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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더링은 한정된 짧은 높이의 바위에서 로프 같은 확보 장비 없이 매트만 깔아서 등반하는 것을 말한다. 이 매트를 크래쉬패드(Crash Pad) 또는 볼더링 매트(Bouldering Mat)라고 하며, 바닥에 깔아 추락이나 루트 정상에서 뛰어 내릴 때 부상으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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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타산 무릉계곡에서 볼더링을 즐기는 여성 볼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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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력을 요하는 고전적인 암벽등반이나 현대의 스포츠클라이밍에 비해 순간적인 파워와 근력을 요한다. 또 짧은 연결동작으로 이어진 개별적 등반 형태의 클라이밍이다. 영국에서는 볼더링 루트를 연결동작 해결을 위한 ‘문제(Problems)’로 부른다. 등반가들은 볼더링 루트 개척을 위해 이런 루트들이 집중된 작은 암벽을 찾기 위해 여러 곳을 여행한다.
추락 시 등반가의 부상을 최소화하기 위해 3~5m 높이의 루트를 등반하는 것이 일반적인 볼더링의 높이다. 볼더러(Boulderer : 클라이머와의 구별을 위해 볼더러라 칭함)가 추락 시 크래쉬패드로 떨어져 안전한 착지를 할 수 있도록 스파터(Spotter)가 있어야 한다. 스파터는 아래에서 손으로 받쳐 매트로 추락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매트를 옮겨 볼더러의 착지지점을 확보해 주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스파터가 있어야 안전한 볼더링을 즐길 수 있다.
7m가 넘는 바위루트는 프리솔로 또는 솔로잉이라 하며 ‘하이볼(High-Ball)’이라 부르기도 한다. 볼더링은 오늘날 ‘등반의 시’라 불릴 정도로 등반예술로 인식되기도 한다.
볼더링은 기존 등반의 한계를 허물고, 인간의 신체적인 조건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어 온 동작을 해결하는 능력을 발휘하며 등반의 최고 난이도(5.15c)를 끌어 올리는 역할에 일조했다. 볼더링의 잠재성은 고유 영역을 구축하며 진화를 거듭해 왔다.
오래 전부터 서구에서는 클라이머들뿐 아니라 알피니스트 등반가들도 크고 높은 산을 오르는 긴 등반의 부분 훈련으로 볼더링을 이용하고 있다. 이들은 고산 거벽에서 직면하는 크럭스를 돌파하는 능력을 기르기 위해 볼더링을 한다.
볼더링은 기존의 암벽등반과 달리 짧은 시간 동안 다양한 등반 동작을 시도하며 근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운동이다. 그러므로 추운 겨울에도 체온을 유지하며 운동할 수 있다. 기존 등반에 비해 접근이 수월하고 복잡한 장비가 요구되지 않으며, 연중 등반이 가능한 볼더링의 매력과 장점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볼더링의 역사
볼더링이란 용어의 유래는 알피니즘이 번창하기 시작한 19세기 후반 영국과 프랑스,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1874년경 프랑스 퐁텐블로(Fontainbleau) 지역에서 볼더링이 시작되었으며, ‘블루 클라이머들(Bleau climbers)’이라 불리는 이들이 스포츠로 처음 등록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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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두타산 무릉계곡에서의 볼더링. 볼더러는 그렉 풋. 2 스파터들은 손을 뻗어 볼더러가 추락 시 안전하게 매트 위로 떨어질 수 있도록 돕는다. 3 천성산 내연사계곡의 ‘세발개구리(V7)’을 오르는 그렉 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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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볼더링이란 용어는 영국에서 시작되었다. 오스카 에켄스타인(Oscar Eckenstein)은 1880년대 영국의 레이크 디스트릭트(Lake District) 지역의 ‘Y 볼더(Y Boulder)’에서 활동한 자타가 공인하는 볼더링 선구자이다. 그는 암벽등반과 볼더링을 체육학적으로 접근해 운동역학을 이용한 자유등반에 심취했다. 평생을 철도청 엔지니어로 일했고, 아이젠을 처음 고안해 제작했으며, 짧은 피켈을 발전시킨 등산사적으로 큰 기여를 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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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남아공 록랜드의 핀치 오브 허브 아레트(V4)를 오르는 샘 캣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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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는 난이도의 새로운 기준을 확립했을 뿐만 아니라 볼더링의 행동철학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헌신했다. 1892년에는 히말라야 카라코룸산맥의 아스콜(Askole)에서 비공식적이나마 최초의 볼더링대회를 개최해 지역 등반가와 스위스 가이드들과의 등반 능력을 비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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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북한산 백운계곡의 바위를 오르는 주한 외국인 볼더러들. 3 미국 요세미티의 볼더 더 킹(V7)을 오르는 데이브 왈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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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에켄스타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영국 전통 클라이머들은 볼더링을 등반에 속한 스포츠로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후 오랜 기간 동안 유럽 등반가들은 알프스 등반이나 긴 알파인 루트에 대비한 훈련으로 볼더링을 즐겼다.
1930년대에 접어들며 프랑스의 피에르 앨랭과 그의 동료들에 의해 퐁텐블로 지역의 수많은 볼더들이 등반되며 볼더링은 본격적으로 대중의 인기를 얻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이 볼더러들이 다시 활동을 재개하면서, 이 지역에서의 볼더링은 유럽 전체에서 큰 인기를 얻게 된다. 훈련을 위한 운동 목적의 볼더링에서 탈피해 역동적인 동작을 연구하기 시작한다. 볼더링 매트와 송진 가루를 신발에 사용하기 시작한 퐁텐블로 지역은 볼더링을 고유한 가치를 가진 스포츠로 유행시키며 유럽 전역에 볼더링이 전파되는 데 큰 발판을 마련한다.
1940년대까지 영국인들은 징을 박은 신을 신고 바위를 올랐다. 그러나 퐁텐블로 지역에서는 피에르 알랭(Pierre Allain)이 신발에 송진가루를 사용해 더 과감한 동작을 구사하게 되었다. 이후 알랭은 특수한 고무 밑창의 신발까지 개발하면서 볼더링의 아버지란 칭호를 받았다.
1941년에는 런던 근교의 해리슨 암장(Harrison Rocks) 해벽에 300m에 달하는 횡단 순회루트가 개척되었고, 1947년 프레드 브닉(Fred Bernik)은 알파인 등반 훈련을 위한 첫 번째 순회루트를 퐁텐블로에서 개척하면서 볼더링을 오늘날의 스포츠로 정착시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