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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14장
참 믿음의 자유와 사랑
(찬송 321장)
2021-8-24 화
맥락과 의미
믿음으로 구원받은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12장부터 계속되는 말씀입니다. 14-15:13은 먹고 마시는 문제 등 일상적인 일에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자유와, 성도들이 사랑으로 공동체를 이루는 것에 대해 가르칩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는 유대인 그리스도인, “믿음이 강한 자”는 이방인 그리스도인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음식이나 절기 등 구약의 율법을 지키는 경향 때문에 믿음의 자유가 적었습니다. 이방인들은 오히려 자유함이 있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두 가지를 가르칩니다. 첫째, 각자 믿음의 판단대로 자유함 가운데 살아라. 믿음은 “예수님은 하나님이다”는 믿음의 고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행동을 판단하는 것을 말합니다. 1, 2, 22, 23절에 “믿음”이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5절에서는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확정이란 것은 모든 것에서 믿음이 확실히 가득 찬 것을 이야기합니다. 성도에게 구원의 확신이 가장 큰 행복입니다. 나아가 성도는 먹고 마시고 살아가는 모든 일에서 믿음으로 가득 차서 확신 가운데 강하고 담대하게 살아갑니다. 이 자유가 있습니다.
둘째, 동시에 다른 성도에 대한 사랑으로 행하라. 나의 자유로운 행동이 다른 성도의 믿음에 큰 상처를 준다면 자유를 절제하라. 사랑 때문에 절제하는 것에 참 자유와 행복이 있습니다.
1. 믿음 대로 행동하라. 다른 성도의 결정을 판단하지 말라(1-12절)
배경은 이런 것 같습니다. 첫째는,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어도 되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사도들은 성도가 우상 신전에 가서 우상의 고기를 먹는 축제에 참여하는 것을 금했습니다. 그것은 명백히 우상숭배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행 15:29, 16:4). 그런데 신전에 바쳐졌다가 시장에서 팔리는 고기를 사서 먹어도 될까요? 사도들은 고기의 출처를 묻지 말고 사서 먹어도 된다고 가르쳤습니다(고전10:25-27).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는 죄가 없습니다. 그것이 영적으로 감염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고기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좋은 것입니다. “그것을 사 먹으면 죄를 짓지 않는가? 그렇게 의심하지 말라. 여러분이 경제적으로 여유가 된다면 확신 있게 기쁨으로 그것을 사 먹고 살아가라”. 이방인 성도들은 그 고기를 자유롭게 사 먹었습니다. 바로 믿음이 강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어떤 성도는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를 사 먹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마음에 거리낌이 되었습니다. 특히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오랫동안 성전 제사제도에 익숙해져 왔습니다. 우상 신전에 바쳐졌다가 시장에서 파는 고기를 먹어도 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압니다. 그러나 그런 고기를 사 먹는 것은 경건하지 않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믿음이 약한 자들입니다.
이런 생각의 차이때문에 교회에서 갈등이 생겼습니다.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를 먹는 성도는 그것을 먹지 못하는 성도를 업신여겼습니다. “믿음이 저렇게 밖에 안 되느냐?”고 말했습니다. 한편, 자신의 믿음과 양심의 판단으로 그 고기를 먹지 못하는 성도는 그것을 먹는 성도를 경건하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둘째, 로마 교회 안의 논란거리는 “날”을 지키는 것에 대한 생각의 차이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 보다 낫게 여기고”(5절). 아마도 유대인 그리스도인을 말하는 듯합니다.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 등, 특별한 금식일이나 안식일을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고 생각한 듯합니다.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5절). 어떤 특별한 날을 생각하지 않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말하는 듯합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특별한 날에 대해서는 행동의 제약이 있으니 “믿음이 연약한 자”로 볼 수 있습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날이 특별한 차이가 없고 유대인 그리스도인처럼 특별한 날에 매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유가 더 많습니다. “믿음이 강한 자”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성경은 각각 자기 믿음의 확정대로 하라고 합니다(5절). 객관적인 기준은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어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먹을지 먹지 않을지는 각자가 하나님 앞에서 정하면 됩니다. 다른 그리스도인은 다르게 할 수 있지만, “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무엇을 하는 것이 좋은지는 스스로 결정합니다. 어떤 날을 특별한 날로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그렇게 하면 됩니다. 특별한 날로 지키지 않고 보통의 날로 하겠다고 생각하면 그것도 좋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온전하게 받아들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참 놀라운 은혜입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네 믿음이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느냐?” 하고 정죄하지 않습니다. 각자 믿음의 마음으로 충성되게 일상생활을 살면 됩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차이가 있는 성도 각자를 기쁘게 받아주십니다. 믿음이 연약한 사람은 연약한대로 평화와 기쁨 가운데서 살아갈 수 있게 하십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은 강한 사람대로 하나님이 주신 것을 더 즐기면서 살아가게 하십니다. 불필요한 갈등을 일으키지 않도록 존중해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집안에서 가족끼리도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 아이들을 힘들게 합니다.
4절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같은 믿음을 고백하는 다른 성도가 나와 다르게 행동을 하지만 주님이 그를 붙드시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이 세우시는 주님의 종을 내가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다양성을 인정합시다. 다른 성도가 나와 다른 그 다름을 존중합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나를 판단하는 것에도 얽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소명을 과감하게 따라 나가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 가정의 경제활동, 내가 어떤 직업을 택할 것이냐, 언제 은퇴할 것이냐, 내가 어떤 종류의 차를 살 것이냐, 휴가를 어디로 갈 것이냐 등에 대해서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고 눌려서는 안 됩니다.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5절). “내가 하는 행동이 틀린 것이 아닌가?” 계속 의심하거나 남의 눈치를 보고 짓눌려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닙니다.
“확정하라”는 말은 로마서 4:21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 쓴 말이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은 100세가 되어도 자녀가 출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았습니다. “약속하신 그분께서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신 가운데서 나아갔습니다. 성도는 일상의 일에서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확신 가운데 살아갑니다. 우리는 한국 사회의 집단주의 경향을 따라가지 맙시다. 내가 양심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판단해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그 확신대로 나아가야 합니다.
6절, 우리는 먹고 마시는 일까지도 주님을 위하여 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교회 안에서 예배할 때만 확신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상의 작은 일도 주님께서 우리를 세우신다는 확신 가운데 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사업을 하고 직장에서 일을 할 때도 그리스도께서 나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우신다는 확신으로 일합니다. 공부를 할 때에도 이 공부를 통해 주께서 나를 세우신다는 확신 가운데 합니다. 직장에서 일하고 공부하고 집안일을 하는 이 모든 것에서 주께서 나를 기쁘게 받아주신다는 확신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런 일상 가운데에 우리의 기쁨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작은 일에도 주께 감사합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주님께 감사합시다.
8절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우리의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입니다. 먹고 마시는 작은 일에서도 주님의 뜻으로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각자를 받아들여 주셨습니다. 다른 성도의 삶도 받으셨습니다. “저 성도는 왜 저렇게 안 좋은 직업을 가지고 어떻게 저렇게 고생하며 살까?” 그들을 답답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성도도 주님께서 받아주셨습니다.
10절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심판대 앞에 선다는 말을 12절에서도 합니다.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우리는 각자가 행한 것을 놓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판단을 받게 됩니다. 각자 믿음을 따라 하나님께 충성한 것을 하나님께서 아시고 판단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른 성도를 어떻게 판단하실지는 하나님의 은밀한 판단에 달려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서서 우리가 다른 성도를 비판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우리 각자를 하나님께서 세워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을 살 때 감사함으로 모든 일을 합니다. 그러니 현재 주께서 나에게 주신 것을 감사함으로 받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불행해하지 마십시오.
2. 다른 성도를 세우고 교회의 평화를 위해 나의 자유를 절제함(13-23절)
모든 음식은 그 자체로서 속된 것이 아닙니다(14절). 속되다는 것은 하나님께 거룩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도는 모든 음식을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살아가기 위해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23절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 시장에서 파는 고기는 사 먹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성도가 그 고기를 사서 먹으면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의 양심의 법에는 먹으면 안 된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의 판단을 어기면 죄입니다. 작은 일에서 양심이 망가지게 되면 큰일까지도 망가뜨립니다. 믿음을 부패시킵니다.
“믿음으로”는 “믿음으로부터”라는 뜻입니다. 성도는 자기 행위의 선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습니다(3:30, 믿음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죄 용서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계속 “믿음으로(부터) 믿음을 향해” 나갑니다(1:17). 처음 의롭다 함을 받아 구원이 시작될 때, 그리고 그 뒤로 살아갈 때에도 계속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죄 용서와 의롭다 함의 확신은 먹고 마시는 작은 일에서도 계속됩니다. 얼마나 복됩니까?
그러나 내가 양심의 가책이 없이 자유롭게 하는 행동이 다른 성도에게 불필요한 상처를 주지 않도록 주의합시다. “하나님의 사업”(20절)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말합니다. 내가 먹는 음식 문제로 하나님이 구원하신 성도와 교회를 무너뜨려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믿음이 강한 자는 음식이나 날에 대한 자기의 생각을 약한 형제 자매에게 맞추어야 합니다. 칼빈 목사님은 이것을 자유의 절제라고 표현했습니다. 교회나 형제 자매를 세우기 위해(19절) 이렇게 절제할 때 “하나님의 나라는 …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17절)으로 교회에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렇게 절제하는 성도에게도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22절) 합니다. 내가 살아가는 삶의 스타일이 있지만 다른 성도의 유익을 위해서 그것을 조금 절제한다고 해도 그것이 내 확신을 굽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그런 일을 나는 편하게 하면 됩니다. 그러나 내 행동 때문에 다른 성도들이 상처를 받는다면, 그들과 함께 있는 곳에서는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성도에 대한 사랑 때문에 나의 자유를 절제합니다. 하지만 다른 성도가 상처를 받지 않을 때는 자유롭게 살면 됩니다. 자기 확신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을 위해서 나의 외부적 행동을 굽히더라도 마음의 확신은 굽히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위해서 절제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확신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23절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되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는 것이 자기 믿음의 양심에 거리끼는데도 먹는다면 하나님 앞에 정죄 받은 것입니다. 객관적으로는 정죄 되지 않지만 그의 마음에 적용된 기준을 어긴 것이므로 죄입니다.
약한 성도를 위해 자기를 절제하는 성도가 자신의 자유를 억압한다면 그것도 죄입니다. 우리는 자유를 절제하면서도 자유롭게 열린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 사회나 교회는 분위기 좋은 것을 지나치게 강조합니다. 그래서 각 사람이 자기 소신대로 살아가는 것을 억누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도 각자가 확신을 향해서 나아가는 일에 큰 방해를 줍니다. 물론 다른 사람과의 평화를 위해서 필요할 때는 절제합니다. 그러면서도 주님께서 우리 가정과 나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주신 사명의 열매를 위해서 달려가는 일에 집중하기 바랍니다.
믿고 복종할 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천국 백성으로 삼아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 우리를 의와 평화와 기쁨의 나라로 불러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의 두 가지 원리를 붙잡기 바랍니다. 첫째, 먹고 마시는 작은 일에서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이루기 위해 확신 가운데 하시기를 바랍니다. 잘 되면 잘 되는 대로 못되면 못 되는 대로 부자면 부자인 대로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다 주님이 내려주신 것입니다. 자기 상황에서 주께서 주신 지혜를 따라 경건의 열매를 맺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다른 성도들과 평화 가운데 함께 살아갑시다. 내가 가진 소신은 분명하지만, 다른 성도의 믿음의 성장을 위해서 나의 자유를 조금 절제합시다. 성도의 믿음이 성장할 때까지 기다려줍시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을 따라 하지 않은 것은 죄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 공로로 죄 용서받았다는 이 믿음으로 은혜를 받았습니다.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주께서 받으실 것이니 믿음으로 하십시오. 또 믿음의 양심에 거리끼는 것은 하지 마십시오.
주께서 우리에게 이 말씀을 주신 이유는 기쁨 가운데 살아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예배와 구원의 기쁨뿐 아니라 일상의 작은 일에서도 우리에게 기쁨을 주십니다. 한 걸음 한 걸음 확신을 갖고 걸어가게 하십니다.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 확신과 기쁨으로 설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기뻐합시다.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 방해되는 것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봅시다. 그것을 떨쳐버립시다. 가정과 직장에서 생활할 때에도 하나님이 나를 받으셨다는 확신 가운데 살아갑시다. 혹시 내가 살아갈 때 우리 가족이나 다른 성도에게 불편함을 주어서 평화를 해친 것은 없는지 돌아봅시다. 또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 다른 성도가 구원과 복음 안에서 성장하는 것을 억누르지 않았는지 돌아봅시다. 우리 교회 전체가 복음으로 더 풍요롭게 되도록 기도합시다. 모든 성도가 삶의 모든 순간을 기쁨과 확신 가운데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시다.
조금 더 생각하기
<참고> “믿음으로”(엑크 피스테오스)는 “믿음으로부터”
“믿음으로”(엑크 피스테오스)는 “믿음으로부터”라는 뜻입니다. 성도는 자기 행위의 선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습니다(3:30, 믿음으로 말미암아, 엑크 피스테오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죄 용서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계속 “믿음으로(부터) 믿음을 향해” 나갑니다(1:17).
<참고> 불변하는 하나님, 객관적 말씀, 성도의 적용은 자기 환경에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에 따라 다른 행동 기준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이 이랬다저랬다 하는 분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항상 변함없는 하나님은 각 성도가 자유롭게 성장하도록 은혜를 베푸십니다. 따라서 그 기준이 성도에 따라 달라지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님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각자의 영혼을 인도하셔서 그에게 확실한 기준을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