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련화
다섯 자 남짓의 작달막한 키에 걸걸한 목소리의 마르지 않은 체구를 지닌 여인이었다. 열여섯 어린 나이로 남편을 만나 열일곱 나이로 첫 아들을 낳아 장남과는 마치 오누이 같은 느낌을 주는 모자 사이였다.
자다가 느닷없는 발병을 잘해서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그 이를 들쳐 없고 병원으로 내달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어린 나이로 시집가서 남편 사랑이 지극해서였을까? 조금만 아파도 호들갑을 많이 부리는 어리광 많은 보살이었다.
그의 어머니 무진장의 뒤를 이어 십 수 년을 대광사 원주 일을 보았는데 그다지 야무진 편은 아니지만 알뜰하게 사중을 돌보며 후일 대덕화가 원주 일 이어받을 때까지 성심으로 봉사 했다.
음식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 색다르고 특별한 음식을 잘 하는 편이었다. 이웃의 잔치나 절의 특별행사에 자주 솜씨를 발휘해서 여럿을 즐겁게 하기도 했다. 오락이나 놀이에 관심이 유난히 많아서 노상 무상스님과 바둑 두다가 어머니 무진장에게 자주 혼나곤 했었다.
그이의 남편은 아들 둘 낳고 처남과 연관되어 육이오 직후 비명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주 젊은 나이에 남편과 남동생을 일시에 잃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홀로 아들 둘 길러내어 첫째는 서울의대를 나와 안과의사가 되고 둘째는 평범한 직장인이 되었다.
며느리에 대한 아쉬움이 늘 목구멍을 껄적지근 하게 해서 아들집에 가기를 미루고 미루었지만 더는 절에 머물기 어려운 몸이 되어 아들에게 가서 한동안 지내다가 인천의 요양병원에서 수년을 지내다가 돌아가셨다.
매년 요양병원을 찾아가 얼굴을 보고 위로하고 오긴 했지만 그 때마다 안타깝고 서글픈 마음이 도탑게 일어 발길 돌리기에 애를 먹었다.
그리 인정 많은 분은 아니었지만 가르침 주기를 좋아해서 절을 찾는 불자들을 평소 많이 읽으신 경전이나 독서 지식을 이용해 친절하게 안내해 주곤 했었다. 그래서 많은 젊은 불자들의 의지 처 역할을 했다.
그 분이 대광사를 돌볼 무렵은 내 나이 워낙 젊은 시절이었고 워낙 무식하게 포교에 열정 쏟을 무렵이었기에 학생들과 젊은이들의 치다꺼리가 여간 아니었다. 매일 라면을 삶아야 했고 매일 비빔밥을 비벼 날라야 했다. 먹성 좋은 젊은이들 등살에 남아나는 게 없을 지경이었다.
그때 비벼 날랐던 비빔밥의 공덕이 헛되지 않아서. 그 때 삶아 날랐던 라면 공덕이 헛되지 않아서 오늘도 그 때 인연 맺었던 이들이 끊임없이 찾아들고 필요한 경우 큰 힘을 보태고 있다.
“묘련화 보살님 아시지요?”
“그 때 라면 잘 먹던 김도원 손상진 등등은 지금도 알뜰히 절을 보살피고 있고 박성철은 스님이 되어 열심히 이웃 보살피고 있고 곽경훈은 종단의 중진이 되어 큰 역할을 하고 있답니다.
당신께서 지으신 좋은 인연이 대광사 미래를 밝게 하고 불교의 내일을 든든히 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