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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제 : 해병대,그들만의 세계
글쓴이 : 신동아 잡지
“국적 포기? 우린 재수, 3수하며 ‘빨간 명찰’ 달러 간다, 필승
수난과 극복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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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에서 해병대 역사를 간략하게나마 살펴보자.
해병대 창설은 1948년 10월 여수·순천 사건 진압작전에서 단시간에 적진으로 침투할 수 있는 상륙작전부대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신현준 당시 해군 중령이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에게 한 건의가 계기가 됐다. 신 중령은 초대 사령관, 김성은 당시 해군 중령(이후 제4대 해병대사령관, 제15대 국방부장관 역임)은 참모장으로 임명됐다.
하지만 그 시작은 초라했다. 1949년 4월15일 경남 진해 덕산비행장 격납고에서 해군 가운데 선발한 380명(이중 병은 가입대한 해군 신병 13기 중 지원한 300명으로, 이들이 곧 ‘해병 1기’다)으로 창설된 해병대는 변변한 무기조차 없어 옛 일본군의 99식 소총으로 무장했다. 전투복도 없어 질 낮은 국산 광목을 국방색으로 염색해 훈련복으로 썼다. 훈련방식도 일본 해군과 육전대식, 미군의 방식이 혼합된 상태였다. 게다가 강병(强兵) 양성 명목의 살인적인 단체기합과 무지막지한 ‘빠따’가 일상화돼 있었다.
이렇게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출발했음에도 창설 때부터 엄격한 군율과 위계질서를 유지한 해병대는 6·25전쟁에서 ‘귀신 잡는 해병’으로 불리게 된 한국 최초의 단독 상륙작전인 통영지구 전투를 비롯, 전 장병이 일계급 특진한 진동리지구 전투, 인천상륙작전,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해 서울 수복의 상징이 된 서울탈환작전, 산악전 사상 유례 없는 승리를 거둬 이승만 대통령에게서 ‘무적해병’ 휘호를 하사받은 도솔산지구 전투, 적의 최정예 부대를 격퇴시켜 아군의 중동부 전선 통제권 장악에 기여한 김일성·모택동 고지 전투, 중공군 1개 사단을 섬멸한 장단지구 전투 등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다’는 해병대 정신을 입증했다.
해병대는 또 1965년 10월 건군 이래 최초의 해외 원정군인 청룡부대를 파월(派越), 1972년 2월 귀국 때까지 줄곧 전장의 최선봉에 섰다. 청룡부대는 베트남 최대 항구인 캄란에 상륙한 이후 캄란지구에서 투이호아, 추라이 및 호이안지구로 북상 전진하며, 파병 6년4개월간 여단급 작전 66회, 대대급 작전 109회, 소부대 작전 15만1347회를 통해 적 사살 9619명, 포로 및 귀순 1256명, 화기 노획 4282정 등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파월병력 3만7304명 중 1076명이 전사했고, 2702명이 부상해 손실률은 10%에 이르렀다.
해병대는 6·25전쟁과 베트남전에서 가장 험난한 전투를 치러냈다. 생명의 위협에 직면한 전투현장에서 이룬 업적은 빛나는 전통으로, 명예를 존중하는 독특한 그들만의 정신으로 자리잡았다.
인·터·뷰 양수근 해병대 교육훈련단장 | |
해병대 교육훈련단(이하 교육단)은 해마다 24개 기수의 신병 1만여 명을 배출한다. 병뿐만 아니라 사관후보생, 부사관후보생 양성교육도 실시한다. 여기에 실무(기간)병력의 보수교육도 맡고 있다. 2004년에는 양성·보수 교육과정을 합해 1만5000여 명이 교육단을 거쳤다. 현 교육단장은 양수근(梁秀根·52·해사32기) 준장. 1992년과 1997년 교육단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는 그는 지난해 12월 말부터 교육단을 이끌어오고 있다. -1000기 신병 배출을 앞둔 소감은. “교육단장으로서 1000기를 맞는 감회가 깊다. 베트남전 철수 이후인 1973년부터 매월 2개 기수씩 배출했는데, 세월이 굉장히 빠르게 지나온 것 같다.” -아무래도 신세대 해병은 예전의 선임병들과 차별성을 띨 텐데…. “우선 식성부터 다르다. 김치와 생선을 싫어한다. 그래도 3∼4주쯤 버티다 고된 ‘극기주’ 훈련 때는 권하지 않아도 다 먹더라. 또 신세대 훈련병은 개인주의 성향이 짙다. 그래서 솔선수범하며 동기들과 더불어 단결심을 키울 수 있도록 교육과정에서 NQ(Network Quotient·공존지수)를 강조하고 있다.” -교육훈련과정에서 훈련병이 부상 또는 사망하는 경우는 없나. “지난해 내가 단장으로 오기 전 2명의 훈련병이 사망했다고 들었다. 주로 교육 4∼5주차 때의 행군이나 구보시 훈련병의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는데, 사고를 최소화하는 게 교육단의 책무다.” -해병대 신병 모집에 조기 합격하는 비결을 귀띔한다면. “불합격의 주원인은 고교 재학시의 결석 때문이다. 성적도 중요하지만 출결사항과 봉사활동 등 성실성을 가늠할 수 있는 부분을 중점적으로 본다. 무술 유단증이 있으면 유리하다. 체력이 달려 떨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건 입소 후 향상된다. 한 가지 숨은 비결이라면 지원율이 비교적 낮은 혹서·혹한기를 택하라는 것이다.” -교육단 시설 면에서 개선할 점은 없나. “훈련교장이 협소해 대개 제1사단의 것을 공동으로 쓴다. 양성과정 전용 훈련교장이 필요하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