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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권력의 키운 악마의 만행, 국가의 책임입니다!!...
자유, 평화, 정의, 인권, 연대, 행복...이 소중한 가치들을 지키고 실현시키기는 것, 또는 우리를 억압하려는 부당한 폭력과 불의에 분노하고 저항하는 것은 인간의 존재 이유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불의에 대한 저항의 권리도, 정신적 식민지 상태를 거부하는 용기도 빼앗긴 채, 형기 없는 무기수와 같은 비참한 삶을 살아야만 했던 분들이있습니다. 갓난 아기부터 노인, 지체장애인과 정신장애인까지 모든 부류의 사람들이 "부랑인" 으로 낙인 찍혀 강제 수용됐지만, 실상은 길을 가다, 공원에서, 또는 부산역에서 아무 죄 없이 끌려온 무고한 시민들이 우리 사회의 무관심과 이를 조장하고 이용해 자신의 정당성을 강화한 국가 권력의 만행으로 자신들의 삶을 송두리 채 빼앗겨 버리고 만 것입니다...
어제 SBS에서 방영된 [그것이 알고싶다] "27년전 형제복지원 홀로고스트의 진실은" 을 보신 분들이라면 측은함과 탄식, 절망과 분노를 같이 느끼셨을 겁니다. "부랑자 교화" 라는 얼토당토 않은 정부시책으로 3천 5백여 명의 죄 없는 시민들은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감금과 폭행, 강제 노역 등 끔찍한 인권 유린을 당해야 했고, 12년 간 각종 폭행과 굶주림, 또한 질병으로 사망한 사람만 공식적으로 513명에 이른다 하니 그야말로 지옥이 따로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망자들 대부분은 심장질환, 신부전증 등의 허위 사망진단서를 발급받았고, 심지어 복지원 인근에 암매장 되거나 각 의과대학에 해부학 실습용으로 팔려나가는 등 두 번의 죽임을 당했으며, 시신 한 구당 300~500만원을 주고 팔기도 했다니, 악마가 자행한 참혹한 살육의 현장이 눈에 선히 그려집니다...
인간의 잔인함과 사악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이 사건은 1976년 박정희 군사정권의 "일본의 조총련에서 부랑인으로 가장한 사람들을 남한에 파견해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 는 공문으로 부터 시작됩니다. 이 터무니없는 공문은 당시 육군 상사였던 박인근에게 호재였고, 그는 부리나케 형제복지원이란 부랑인 수용소를 만듭니다. 사회복지사업이란 미명으로 악마의 터가 자리를 잡게되는 것이죠. 더더욱 1981년 4월 10일 전두환은 국무총리에게 "근간 신체장애자 구걸행각이 늘어나고 있다는 바, 실태파악을 하여 관계부처 협조하에 일절 단속 보호조치하고 대책과 결과를 보고해주기 바랍니다" 라는 지휘서신을 내립니다. 이는 곧 "내무부훈령 410호" 제정되고 부랑인 등의 신고, 단속, 수용, 보호와 귀향조치 및 사후관리라는 업무지침이 치안본부와 내무부의 합작품으로 진행되자, 날개를 단 박인근은 수용시설의 확장을 통해 사회사업가로 활동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지옥의 문은 그렇게 열렸던 것입니다...
1987년 이 끔찍한 사건은 한 검사의 집념으로 세상에 알려졌지만, 형제복지원 원장 박인근은 정권의 비호 덕에 국가보조금 횡령죄만 인정돼 솜방망이 처벌을 받았고, 인권유린을 당했던 피해자들은 아무런 보상이나 진상 규명조차 없이 뿔뿔히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당시 울산지청 소속 검사로 부산형제복지원 사건을 수사했던 김용원 변호사(현 법무법인 한별 대표)는 오마이뉴스를 통해 당시를 이렇게 회고합니다...
부산형제복지원
"부산형제복지원은 사회복지시설이 아니고 완벽한 감금시설"이며 "복지원 수용자들은 대부분 멀쩡한 사람들인데 납치되다시피 끌려와 감금되어 있으면서 노임도 받지 못한 채 강제노역에 동원되었다" 또한 복지원은 "교도소를 뺨치는 어머어마한 철문과 성곽 같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내가 아는 법전에는 이런 시설을 인정하는 법률이 없다" "수용자들은 툭하면 얻어맞아 죽어갔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의사들은 얻어맞아 죽은 수용자들이 자연사했다고 진단서를 끊어주었다. 그들의 시체는 의과대학에 실습으로 팔려갔다고들 했다."....기사출처 오마이뉴스...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인간의 신체적 자유란 소중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다. 단 한명이라도 본인의 자유로운 의사에 반하여 장기간 감금당한 채 강제노동에 시달린다면 그것은 중대한 사건이다. 아무리 못난 인간이라도 그런 대접을 받아서는 안된다. 그런데 3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복지원이라는 이름의 감방 아닌 감방에 감금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고 당시의 상황을 증언합니다. 또한 당시 사건에 대해 축소 은폐를 회유하고 압력을 행사했던 청와대와 부산시장, 검찰수뇌부와 이 사건의 재판장이었던 김용준 대법관을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부산형제복지원이 부랑인들을 울주작업장에 수용한 것과 야간도주를 방지하기 위해 취침중 출입문을 잠근 것 등이 "감금죄" 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겠죠. 이런 작자가 가증스럽게 서민 코스프레를 하며 총리를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으니 참으로 기함할 노릇입니다...
# 대법, 김용준 재판장은 지난 1988년 11월 8일 특수감금죄에 무죄를 확정해버렸습니다.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진 군부독재 정권은 산업화 과정에서 도시 빈민이 돼 거리로 내몰린 사람들을 "청소해야 마땅한 잠재적 범죄자"로 치부했고,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눈에 잘 띄지 않는 시설에 감금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또한 국가 정책의 야만성은 사회복지법인의 탐욕마저 묵인하며 파렴치한 범죄를 종용하기까지 했으니, 1986년 형제복지원에 수용된 3975명 가운데 경찰이 의뢰한 수용자는 3117명, 구청에서 의뢰한 수용자는 253명이었으며 이렇게 채워진 머릿수만큼 형제복지원은 "국고보조금"을 받았고, 상황이 이렇다보니 구금은 막무가내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결국 국가가 수용자들에게 덧씌운 "사회악"이라는 낙인으로 악마를 키운 셈이죠...
이 아이들이 "부랑인이고 사회악" 입니까? [사진 출처 시사인]
형제복지원은 몇 차례 간판만 바뀐 뒤 현재의 형제복지지원재단으로 여전히 건재합니다. 박 원장은 2011년까지 해당 법인 이사로 활동했으며, 현재는 아들 박천광이 대표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서민들의 서러운 돈이 이 법인으로 흘러든 정황도 포착됐습니다. 2005년 법인은 수익사업부 증축 공사비 명목으로 "부산상호저축은행"에서 장기 차입을 시작해 2009년까지 118억원을 대출받았습니다. 부산시는 차입금과 관련해 특별점검을 실시했으나 118억원에 대한 입출금 내역이 명확하게 관리되지 않고, 40여억원은 사용 용도조차 불분명했습니다. 별도의 회계감사 조차 받지 않았습니다. 횡령 등 혐의로 현재 재판 계류중이구요...
1984년 12살 누나와 함께 형제복지원으로 끌려간 9살 소년의 이야기가 <살아남은 아이>란 책으로 엮어져 나왔습니다. 재작년 봄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제 이야기 좀 들어주세요!!" 라는 피켓을 들고 1인시위를 하던 한종선씨가 바로 그 주인공이죠. 그의 소박한 바람은 "국가가 사과를 했으면 좋겠어요" 였습니다. 하지만 진상 규명을 위한 특별법 등 제도가 마련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다행히 뜻있는 분들이 모여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안을 마련해 곧 입법 발의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조속히 통과되기를 희망합니다...
"이제는 피해자들이 용기를 내 말하려 한다. 한때는 가정에서 사랑받던 아이들과 아버지, 어머니들이, 그리고 이웃들이 죄없이 끌려가 평생 지울 수 없는 시련과 아픔을 자행했던 국가를 상대로 억울함을 호소하려 한다" 는 이들의 절규가 귓전을 맴돕니다. 부디 뜻을 이루시길 응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