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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치론
- 이기항의 해양 장편소설 <싸치>를 읽고
들우물
이런저런 이유로 지연되었던 <싸치>읽기가 드디어 끝났다. 2002년 설 연휴를 맞아서야 차분하게 정독했으니 그동안 얼마나 게으름을 피웠단 말인가. 그동안 아무런 생각없이 식탁에서 먹었던 참치 통조림 하나를 보아도 이제는 예사롭지 않은 마음이 들 정도로, 원양어선을 타고 인도양까지 가 참치를 잡는 선원들의 삶이 비교적 생생하게 그려진 이야기이다. 하지만 그것은 선원들의 건강한, 희망에 찬 선상생활 중심이 아니라 다중(多重)의 사회적 문제를 내포하는 사건 중심의 이야기로서 세인들 앞에 알몸으로 던져진, 아마추어 작가의 노작(勞作)이다.
다중의 사회적 문제란, 우리 사회에 만연된 부조리와 원양어선 내의 폭언․ 폭력․인권유린의 실상과 인간의 탐욕․잔인성 등을 직․간접으로 폭로하고, 동시에 생명존중을 통해서 자연과의 공존․공생관계를 모색해야 하는 21세기 화두(話頭)를 주인공 박만수와 싸치(고래)와의 관계를 통해서 환기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글은 세인들에게 던져진 작품의 문제의식이 어떻게 구축되었으며, 작품의 구조와 작가의 의도 등의 상관관계를 중심으로 기술될 것이다. 그럼으로써 보다 온전한 해양문학의 전형이 창작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함과 동시에 이 작품에 대한 세인들의 관심을 모을 수 있는 일에 작으나마 도움이 되고자 한다.
1. 싸치와 박만수와의 관계
고래를 일컫는 싸치는, 작품속에서 주낙을 흐트러 놓거나 미끼와 주낙에 걸린 참치들을 다 혹은 부분적으로 먹어 치움으로써 참치잡이를 방해하는 영민한 바다의 포유류 동물이다. 그래서 어선 가까이 그들이 나타나기만 하면 선장을 비롯 모든 선원들은 긴장하기도 하며, 어느새 그들의 얼굴엔 수심이 깃들기도 한다. 필요에 따라서는 배로부터 그들을 멀리떼어놓기 위해 빠른 속도로 몇 일에 걸쳐 어장이동을 해야만 한다.
그러는 어느 날 어쩌다가 걸려든 작은 싸치 한 마리를 힘들게 갑판 위로 끌어올려, 그야말로 분풀이를 하듯 도끼와 칼을 이용, 잔인하게 죽여 버리는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싸치 무리들의 항의성 시위가 벌어지기도 하고, 또 더욱 끈질기게 따라다니며 조직적으로 조업을 방해하거나 온전히 망쳐 놓는다. 마침내는 스크루에 걸린 주낙과 낚시줄을 해체하기 위하여 정선(停船)하는 소동을 벌이고, 또 그들을 따돌리기 위하여 다른 어선들과 합류하는 속임수를 쓰기도 한다.
한편, 싸치가 갑판 위에서 처참하게 도끼로 얻어맞고 칼로 몸통이 잘려나가 죽임을 당하던 날, 유독 동정심 어린 발언을 함으로써 선장으로부터 폭언과 함께 빰을 얻어맞아야 했던 만수와는 아주 뜻밖의 교감관계가 형성되고, 그 관계가 지속 발전하여 표정과 수화(手話), 그리고 주낙의 미끼를 이용한 감정교류와 부분적인 의사소통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만수의 뜻대로 -반드시 온전한 것은 아니었지만- 참치를 몰아다 줌으로써 많은 참치를 잡을 수 있게 하기도 하고, 또 주낙을 헝클어 놓기도 하고, 심지어는 특별한 어종(魚種)까지도 구분하여 잡도록 하는가 하면, 만수가 누군가로부터 얻어맞고 밤바다에 내던져졌을 때에는 부이들을 끌어 모아 뗏목처럼 만들어 놓음으로써 만수를 살리기도 하는 등 실로 놀라운 일들이 벌어진다. 어디 그뿐인가. 싸치를 혼내주기 위해 통신장이 제안한 대로 부비추렙(일정한 힘을 가했을 때 폭발하는 지뢰의 일종)을 만들어 주낙에 매달아 놓으려 할 때 그를 제지하는 과정에서 만수와 통신장은 몸싸움이 벌어지고, 끝내는 만수의 한쪽 팔을 날리는 사건이 발생함으로써 만수가 귀환조치되는 날에는 싸치들이 몰려들어 우왕좌왕하며 이상한 울음을 내기도 한다.
이처럼 싸치와 만수는 감정을 어느 정도 공유하고 부분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하여 서로를 아끼고 존중해 주는, 경이적인 차원의 교감관계로 묘사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작가의 의도인, 인간의 끝없는 탐욕과 잔인성이 생명체를 무분별하게 남획․유린함으로써 자연의 목을 조르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워 새로운, 자연관과 생명관을 모색, 공생․공존의 당위를 환기시키고자 하였으리라.
2. 선상 폭력과 인권유린
ꡒ야 이 새끼들아! 지금 이 배가 유람선인 줄 알아?ꡓ라는 모욕적인 말로 시작되는 선상 소방훈련이 시작되자마자 항해사로부터 일방적으로 얻어맞고 쓰러지는 선원 윤호선과 신씨. ꡒ밑도 끝도 없이 왜 사람을 치고 그래요?ꡓ라는 항의성 섞인 말 한 마디에 몰매를 맞다시피 얻어맞는 윤호선, 마침내 항해사와 멱살을 잡고 엎치락 뒤치락 하는데 이를 지켜보던 기관장은 어이없다는 듯 몽둥이로 윤호선을 내리치자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나뒹구는 윤호선을 그들은 인정사정없이 짓밟기 시작하고…… 그 누구도 제지하거나 항의할 수 없는 상황에서 윤호선은 결국 선장 앞에 무릎을 꿇는다. 소위 ꡐ겁주기ꡑ 내지는 ꡐ보여주기ꡑ식 폭력시위가 항해 초반에 벌어진 것이다. 분명 이는, 앞으로 누구든 대들거나 명령과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 이렇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일종의 협박이요, 강력한 암시였다.
선상 폭력은 선원들 사이에서도 일어나지만 대부분은 어선의 간부들로부터 선원들이 일방적으로 당하는 형태다. 물론, 선원들의 안전과 조업실적을 올려야 하는 책임을 진 선장 이하 간부들은 필요시 정신교육과 신체적 훈련을 시켜야 하겠지만 그 방법이야 늘 선원들의 인격이나 모독하고 폭력을 행사하여 인권을 유린하는 것으로써 나타난다. 폭언은 선상에서 평어이고, 자그만 문제라도 생길라치면 먼저 폭력부터 휘두르고 보는 구시대적인 발상과 무조건적인 상명하복의 권위가 난무한다.
어느날 싸치와 만수와의 수화를 통한 교감관계를 눈치챈 선장은 갑자기 만수를 불러 뺨부터 이리저리 때리고 보는 ꡐ협박성 진실캐기ꡑ를 시도하지만 더 큰 문제를 야기하고 만다. 그런 껄끄러운 일이 있은 후부터는 항해사의 감시와 잦은 손찌검과 함께 회유도 있었지만 만수는 끝내 입을 열지 않는다. 그러자 몇 차례 소름이 돋는 -그러니까, 앞으로 말을 듣지 않으면 죽여 버릴 수도 있다는 식의- 암시를 주기도 한다. 하지만 말을 듣지 않자 그 암시의 내용대로 냉동창고에 감금해 버리는 살인적인 음모를 실행하기도 하고, 또 어둠속 갑판에서 몰래 내리친 다음 바닷속으로 던져 버리는 살인행위까지도 감행한다.
작가는 이런 선상 폭력이 전근대적이고, 우리의 현실사회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끊임없이 암시해 준다. 암시를 준다기보다는 최소한의 정보를 흘려 놓는다. 아주 계획적으로. 곧, 일본 어선과 한국 어선의 선장의 근무태도를 은연중 대비적으로 묘사를 하기도 하고, 원양어선에서의 각종 사고가 다른 어느 분야에서의 사고보다 많다는 통계적 사실을 흘려 놓기도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긴장감 넘치는 선상 폭력에 대한 묘사는 이 작품의 주지(主枝)인 싸치와 만수의 교감을 통한 생명존중과 자연에 대한 새로운 관계 모색을 부각시키는 일보다 큰 비중을 차지할 수는 없다. 또, 차지해서도 아니된다. 그런데 사실은 주지와 부지(副枝)의 구별이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고 있다는 구조적인 문제를 노출시키고 있다. 이 점에 관한한 이 글의 끝부분에서 상세하게 설명하기로 하자.
3. 부조리한 인간과 부정 부패로 얼룩진 사회
만수의 할머니는 소백산 자락에 위치한 노동리에 살고 있었는데, 정월에 소형 화물트럭의 적재함에 병아리를 싣고 돌아다니는 두 청년의 감언이설에 돈 삼십만원을 사기당한다. 사연인 즉 모 양계장에서 출장나왔다는 두 청년은 병아리 위탁농가를 물색한다며, 삼 개월 뒤에는 많은 값을 치르고 사간다는 것이고, 사료는 양계장에서 보급해 주고, 사양기술은 개별지도를 할 뿐 아니라 모범농가에 대해서는 선진지 시찰기회가 부여된다며, 감쪽같이 동네 사람들을 속이고 보증금조로 삼십만원을 받아 달아나 버린다. 문제는 다음날이 되어서야 속은 줄 알고 파출소에 가 신고를 했더니, 경찰은 ꡒ참말로 딱두 하십니다.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어수록하니 사기를 당하십니까. 더구나 한두 집도 아니고 창피하지도 않아요? 나 원 참, 동네방네 자랑이라도 해야겠군요.ꡓ라고 말하며 도리어 야단을 치는 게 아닌가. 그 길로 분을 삭이지 못하고 화병으로 몸져 누었다가 결국엔 농약을 마시고 자살하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생긴다.
만수의 고향선배인 강영길은 읍내 변두리에서 세차장을 하는데, 사업이 좀 잘 된다하니까 소유주는 임대료를 올려받기 위해 수작을 부리고, 읍내 주재기자는 협박성 취재를 하며 돈이나 뜯어내려 하고, 세무서 직원들은 사업실태조사라며 은근히 돈을 요구한다. 그뿐 아니라 식품가공공장에서 버리는, 악취 나는 폐수가 환경을 오염시킨다고 환경청에 신고했건만 어떻게 알았는지 관련 식품회사 간부직원이 먼저 와 협박과 회유를 해댄다.
아마도, 작가는 강영길의 삶과 그 삶에서 나오는 푸념조의 말을 통해서, 그리고 만수의 할머니 자살 사건을 통해서 기층사회에까지 부정부패가 만연된 우리 사회를 폭로하고자 했을 것이다.
ꡒ제 아무리 고상한 척해도 실상은 동물만도 못한 게 사람들이야. 사람들은 언제나 계산적이어서 약자에게는 강하고 강자에게는 약하거든. 한 마디로 치사하지.ꡓ
만수에게 한 강영길의 이 한 마디의 말은 인간의 부조리한 속성을 단적으로 드러내 주고 있다. 선원 신씨가 자조 섞인 말투로 한일 국민성을 나름대로 비교, 성토하는 대목은 이와 함께 인간을 바라보는 작가의 부정적 시각이 반영된 것이리라.
인간의 부조리한 속성은 잔인성에서도, 그리고 이기주의적인 탐욕에서도 유감없이 확인된다. 한 때 기름을 제공한다는 이유에서 고래를 싹쓸이하듯 잡아 급기야는 국제적으로 포경산업을 금지시켜야만 했듯이, 먹거리로 제공되어 돈이 된다기에 참치라면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잡아대는 오늘날, 그 선상에서 자행되는 각종 어족 죽이는 선원들의 태도와 방식은 가히 충격적이라 할만하다. 가오리․싸치․상어 등을 갑판 위에서 망치․도끼․칼 등으로 치고, 자르고, 베어 죽이는 장면은, 특히 지능지수가 비교적 높은 고래를 죽이는 과정에서 듣게되는 울음소리와 몸서리치는 모습과, 어미 상어 뱃속에서 막 꺼낸 새끼들을 밟아 죽이는 모습 등은 거꾸로 인간의 잔인성을 폭로시켜 주는데 부족함이 없다.
4.작품의 구조와 작가의 의도
작가는 작품을 통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첫째는 싸치와 만수와의 감정교류와 부분적인 의사소통을 통해서 생명과 자연에 대한 소중함과 경외감을 새삼 일깨우고자 했고, 둘째는 원양어선을 타고 참치를 잡는 선원들의 생생한 삶과 선상의 각종 폭력과 인권유린의 구조적 문제를 폭로하고 싶었을 것이고, 셋째는 우리 사회에 만연된 부정․부패를 비롯 인간의 부조리한 속성을 또한 부각시키고 싶었을 것이다. 이처럼 작가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고, 또 자신의 바람을 문장속에서 어느 정도 충족시키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하고 싶었던 많은 이야기 중에서도 중요 우선순위가 있게 마련이고, 가장 먼저, 가장 많이 해야하는 주지, 곧 가장 중요한 기둥이 있고, 그 다음으로 중요한 부지도 있게 마련이다. 물론, 부지 가운데에서도 제1, 제2, 제3의 부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앞에서 지적했다시피 그 주지와 부지 사이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다. 사실, 소설의 제목을 ꡐ싸치ꡑ라고 붙였기 때문에 당연히 작품의 주된 이야기는 싸치와 만수와의 관계와, 그것의 발전에 초점이 모아졌어야 했다. 물론, 그렇게 서사구조를 구축하려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겠으나 부지들이 따로따로, 그러니까, 개별적인 이야기들을 모자이크하듯 합쳐 놓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좀더 이해하기 쉽게 말해, 이 소설은, 우리 사회의 현실적인 부정․부패와 선상폭력 내지는 인권유린과 참치잡이의 애환을 하나의 축으로 전개시키든가, 아니면 싸치와 인간과의 관계 구축과 그것의 발전, 그리고 그 결과 등에 초점을 맞추어 전개시키든가 하여 처음부터 분명하게 했어야 했는데 그러하질 못하고 양다릴 걸치고 있는, 어정쩡한 형국이라는 것이다.
만약에 이 소설이 전자의 형태로 쓰여졌다면 작품의 제목을 ꡐ암시ꡑ라고 붙여야 했고, 후자의 형태로 쓰였다면 지금처럼 ꡐ싸치ꡑ 아니면 좀더 구체적으로 ꡐ싸치의 울음ꡑ 혹은 ꡐ싸치의 눈물ꡑ 정도로 붙였어야 했다. 또 그렇게 결정되었다면 전자는 리얼리즘 시각에서 이야기와 사건들이 보다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전개, 묘사되어야 하고, 후자는 이야기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최소한의 객관적인 사실, 곧 지능지수가 비교적 높은 고래와 인간과의 관계에 상상력을 동원하여 환타지로 발전시켜야 한다. 바로 이런 구조적인 측면을 먼저 고려했어야 했는데 그러하지 못했다는 결정적인 흠이 있다.
따라서 기지가 있는 작가라면 이 한 권의 소설을 반으로 잘라 성격이 다른 두 편의 소설로 개작해 보는 것도 고려해 볼만하다. 대다수의 사람이 원양어선을 타고 망망대해에 떠 있지 않아도 작가의 섬세한 묘사력과 치밀한 이야기 구도에 이끌리어 꼭 대해 가운데 떠 있는 선원들이 느끼는 것처럼 피부에 와 닿도록 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지 못한것은 작가의 의도가 앞선 나머지 하고 싶은 많은 이야기들을 간추려 재구성하는 여유와 또 창작의 경험을 충분히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문학사에서 빈약하기 짝이 없는 해양문학의 발전을 가져 올 수 있는 기초를 마련했다는 점에서는 이 작품의 의미와 예비작가의 공과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