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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1TV 역사스페셜
고구려, 수나라 전쟁의 미스터리 추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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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영웅 강이식(姜以式) 장군 실체 방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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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월 25일(토) 밤 8시 KBS 역사스페셜에서 한시간 동안 고구려, 수나라 전쟁의 미스터리(연출: 이연식, 작가: 이성민)를 방영하였다. 역사는 서기 598년 고구려와 수나라간에 벌어진 전쟁을 제1차 전쟁(임유관 전쟁)으로 밝히고 있다. 제1차 고·수 전쟁은 지금으로부터 1400년 전, 동아시아 전체를 뒤흔들었던 전쟁으로 역사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로 그 진실 역시 오랫동안 역사 속에서 가려져 있었으나 금번 역사스페셜을 통해 강이식 장군이 전쟁에서 승리로 이끌었음을 다시 한번 밝혀줌으로써 시조님의 위상(位相)을 제자리에 모시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감격과 자긍심을 갖게 하였다. |
편집자 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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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기록 오류에서 비롯된 역사적 진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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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를 다룬 역사책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꼽히는 '삼국사기'에 '수나라의 30만 군대가 고구려를 공격해왔다. 그러나 3개월 후 이중에 살아 돌아간 사람은 열 가운데 하나 둘에 지나지 않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598년 고구려와 수나라간에 벌어진 전쟁에 관한 내용이다. 역사스페셜은 제1차 고·수 전쟁을 기록한 이 간략한 내용 그 이면에 숨겨져 있는 진실이 무엇인가에 대해 초점을 맞춰 밝혀지지 않는 역사적 실체에 대해 접근하였다. 지금으로부터 1400년 전, 동북아시아 전체를 뒤흔들었던 전쟁. 즉 598년부터 614년까지 무려 네차례 벌어진 고구려와 수나라간의 전쟁이 바로 그것이다. 장장 16년에 걸쳐서 이뤄진 장기전쟁인데다 그 규모가 세계대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거대했던 고구려, 수나라 전쟁. 그러나 612년 제2차 전쟁이었던 "살수대첩"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역사적인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라 그 진실 역시 오랫동안 역사속에 가려져 있다고 밝혔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598년 제1차 전쟁에 대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영양왕 9년 수나라가 30만 대군을 동원해 고구려를 공격해왔다. 그러나 당시에 장마와 질병이 있었고 수군(水軍)은 태풍을 만나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수나라 군대 가운데 죽은 사람은 10에 8, 9였다. 이것이 우리나라 역사에서 당시의 전쟁에 대해 남아있는 기록의 전부이다. '역사스페셜'은 30만 병력을 동원해 시작한 전쟁이 이렇게 흐지부지 끝나버렸다? 더구나 전투 한번 없이 단지 자연재해만으로 죽은 사람이 10에 8, 9였다? 이러한 이해할 수 없는 기록의 미스터리를 밝히기 위해 관련 기록을 찾아내고 기록내용의 사실을 바탕으로 학자들의 증언과 현지 사적을 바탕으로 풀어 가는 형식을 취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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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서(隋書)의 자치통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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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나라가 전쟁을 일으키기 전, 고구려의 영양왕이 먼저 요서지방을 공격했다. 고구려의 선제공격이 이루어진 배경을 살펴보면 중국 정세의 변화와 연결지을 수 있다. 즉 6세기 후반, 중국은 세 개의 나라로 분열돼 있었다. 그런데 북주가 북제를 정복한 뒤 새로이 수나라를 세우고 창업 8년 만에(580) 진나라까지도 멸망시켰다. 400년 만에 중국에 나타난 통일왕조, 이것은 그동안 고구려를 중심으로 동아시아의 질서에 새로운 위협을 의미한다.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자 두 나라 사이에는 당연히 세력 다툼이 벌어질 수 밖에 없었다. 새롭게 세력을 키우려는 수나라와 전통의 강국 고구려와의 사이에 긴장감이 높아갈 무렵 수나라로부터 한 장의 국서가 날아들었다. '수나라의 황제인 문제(文帝)가 고구려왕을 신하로 칭하며 수나라에 굴복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이와같은 수나라의 행동에 대해 고구려의 입장은 어땠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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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고사(단재 신채호 지음)에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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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7년은 고구려 영양왕 8년으로 수(隋)의 문제가 진을 병합하여 중국을 통일한지 17년되는 해이다. 수(隋)는 이즈음에 고구려와 자웅을 다투고자 고구려를 지극히 업신여기는 내용의 오만하기 이를데 없는 글을 보내왔다. 영양왕이 이 모욕적인 글에 크게 노하여 여러 신하들을 모아 회답의 글을 보낼 것을 의논하니 강이식이 '이같이 오만무례한 글을 붓으로 회답할 것이 아니라 칼로 회답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여 곧 개전하기를 주장하였다.
○ 전쟁의 시작(598년) 수 문제의 국서(國書)가 온 이듬해인 598년 고구려의 군대는 요하를 건너 수나라로 진격하였다. 이렇게 해서 고구려와 수나라의 16년 전쟁(1차: 598년, 2차: 612년, 3차: 613년, 4차: 614년)이 시작되었다. 고구려의 공격 목표는 요서 지역에 위치한 영주(지금의 조양)이다. 6세기 무렵 조양에는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큰 국제시장이 들어서 있었기 때문에 조양을 차지하게 되면 거대한 시장권과 교역권을 가질 수 있었고 요서를 장악하는 것이 곧 세력의 확장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조양이 위협받으면 다음 단계로 본토나 내륙이 침범 내지는 위협받을 수 있는 전략적인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조양을 차지하지 않으면 그보다 몇 배의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고 조양을 잃는다는 것은 곧바로 경계선이 안으로 후퇴하게 되는 것이다. 고구려가 영주 즉 조양을 선제공격하기 위해 동원한 병력은 고구려 정예부대가 아닌 말갈군 1만이었다. 고구려가 영주지방을 선제공격한지 석 달만에(598년 6월) 수나라 문제는 넷째아들 양과 개국공신 고경 등을 지휘관으로 30만 대군을 조직해 대대적인 고구려 원정에 나선 것이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된 지 석 달만에 수나라 군대는 열 가운데 여덟, 아홉이 죽었을 정도로 큰 패배를 안은 채 돌아가야 했던 것이다. 삼국사기나 수서(隋書)같은 역사서는 당시의 상황에 대해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장마와 전염병 그리고 태풍과 같은 자연재해 때문이라고 적고 있을 뿐 고구려와의 전쟁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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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 고·수 전쟁의 미스터리 1400년 의혹은 이렇게 풀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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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역사스페셜에서는 조선상고사를 인용, 고구려와 수나라 군대는 분명히 전투를 벌였고 강이식이란 장군이 고구려 군대를 지휘했다고 밝히면서 강이식이라는 인물이 과연 실존인물이고 고구려의 장수였다면 [조선상고사]의 내용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진주강씨 족보와 대동운부군옥 등에서 쓰여져 있는 강이식 장군의 기록과 진주강씨 후손들이 과연 강이식 장군을 알고 있는지 그리고 심양 원수림에 있는 강이식 장군의 묘비좌대 등을 확인하는 과정을 거쳤고 거북좌대가 있는 고려영자촌 원수림이라는 지명이 강이식 장군의 직책(병마원수)과도 일치하는 사실을 입증하였다. 전쟁사와 고구려 해양사환경대기과학 등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연구결과의 증언과 한국과 중국의 고대 역사기록을 탐색해 종합적으로 고·수 전쟁을 재구성하여 1400년 의혹을 이렇게 풀었다. 고구려는 400년 만에 중국에 나타난 통일왕조, 수나라의 출현은 동아시아의 새로운 질서 위협을 의미하는 것으로 장차 이들 위협에 대비해 변화하는 국제 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유비무환의 준비된 전쟁으로서 고구려는 수(隋)의 의도를 알아보려고 불과 1만의 군사로 영주지방을 공격한 뒤 곧바로 돌아왔고 수나라는 이것을 빌미로 대대적인 원정군을 보냈는데 고구려와 수나라 사이에는 많은 늪지대가 있고 지형이 험해 천연적인 장애물과 장거리를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군량을 조달하는 문제도 어려웠을 것이다. 다시말해 두 나라가 전쟁을 벌일 경우 원정군의 입장이 훨씬 불리한 것이다. 고구려는 이 같은 사실을 미리 계산에 넣고 수나라가 불리한 여건 속에서 작전에 말려들 것이라는 예상아래 철저하게 고구려의 주도로 준비된 전쟁을 치렀다. 그 결과 수나라는 1차 전쟁을 쓰라린 패배로 끝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1400년 전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을 통해 기록 이면에 숨겨져 있는 진실을 찾아보았고 그리고 이를 통해 역사 속에 잊혀져 있었던 인물 영웅 강이식 장군의 실체를 발견하고 강이식 장군이 이끌었던 전쟁이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도 밝혀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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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전쟁의 영웅 강이식 장군의 위상을 드높이고 후손으로서 자부심 가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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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년 만에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를 상대로 고구려가 완전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고구려는 누구도 감히 넘볼 수 없는 강한 국력과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변화하는 국제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함으로써 수나라의 도전을 물리친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의 명실상부한 패자로 군림한 참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런 자랑스런 역사의 한가운데에 영웅 강이식 장군이 함께 하였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제 밝혀진 시조님의 빛나는 전공을 역사적 사실에 입각, 영원히 기록으로 남기도록 우리 모두 노력해야 할 것이며 한 시대의 주역이었던 영웅의 후손으로서 강한 자부심을 지키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
자료정리: 정구 중앙종회 종무처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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