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23일에 정규 19집 앨범을 내놓은 가왕 조용필은 지난 15일에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의 한 식당에서 열린 '헬로 땡큐 프레스 파티'에 참석한 가운데 연 기자 회견에서 후배 가수들에게 강력한 충고를 던졌다. 우선 조용필은 '현재 K-POP 선두 주자 노릇을 하는 가수 및 음악가들은 정말 대단하고 훌륭하다. 음악도 잘 만들고 퍼포먼스(Performance)도 대단해 내가 보아도 멋있다. 그들의 무대를 주의 깊게 시청하면서 오히려 나 자신이 그들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이제 늙었다는 생각도 한다. K-POP은 미래도 좋고 전망도 밝다'고 칭찬했다.
이후 그는 '여기에 내 견해를 덧붙여 보겠다'며 '퍼포먼스도 필요하지만 프로듀서와 가수, 기획자 등 모두가 힘을 합쳐 가수의 매력을 얼마나 뽑아낼 수 있느냐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는 수많은 연습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많은 연습을 통해 깨닫고 획득한 가장 좋은 장점을 빼내 멜로디를 만들게 되면 그 음악은 분명히 좋은 음악이 된다. 음악에서 퍼포먼스가 차지하는 비중이 50%를 넘으면 음악적 가치가 아무리 좋아도 다른 곡들과 똑같을 수 있다. 퍼포먼스의 비중을 40% 이하로 내리고 음악적 틀을 세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며 퍼포먼스에 집중하는 수많은 후배 가수들에게 충고를 던졌다.
조용필의 충고 내용을 들은 누리꾼 및 문화인 대부분은 '엄연히 대선배 가수의 충고인 만큼 틀린 말이 하나도 없다. 이 땅의 모든 가수들은 이를 귀담아 들어야 한다'며 지지했다. 또한, 충무로 출신 영화 감독 김영한도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랩(Rap)의 사례를 들며 '지나치게 퍼포먼스만을 추구하는 가수 대부분은 수명이 짧다. 가수는 문자 그대로 음성으로 소리를 아름답게 낼 수 있고, 목청으로 심금을 울릴 수 있는 사람을 말한다. 가수가 되기 전에 자신의 가창력부터 찾아야 한다. 세 번 이상 목청을 토하여 득음하는 자세로 가수 본연의 자세를 다듬은 후에 퍼포먼스에 집중해도 늦지 않다'며 지지를 보냈다.
그렇다. 조용필의 말대로 한국 가요계는 불가능한 일들을 해냈다. 조용필 본인도 마찬가지다. 그는 1969년에 미 8야전군 휘하 부대에서 데뷔하여 1971년에는 3인조 그룹인 <김트리오>를 결성해 락(Rock) 가수로 활동했다. 1974년에는 <조용필과 그림자>를 결성해 활동하다가 이듬해에 개별 가수로 전환했다. 일본 가요가 길거리에서 넘실대는 상황에서 개별 가수로 전환한 그는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불러 그 동안 한국 음악 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일본 가요들을 차근차근 몰아내고 일본에도 이 곡을 한국 가사 그대로 수출했다. 그러나 1977년에 대마 흡연이 적발되어 10만 원의 벌금형을 선고받은 조용필은 자숙을 선언한다.
이듬해에 한국 연예인협회의 무대 출연 허용으로 가요계에 복귀, 그 이듬해에는 공식적으로 가요계에 데뷔하여 정규 1집 앨범을 발매했다. 타이틀곡인 <창밖의 여자>의 곡명을 따서 이름지은 이 앨범은 한국 음악사상 최초로 100만 장 이상이 팔려 1990년에는 이 기록이 기네스북에 등재되는 명성을 떨쳤다. 다시 그 이듬해에 조용필은 미 합중국 카네기홀 단독 공연을 한국 가수 최초로 열었다. 이후 KBS <가요톱10>에 출연한 조용필은 1982년 8월 18일부터 11월 3일까지 정규 4집 타이틀곡인 <못찾겠다 꾀꼬리>로 10주 연속 1위를 달성하여 5주 연속으로 1위를 달성하면 '골든컵'이라는 특별 트로피를 수여한 후 더 이상 순위 집계가 되지 않도록 하는 소위 '골든컵 제도'가 도입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1983년에는 NHK홀 단독 공연을 한국 가수 최초로 열어 약 7천 5백 명의 관객을 모았다. 이는 개관 이래 최다 관객수였다고 한다. 당시 NHK홀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가수들만이 설 수 있는 막강한 권위를 자랑하는 음악당이었다고 한다. 이듬해 11월 23일부터 다음 달 17일까지 일본 15개 도시를 도는 전일본 순회 단독 공연을 열던 중 12월 12일에는 무도관 단독 공연을 한국 가수 최초로 열었다. 1만 4천 명이 들어갈 수 있는 무대이지만, 한일 양국이 서로 문화를 개방하지 않았으며, 다양한 소셜 미디어가 없는 상황인지라 당시 관객 수는 약 5천 명에 그쳤다. 하지만 무도관 단독 공연 역시 도쿄 돔이 들어서고 국립 가스미 가오카 경기장(동경 올림픽 주경기장)이 개방되기 전인 당시까지만 해도 전일본 국민 가수가 아니면 감히 꿈꿀 수 없는 무대였다고 한다.
그리고 1986년에는 정식으로 일본에 진출해 <추억의 미아 1>을 발매했고, 100만 장 이상이 팔려 나갔다. 이를 계기로 조용필은 그해 열린 제1회 골든디스크 시상식에서 대상을 받았다. 이렇게 조용필은 1981년부터 무도관 단독 공연 때까지 약 30회에 걸쳐 내일 단독 공연을 열었다고 한다. 이어서 조용필은 1987년에는 해외 가수 최초로 홍백가합전에 초대받은 것을 시작으로 90년까지 4년 연속으로 홍백가합전에 출연했으며, 1990년 홍백가합전은 롯데월드 현지 중계로 출연했다고 한다. 더 나아가 1988년에는 공산권 국가인 치나의 북경 장성 호텔에서 역시 한국 가수 최초로 단독 공연을 열었다. 양국간 교류가 없었고, 당시 자본주의 진영은 사회주의 국가를 '도깨비'들이 사는 세상으로 여기고 있었다.
게다가, 당시 한국도 군부가 정권을 쥐고 있었던지라 냉전의 벽은 대단히 높았다. 조용필이 입국할 때까지만 해도 공연 소식을 아무도 몰랐다고 한다. 조용필은 출국 하루 전에 취소, 장소 변경 등 우여곡절을 거쳐야 공연을 진행해야 했다. 조용필의 공적과 명성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1993년에 해운대 해수욕장에서 연 단독 공연에 1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모았고, 이듬해에는 음반 판매량이 1000만 장을 넘기고, 일본에서도 한국 가수 최초로 음반 판매량이 공식 집계 기준 600만 장, 비공식 집계 기준 800만 장을 넘겼다. 1996년에는 정규 5집 앨범 공동 타이틀곡인 <친구여>가 한국 가요 최초로 고1 음악 교과서에 실렸다.
1999년에 연 예술의 전당 단독 공연은 개관 이래 유료 판매율 역대 1위(87%)를 기록했고, 2008년에 역시 예술의 전당에서 연 단독 공연은 가장 높은 예매율(104%)을 기록했다. 2003년에 서울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연 데뷔 35주년 단독 공연은 H.O.T.와 GOD에 이어서 한국 가수 중 세 번째로 열린 서울 올림픽 주경기장 단독 공연이며, 역대 서울 올림픽 주경기장 단독 공연 중 최초로 좌석표가 모두 팔렸다. 이 데뷔 35주년 단독 공연은 폭우 속에서도 약 4만 5천 명이 공연을 끝까지 보았다고 한다. 2005년에는 한국 가수 최초로 전국 월드컵 경기장 순회 공연을 열어 약 30만 명을 모았다.
2008년에 서울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연 데뷔 40주년 단독 공연은 5만 5천 명의 관객을 끌어 모아 한국 가수의 단독 공연 중 최다 유료 관객수를 기록했다. 이렇듯 한국 가요계의 살아있는 전설이자 현재 모든 한국 가수들이 표상으로 삼고 있으며, 우리의 어머니들을 매혹시켜 한편에서는 도덕성 문제에 휘말리고 자신과 음반 계약을 맺은 제작사로부터 저작권을 빼앗겨 아직까지도 되찾아오지 못하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이른바 '오빠부대'라는 용어를 만들어 내는 등 오랜 세월에 걸쳐 한국 가요계에서 가장 크고 많은 피해를 입으면서도 한국 가요사를 써 왔던 조용필은 다양한 장르를 소화하며 여러 계층을 넘어 글로벌 잠재력을 갖춘 최고의 문화 전사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