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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두만강을 다녀와서,
<프로로그>
전유택군은 60년대 미국으로 유학, 박사학위취득후, 휴스턴에 정착, 30여년을 살아왔으나, 3년전 뜻한바있어, 직장을 조기은퇴하고, 연길에있는 연변과기대 교수로 강단에서서, 조선족 후학을 가르치고 있다.
유택군은 1년에 한번정도 서울에 다녀가고있으나, 너무나 오랫동안 동문들과 연락이없었기에, 여러동문들을 많이 만나지 않고, 가까운 몇몇만 만나보고 돌아가곤 했다.
금년 년초에도 서울에 다녀갔는데, 이번에는 장남(규식)의 결혼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난 2. 11(토) 청운동에 있는<새사랑교회> 에서 가진 결혼식에는, 나는물론, 한재희, 이규영, 유희형등 몇 명만 참석했는데, 유택군 은 금년8월에 꼭 연길로와서, 과기대도 방문하고, 백두산, 두만강일대를 둘러 보라고 권유한 바 있다.
이런 사연으로, 내가 주동이되어, 한재희, 이규영, 유한호, 김영규등과 의론하여,
8월10일 부터 14까지 4박5일로 연길에 가기로 결정 하고, 중국비자를 받고, 항공편도 예약을 마치었는데, 출발을 불과 10여일 남기고, 유한호군이 角膜手術을 받아,
절대 안정하라는 의사의 권유로, 아쉽게도 동행을 포기하고, 재희, 규영, 영규..그리고 나.. 네명만이 떠나게 되었다.
출발하기 며칠전에는 어덯게 알았는지, 항상 동기회총무로 고생만하는 안문희군이 나에게 전화하여, 자기의 매제인 김혁환박사가 화동동문(60회)인데, 연변과기대에서 봉사하고있다고 하면서, 가는길에 <고추장>과 남양유업의 <불가리스>요그르트를 갖다주라는 부탁아닌 명령을 받았다.
8월 10일(목) 출발항공편은 12시50분발 대한항공 6835편인데, 여유를 갖고 10시반경 인천공항 C지역과 D지역사이에서 만나기로했는데, 재희, 규영은 이미 나와있었고, 영규는 조금늦게 나타났다. 모두 초등학교 시절 소풍가는 기분으로 들떠있었다. 일찌감치 check in을 하고, 입국절차를 밟는다고하는데, 규영은 <부채>를 화장실 에 놓고왔다고 부산을 떨며 달려갔으나 애지중지하는 부채는 이미 사라졌고, 자신이 벌써부터 <건망증>을 고백하고 있다. 우리같이 늙으면 다 건망증이 오게 마련이지...뭐, 규영이만 건망증이 있나...한마디 씩하고... 출국절차를 마치고, 검색절차에 들어갔는데, 재희만은 나오지않는다...무슨일인가 하고 검색대에 돌아가보니, 재희 hand carry 짐을 X-ray 로 검색한결과 위험한 날카 로운 물건들이 많이 들어있어 검사원과 시비가걸린 것이다. 그물건들은 끝이 날카로운 가위여러개를 포함한 수술기구렸다. 누가 의사 아니랠까봐, 직업의식의 발동으로, 수술도구를 들고 다니는 모범의사 <한재희박사>가 아닌가? 하여간 검사원의 상관이 나타나, 모범의사의 설명을 듣고, 용서(?)를 받고서야 소동은 끝났으나, 재희는 여전히 씩씩대고 있다. 영규는 마나님의 엄한(?) 지시인지, 쇼핑 한다고 자리를 뜨고, 재희, 규영과 같이 간이식당에 들렸는데, 규영과 나는 커피 한잔으로 족한데, 재희는 한사코 유부국수를 주문한다. 벌써부터 食貪을 보이고 있는 재희... 나는 안문희의 준엄한 지시가 생각나, 혼자서 고추장과 요그르트를 산다고 넓고넓은 공항상점은 다 뒤지고 다녀도, 고추장은 흔하나, 요그르트는 통 찾을 수 없었다. 여기저기 물어, 겨우 요그르트파는 편의점을 찾아냈는데, <불가리스>는 팔지 않고, 서울우유의 <칸>이라는 요그르트만
팔고있었다. 그것도 감지덕지라고 겨우 사서... 바쁜 걸음을 재촉하여, 출구에 도착하니, boarding 직전. 그런 와중에도 유택에게 선물 할, 고추장, 젓갈, 김치를 샀고, 여행중 우리가 먹을 김치도 몇통 따로 사두었다.
드디어 비행기에 탑승, 35번 CDEF석에 앉았는데, 보잉 737 이라, 좌석이 복도양편 에 세줄씩있고, 비좁아 움직이기 조차 힘들다.
시간을 끌다가 1시 20분에야 드디어 이륙... 재희는 벌써부터 캠코더촬영을 개시... 재희가 <장산곳>이 보인다고 소리친다. 비행기 책자에 그려져있는 항공로에는 인천-강릉쪽으로 가서 북상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는데, < 장산곳>이 보인다고 하니, 이상한 일이아닌가? 그런데, 기내스크린에서 보여주고있는 비행항로는 분명히 인천에서 서해쪽으로 나가, 북상하고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 승무원에게 어찌하여, 지도와 실제항공로가 다른가? 언제부터 서해를 통하여 북상하는가? 전에는 강릉쪽으로가서 북상하지 않았나? 등 귀찮은 질문을 해 보았다. 전에는 동해를 통하여 북상하였는데, 북측이 동해로 미사일을 마구 쏘아 대니, 항로를 변경하여 , 서해를 통하여 북상하는 것이 아닌가 지례 짐작 했기 때문이렸다. 사실은 그렇치않고...오래전부터 서울-연길항로는 서해를 통하여, 북상하여,요동반도, 센양을 통하여 우회하고 있다는 대답을 들었다. 늦게먹는 기내식은 괜찮은 편이었고, 맥주도 한잔씩 마셨는데, 재희가 부스럭거리 더니, 가방에서 무엇을 꺼내는가했더니, 소주를 한잔씩 돌리는 것이 아닌가? 재희는 학교다닐때에는 그렇지 않은것 같은데, 언제부터 이렇게 준비성이 많은 모범생이 되었는지 모두 감탄하고 있는데, 또 부스럭 거리더니, 백두산지도, 천지 정밀지도, 백두산 관련 신문스크랩을 꺼내 돌리는것이 아닌가? 이렇게 예습 잘 하는 모범생을 보았던가?
맥주에다 소주...꾸벅꾸벅 졸다보니....착륙한다는 어나운스먼트가 들린다. 2시15분(현지시간) 연길공항에 도착한다. 재희는 또 열심히 캠코더들 돌리고 있다. 공항에서 입국심사는 한국말로 진행 되었고, 간단히 끝났다. 공항 로비로 나오니, 유택군이 운전기사(강룡철)를 데리고 마중 나와 있었다. 공항건물에는 <연길>이라고 한글로 크게쓰고 또 한자로 <延吉>이라고 씌어 있었다. 이곳 연변 조선족 자치주는 한글이 우선이고, 한자가 다음이라고 하니 말그대로 조선족자치주라는 것이 실감이나고, 외국이라는 느낌은 별로 들지 않았다. 우리가 체류하는 동안 임차하기로한 밴에 올라, 코스모호텔(Kaoshimao Hotel) 에 여장을 풀고, 즉시 연변과기대로 향하였다. 연변과기대에 와보니, 생각했던것 보다는 캠퍼스도 넓고, 건물도 많고, 시설도 훌륭했다.
과기대는 1992년 21세기 중국교육의 개방개혁정신에 따라, 최초로 중국과 외국과의 합작대학으로 설립되었으며, 인간화와 세계화를 지향하고 있다.
학교본관에 들어서니, 오른쪽벽에 등소평이 1983년 국경절에 쓴 휘호가 걸려있는데, <敎育要 面向現代化, 面向世界, 面向未來>라고 씌여있었다. 김진경총장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순전히 기금을 모금하여 설립하였는데, 건설공학부, 간호학부, 재료기계자동화공학부, 생물화공학부, 컴퓨터전자통신 공학부, 상경학부, 서양어학부, 동양어학부등 8개학부 11개학과가 개설되어있다.
학생수도 1600명, 교수만 200여명(교직원총300명)에 이르고 있는데, 교수들은 전원 무료봉사를 하고 있다. 앞에서도 잠간 이야기 했지만, 유택군이 미국에서의 윤택한생활을 마다하고, 이대학에서 후학을 가르치면서 무료봉사하고 있는것은 우리의 자랑이요, 존경받을 만한 일이다. 연변과기대 터는 그중 일부가, 공동묘지 였는데, 설립자인 김진경총장은 이 자리에 학교를 세운것이고, 화장터자리는 외관은 손대지않고, 내부만 일부개조하여, 중국당국의 묵인하에, 교직원들이 예배보는 장소로사용하고있다고 한다. 학교캠퍼스 한쪽에 자리잡고있는 유택군의 아파트에 들렸는데, 아파트의 크기도 웬만하고, 구조도 좋아, 서울의 웬만한 아파트 수준이었다. 유택군 어부인이 준비한 과일파티를 가진후, 모두 같이 저녘식사를 하기 위하여 떠났다.
도착한곳은, <三驕火鍋>라는 간판이 걸린 식당인데, 우리의 신선로와 같이 생긴큰남비를 불에올려놓고, 국물이 끓으면, 양고기, 돼지고기, 각종야채, 국수 등을 익혀먹는것이었다. 다만 큰남비는 가운데에 칸이 막혀있고, 담백한 국물과 매운국물이 나누어있어, 두가지맛을 다 즐길 수있도록 되어있었다.
양고기 火鍋는 출국전부터 재희가 강력하게 주장하여, 미리 유택에게 부탁하여 예약해두었던 것이다. 주문은 중국어에 비교적 능통한 유택어부인이 주로했는데, 재희도 body language 로 꽤나통하는것 같았다. 술은 물론 빠질수없었고, 黑土地라는 브랜드의 白酒 를 마셨는데, 값도 웬만하고 (도자기병 128유엔, 일반병 30유엔), 맛도 괜찮았다. 호텔로 돌아오니, 재희는 의자에 앉은채 벌써부터 코를 골기시작했고, 옆방에 있는 영규, 규영이는 한잔 더하자고 독촉은 심하고... 결국은 참다못해, 규영이가 친히 우리방까지와서야, 재희와 나는 영규,규영방으로 가서, 다시 한잔나누고, 방으로 돌아왔다. 재희는 금방 골아 떨어졌는데, 어찌나 코를 심하게고는지,마치 탱크 굴러가는 소리같았다. 나는 도저히 잠을 잘수없어 거의 밤을 새우다시피하고 새볔녘에 잠이들까 말까하는데, 재희는 벌써 일어나 부스럭거리기 시작하니, 나도 더 이상 침대에 누워만있을 수 없었다.
일어나 시계를보니 새벽5시...결국은 한잠 자지 못한채 하루밤을 보낸셈이다.
8월 11일(금) 오전 8시, 용정을 향해서 떠났다. 시멘트로 포장돤 4차로 준고속도로를 타고 한참이나 달리는데, 오늘은 吉日이라 풍선을 매달고, 달리는 결혼차량행렬을 여러번 만날수있었다.
海蘭江 競技場을 왼쪽으로끼고, 비포장길로 접어들면서 언덕길을 오르니, 왼쪽으로는 용주사입구라는 푯말이보이고, 계속해서 올라가니 이곳이 바로 일송정이다.
옛날 독립군들 이 이곳에 뫃여, 사격 연습도하고 군사훈련을 하던곳이라고한다.
우리가 잘아는 선구자의 노래비를 비롯, 여러개의 시비가 서있고, 일송정 그리고 그옆에는 소나무 한구루가 심어져있었다. 선구자 노래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노래이지만, 원래는 <용정의 노래>인데 선구자로 더 잘 알려져있다. 노래비에는 다음과같이 새겨져있었다.
龍井의노래(先驅者), 작사 尹海榮, 작곡 趙斗南
<一松亭 푸른솔은 늙어늙어 갔어도
한줄기 海蘭江은 千年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先驅者
지금은 어느곳에 거친꿈이 깊었나
용두레 우물가에 밤새소리 들릴 때
뜻깊은 용문교 달빛고이 비친다.
異域하늘 바라보며 활을쏘던 先驅者
지금은 어느곳에 거친꿈이 깊었나
용주사 저녘종이 琵岩山에 울릴 때
사나이 굳은마음 깊이새겨두었네
조국을 찾겠노라 盟誓하던 先驅者
지금은 어느곳에 거친꿈이 깊었나 >
또 한편에는 李泰洙가 지은 <龍井讚歌>노래비가 서있는데, 아래와같았다.
<白龍昇天 신비한 전설 용드레 우물에 무지개섰다.
그 光环 海蘭에 비끼고 琵岩에 절려 瑞旬山野를 비추니
天地正氣 人傑에 용꿈을 선사하는 天惠의땅
경스러운터 龍井 2004. 4. 20 >
또 한쪽에는 趙龍男이 쓴 <비암산 진달래>라는 시비가서있는데, 아래와같다.
<산.산 비암산 봄이오는산
봄눈녹는 길목마다 피는 진달래 꽃가지부는 바람
연분홍바람 네마음 내마음에 꽃물이드네
꽃술을 세여보자
꽃말을 읽자 세전벌 오십리에 밭갈이 노래
산.산 비암산 꽃이피는산 꽂눈트는 굽이마다
우는솔쪽새 님아 님아
오서리 오시리잇고 일송정 추녀아래 꽃꿈이 곱네
꽃잎따서 그리운 편지에접어
용정이 봄소식을 전하여주자 2004.4.20>
일송정 한쪽에는 <復元記>가 세워져있었는데, 복원하기까지의 그간의 경위를 상세히 적고 있다. < 琵岩山 一松亭은 원래 정자모양의 한그루 소나무로서 龍井八景의 하나였다.
이소나무는 日帝에의해 1938년 죽었다고 전해왔다.
용정시 人民정부에서는 한국 변경섭국장, 김재천총재, 이승래 사장의 후원으로 1991.3.12 소나무를 다시심고, 그해 9.3 정자신축공사를 준공하였다.
이후 정자확건과 보수공사에 한국 김서곤, 허정남, 김광휘, 박일남, 유호담, 김교봉, 조일형, 임종문, 이상옥, 황규흠, 조재만, 박응준 선생등이 협찬하였다.
2001. 9.3 용정시 인민정부>
일송정에는 복숭아, 자두를 아무러케나 소쿠리에 담아 팔고있는 조선족 소녀가 우리를보고, 한국말로 사달라고조른다.
유택이가 재빠르게 한웅큼 사주었다. 일송정에서 좌우를 둘러보니 경관이 아주좋은데, 북쪽으로부터 흘러내려 용정시로 관통하 는 해란강굽이가 잘보였다.
지금은 우기가 아니라, 수량이 많지않아 강이라기보다는 개울 이라는 느낌만들었지만, 수량이 많으면 장관이겠다는 생각도들었다. 이곳에 옛날 발해 유적이있으며, 왕궁이있었다는 설도 전해오고있다고 하는데, 그럴듯한 이야기인것같다.
일송정을 둘러보고, 돌층계를 내려오는데, 왁짝지껄 떠들어대며 올라오는 한떼의 젊은 남녀학생들을 만났다. 어디에서오느냐고 물었더니, 충청도 아산에있는 재동교회 신자들인 데, 목사님 인도하에 여행중이라고한다. 9시30분경 일송정을 떠나, 용정시내로 향했다. 해란강에 걸쳐있는 용문교를 지나, 시내로 들어가니 이곳이 바로 용정이다. 옛날 그 악명을 날렸던 일본영사관은 용정시청사로 변해있고, 그 바로옆에는 현대호텔이 서있었다. 용정이란 지명이 어덯게하여 유래하였는가를 알려주는 <龍井巨龍 友好公園>을 찾았다. 그곳에는 <龍井 地名 起源之井泉>, 한글로는 <용정지명기원지 우물>이라고 새겨진 큰돌비석이 세워져있고, 우물은 나무뚜겅으로 덮여져있어 안을들여다볼수는없었다.
<友好公園>기념비에는 <이公園은 1996.9.21 龍井市와 巨濟市 友好交流協定을 締結하고 그뜻을 후세에 기리기위해 曹相道市長이 주관하여 巨濟市 大宇重工業 造船海洋部門 任職員일동이 조성하였음. 용정시 인민정부,거제시 1997.9.3 준공> 라고 씌여있었다.
또한 <용정지명 기원지 우물>돌비석에는 < 이우물은 1879년부터 1880년간에 조선이민 장인석, 박인언이 발견하였다. 이민들은 우물가에 (용드레)를 새겼는데, 용정지명은 여기서부터 나왔다. 1934년 용정촌의 주민 이기섭이 발기하여 우물을 수선하고, 약 2m높이의 비석하나를 세웠는데, 그 비문을 <용정지명기원지 우물>이라고 새겼다. 1986년 용정현 인민정부에서는 <문화대혁명>에 의하여 파괴되었던 이우물을 다시파고 비석을 세웠다. 1987.2. 2. 27 용정현 인민정부> 라고 씌여있었다.
우물 주변에는 중국인들이 삼삼오오로 여기저기 뫃여, 화투판을 벌이고있었고, 한쪽에서는 서양트럼프판도 벌이고있었다. 대낮에 남녀가 어울려, 카드판을 벌이고있는 것은 진풍경 이 아닐수없다. 9시 40분경, 그곳에서 가까운 거리에있는 大成學校에 도착했다. 그 유명한 대성학교는 옛날교사는 그래도 보존되어, 기념관이 되어 있었고, 학교터는 용정중학으로 변해 있었다. 기념관 앞에는 <윤동주 기념시비>가 서있었는데, 그유명한 序詩가 새겨져있었다.
< 죽는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기념관에 들어가니, 안내원이 나와서 장황하게 대성학교의 유래, 선열들의 독립운동을 설명해주었다. 벽에걸려있는 사진은 독립운동가인 이상설, 이동휘등의 사진도 보였고, 김일성이 최헌등과같이 찍은 사진도 걸려있는데, 셋이서찍은 사진에서 김일성이 가운데 서있지않은 것을 보면, 젊은시절 무명시대의 사진인것 같다. 하기야, 김일성이 해방후 북한에 들어올 때, 나이가 불과 30초반, 쏘련군 대위계급이었으니까...
김일성 장군운운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렸다. 졸업생중에는 문익환목사 사진도 보였다. 안내원이 방명록에 싸인을 하라고해서, 모두 싸인을하고, 유택이가 대표로, 금일봉을 내놓 았는데, 모두에게 금일봉씩 강제징수(?)하려고해서 기분이 언짢았다.
기념관을 나오려니, 여러대의 대형뻐스가 잔뜩 한국관광객을 실고 도착하고있었다. 10시 15분 용정중학을 떠나, 연길로 향했다. 11시경 연변대학 바로 정문 앞에있는 < 興豆飯店>에 도착했다. 이식당은 원래, 홍콩반점자리인데, 조선족과 결혼한 한국인 이 투자하여, 식당을 오픈하고, 홍콩반점이란 식당명을 그대로 쓰려고 했으나, 원주인과 다툼이 생겨, 비슷한 발음으로 식당명을 바꾸었다고한다. 한자로는 興豆라고 쓰면서도, 한국발음으로는 흥콩이라고 씌여져있었다. 豆는 한국말로 <콩>이니..한국인의 상술도 놀랍다. 유택왈, 이곳에서 최고라는 <돼지고기 짜장면>을 한그릇씩 비우고, 어찌 술을 빠트릴까보냐.. 연변에서 생산하는 氷川맥주를 곁들이고... 웬 점심을 11시부터 하느냐고 야단들인데...유택왈, 백두산 가는길이 멀어, 조금이라도 시간을 세이브하기 위함이라니... 식당옆에있는 슈퍼에들려, 간단히 물건을 사고, 11시 45분 식당을 떠나, 드디어 백두산을 향해 출발이다.
잘 포장된길을 따라 달리다보니, 12시20분경, <長白山으로 가는길>이란 간판이 보인다. 아직도 백두산 입구까지 가려고해도 한참인데, 벌써부터 흥분이된다. 安圖, 明月湖를 지나는데, 안도는 운전기사 강룡철의 고향이라고한다. 강룡철은 조선족3세로 연변에서 해양대학을 졸업한후, 現代商船에 취직 8년간 근무 하면서 적지않은 자금을 만들어, 고향에 돌아와 1인 觀光會社를 차려, 짤잘한 수입을 올리고 있다고한다.
유택이 차속에서 우리를 둘러보면서 하는말이, < 지난3년동안 백두산에12번이나 갔는데, 갈 때 마다 천지를 보았다.이번이 13번째인데 이번에도 천지를 볼 수 있을것같다>고 큰소리치면서도, <우리일행 중에서 부정을 탄 사람이있으면 못볼 수도있다>고 슬쩍 구실 을 만들어놓는다.
백두산에 올라 천지를 보는확률은 野球일류타자가 안타를 치는확률인 3할대라고하는데, 100% 安打를 치고있으니 존경 할만하다. 유택이 계속해서 하는말이 <백두산에올라가서 天池를 보는것과 못보는것과의 차이가 얼마인지 알아? >하고 묻는다.
모두 대답을 못하고있느니까, 유택왈 <天地差異이지 뭘>.모두 즐겁게 웃었다. 백두산행은 유택으로서는 13번째이지만 우리는 초행인데, 과연 백두산에 올라 天池를 볼수있을까? 2시20분경 高城이란 곳을 지나는데, 운전기사하는 말이 이곳이 박정희 대통령이 군생활하던 곳이라고한다. 紅旗村, 東淸, 二道白河를 지나, 3시30분경 <長白山入口>라는 표지판이 나온다. 길양편으로는 美人松(또는 長白松)이란 소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찬 길로 접어든다. 이소나무는 곧바르게 높게 자라기 때문에, 經濟林으로 그만이라고한다. 도처에, <熱愛大自然 保護長白松>이라고 씐 현판이눈에띈다. 차만타면 자는버릇이있는 영규는계속자고있고, 규영은 졸고있고, 재희는 열심히 캠코더를 돌리있고, 유택과 나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있고.. 4시경 드디어, 백두산입구 주차장에 도착했다. 백두산 입장료 100유엔, 뻐스료 45유엔... 바가지 요금에는 틀림없으나, 우리보다도 소득이 훨씬 적은 중국인들로 아무말없이 돈을 내는데야... 4시45분 뻐스를 타고 드디어, 백두산을 향하여 떠났다. 5시 10분경, 장백폭포, 천지에서 제일가까운 天上溫泉觀光호텔에 도착했다. 날씨가 흐려지고있어, 당초 계획했던 백두산 정상등정, 장백폭포, 천지등정도 포기하기로했다. 백두산정상을 등정하려면, 이곳에서 다시 뻐스로 내려가, 짚차에타서 올라간다고하는데...올라가봐야 천지를 볼 수 있는 가능성 은 없고...장백폭포, 천지는 도보로 한시간정도면 오를수있으나, 벌서부터 날이 어두워 지고있으니... 호텔내에있는 유황온천에 들어가 피로를 풀기로했다. 83도C, 세계제일의 유황성분함유... 등 온천을 자랑하는 문구가 여기저기 걸려있다.
중국사람들은 워낙 과장을 좋아하니 디스카운트해야겠지만, 온천은 그런대로 할만했다. 저녘은 어디서하나? 의견이 분분하다. 그럴듯한 식당까지 가려면..걸어서 20-30분내려 가야하는데...갈때는 좋으나, 한잔하고 돌아올때가 문제렸다. 결론, 호텔에서 5분거리에있는 허름하게보이는 식당으로 정했다. 메뉴는 山川漁.... 天池에서 잡히는 山川漁를 안주삼아 술을 나누게되다니... 산천어 매운탕을 끓이고... 白酒를 마시다가, 역시 재희가 서울에서부터 숨겨가져온 燒酒로 끝을 맺었다. 주인아줌마는 조선족인데, 출신은 경상도, 경상도말로 구수한 이야기를 잘 늘어놓았고, 장사수완이 대단한사람이다. 이런 음식점을 여러곳에 가지고있고, 음식점 이외에도 기념품, 토산품가게도 갖고 있다. 식사를 끝내니, 주인아줌마는 옆건물로 안내해서 여러 가지 상품을 보여주었으나, 구경만했다. 그런데, 오늘밤은 누구하고 同宿할지? 2人1室이고 보니, 슬그머니 걱정이된다. 아침부터, 내가 어제밤 재희가 하도 코를 골아 한잠도자지 못했다고 실토를 했더니, 규영, 영규는 킬킬대고 웃으면서, <재희 코고는 것은 유명한 것인데, 아직도 몰랐니? > 하는 것이었다. 오늘은 무언가 조치가 있기를 기대하고 있는데... 결국, 규영이가 재희와 동숙하고, 나는 영규와, 유택이는 운전기사와 같이... 내일아침 새녘5시에 장백폭포를 지나 천지로 가기로하고 잠을 청했다. 영규는 코도 골지않고, 아기가 잠자듯 새근새근소리만 내었다.
8월12일(토) 새벽3시반 누군가 이방저방 두둘기면서 떠들어대는바람에 잠을깨었다.물론 한국사람이었 고, 아마 대장이 일행을 깨우고있는 것이다. 아마, 새벽에 천지에올라, 日出壯觀을 보려는 참인것같다. 일단 눈을뜨고보니...잠도오지않아 침대에 그대로 누워있는데.... 5시...재희가 요란하게 문을 두드리며 깨운다. 5시15분, 우리모두는 호텔을 출발, 장백폭포를 향했다. 5시30분경 폭포입구에 도착하니, 이곳도 입장료를 또 요구한다. 40유엔씩...200유엔을 지불했다. 중국사람들, 정말 돈좋아 하는것같다. 폭포입구에 세워져있는 안내문을 읽어보니, 우리가 어제밤 묵은호텔과 장백폭포에 오르는 계단(낙석을막기위하여 철근으로 지붕까지씌운 터널)은 한중합작 으로 만든것이었다. 안내문을 읽어보니, < 길림 장백산국가급 자연보호국 삼림여유공사, 와 한국관광집단 동아항공화물주식회사간의 합작으로, 미화 699만불을 투자, 천상온천호텔은 1996.6-1999. 9간 공사를했고, 등산계단은 1994.6-1996. 6간 1단계 공사, 2001.6-2003.7간 2단계공사를 하였으며, 계약기간은 2003.12.24-2038.10.5 간 35년간으로 한다>는 내용이었다.
가벼운마음으로 층계를 하나하나 올라가는데, 처음에는 계단경사가 그런대로 완만하여 오를만하더니, 중간에 몇군데는 경사가 너무 급하여, 올라가지가 힘도들지만 한번 실족하면, 그야말로 끝장이라는 생각도들었다. 옆 난간을 불잡으면서 엉금엉금 기어올랐다면 정확한 표현이겠다. 5시 55분경, 폭포바로옆에 있는 중간 휴식처에 도착, 아무리 기다려도, 재희, 규영, 유택은 올라오지않는다. 영규는 날쎈돌이 처럼 벌써 사라진지 한참이고... 할 수없이 온자 계단을 계속오르니, 6시15분 장백폭포를 지나면서, 넓고 평편한 들판이 나온다. 한쪽으로는 천지에서 흘러내려, 장백폭포로 떨어지는 물이 기운차게 흐르고있고, 앞에 영규가 혼자서 걸어가고있었다. 나는 영규를 불러, 같이 가는데, 길에는 등산객들이 쌓아놓은 돌탑이 즐비하고, 웬일인지 하늘에는 까마귀 떼가 새까맣게 맴돌고 있다. 산쪽에는 <禁止登山 後果自負>라는경고문이 세워져있고...천지에서 백두산정상으로 올라가다가 변을 당한사람이 많아 경고를 하는것이렸다. 6시35분 영규와 나는 드디어 천지에 도착했다. 1시간 20분이 걸린셈이다. 한참이나 기다리고있으려니, 재희,규영,유택이가나타났다. 영규왈...<재희는 캠코더로 사진찍 는 다는 핑계로, 쉬면서 올라오는것이고...규영과 유택은 행여나해서 호위병노릇하는것>이고, 하여간 우리 다섯은 드디어 천지에 도착했다.
천지를 처음보는 순간의 감동을 어찌 내가 글로써 표현할수있을까? 그저 찡하는 느낌이 내 가슴 깊은곳으로부터 솟아 오르고있을뿐이다.내앞에 펼쳐저있는 천지,
바로 이天池를넘어, 남쪽으로 우리조국 한반도 삼천리가 쭉뻗어내려있지않은가?
오늘은 비록, 중국땅을 빌렸지 만 우리민족의 발상지인 천지에올라 우리민족의 성지인 백두산을 바라보고 있지않은가?
기록을 보면, 천지의 남북길이는 4.81km, 동서는 3.35km, 수면넓이는 2.194m2, 둘레 14.4km 최고봉과는555.6m 의 표고차이, 물깊이는 평균 204m, 천지를 둘러싸고있는 거봉은 2600m가 넘는 것만 16개, 최고봉은 장군봉(백두봉 2.744m), 불행중 다행이랄까 북한쪽에 위치해있고, 중국쪽최고봉은 백운봉(2.691m)라고한다. 우리들은 감동의 순간, 순간을 즐기면서, 항상 준비성이 많은 재희가 무거운배낭을 짊어 지고 가져온, 白酒로 頂上酒를 마시면서, 목우촌 햄, 빵을 곁들여 아침식사로 대신했다. 유택이가 지니고 다니는 온도계를 보니, 15도C 제법 쌀쌀하다. 모두들 천지물을 한움큼씩 마셔본다. 물맛이 그만이다. 규영이는 기회만있으면 담배한대.. 규영이는 천지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7시35분 드디어 한떼의 관광객이 시끌버끌하면서 올라온다. 약 한시간남짓, 우리다섯명 만이 天池를 점령하여, 傳貰낸기분이었는데, 이제 하산하기로했다. 여기서 백두산, 천지에관한 역사적 기록을 한번 훓어보기로하자. 최근, 박지향, 김철, 김일영, 이영훈교수등이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이란 방대한 책을 내어 장안의 화제이다. 우리가 주지하다시피, 1980년대에 출간된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민족지상주의, 민중혁명필연론등 좌파적시각에서 현대사를 해석했고, 많은 젊은이들은 이책을 우리의 正史로 인식하게되었다. 물론 그동안 여러학자들이 좌파적현대사해석에 많은 오류가있음을 지적해왔지만, 앞에서 말씀드린 몇분의 역사학자들이 2004년부터 책임감을 가지고, 좌파적시각을 비판하고, 균형된시각으로본 현대사를 본격적으로 집필하기로 결정하여, 발간된 것이 바로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1,2권이다.
나는 평소 역사에관심이 많으므로, 금년2월이책이 발간되자마자 사서 읽어보았다. 그런데, 책을 펼치자마자, 서울대 이영훈교수가 쓴글은 <백두산이야기>부터 시작된다. 내가 지금 백두산이야기를 쓰고있으니만큼, 이교수의 글을 잠간 소개해주고싶을뿐이다. 이교수연구에의하면, 조선조5백년동안 백두산에올라, 글을 남긴사람이 도합7명밖에않된 다고한다. 그
중 최고의 지식인은 1776년 이조판서와 대제학을지낸 徐命應이란 분이 趙曮(조엄)과같이 백두산에 올랐다. 서명응은, 조엄에게 <아직 이하늘아래, 큰연못의 이름이없는 것은 우리로하여금 이름을 짓게하고서함이 아닌가? 이제 백두산은 우리나라에 속하지도아니하고, 저들의 나라에 속하지도아니하니, 우리와같은 세상의 호사가들이 여기에 발길이 미치는 것은 천백년이 지나도록 한두명뿐이요. 만약 우리들이 지금 이름을 짓지 아니하면, 이산이 끝내 이름이 없을터일세.> 그리하여 붙인 이름이 太一澤이었다. 太는 태극을, 一은 天一을 의미했다. 天地人은 결국하나, 서명응은 성리학의 근본원리를 빌려, 백두산정상의 큰못의 이름을 지었다. 서명응보다 10년앞서, 함경도 경성의 선비 인 朴琮이 백두산에 올랐는데, 그는 < 백두산의 웅장한 기세는 중국의 五嶽을 능가하는 수준이다. 곤륜산 아래로는 중국의산천이라도 백두산에 미치지못한다. 이로써 백두산이 곤륜산의 嫡長子가되고, 오악은 단지 그 庶子가 될뿐이다.> 이교수는 박종의 생각은 우리나라를 小中華라고 여기는 역사관의 산물로 보고 있다. 1885년 土門勘界使로 백두산에 올라, 청국관리들과 國境을 다투었던 李重夏도 글을 남겼 는데 그도 小中華思想에 젖어있었다. 오늘날, 단군을 국조로하고, 백두산이 민족의성지로 바뀐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였다. 1927년 崔南善은 백두산에 올라 <白頭山覲參記>를 썼는데, <백두산은 우리 種姓의 근본이시며, 우리문화의 연원이시며, 우리국토의 초석이시며, 우리역사의 胞胎이시며, 이미 생명의 양분이다> <백두산은 자애로운 어머니의 품속이다. 삼계에 헤매는 외로운 비렁뱅이 아이가 산을넘고 물을건너 자애로운어머니의 온화한 얼굴을 한번뵈옵기 위해 백두산을 찾았다. 또한 백두산은 아버지다. 천지를 바라보며, 절규한다.
한하버지! 한아버지! 저올시다. 아무것도 없는 저올시다. 우리민족은 다시살아 날 것이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압시사 압시사 백두산천왕 천지대신>이라고 썼다.
최남선이 백두산에 부여한 어머니와 아버지로서의 생명력과 권위는 오늘날까지 남한,북한 공히 민족신화로 발전하거나 국가상징으로 공식화되었다. 일제가 패망한후, 최남선은 반민족행위자로로 재판을받았지만, 민족의정기가 백두산처럼 우뚝솟기를 바라마지않던 그의 간절한 기도만큼은 헛되지않은듯하다고 이교수는 평하고 있다. 이교수는 이어, 백두산 신화가 완성되는 시기는, 남북한공히 1987년경으로 보고 있다. 북한에서는 백두산을 김일성,김정일 이야기로 만들었고, 남한에서는 高銀이 長篇敍事詩 <白頭山>을 발표, <백두산은 우주요, 삼라만상의 정수리요, 온 동아시아요, 조선의 근본 이었다.> 고은은 백두산은 그것을 정수리로하는 조선의국토는 하나의 생명이요 신체였다.
<한번비트니 여기가 팔이요, 저리 비트니, 저기가 궁둥이다. 이모두 큰산 한자락 치맛자락 이로구나. 누가 모르랴 백두산 한골짜기 마을, 마을이여,,,, 바다 건너 한점 울릉도 성인봉 까지두었구나. 남으로 남으로 물건너 한라산 두었구나>
그는 2005 독도를 찾아, 독도를 <내조상의 담낭>이라했다. 최남선이 제창한 <정신적백두산>은 오늘날 이같은 수준의 <국토신체론>으로 발전해있다고 이교수는 쓰고 있다. 7시35분 하산을 시작했는데, 웬걸 재희가 앞장을 서더니 <똥차가 기아가 풀렸어> 한마디 하고 쏜살같이 내려간다.
물론 내려가는 길은 올라오는길보다 쉬운 것은 당연, 거의 다내려오는길에, 온천물에 계란, 옥수수를 삶아파는 가게에들려, 하나씩 먹어본다. 이곳에서는 한국돈도 받는데, 계란3개에 천원... 9시 경, 호텔에 도착, 급히 짐을 꾸려 9.15분 호텔문을 나섰다. 뻐스를 타고 10분쯤내려가, 백두산정상으로 가는 Jeep를 타는 정류장에가서 줄을 섰는데, 10시20분 무려 한시간이나 기다려서야 우리차례가왔다.
Jeep를 타는데에도 20유엔씩 돈을 냈다. 중국사람들 정말, 돈벌이를 잘하고있다. 워낙 기다리는사람도많았지만 중국사람들의 무질서도 한몫을했다. Jeep 는 일제 6인승 Pajero인데, 운전기사의 난폭운전으로 아찔하기만한데, 20분만에 백두산정상에 차를 대었다. 우리가 오른곳은 천문봉인데 2.670미터다. 정상 주차장에 도착해보니, 도처에 수많은 중국해방군이 왔다갔다 하고있었다. 알고보니, 해방군이 아니라, 관광객들이 군용오버코트를 입고있는것이었다. 그곳은 날씨가 제법쌀쌀한데, 미쳐 두터운옷을 준비하지않고 올라온 관광객 들에게,중국해방군들이 군용트럭을 세워놓고, 돈을 받고 군용오버코트를 빌려 주고있지않은가? 하여간 중국사람들은 군인도 돈을 좋아하는데에는 예외가 아니었다.
천문봉에서 천지를 내려다보니, 천지는 보일 듯 말 듯, 안개, 구름이 오락가락 하고 바람이 세차게분다. 결국 백두산에 올랐으나, 천지는 본것인지 못본것인지, 그래도 일부분은 본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하산 할 수밖에없었다.
정상에서는 일단의 한국인들이 찬송가를 불러대는 모습도 볼수있었다.
천문봉정상에는 당시 실권자 등소평이 다녀갔다는 기념비가서있는데, <天池 등소평 1983년 夏>라고 씌여있었다. 그만큼 중국정부는 백두산을 중요시한다는 증거임에는 틀림없다. 12시경, Jeep를 타고, 다시한번 난폭운전에 우리운명을 맡기는수 밖에없었다. 하산길 운전은 난폭을 넘어, 곡예운전이라 아예 눈을딱감고 있는편이 낳을것같다. 이란상황에서도 영규는 잠을 잤다고하니... 다시 뻐스에 옮겨타고내려와, 우리가 전세낸 밴으로 옮겨타고, 어제 우리가 출발한 장백산입구까지 내려왔다. 12시45분, 겉보기에는 괜찮아보이는 중국식당에 들어갔다. 몇가지 중국음식을 시키고, 중국브랜드로는 꽤 유명한 칭따오맥주를 시켰으나 미지근한것밖에없으니, 한잔으로 그쳤다. 식사를 하면서, 천지를 볼수없었던 것이 누구의 책임이냐? 누가 부정을 탄사람이냐? 로 옥신각신하면서 서로 책임을 전가하기만했는데, 중론은 마음좋은 <누구>를 억지로 지목하는데 성공했지만, 이름은 생략하는 것이 좋겠다.
1시55분, 식당을 출발하여, 이제부터 중국과 북한국경을 따라 흐르고있는 두만강일대를 찾아나섰다. 3시경, 밴이 멈추었는데, 그곳에는 두만강 발원지(중.조선국경)이란 푯말이 서있었다. 두만강 발원지는 말이 강이지, 훌쩍 건너뛸 수 있는 시내물에 불과했다. 차속에서는 유택이가 백두산이 최근 화산폭발한 것은 1702년이고, 300년주기 대폭발설이 있다는등, 백두산이 사화산이 아니고, 휴화산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래 나는 <고교시절, 나는 지리반이었는데, 이영택선생이 가르치기를 한반도에는 화산활동이 없고, 역사기록상 제일최근에 있었던 화산폭발은, 고려 광종때, 제주도 앞바다에 화산이폭발하여 섬이생겨났는데, 그섬이 바로 飛揚島다>라고 유식한 유권해석을 내리고있었다. 귀국해서, 인터넷에 접촉하여, 백두산화산폭발에 관하여 알아보니, 유택이가 한말이 정확하 고, 내가 내린 유권해석은 틀린것이었다.
자고로 아는체 하다가는 망신당하기 마련인것같다. 조선왕조실록은, 1668년(현종), 1702년(숙종)에 백두산 화산활동이있었다고 기록하고있고, 중국기록에는 1903년 화산활동이 있었다는 기록도있는 것을 보니, 백두산은 휴화산인지도 모르겠다. 중국화산학자들은 2000-2050사이에 대폭발 가능성을 제기하고있다고 한다. 지금 우리는 두만강을 따라 중국측이 개설해놓은 군사도로를 달리고 있다. 비포장이지만 잘 정비된 도로다. 강룡철기사에 의하면, 이길은 일반인에게 잘 알려져 있지않고, 중국군 의 검문, 검색도 받을 경우가 있다고한다. 차는 제법 속도를 내어 달리고있는데, 두만강 숲속에 북한군병사 몇명이 나타난것이 보였다. 내가 북한군이 나타났다고 소리쳤는데, 차는 벌써 백여미터 굴러갔고, 북한군을 본사람은 나밖에 없으니, 모두 믿으려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모두 확인하러 가자고해서, 강기사는 차를 돌리지않고, 백기아를 넣고, 백여미터 후진했더니, 과연, 두만강기슭 숲에는 북한군3명이 서있었고, 우리를 발견하고는 담배피우는 시늉, 무엇을 먹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10대로 보이는 순진한 젊은 아이들로 보였고, 총은 메고있으나, 경계심은 전혀없는 것같이 보였다. 아마 지나가는 관광객들로부터 담배나 과자같은 것을 가끔 얻는데 익숙한것같다. 담배를 갖고 다니는 사람은 규영뿐인데, 담배는 규영가방에 들어있고, 담배를 꺼내려면 밴뒷문을 열고, 가방을 열어야되고, 또 담배를 건네주려면, 도로에서 강기슭로 내려 가야하는것도 문제다. 저들이 순진하고 어려보이나, 세상일은 알 수없는일, 손만 흔들고 가기로했다. 우리가 손을 흔드니까, 그들도 따라서 손을 흔들었다. 그 자리를 떠나오면서, 모두들 <담배를 주고올껄>하고 아쉬움을 이야기 하고있었다. 3시45분, 드디어 중국군초소가 나타났다. 강기사는 차에서 내려, 자동차등록증을 보여주고, 차량번호를 기록한후 통과허가를 받았다. 강기사는 이곳은 군사작전지역 이므로, 차량번호를 반드시 기록해야 한다고한다. 초소옆에있는 막사에는 중국군이 많이 보였다. 중국병사 한명이와서, 강기사에게 무어라고 하는데, 한국담배가 줄 수없느냐 는 이야기란다. 규영이가 차에서 내려, 담배한갑을 중국병사에게 선물했다. 매우 고마워 하는것 같았다. 또 중국병사가 다가와서 우리차의 행선지를 물어보곤, 자기도 그곳까지 태워달라는 부탁이다. 강기사가 우리 의견을 물어보길래, 동승 해도 좋다고했다. 조금있다가 그병사가 다시오더니, 같이가기로 한 동료병사가 아직 오지않아 혼자 떠날 수 없다고해서, 중국병사 동승건은 없는것이되었다. 중
국초소 가까운곳에, <釣魚臺>라는 곳이있었다. 김일성의 낚시터로 알려져있는데, 내려가 보니, 폭이 별로 넓지않은 두만강에 나무로 만든 다리가 걸쳐있고, 북측 강가에 커다란 바위가 놓여있었다. 바로 그바위위에서 김일성이 낚시를 즐겼다고한다. 다리의 중간은 부서져있어, 다리로 건널수는 없는형편이었다. 북쪽에는 인기척도 전혀없었다. 다리밑으로 내려가보니, 맑고 푸른 두만강물이 흐르고있었다. 손을 담가보기도하고, 한웅쿰 물도 마셔보았다.
우리는 廣坪을 지나고있는데, 북한마을이 잘보인다. 그곳마을 이름은 <무봉>이라고 하는데, 농부가 소를끌고가는 풍경이며, 사람들이 논,밭에서 일하는풍경이 잘보인다. 벼, 옥수수 농사도 잘 된것같다. 하여간 평화로운 농촌풍경이다. 그런데, 마을 뒷산은 벌거숭이였다. 나무를 베에, 목재로 중국에 수출한다고한다. 우리는 南平鎭근처에 다달었는데, 두만강건너편 마을이 茂山이라고한다. 언덕위에 올라, 무산쪽을 바라다보니, <당의 령도체계를 철저히 세우자!> <21세기 태양, 김정일장군 만세!> 라고 쓴 탑이 보인다. 탑은 모두 북쪽에서 잘보이도록 세웨놓았는데, 중국사람들은 이런탑을 보고 무엇을 느낄것인가? <21세기 태양>이, 자기주민 밥도제대로 못먹여, 아사자가 속출하고, 탈북자가 줄을 잇고있고 , 전기가 부족하여 불빛없는 깜깜한 밤을 보내게하 고 있지않은가? 또 <청진 44km> 라고쓴 이정표도 보인다. 강가에 내려가보니, 한글로 <국경지대에서 밀매, 환불을 금지한다> <비법적 월경을 엄금>등의 경고판이서있다. 아마, 이지역에서 밀매, 환불이 많고, 불법입국도 많은가보다. 우리는 南坪, 和龍를 지났는데, 光復軍이 일본군을 맞아승리한 유명한靑山里가 가깝다고하나 시간이없어 지나치기로했다. 우리는 三合鎭까지 가서, 두만강 건너편 會寧도 멀리서나마 바라본후, 延吉로 돌아왔다. 두만강 기슭을따라, 돌아오는길에 해프닝이 벌어졌느데, 우리가 강기슭에서서 북한쪽을 보고있노라니, 택시한대가 쏜쌀같이 우리를 스쳐지나 간다. 얼마후 우리도 차를타고 출발했는데, 길가에서 어떤 젊은여인이 우리가오는쪽 을 향하여, 정면으로 엉덩이를 다들어내놓고, 소피를 보고있는것이아닌가? 바로 우리를 스쳐지나간 운전기사렸다. 택시는 길가에 세워놓은채.... 아마 그여기사는 상당히 속도를 내고왔으니, 이산골짜기에서 나타날사람도없을터이고, 우리가 그렇게빨리 따라올지는 상상조차 못한것같다. 우리차도 속도를 내고있어, 현장을 순간적으로 스쳐갔지만, 기억에 남을 좋은구경을 한셈이다.
우리모두가 <와> 소리치며 즐거워하는데, 규영이만 무슨 일이일어났는지 모르고
있다. 우리 설명을 듣고나서야, 조금전 해프닝을 목격하지 못한 자신을 탓하기만하고 있다. 차를 타기만하면 잠을 자는 영규도 목격을 했다고하니 참으로 이상한일이다. 차 조수석에 앉아서, 캠코더를 손에서 놓지않았던 재희도 그순간을 감상만했을뿐, 촬영에는 실패한것 같다. 하여간 돌아오면서, 모두 즐거워했다. 8시20분이 되서야, 코스모호텔에 돌아왔다. 저녘식사는 인근에있는 한국식당 丁饗館(정향관)에서 빈대떡, 닭고기, 칼국수등 순 한식으로했다. 물론, 白酒는 빠지지않았고.... 오늘밤은 누가 재희와 room을 share 할것인가?
8월 13일(일) 오전 8시 호텔을 출발, 서쪽으로 달려, 9시 10분 도문(圖們)에 도착하였다. 도문은 북한과 접경도시로, 두만강을 사이에두고, 북한쪽은 南陽이다. 두만강에 도문대교가 걸쳐있는데, 다리중간부분에 邊界線이라고 한자와 한글로 적혀있다. 이선이 바로, 중국과 북한의 국경선이라고한다.
바로 변계선에 중국군 병사가 한명서있으면서, 관광객이 이선을 넘지않도록 주의를 주곤하지만, 사진찍으려고 한발짝정도 들어가는것은 묵인하는듯했다. 우리도 변계선을 한발짝씩 넘어가 사진 한 장씩 찍었다. 어쨌든 북한땅에 들어갔다온셈이다. 북한군은 다리위에는 물론, 강건너편 마을에도 인적이 전혀없다. 그다리에는 1941년 11월 준공, 圖們大橋 라고 씌여있었다. 도문대교 옆에는 중국과 북한국기를 새겨넣은, 中.朝友誼塔도 서있고, 展望臺도 있다. 전망대에는 <登國門 覽異國 風情, 국문에올라 이국풍치를 구경하라>고 한자와 한글로 씌여있다. 1991년 江澤民이 다녀갔다는 기록도 씌여있다. 전망대에올라, 북한쪽 南陽을 바라보니, 비교적 큰마을이기는 하나, 유령도시처럼 조용하기만하다.
10시경, 도문을 떠나, 두만강을 따라 서쪽으로 얼마가니, 두만강 건너 穩城이 보였다. 유택이가 보통관광객은 알지못해 가보지못하는 <끊어진다리>를 보러가자고한다. 큰길에서 벋어나, 사람키만큼 크게자란 쑥이 가득한 좁은길을 따라 한참들어가보니, 두만강에 걸쳐있는 큰다리가 나타났다. 가까히 가보니, 穩城大橋, 昭和12년 12월5일 준공이라고 씌여있다. 옆에 중국어 로 씌여진 안내판에의하면, 온성대교는 일본군이 1936년 인근주민을 강제동원하여 준공하였으며, 1937년 중국대륙 침략시에 이교량을 통하여 진입하였고, 1945. 8. 10 쏘련군이 대거 만주로 진입하자, 쏘련군의 진입을 막기위하여 일본군이 철수하면서, 8. 12 폭파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교량길이는 478미터, 넒이 6.5미터, 높이 7미터, 18톤의 무게를 지탱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다리 중간 폭파된지점까지 가보니, 지금기준으로 보아도 대단한 교량이다. 철근 콩크리트 다리가 아니라, 철제빔으로 교각을 만든 튼튼한 다리인 것이다. 우리는 역사에서 배운, 일본의 중국침략의 현장에 와있는 것이다. 유택이는, <끊어진 다리>가 또 하나있는데, 오늘 최종목적지인 防川까지 갔다가 돌아오는길에 들리자고했다.
12시경 琿春에 도착, 홍콩반점에 들려 점심을 하고, 두만강 기슭을따라 서쪽으로 달린다. 두만강건너, 멀리 북한쪽으로 그 惡名높은 阿吾地가 보인다. 아직도 석탄을 많이 캐내는지 석탄이 산같이 쌓인 것이 많이보인다. 2시20분, 오늘의 목적지인 防川에 도착했다. 방천은 중국땅의 동쪽끝이며, 중국, 북한, 러시아 3국의 국경선이 맞닿아있는곳이다. 중국정부는 이곳을 풍치지구로 지정,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다. 방천에는 望海閣이란 전망대가있어, 위에오르면, 두만강 하류를 경계로한 러시아, 북한땅을 바라볼수있으며, 북한과 러시아를 연결하는 철교도 보인다.
안내판에는 다음과같이 씌여있다. <망해각은 한눈에 삼국을 바라볼 수 있는 주체건물로서 1993년에 건설되었으며 건축면적은 400평방미터에 달한다. 전임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며 중앙군사위 부주석인 류화청동지가 친필로 이건축에 망해각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망해각3층에 올라서면 인접한 로씨아빈해변강구 하쌍진과 조선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두만강시의 풍경을 만끽할 수 있다. 조로철로대교는 1950년 기공하여 1952년에 준공되었는데, 도로와 철로 두가지로 통할 수 있다. 다리의 높이는 11미터, 넓이는 8미터, 길이는 560미터이고, 년간 화물수송량은 450만톤이다. 대교에서 3개의 높은틀은 로씨아측에서 건설하고, 5개의 낮은틀은 조선측에서 건설하였는데, 조선과 로씨아를 통하는 유일한 육로통로 이다> 또 <한눈에 3국을 바라보기>관광지 소개 안내문이 서있는데, 다음과같다. <방천 국가급 풍경명승구내에 자리잡고있는 한눈에3국을 바라보기 관광지는 시구역과 62키로미터 떨어져있으며, 동남은 로씨아와 잇닿아있고, 서남은 두만강 을 사이에두고, 조선과 마주하고 있다. 망해각은 본관광지의 주요건물인데, 망해각에올라서면 로씨아의 하쌍진과 조선의 두만강시를 굽어볼수있다하여 <닭의울음소리3국에 들리고, 개짖는소리3강을 깨우며, 꽃향기가 사방에 풍기고, 웃음소리, 이웃나라에 전해지는곳>으로 세계에 널리 알려지고 있다.
방천촌 으로부터 두만강을 따라 15키로미터 내려가면 일본해에 들어서는데, 이는 우리나라에서 직접일본해에로 진입하는 유일한 통로이기도하고, 또한 우리나라 에서 수로로 로씨아, 조선동해안, 일본서해안, 나아가서 북아메리카, 북구라파 에 이르는 가장가까운 곳이기도하다> 이 안내판에는 東海를 日本海로 표기하고있는데, 東海로 바꾸도록 노력하고저 한다. 이곳에도 어김없이 <守東北前哨 揚中華國威 1991 江澤民>라는 휘호가 새겨져 있다. 우리가 내려다보고있는 두만강하류, 이곳 어디쯤엔가, 420여년전, 충무공 李舜臣將軍이 지켰던鹿屯島가 있을터인데하는 생각이들었다.
귀국해서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니, 서울대 이기석교수가 연구팀을 이끌고, 녹둔도에 5차례 답사한바있는데, 두만강의 잦은 범람으로 녹둔도는 연해주에 연육되고, 현재는 러시아땅으로 편입되었다고한다. 녹둔도의 크기는 잘알수 없으나, 이교수는 32km2 로 추정하고 있다. 지금의 중국과 러시아국경선은 1858년 아이훈조약, 1860 베이징조약으로 확정된것이지만, 아직도 분쟁의 여지가 많이 남아있다.
앞에 안내판에서 설명했듯이, 중국이 15km를 지키지못하여, 동해로 나가는 수로를 차단당한것이니 중국측으로서는 안타까운일이아닐수없다. 또한 두만강일대의 북한.중국, 북한.러시아 국경선은 구한말, 우리가 외교권을 상실한상황에서, 일본과淸간의 야합, 러시아와 淸간의 타협으로 정해진것이며, 녹둔도는 물론, 간도도 먼훗날 남북통일이되면 영토교섭의 대상이되어야할 것이다.
돌아오는길에 방천에서 가까운곳에 <聯合國 世界公園>이라는 돌 비석이 세워져있는데, 한글로, 유엔세계공원, 영어와 러시아어는UN World Peace Center, 빠르크 미라 우엔, 1999.4.22 이라고 씌여있었다. 이곳에, 무슨 연유로 이런비석을 세웠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3시 30분경, 圈河라는 곳에 들렸는데, 그곳에는 安重根義士가 1909. 10.26 하르빈역에서 <이또 히로부미>를 저격하기전, 1908.4-6월간 6차례, 1909.9 한차례, 10여명의 동지들과 은거하면서 의거를 계획했던 고택이 남아있었다. 이고택은 초가집 단칸집으로, 북한에서 흔히볼 수 있는 북방식집인데, 부엌은 비교적넓어, 주방, 난방시설, 창고를 겸하는 용도인것같고, 단칸방은 온돌방인데, 안중근의사와 관련한 오래된사진이 몇개걸려있었다. 옆에 비치된 방명록에 모두들 서명하고, 관리인에게 금일봉을 내놓았다. 나는 일찌기 남산에있는 안중근의사 기념관에는 가본적있으나, 중국땅에와서 안중근의사의 혼이 머문곳에 잠시나마 들려보면서 새로운 감회에 젖어본다.
유택이가 연길로 돌아가는 길에, 앞에서 이야기한 <끊어진 다리>를 가보자고 했다. 숲속을 헤처가면서 좁을길을 따라, 겨우 찾아냈는데, 강기사는 이다리는 솔만자교(甩灣子橋)라고 말해 주었다. <온성대교>보다는 약간 작은 다리이지만, 매우 규모가큰 다리였으며, 일본군이 만주침략을 위하여 건설한 다리임에는 틀림없는것같다.
끊어진 곳에 가보려고, 유택과 규영이가 앞장서고, 우리도 뒤따르려고하니 다리옆에 높히 세워져있는 감시카메라가 도는가싶더니, 중국어로 경고방송이 요란하게들린다. 강기사말이, 다리위에있는 사람들은 즉시 중국쪽으로 돌아오라는 경고방송이라고한다. 우리는 황급히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저녘7시가 넘어서야 연길로 돌아와, 유택어부인을 합석시켜, 코스모호텔 내에있는 식당에서 중국식단으로 저녘식사를 나누었다. 白酒몇병을 비우면서, 그동안 못다한 武勇談을 나누면서 이야기는 끝이없었다. 나와 규영이가 방으로 돌아와있으니, 영규가 찾아와서 하는말이, 어제밤에는 한잠 도 자지못하였다고하면서, 재희와 別居를 선언하는 것이 아닌가? 어제밤 재희가 얼마나 코를 골았으면, 떠나기 전날 別居를 이야기하겠는가? 모두 영규말을 들어 주기로해서, 오늘밤은 영규와 재희는 獨守空房신세가 되었다. 그래도 慰勞한다는 핑계로, 모두들 재희방으로 가서 또 한잔하고나서야 헤어졌다.
8월14일(월) 오늘은 귀국하는 날이다. 4박5일이 긴가싶더니 이렇게나 짧던가하는생각만든다. 유택어부인이 정성껏 준비한 한보따리씩 선물도 챙겼겠다. 그비싸고 귀한 자연송이가 한box요, 말린버섯 그리고 용도를 잘알 수 없는 비단주머니(?) 가 들어있었다. 공항가는길에 Kocemo(考世茂)호텔에 들려, 커피한잔씩 나누고, 공항으로 향하였다. 공항은 복잡, 무질서 그자체인데... 강기사왈, 중국은 이런 무질서속에서도 질서가 있다고 한다. 승객이 많은 것이 아니라, 환송객이 더많다 는 설명도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런대로 우리차례가되어, 대한항공 6836편에 탑승을했고, 12시 10분 이륙, 3.15 인천공항에 안착하였다.
<에필로그>
8월14일 귀국해서 신문을 보니, 8월13일 중국당북이 백두산을 등정하는 한국 관광객들의 소지품을 철저하게 검색하여 물의를 일으켰다는 기사가났다. 우리가 바로 8월12일 백두산등정을 하고 하산하였으니, 하루만 늦었서도 우리도 당할 뻔 했다.
유택이는 미국으로 가는길에 8.17-20간 서울에 들리는 기회가있어, 8월18일 재희,영규, 나, 그리고 이번여행을 miss한 유한호가 join하여(규영이는 병원일로 부득이 불참) 여의도에 있는 음식점에서 만날 기회가있었다. 유택이는 가을학기부터 California Baptist Univ.에서 한학기 강의를 하고, 내년 2월 연변으로 돌아갈계획이다.
유택에게 물어보니, 8.13 한국학생들이, 백두산정상에 올라, 북한인권을 규탄하고, 유인물을 뿌리며 시위를 한다는 정보를 중국당국이 입수하여, 사전조치를 취한 것 이라고한다.
소위 東北工程이란 이름으로, 고구려, 발해역사를 중국의 지방정권역사로 변조하고, 백두산을 長白山으로 개칭하고 (원래 장백산맥은 산맥이름이며, 장백산맥에서 제일높은 산이 백두산인데, 백두산을 장백산으로 바꾼것), 백두산관활을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다른기관으로 이관시키고, 백두산근처에 공항을 건설하고, 순환도로건설, 철도건설을 하는가하면, 백두산에서 군사훈련을 공개적으로하고, 심지어는 등산로입구에있는 호텔(우리일행이 숙박한 호텔포함)철거를 요구하는 한편, 백두산을 UNESCO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를 시도한다고한다.
뒤늦게나마, 우리정부도 고구려역사재단을 확대시켜, 최근 동북아역사재단을 발족시켜, 대응에 나섰다고하니 다행이라고생각한다.
중국에 거주하고있는 조선족 176만명중 약 100만명이 연변조선족자치주에 살고있으나, 중국정부의 개혁개방정책채택후, 많은 조선족이 한국관광객 이 많이찾는 관광지나 중국진출 한국기업에 취업하기 위하여 연변을 떠났고, 또 한국내에 많이 취업하고있어, 연변내의 조선족인구가 급감하고있어, 이렇다가는 머지않아, 조선족자치주의 지위를 상실 할 수있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중국에가서(특히 연변지역) 공개적으로 기독교선교활동을 한다던지,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행동을 한다던지, 고구려의 옛강토를 되찾자고 외치는 행동은 삼가야할 것이라고생각한다.
우리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하여 감정적 으로 대응하기보다는, 장기적인 안목과 역사의식을 갖고, 냉정하게 하나하나 준비해나가야할 것이다.
중국의 어느대학교수가 강의실에서 중국학생들에게 행한 강의내용이 인터넷에 게재되어, 충격을 준 바 있다. 그내용은 북한내에 만일의 사태가 일어났을 때, 중국이 이에 개입할 명분을 얻어, 북한이 중국의 일부로 편입될 가능성을 제기한 것이다.
요즈음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마치, 100여년전 舊韓末을 연상케한다.
얼마전까지 우리나라 외교의 작은 부문이나마 일조를 했던 한사람으로서 책임감을 느끼며, 작금의 우리의 상황을 보면서, 염려하는 바 크다.
언젠가는 중국땅을 빌려서가 아니라, 우리땅을 당당히 밟고 백두산에 오를날 을 기원하면서 .....
2006. 10. 3 하늘이 열린날 신성오 씀
첫댓글 신성오 대사! 이 곳에서 만나볼수 있으니 반갑고 감사하오. 종군기자가 집필한 글을 읽고 있는 듯한 사실감과 현장감이 느껴지는 문체와 상황설명에 감동을 받았오.
아니 신성오대사께선 백두산 경관을 즐기기보다는 ... 이 장편의 논문을 ? (그러나 어쨌던 우리나라 애국가가 동해물과 백두산이 ... 하고 시작 한다는 사실을 거의 잊고 살아온 우리들이긴하지만 ... 아 아름다운 sacred mountain 을 자연 우리 인류의 자연 유산으로 보호하겠다는 사람들이 있으면 할수 없는 일이지. 이건 외교라기보다는 민족적 차원에서 토의 해 봤어야 할 문제 였던 것 같은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