 깊은 동굴에 와 낙관을 찍었을까
지렁이 울음소리로 혼자 눈물 삼켰을까
제철 조기 찌개 끓여 한라산 올린 밥상
못하는 술이라도 한두 잔 부딪히자
낮술의 힘을 빌려서 고백할까 당신 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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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을 열두어 번 읽고 있을 때쯤 낙관(落款)이 낙관(樂觀)으로 읽히고 보이고 삼키게 되었다. 맞아, 삼켰다고 말해야겠다. 울컥하다가 읽다 말고 나도 모르게 살짝 사레들더니만 그냥 통째로 꿀꺽 삼키고 말았다. 지금의 5060세대가 걸어온 삶의 족적이 오십보백보임에 콧날이 시큰해짐을 느끼며 동질감과 공감이 밀려든다.
‘과묵한 열 개의 눈이 나를 빤히 보지 뭐야’라는 시인의 표현은 잊고 살았던 유사한 경험을 떠오르게 한다. 최근 몇 년간은 운동화를 빨았던 기억이 거의 없지만 마라톤 한다고 한창 뛰어다닐 때는 빨기도 자주 하고 바꾸기도 많이 했다. 마라톤이 인생이라지만 사실 인생이 백배는 더 힘들다. ‘볕 좋은 주말 아침’이 생각보다 많지 않음이다.
기업체가 IMF 이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던 ‘구조조정’에 ‘나 믿지’는 뻥이요 부도어음이었으니 모닝 키스로 입술 덮듯 덮어 버릴 수 있는 일이 아니란 걸 알면서 너무나 잘 알면서도 사랑하는 이에게는 내 발밑의 벼랑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그리도 시선을 딴 데로 돌리려 했던 우리가 아니었는가?
시인의 자문, ‘지렁이 울음소리로 혼자 눈물 삼켰을까’에서 ‘지렁이’/‘울음소리’/‘혼자’/‘눈물’이라는 단어가 이 사회의 탄수화물인 경쟁, 생존, 성장, 변화와 지방인 돈, 권력, 학력, 명예와 단백질인 여가, 힐링, 건강, 문화가 밸런스를 잃어 휘둘릴 때 나타나는 고름이다. 출혈이다. 툭 건드리면 무너져 버릴 것 같은 이 단어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앞도 안 보이고 끝도 보이지 않는 “터널 증후군”이다.
‘한라산 올린 밥상’이라는 정성이나 ‘못하는 술이라도 한두 잔 부딪히자’는 시인의 권주(勸酒)를 거절할 용기가 나질 않는다. ‘낮술의 힘을 빌려서 고백할까 당신 최고!’에 이르러 마침내 낙관(落款)이 낙관(樂觀)이 된다. 앞서 ‘나 믿지?’는 결국 뻥도 아니고 부도난 어음도 아닌 우리에게 비타민이 되고 거기에 ‘당신 최고!’라는 워딩이 합성될 때 약효 최고의 멀티 희망 비타민이 되는 것이 아닐까?
고백은 사람을 움직이는 근육질의 단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