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피크닉 신영호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주장과 지식, 권위와 전통 속에 둘러싸입니다.
그럴수록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을 맹목적으로 믿을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스스로 분별하고 선택할 것인가 하는 문제일 것입니다.
다음의 구절은 그 핵심을 아주 간결하게 말해 줍니다.
보병궁 시대의 붓다는 아마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나를 붙잡으려 하지 말라.
붙잡으려는 순간, 너는 이미 나를 잃는다.
그러나 존중은 버리지 말라.
존중은 붙잡음이 아니라, 깨어 있음이다.”
과거의 시대에 사람들은 진리를 인물에 묶어 두려 했습니다.
스승을 절대화하고, 교리를 고정시키고, 이름에 의지해 안정을 얻으려 했습니다.
그 방식은 혼란의 시대를 지나오는 데 필요했습니다.
질서는 의지할 기둥을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다릅니다.
보병궁 시대는 스승을 신격화하는 시대가 아니라,
각자가 스스로 깨어나 스승의 자리를 나누는 시대입니다.
여기서 붓다는 한 인물이 아니라 하나의 상태입니다.
깨어 있는 의식의 이름입니다.
그래서 붓다는 이렇게 덧붙일 것입니다.
“나를 존중하되, 나에게 기대지 말라.
나를 배우되, 나를 흉내 내지 말라.
나를 사랑하되, 나를 소유하려 하지 말라.”
집착은 과거의 방식입니다.
집착은 진리를 안전한 상자에 넣고 닫아 두려는 마음입니다.
하지만 깨어 있음은 흐름입니다.
흐름은 붙잡을 수 없습니다.
흐름은 함께 걸을 수만 있습니다.
보병궁 시대의 수행은
어떤 이름을 믿는 수행이 아니라
의식을 투명하게 만드는 수행입니다.
붓다는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따를 필요는 없다.
너희가 해야 할 일은
나처럼 보려는 것이다.”
여기서 ‘보는 것’은
교리를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이 일어나는 자리,
두려움이 생기는 자리,
집착이 움트는 순간을
있는 그대로 아는 일입니다.
존중은 필요합니다.
존중은 방향을 줍니다.
그러나 집착은 시야를 좁힙니다.
존중은 스승을 통해 자신을 봅니다.
집착은 스승으로 자신을 가립니다.
보병궁 시대의 붓다는
권위를 무너뜨리려 하지 않습니다.
그는 권위를 이동시킵니다.
밖에 있던 권위를
안으로 돌려놓습니다.
“너희가 나를 존중하는 만큼
너희 자신의 의식을 존중하라.
너희 안의 붓다를 가볍게 여기지 말라.”
이 말은 교만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책임지라는 뜻입니다.
더 이상 누구에게 구원받는 시대가 아니라
의식을 스스로 관리하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붓다는 이렇게 정리할 것입니다.
“나를 사랑해도 좋다.
그러나 나에게 매달리지는 말라.
내 말을 기억해도 좋다.
그러나 네가 직접 보지 않은 것은
진리라 부르지 말라.
집착 없이 존중하라.
존중 속에서 자유로워져라.
그때 너는
나를 이해하지 않고도
나와 같은 자리에 서게 된다.”
이것이 보병궁 시대의 언어로 다시 들리는
붓다의 메시지일 것이다.
다음은 법(다르마, Dharma)에 대한 아주 중요한 구절 하나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이 문장은 오래전부터 여러 수행자와 사상가들에게 깊은 울림을 준 가르침으로,
‘무엇을 기준으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매우 명확한 방향을 제시합니다.
소문으로 들었다 해서,
대대로 전승되어 왔다 해서,
“그렇다 하더라”는 말 때문에,
성전에 쓰여 있다 해서,
논리적이라는 이유로,
추론에 의해서,
이유가 그럴듯하다고 해서,
우리가 사색하여 얻은 견해와 일치한다고 해서,
유력한 사람이 한 말이라 해서,
혹은 “이 사문은 우리의 스승이다”라는 생각 때문에그대로 따르지는 말라.
그대들 스스로가 분명히 “이러한 법들은 해로운 것이고,이러한 법들은 비난받아 마땅하며,이러한 법들은 지자들의 비판을 받을 것이고,이러한 법들을 따르고 행하면 손해와 괴로움이 생긴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때 그것을 버리도록 하라.
– 『붓다의 가르침』
이 가르침의 핵심은 단순한 회의주의가 아닙니다.
모든 것을 부정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습니다.
맹목적으로 믿지 말라는 말은
아무것도 믿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직접 보고, 경험하고, 분별하라”는 요청입니다.
전통도, 경전도, 스승도
모두 소중한 길잡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최종 판단은 언제나
자신의 삶 속에서 검증된 체험과 통찰 위에 놓여야 합니다.
어떤 생각과 행위가
나와 타인에게 괴로움을 낳는지,
삶을 좁게 만드는지,
혹은 더 넓고 밝게 여는지 —
이것을 알아차리는 힘이 바로 수행의 핵심입니다.
법은 외부에 고정된 규칙이 아니라,
살아 있는 선택의 기준입니다.
그 기준은 결국
“이것이 나와 세계를 더 건강하게 하는가”라는
아주 실질적인 질문으로 돌아옵니다.
이 구절은
권위를 부정하는 선언이 아니라,
의식을 성숙시키는 초대장입니다.
스스로 보고,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책임지는 삶.
그 지점에서
법은 비로소 살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감사합니다.
피크닉 올림.
첫댓글
저부터 붓다를 지나치게 교주로 모신 태도에 참회합니다.
가르침 에 죄가 어디 있습니까.
성경 말씀에
두려워 말라. 처럼.
안그럼 여생이 불안 합니다
네네. 시샵님. 감사합니다!ㅋ
시샵님께서 제 마음을 너무 잘 아시는 것같아... ㅋ 여하튼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