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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 모임] 비밀을 맡은 자
2019. 12. 6. 이현래 목사
(고전4:1,2)
“1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엡1: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골4:3,4) “3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 4 그리하면 내가 마땅히 할 말로써 이 비밀을 나타내리라.” 오늘은 고린도전서 4장에 있는 말씀이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4:1,2)는 말씀이 있다. 라는 생각이 나서 말씀을 드리려고 한다. 전에는 비밀을 맡았다는 생각이 거의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까 우리가 굉장히 깊은 비밀을 맡은 자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영어로 ‘mystery’, 히랍어에서도 역시 ‘mysterion’라고 되어 있다. 복음은 사실은 다 미스테리다. 왜냐하면 땅에서 사람이 무엇을 연구해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미스테리다. 사람이 연구한 것은 아무리 과학자들이 놀라운 기구를 발명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들으면 다 알 수 있는 그런 말이다. 사람이 연구한 것이기 때문에 비밀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런데 하늘에서 온 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도 다 비밀이다. 우리에게 속한 것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늘에 속한 일을 맡은 사람들이라면 모두 비밀을 맡은 사람들이다. 아주 쉽게 말해서 창조라는 것도 사람들이 아는 창조와 다르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창조론, 진화론과는 다른 말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는 말은 지금 진화론자들이 말하는 진화론, 아니면 창조론자들이 말하는 창조론, 이런 문제가 아니므로 비밀이다. 창조론자들이 알고 주장하는 창조는 비밀이 아니다. 창조 과학회라는 것이 있다. 거기서는 과학적으로 창조를 설명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 과학적으로 말하게 된 것이니까 이것은 비밀이 아니다. 철학적으로 말하더라도 역시 비밀이 아니다. 그런데 이것이 나를 지으신 것이나 나를 창조한 것이라고 하면 비밀이다. 이것은 나를 낳으신 아버지도 모르는 것이다. 내 아버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내가 있는 것은 아버지 때문에 있는 것인데, 왜 너희는 아버지가 있는데 왜 또 아버지라고 하느냐? 옛날에 이런 말이 있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니까 ‘이 불효막심한 놈들아, 너희 아버지가 땅에 있는데 무슨 아버지가 또 있다고 하느냐?’ 이런 말들이 한국에 복음이 전파될 때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어쩌면 저런 불효막심한 놈들이 다 있다고 해서 많은 순교로 이어졌다.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한 것은 비밀이다. 쉬운 것 같지만 비밀이다. 우리에게는 없는 것이다. 마리아가 예수를 성령으로 잉태했다는 이것만 비밀인 것으로 생각하지만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창조되었다고 하는 것도 알고 보면 비밀이다. 우리가 이것을 전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나를 낳은 것을 전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전혀 모르는 하나님이 나를 창조했다는 것을 전하는 것이다. 니고데모가 왔을 때, 그 굉장한 사람이 거듭나야 된다, 다시 나야 된다는 말을 하니까 멍해서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요3:4)하고 물었다. 모태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은 비밀이 아니다. 그런데 다시 나야 된다는 말은 비밀이다. 우리가 하는 말이 쉬운 말 같지만 전부 비밀이다. 우리는 비밀을 맡은 사람들이다. 모든 것이 다 그렇다. 성경에 있는 말씀들은 대부분 비밀이다. 비밀을 맡은 자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들이다. 내가 세상에 나갈 때, 나는 비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이 의식이 우리에게 아주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신학교에서 공부해서 설교를 하는 것이니까 무슨 큰 비밀을 말한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여러분은 어떤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나올 때, 내가 비밀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했는가? 아마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으리라고 생각된다. 신학교를 갈 때, 하나님의 비밀요원이라고 생각하고 간 것은 아니지 않은가? 좋은 일,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생각하고 갔지 비밀 요원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요즘은 부쩍 내가 하나님의 비밀요원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오늘 이 말씀이 떠올랐다.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고전4:1) 바울은 이런 말을 여러 번 했다. 골로새서 4장 3,4 절에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 그리하면 내가 마땅히 할 말로써 이 비밀을 나타내리라.”(골4:3,4)는 말이 있다.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도록 우리를 위해서 기도할 때, 그리스도의 비밀을 담대히 말할 수 있도록, 확실하게 말할 수 있도록 그렇게 구해 달라고 했다. 왜냐하면 내가 이것을 위해서 매인 바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비밀 때문에 내가 매인 바 되었기 때문이다. 너희가 그렇게 기도를 하게 되면 내가 마땅히 할 말, 확실하게 할 말을 전하겠다는 말을 한다. 비밀이니까 확실하게 전해야 한다. 잘못 전해버리면 안 된다. 확실하게 전해야 된다. 그래서 이것을 확실하게 하려고 교리도 정해놓고 여러 가지 노력을 한 것 아니겠는가? 보통 말이라면 교리를 제정하고 연구할 필요가 없다. 실험실에 가서 연구하면 된다. 사람의 이성과 상식 안에서 나온 것이니까 검증하면 된다. 그런데 이것은 검증할 기구가 없다. 그래서 잘못 전해 버리면 엉뚱한 것이 되어버리고 어디다 물어 볼 데도 없다. 그래서 ‘마땅히 할 말’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확실하게’라는 뜻이다. 이 비밀을 내가 말할 것이다. 우리를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기고,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까 상당히 심각한 말이다. 그런데 골로새서 1장에 보면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골1:27)라는 말이 있다. 이 비밀은 너희 안에 있는 그리스도다. 바울은 이 비밀이신 그리스도를 자기가 위임 맡았다는 뜻이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아는 대로 기독교의 창시자, 교주, 하나님 아들, 이렇게 간단한 것 같지만 그것이 아니고 세상에 대해서는 완전히 비밀이다. 비밀한 사람이다. 아주 쉽게 생각하면 십자가에서 내려오지도 못하고 죽은 사람을 ‘주님’이고 ‘그리스도’라고 전하는 것이니까 이것 자체도 비밀이다. 어떻게 십자가에서 내려오지도 못한 사람은 그리스도라고 하는가? 황제를 보고 그리스도라고 한다면, 하나님 아들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이 생각할 때 황제니까 그렇겠구나 하고 생각하지만 십자가에 못 박혀서 내려오라고 해도 내려오지 못하는 사람을 보고 하나님 아들이니 메시아라고 하니까 말이 안 되는 소리다. 그런데 이 말이 안 되는 소리를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니까 세상 사람들을 보고 뭐라고 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가 이것을 전하는데 기도해 달라는 말까지 한다. 하나님께 속한 모든 계획은 전부 우리에게는 비밀이다. 하나도 비밀이 아닌 것이 없다. 왜 우리 같은 사람을 택했는가? 이 비밀을 어떻게 하면 보편화시켜서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하겠는가? 이것 때문에 우리에게 사역자의 일을 맡긴 것이다. 그 비밀을 그대로 전하려면 사역자가 필요 없고, 책만 있으면 된다. 이것을 보편화시켜서 모든 사람이 알아듣도록 해야 하기 때문에 사역자가 필요한 것이다. “내 법을 그들의(저희) 생각에 두고 그들의(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히8:10) 이날 이후에는 아무도 하나님을 알라하지 아니할 것은 어린아이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다 알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도록 하기 위해서 사역이 필요하다. 어린아이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다 알도록 하기 위해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전한다 해도 내가 늘 말씀드리는 것처럼 전혀 모르는 것을 전해버리면 헛일이다. 콩을 삼키는데 생콩을 삼켜 버리면 그대로 도로 똥으로 나와 버린다고 한다. 그래서 밭에 심어 놓으면 콩이 나온다. 들에 가보면 수박 같은 것이 인분에 섞여 떨어져서 늦게 난 것이 있다. 재배한 것이 아니고 돌 수박이다. 그런 것은 나서 어떻게 자라다가 늦가을이 되어서 서리 맞으면 죽고 만다. 새들이 살은 다 먹지만 씨는 소화가 안 되니까 그냥 도로 나와서 떨어지면 다시 싹으로 난다. 씨 속에는 엄청난 생명력이 들어 있어서 씨 자체를 그냥 먹으면 소화가 안 되는 모양이다. 우리가 전하는 말씀들이 비밀이다. 우리가 이 비밀을 알아들었다는 것이 참 신기한 일이고 은혜로운 일이다. 모세가 산에 들어가서 40일 동안 있다가 나왔는데, 밖에서 볼 때는 무서운 광경이었다. 천둥소리가 나고 깜깜한 구름이 끼고 나팔소리가 났다는데 감히 아무도 산에 접근하지 못하는 그런 무서운 광경이었다. 누구든지 여기에 접근하면 죽는다고 할 정도였으니까 무서운 것이 아니었겠는가. 그런데 모세는 거기서 무엇인가를 보고 왔다. 성막을 건축할 때, 거기서 보고 온 식양대로 만들었다고 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내게 보인 식양대로 건축했다고 했다. 자기에게 뭔가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림을 보듯이 성막을 그렇게 보았겠는가? 다르게 봤으니까 비밀이다. 이렇게 만들어 놓으니까 이런 식양이 된 것이지 그렇지 않을 때는 머릿속에만 있는 어떤 것인데 무엇을 보고 그렇게 만들어 놓았다. 어쩌면 모세 자신도 왜 이것을 이렇게 건축해야 되는지 모르고 했을 수도 있다. 첫 번 계시를 본 사람은 대부분 다 그렇다. 그래서 다음에 해석하고 다음에 또 해석하고 구약시대 많은 사람들이 해석을 해도 다 해석이 안 되었다. 제물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해석이 되었다. 여호와께서는 그런 제물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고, 상한 마음을 원하신다고 해석된 것이다. 번제단에 드려진 제물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해석한 것이다. 제물을 계속해서 드렸지만 그것을 해석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사람들의 행동을 보니까 제물을 제물대로 잘 드려놓고 사는 것은 전혀 아니다. 그래서 그런 해석이 가능해졌다. 여호와께서는 번제나 소제나 이런 제물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고, 너희들의 상한 심령을 원하는 것이라고 해석이 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 해석했다고 할 수가 없다. 우리가 예수가 하나의 제물, 번제물이라고 해석했을 때 보면 그것이 우리에게 상한 심령을 요구하는 그런 제물이 아니었다. 계시를 먼저 본 사람이 있고, 그 다음에 어떤 상황에서 그것을 해석한 사람이 있고, 그 다음에는 이렇게 해석한 사람이 있다. 이래서 해석이 넓어지고 보편화되어 간다. 예수님도 마찬가지다. 요한복음을 처음에 읽으면 우리가 전혀 모르는 말이다. “태초에 로고스(말씀)이 계시니라 이 로고스(말씀)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로고스(말씀)는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 이것은 전혀 모르는 말이다. 더군다나 “로고스(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1:14)라는 말이다. 그것은 요한이 처음부터 예수를 보고 그렇게 알았던 것이 아니다. 일생을 살고 난 다음에, 마지막에 그렇게 알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석이 된 것이다. 이 사람은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이라고 해석이 된 것이다. 마태나 누가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처녀의 몸에서 났다고 전했는데, 요한은 수십 년이 지난 후에 그 사람에 대해서 말하기를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으로 해석이 된 것이다. 처녀에서 잉태되었다는 말과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은 수십 년의 차이가 있고, 또 사람의 차이도 있다. 그리고 그 말을 해야 하는 상황도 있다. 이 비밀은 계속해서 해석되어야 할 그런 비밀이다. 우리가 전해 받은 복음은 통째로 받아서 통째로 내놓는 그런 복음이 아니다. 씨를 받았다고 그냥 통째로 먹어라, 이것을 깨지 말고 먹어라, 손상시키면 안 된다고 먹여서는 소화가 안 되고 계속 똥으로 나와 버린다. 이것은 누군가가 죽음을 무릅쓰고 깨야 된다. 깨서 씹어 먹어서 잘못하면 죽고, 잘하면 살고, 이래서 개발되는 것이다. 이것을 그냥 조심조심 그대로 씨를 보존해서 삼켜놓으면 위장에서 소화가 안 되기 때문에 도로 나와 버린다. 우리가 지금까지 전해들은 복음도 그런 것이 많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이것도 그렇게 받으면 그런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론이 많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다고 다냐? 그러면 행위는 어떻게 되는 것이냐? 이런 문제가 계속해서 생긴다.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것은 그것이 다 해석이 제대로 안 되었다는 말이다. 누군가가 그것을 삼켜서 소화해서 피와 살이 된 것을 갖다 내놓아야 된다. 그래야 식당에서 먹을 수가 있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떡을 주시면서 이것은 내 몸이라고 했다. 예수님이 그랬다고 해서 천주교에서는 떡을 준다. 그런데 과연 그것을 먹으면 예수가 자기 몸속에 들어오는가? 그것은 아니다. 화체설이라고 하지만 그 떡 자체가 우리 몸 안에서 예수가 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것도 해석이 되어야 될 문제다. 우리가 맡은 비밀은 상당히 어려운 비밀이다. 왜냐하면 하늘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땅에 있는 비밀은 어떻게 해서든 알아진다. 하늘에 속한 것은 우리 마음대로 안 되는 그런 비밀이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이것은 비밀이구나, 이렇게 된 것을 전해야 된다. 사람들이 다 알 수 있는 것을 전하는 것은 비밀이 아니다. 다 아는 것을 이야기 하려면 누구든지 한다. 우리가 다 할 수 없으니까 주일학교 같이 사람이 많은 데서는 선생님을 세울 때 참 난처할 때가 많다. 나는 부족해서 못하겠다는 사람도 있다. 사람이 적으니까 여기 공과 책도 있으니까 열심히 보고 해서 가르치면 된다고 해서 주일학교 선생을 시킨다. 그러면 그 사람은 모르고 책에 써있는 대로 가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게 아이들에게 제대로 양식이 되겠는가? 복음이 이렇게 지연되는 이유가 정확하게 소화를 해서 내놓는다고 하더라도 사람으로 인해서 제한이 되는데, 소화되지 않은 것을 전해놓으면 소화가 되겠는가? 우리나라에 주자학인 성리학이 들어와서 나라가 그것으로 유지되기도 하고 망하기도 했다. 퇴계학파는 주리론이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져야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하늘의 뜻은 천리니까 바꿀 수가 없는 것이다. 아버지도 내가 바꿀 수 없지 않느냐? 마찬가지로 임금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어린아이를 세워놓고도 바꿀 수가 없으니까 임금이라 했다. 이런 이론이 조선왕조를 유지시켜 주었다. 단종애화도 생긴 이유가 임금 자격이 없는 사람이 적자 승계의 법칙에 따라서 임금이 되었다. 그러면 당연히 형제간 중에서 능력이 있는 사람이 치고 들어오게 된다. 그래서 반정이 일어났다. 조선왕조를 유지하는데 아주 좋은 이론이었기 때문에 국학으로 채택이 되어서 이것 이외에는 다 이단이 되었다. 퇴계학을 위반하는 것은 다 이단이고, 사문난적이다. 이에 비해서 율곡은 이발기국이라고 해서 이인 하늘의 이치는 변할 수 없는 것이지만 사람에게 와서 시행될 때는 변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에 따라서 달리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맞기는 맞는 말인데, 왜 이단으로 몰렸는가? 그 이론에 따르면 임금도 잘못하면 갈아야 된다는 말이 되기 때문에 되겠는가? 안 된다. 그래서 밀려났던 것이다. 실학사상이 밀려났던 이유가 바로 이 주자학 때문이었다. 지금 기독교는 학파로 말하면 퇴계학파에 속한다. 예수님의 기도가 그렇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6:9) 주리론이나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 주시옵소서, 이 말이다. 이것이 완전한 비밀이다. 그런데 이것을 정치적으로 사용했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 주자학의 퇴계론이 맞지만 그것을 정치적으로 사용할 때는 불가능한 것이다. 사람이 안 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기독교도 똑 같다. 성경 말씀이 맞는 것이지만 이것이 사람에게 와서 변질될 수도 있고, 다른 것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을 막으려고 교리를 만들고 어떻게 하려 했는데, 그렇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몇 년도에 신조가 나왔는데도 몇 년도에 다른 신조가 나오고 해서 그것을 보강하려고 했다. 지켜보려고 했다. 그런데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그것과는 관계가 없다. 그래서 교리를 아무리 잘 만들어 놓아도 결국 실패한 것이다. 이것은 비밀이다. 사람을 통하지 않고서는 안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모든 것이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지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에 따라서 달라지기 때문이다. 전기는 똑 같은데 전기를 보내려면 잘 전도되는 금속을 사용해야 된다. 우리 집에 들어오는 것은 구리철사다. 구리로 전달해서 들어오는 것이다. 돈이 많다면 은으로 하면 더 좋다. 돈이 더 많아서 금으로 하면 더 좋다. 그 중에 값이 맞고 잘 통하는 것이 구리니까 구리로 전선을 쓴다. 그것도 오래 가고 멀리가려고 하면 손실이 굉장히 많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220볼트로 승압을 시킨 이유가 전기 손실을 막으려는 것이다. 절전하기 위해서다. 그만큼 위험하다. 볼트가 높으니까 사람이 닿으면 감전되고, 화재도 나기 쉬운 문제가 많이 생긴다. 미국은 전기가 풍부하니까 110볼트를 쓰지 220볼트를 안 쓴다. 전기가 좋은 것이지만 잘못 통과되면 큰일이 난다. 철사를 통과하면 불이 난다. 그것을 통과시킬 수 있는 구리철사가 필요하다. 하나님의 비밀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잘못되기 쉬운 것이기 때문에 그런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전기로 말하면 구리철사가 필요하듯이 하나님의 비밀도 그것을 맡을 사람이 필요하므로 이렇게 시간이 오래 간 것이다. 아브라함이 나올 때까지 다른 사람으로는 안 되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나온 것이 아닌가? 예수가 아니면 안 되기 때문에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이다. 400년을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살이를 했다. 꼭 400년을 있어야 되는가? 그것이 아니다. 구원자가 없기 때문이다. 모세가 구원자가 될 때까지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종살이를 해야 되는 것이다. 구원자가 올 때까지 할 수 없다. 내가 물에 빠져 있으면 구원자가 와야 되는 것이지 한 시간 되면 구원이 되는가? 두 시간이 되면 되는가? 구원자가 없으면 그냥 죽는 것이다. 나도 어려서 물에 빠져서 죽을 뻔 했다. 마침 구원자가 배를 타고 지나가다가 뛰어 들어서 건져주어서 살았다. 그때는 순간을 다투는 때였다. 사람이 물에 빠지면 세 번 들락날락하면 죽는다고 한다. 수영을 못하는 사람은 더 이상 안 된다고 한다. 그때 잘못했으면 죽었다. 그런데 마침 동네 형이 여름인데 배를 타고 지나가다가 그 광경을 보았다. 아무도 못 봤는데 보았다. 그 형이 뛰어 들어와서 나를 살렸다. 그 형도 기억하고 있었다. 나도 기억하고 있었다. 언젠가 뒤에 내가 너를 살려준 것을 아느냐고 물어보았다. 나는 평생 그 사람을 못 잊는다. 이스라엘이 왜 꼭 그때 나와야 했는가? 그것은 모세가 준비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구원받을 사람도 다 그렇다. 알고 보면 어떤 사람이 와아 되기 때문에 그러고 있는 것이다. 또 구원의 정도도 누구를 통해서 복음을 듣느냐에 따라서 그 정도가 정해져버린다. 어떤 교회에 가보면 그 교역자만큼 정해져 있고, 더 이상은 안 된다. 병 고치는 자리에서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 거기서 머물러서 더 이상 못 가는 경우가 참 많다. 그것이 자기에게 마지막 복음이 되어버린다. 그 사람은 거기서 복음을 받았고, 그런 복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조** 목사의 설교를 들어보면 설교마다 반드시 신유에 대한 말이 나온다. 처음에는 다른 것으로 시작했다가 중간쯤 가면 딱 전환이 되어서 신유로 들어간다. 자기는 거기서 구원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자기 사역의 한계가 거기다. 그 사람의 사역을 보면 예수를 어디서 만났는가의 차이다. 병 고치는 데서 만났느냐, 떡을 먹이는 데서 만났느냐, 죽은 사람을 살리는 데서 만났느냐, 이것에 따라서 사역의 한계가 생긴다. 우리도 예수를 아는 데 어디까지 아느냐에 따라서 우리 사역의 한계가 생기게 된다. 그러므로 예수를 아는 일이 너무 중요하다. 왜냐하면 복음의 비밀은 그리스도라고 했기 때문이다. 비밀 중의 비밀이 그리스도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 계획, 경륜, 이 모든 것의 모든 것은 그리스도니까 거기까지 와야 되는 것이다. 물론 더 갈 것도 있겠지만 하여간 그렇다. 나는 거기에 머물러 있는데, 좀 더 갈 수 있으면 더 갔으면 좋겠다. 그래서 누가 들어서 바로 아멘 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여러분들도 목회를 하시면서 그런 것을 느낄 것이다. 내가 하는 말을 듣고 사람들이 아멘하고 들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런 것이 목회자들의 소원이 아니겠는가? 맨날 말해도 못 알아듣는다든지, 안 된다든지, 이러면 답답하다. 젊었을 때 해 보니까 맨날 말해도 그 말이 그 말이고, 그때가 그때다. 순복음 교회를 가보니까 뜨끈뜨끈해서 완전히 김이 폭 나는 찐빵이니까 자연히 눈이 돌아갔다. 저러해야 되지 냉랭해서 되겠는가, 이런 생각이 들어서 팔자에 없는 짓을 하고 돌아다녔다. 내 기질에 안 맞는 것인데, 그것을 알아보려고 산으로 어디로 막 돌아다녔다. 아무리 해도 나는 안 되었다. 그래서 포기 했는데 그것이 된 사람들은 거기에 머물게 되었다. 그때 안 된 것이 참 다행이다. 그리스도의 비밀을 명확하게 말하게 되기를 구해라는 말이 있다.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골1:27) 하나님의 계획은 전부 비밀에 속한 계획이다. 천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 하나님과 비슷하니까 누구라도 다 인정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이라고 해도 상관이 없다. 천사가 와서 이야기를 하고 싹 사라지고 하면 누구라도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지 않겠는가? 요즘에는 음성만 듣고서도 하나님을 만났다고 한다. 또 꿈에 뭘 봤다고 해서 하나님을 봤다고 하는 사람도 많다. 음성을 들었다는 사람을 몇 사람 만나 봤는데 요지부동이다. 너무나 확신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수가 없다. 하나님과 직통 전화, 핫라인이 개통되어 있는데 사람의 말이 필요하겠는가? 또 은사를 체험한 사람은 은사 자체가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하나님이 자기를 특별히 사랑해서 이런 은사를 주었다고 생각하기도 하니까 그것도 말리기 어렵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우리가 비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것은 비밀이라고 할 수가 없다. 사람들이 다 인정하고 알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굉장한 사람인 줄 알았고, 메시아인줄 알았고, 이스라엘을 구원할 줄로 알았고, 그 동안 몇 백 년 동안 자기들이 생각했던 메시아사상을 가지고 예수를 바라보았다. 바닷가에서 고기나 잡던 제자들이 그런 기미가 있는 분을 만났으니까 얼마나 기고만장했겠는가? 몇 백 년 동안 선지자들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 사람이라고 했으니까 얼마나 가슴이 벅찼겠는가? 그런데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했는데, 못 내려오니까 얼마나 허무했겠는가? 그런데 이 사람을 전하는 것이 비밀의 계획이다. 분명 사람인데, 이 사람이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한다. 그 사람을 통한 계획도 있지만 그 사람 자체가 하나의 계획인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을 때 무엇을 하려고 지었는가? 자신의 형상이 되게 하기 위해서,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또 자신의 생명을 확산시키기 위해서, 사람을 지었다. 이 면에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능력을 행하고 행하지 않는 기준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다. 천사는 그렇게 도전했지만, 지금도 사람은 그렇게 도전을 받고 있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그것이 아니고, 순수한 사람이라야 되도록 그렇게 지어 놓았다. 형상으로 실재를 드러내려면 아주 순수해야 된다. 유리가 맑아야 빛이 그대로 전달된다. 유리가 맑지 않으면 빛이 그대로 나타날 수가 없다. 지금은 그런 유리를 보기 힘들지만 옛날 해방 후에 유리가 없었다. 그것을 억지로 끓여서 병도 만들고 심지어는 전구도 만들었다. 그래서 전구 속에 거품이 들어 있는 것이다. 불을 켜 놓으면 어름어름했다. 형상으로 만들어 놓은 전구가 그 모양이니까 안에 똑 같은 전기를 넣어 놓아도 바깥에 비칠 때는 어름어름하게 비치는 것이다. 전구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안에 복음이 들어왔다고 해도 내 자신이 맑지 않으면 어름어름해져버린다. 이것은 아주 심각한 문제다. 구약 성경에도 아브라함이 100세가 될 때까지 연단한 것이다. 자기의 모든 생각이 없어지고, 자기의 사상이 없어질 때까지, 이삭도 마찬가지고 야곱도 마찬가지고 모세도 마찬가지고 다 그렇다. 알고 보면 맑은 유리를 만드는 과정이다. 유리가 그냥 쉽게 만들어지는 것 같지 않다. 그만한 열이 있어야 되고, 여러 가지 조건이 맞아야 맑은 유리가 나오지 그렇지 않고서는 맑은 유리가 나오지 않는다. 크리스탈은 좋은 유리그릇이 있다. 그 그릇은 굉장히 무겁다. 왜 무거운가 했더니 아는 사람이 말하는데, 그 속에 납이 들었다고 했다. 그런 유리가 되려면 칼로 깎아야 되는데 거기에는 납이 들어가야 된다고 한다. 그냥 유리로는 안 된다. 같은 유리인데 성질이 다르다. 그래서 조각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크리스탈 컵에는 뜨거운 차를 부으면 안 된다. 그 안에 납이 들었으니까 찬 것만 넣어야지 뜨거운 것을 넣으면 안 된다. 사람도 납이 들어간 크리스탈이라면 보기에는 참 좋겠지만 거기에 하나님의 뜨거운 것을 넣으면 독이 나올 것이 아니겠는가? 뜨거운 하나님을 넣어놓으면 독이 나와버린다. 차디찬 하나님만 넣어야지 뜨거운 하나님을 넣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사람이 굉장히 중요하다. 나는 사람이 잡히면서 성경을 똑 같은 사람이 보는 데 왜 이렇게 다르게 보는가? 처음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워치만니를 처음 만났을 때 든 생각이 그것이었다. 같은 성경을 이렇게 볼 수도 있는가? 이것은 사람이 다르구나. 그때 처음 그것을 발견했다. 그러고 나니까 다른 것은 다 소용이 없고 이것이 중요한 일이구나. 그렇게 알아졌다. 그래서 연단된 것이 감사가 되었다. 이러느라고 연단이 필요하구나. 내게서 이런 문제를 처리하는구나. 내 안에 있는 이런 것들을 처리하는구나. 깨끗한 유리를 만들려면 그 안에 있는 얼마나 많은 불순물들을 제거해야 되겠는가. 여름에 먹는 육수가 있다. 그것은 소고기를 삶은 물이다. 그런데 소고기를 삶으면 기름이 있을 것이다. 냉면을 먹으려면 차게 해야 되는데, 더군다나 식으면 소고기 기름은 허옇게 비누처럼 되어 버린다. 거기에 냉면을 말아 놓으면 먹겠는가? 입안에 쩍쩍 들어붙는다. 그래서 기름을 일일이 다 걷어내야 된다. 식히면서 위에 뜨는 기름을 다 걷어내서 기름이 전혀 없어야 육수가 된다. 그러면 차게 해도 기름 덩어리가 안 생긴다. 거기에 면을 넣어야 시원한 냉면이 된다. 여름에 속은 느끼하고 먹기는 싫고 단백질은 보충해야 할 때 냉면을 먹는다. 요즘에는 진짜 냉면을 하는 집이 없다. 그것은 먹으면 속이 시원하다. 기름기가 없기 때문에 배탈이 안 나고 시원하다. 몇 번 정성껏 걷어내야 된다. 슬쩍 해놓으면 냉면을 먹을 때 기름이 떠 다녀서 버려버린다. 못 먹는다. 메밀도 찬데 거기에 기름 덩어리가 있으면 어찌되겠는가? 맑은 유리를 만들려면 많은 여과 과정이 필요하다. 물도 맑은 물을 만들려면 많은 여과과정이 필요하다. 사람도 맑은 사람을 만들려면 많은 여과과정이 필요하다. 그래야 하나님이 나타나고 싶을 때, 그대로 나타날 것이 아니겠는가? 안 그러면 내 어떤 것이 드러나기 때문에 혼합물이 되어서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드러나지 못하게 된다. 비밀을 맡은 사람의 책임이 굉장히 크다. “비밀을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4:2)고 했다. 충성이라는 말은 진실, veritas, trust, 이런 말로 번역이 되었다. 맡은 사람이 구할 것이 무엇인가? 충성스럽고 신실한 것인데 이것만 생각하면 또 안 된다. 방금 말씀드린 대로 여과과정이 필요하다. 아무리 충성스럽다고 하더라도 여과가 안 되면 충성을 안 하는 것보다 못하다. 잘못 전달이 되면 안 하는 것보다 못하기 때문에 여과과정이 필요하다. 우리 일생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많은 과정을 지나게 하는 것은 여과시키느라고 그런 것 같다. 우리 자신의 어떤 것이 없도록 여과를 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그분이 그냥 드러나도록 그렇게 하려니까 비밀을 맡은 사람들은 좀 고생을 해야 된다. 아무래도 그렇다. 내 생각대로 사는 것이 세상인데, 내 생각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니까 내 생각을 없애야 되는 것이다. 불교에서도 이것을 없애 보려고 애를 쓰는 것 같다. 업에 싸여 세상에서 헛된 생활을 하니까 업을 다 제거하자는 것이 아닌가? 업을 다 제거하고 해탈하자. 중력이 없는 세계로 가자. 무중력 상태로 가자는 것이 불교의 소원이다. 우리는 그렇게 수양을 하는 것으로는 안 되고,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다루어져야 된다. 그래서 그것이 없어져야 된다. 내가 이것을 수양하게 되면 어느 정도까지는 수양이 된다고 할 수 있지만 다른 뭔가가 남는다. 요즘에 스님 가운데 유명한 분이 나와서 즉문즉답을 한다. 대답을 하는 것을 들어보면 아주 통쾌하게 대답을 하는 것이 많다.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차원이 높지 않겠는가? 그래서 나에게 와서 물어 본 사람이 있다. 그 사람과는 어떻게 다르냐고 물어 본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굉장히 수양한 사람이다. 나는 수양을 한 것이 없어서 그 사람과 비교할 수 없다. 하나님이 다루셨지 내가 수양한 일이 없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못하게 했다. 참 이상하다. 내가 계획해서 하면 잘 안 되었다. 남이 하라고 해서 하면 뭐가 되는데, 내가 계획해서 하면 잘 안 되었다. 참 이상하다. 내가 딱 두 번 돈벌이를 해 봤다. 우리 교회 초창기에 돈도 없고 모두 학생들만 와서 같이 살자고 하는데 먹고 살 일이 막막했다. 그냥 무작정하고 보따리 하나 들고 오는 것이다. 우리 집에서 40명씩이나 밥을 먹고 살았다. 겨울에 배추김치를 담으면 400포기를 담았다. 요즘 집에서는 5포기 정도 담을 것이다. 그런데 400 포기를 담았는데 그것도 모자란다. 메주를 사면 알 메주를 두 포대씩 담았다. 뭘 좀 벌어야지 해서 내가 손 댄 것마다 다 손해만 보고 돈을 못 벌었다. 한 번은 누가 와서 시에서 무슨 땅을 분양하는데 그것을 사 놓으면 좋지 않겠느냐고 해서 그것을 사 놓았다. IMF가 막 터지기 직전이었기 때문에 사놓고 나니까 IMF가 터져서 빌딩이 1/3 값에 나왔다. 이것을 안 샀으면 빌딩을 살 수 있었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래도 그것이 결국은 돈이 남아서 10억 이상 돈을 남겼다. 대단한 일이 아닌가? 3년 동안 있었는데 그것을 지금에 있는 땅을 사기 위해서 팔았는데, 그때 살 사람이 없어서 그 돈을 남기고 팔기가 굉장히 어려웠다. 그랬는데 팔고 나니까 몇 배 뛰어서 지금은 그 땅 한 평에 500만원에도 못 산다. 200만원에 판다고 애를 먹었는데 지금은 500만원도 더 간다. 그래도 우리로서는 큰돈을 벌었다. 10억이 어딘가? 세금만 3억을 냈으므로 엄청나게 벌었다. 그것이 기초가 되어서 가창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고 또 한 곳은 경매하는 분인데 이런 땅이 있는데 사 놓으라고 해서 사 놓았는데 돈이 되었다. 딱 두 번 교회가 돈을 벌어 봤다. 내가 계획해서 했던 것은 다 안 되었다. 돈만 없어지고 말았다. 과일 장사를 한다고 형제들을 시켜서 했더니 다 까먹었다. 내가 직접 누비이불 공장을 했는데, 그것도 반값에 팔아버리고 말았다. 나는 돈이 안 되었다. 돈과 인연이 없다. 형제들이 목사님 저런 것을 안 하면 좋겠는데 하고 뒤에서 수근 거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더 했다. 교훈을 배웠다. 나는 돈과 인연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배웠다. 너는 돈을 벌 사람이 못 된다는 것을 그때 배웠다. 안 그랬으면 계속해서 돈을 벌려고 했을 것이다. 헌금하라는 소리를 하기 싫으니까 내가 어떻게 벌어서 썼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나는 교회를 지을 때도 헌금하라는 이야기는 안 했다. 헌금하라는 말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 말을 못하겠다. 자기들이 자발적으로 해서 이렇게 되었다. 내게 맡겨 놓았으면 집을 못 짓는다. 헌금하라는 말을 못하는데, 어떻게 집을 짓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연단하실 때, 그 사람 나름대로 어떤 것을 하게 하고, 어떤 것은 못하게 하는 것 같다. 일생을 지나고 보니까 감사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 공부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못했다. 그때는 후회를 했는데, 지금 생각하니까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공부를 했더라면 내가 골치 아픈 사람이 될 뻔 했고, 많은 사람에게 골칫거리가 될 뻔 했다는 생각이 든다. 꼭 올 길로만 인도했다는 생각이 드니까 감사가 된다. 꼭 올 길로만 인도했구나. 하나님의 비밀을 맡기려면 사람을 꼭 연단해야 된다. 그렇지 않고서는 맡길 수가 없다. 간첩으로 보내 놓았더니 이중간첩이 되어버리면 버리는 것이다. 대부분은 그래서 죽는다고 한다. 간첩으로 갔다 온 사람들이 이북에서는 간첩활동을 할 수가 없다고 한다. 결국은 정보를 서로 주고받고 교환하는 일을 한다고 한다. 이중간첩이 되는 것이므로 어느 쪽에서 없앨지 모른다. 비극이다.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사람들이 만일 왔다 갔다 해버리면 사탄에게도 버림받고 하나님께도 버림받고 이렇게 되어 버리니까 한 가지 밖에 못해야 된다. 이것도 못하고 저것도 못하면 안 되니까 한 가지만 해야 된다. 여러분도 그런 여러 가지 고난과 환란을 겪으셨을 것이다. 그러면서 차츰 자기 일을 알아가고, 내가 비밀을 맡은 자라고 알아갈 것이다. 비밀을 가진 자! 그리스도만큼 비밀이 없다. 비밀한 사람이 없다. 나도 사람들이 생각할 때는 비밀한 사람이다. 옛날에 알던 사람들이 생각할 때는 저 사람이 지금 뭘 하고 있는가? 어떤 사람들은 아직도 안 죽었는가? 이런 사람도 있다. 내가 70살도 안 되었을 때, 고향 사람들은 그 사람이 아직도 살아 있는가? 이런 이야기를 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비밀이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 있을 줄은 생각이나 했겠는가? 어림도 없는 일이다. 이것도 비밀인데 이런 것도 세상에 있을 수 있다. 놀라운 비밀도 안 된다. 또 이 비밀이 다른 사람에게 구원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예수의 비밀은 우리에게 구속이 된다. 분명히 하나님 아들인데 십자가에서 유유히 내려왔으면 얼마나 하나님 아들이 확실한가? 그런데 내려오라고 야유를 하는 데도 불구하고 못 내려왔으니까 모든 계산이 다 틀려 버렸다. 사도들이 계산했던 모든 계산이 다 틀려 버린 사람이다. 그러므로 비밀이다. 그런데 그 사람이 우리의 구속 주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이 바라던 사람이라는 것이다. 다 어떻게든 하나님께 잘 보여 보려고 애를 쓰는데 하나님은 그 사람을 바랐다는 것이다. 나는 이런 사람을 만들어 놓았지 네피림은 만들어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네피림이 되려고 애를 썼다. 무슨 면이든 네피림이 되려고 했다. 그것이 안 되어서 열등감을 가지게 되었고 처지게 되었는데, 하나님은 나는 그런 사람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100살이 넘어서야 아들을 주었다는 말이 왜 그렇게 좋게 들렸는지 모르겠다. 어떻게 그 사람이 좋게 들렸는가? 야곱이 다 빼앗겨 버리고 빈손이 되었는데, 그것이 어찌 좋게 들렸는지 모르겠다. 내가 그랬으니까 그랬을 것이다. 내가 아무 것도 없으니까 그런 생각이 났을 것이다. 하여간 그것이 희망이 되어서 내 길이 되었다. 그 길은 이렇게 환하게 열려 있었다. 누가 방해도 안 했다. 내가 조금 잘되려고 하니까 대번에 방해꾼이 생겼다. 내가 있던 교단은 조그만 교단인데 거기서 지금 내가 생각해도 잘 나가던 사람이었다. 내가 이렇게 잘 나가도 되는가? 이럴 정도로 잘 나가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바로 쇄기가 걸렸다. 그래서 내가 거기서 나오게 되었다. C.C.C.에서도 그랬다. 처음에 들어가서는 죽은 체 하고 있었다. 아무 말도 안 하고 물어 보면 대답할까 말까 했는데, 나에게 물으면 창피한 것만 나오지 뭐가 나오겠는가 싶어서 죽은 체 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다 보니까 드러나서 몇 번 들어가서 말을 하게 되었는데, 굉장히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 그런데 누가 콱 쇄기를 박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밀려났다. 그렇게 밀려났는데 점점점점 좋게 되었다. 이것도 비밀이다. 밀려났는데 어떻게 잘 되었는가? 그런데 밀려났는데 점점 잘되었다. 두 번째 밀려 날 때는 전혀 겁나지 않았다. 첫 번째 한 번 밀려나 보았기 때문에 두 번째 밀려날 때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한 번 밀려나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비밀이다. 우리가 볼 때는 실패자다. 사람들이 볼 때는 실패자다. 그날 저녁에 그 사람들은 축배를 들지 않았겠는가? 하나님 아들이라는 놈이 참 꼴좋더라고 앉아서 한 잔 했지 않겠는가? 그러면 그렇지 성경 말씀은 이렇게 맞지. 그럴 수가 있는가? 점잖은 사람들은 앉아서 그렇게 하지 않았겠는가? 당연히 그런 놈은 죽어야지, 그런 놈이 살다니, 말이 되겠는가? 성전을 헐어라, 사흘 만에 일으키겠다는 이런 놈이 살아 있으면 되겠는가? 이러면서 축제를 벌였을 것이다.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나이다. 그들도 이 노래를 부르지 않았겠는가? 세상이 볼 때는 실패했다. 그런데 거기서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이 나왔고,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포함하시려고 하는 그 자리가 만들어져서 우리 가운데 진짜 장막을 친 것이다. 누구라도 들어올 수 있도록 장막을 친 것이다. 사람이라고 생기면 누구라도 거기에 들어갈 수 있도록 그런 장막의 길이 생겼다. 이것이 비밀이다. 누가 만유를 포함하겠는가? 어떻게 된 사람이 만유를 포함하겠는가? 거기서 만유를 포함하게 되었다. 무슨 재주로 만유를 포함하겠는가? 교회 안에서도 보면 여러 가지다. 잘 나가는 사람도 있고, 못 나가는 사람도 있다. 많이 배운 사람도 있고, 못 배운 사람도 있다. 여러 가지 사람이 있다. 그것들이 모두 빈 밭으로 와 있는데, 갈등을 일으키기 시작하면 굉장한 갈등을 일으킨다. 같은 교회 안에 와서도 교회가 왜 이러냐? 왜 이렇게 불공평하냐? 돈이 있는 사람만 알아주느냐? 별 말이 다 있다. 이 모든 사람이 다 포함 되려면 그럴 수 있는 어떤 자리가 있어야 된다. 그 사람들을 일일이 다 고칠 수가 없다. 그것 때문에 신경 쓰다가 결국은 간암 걸리는 것이 아닌가? 목회하는 사람들이 간암으로 죽은 사람들이 많다. 성공한 사람들 중에서도 그런 사람이 많다. 얼마나 속이 썩어서 그렇게 됐겠는가?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으면 그렇게 되었겠는가? 자유가 없고, 항상 조심해야 되고, 항상 경계해야 되고,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생활을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되지 않았겠는가? 사람이 수천, 수만 명씩 모이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은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교회를 개척해서 그렇게 했다면 이것은 정말 하나님이나 할 일이지 사람이 못할 일이다. 너무 어렵다. 그러니까 병이 안 들겠는가? 우리나라에서 성공했다는 사람들은 다 그렇게 해서 죽었다. 나 같이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만 살아 있지 그렇게 성공하려고 했으면 진즉 못 산다. 나는 아예 시작도 못하고 말았을 것이다. 내가 아무 것도 못하니까 이렇게 오래 살고 있다. 내가 무엇 좀 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이렇게 살고 있겠는가? 나도 할 수 있으면 왜 안 했겠는가? 해도 안 되니까 못한 것이다. 내가 일부러 안한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만큼 비밀인 사람이 없다. 완전한 실패자다. 그런데 완전히 성공한 사람이다. 그것이 비밀이다. 완전히 죽었는데 다시 살았다. 이것이 비밀이다. 부활이 간단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부활해서 10년을 살았거나 20년을 살았으면 모르지만 겨우 40일 있다가 구름을 타고 가버렸다고 한다. 부활한 후에 겨우 40일 동안 땅에 있다가 번쩍 번쩍 여기 나타났다가 저기 나타났다가 40일후에는 구름을 타고 가 버렸다고 하는데 믿어지는가? 그런데 왜 그것을 그렇게 힘 있게 전했겠는가? 그것도 비밀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비밀을 맡은 사람들이다. 다른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남이 모르는 뭔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일부러 모르는 것이 아니다. 내가 가지고 있지만 다른 사람은 모른다. 하나님에게서 받은 것은 다른 사람이 모른다. 내가 말해도 모르는데 무슨 수로 알겠는가? 설명을 그렇게 하려고 해도 모르는데, 어떻게 자기가 직접 알겠는가? 당연히 모른다. 비밀을 맡은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의 비밀한 일군이다.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다. 그렇게 여기라는 것이다. 그렇게 알라는 것이다.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4:1,2) 물론 열심도 있어야 되고, 충성도 있어야 된다. 그 이면에 연단이 필요하다. 연단이 없이 열심만 가지고서는 안 된다. 열심만 가지면 이스마엘을 낳아버린다. 가는 데마다 이스마엘을 낳고 다닌다. 그래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손에 우리가 연단되는 것이 복이다. 아브라함도 연단을 받지 않았으면 다른 사람과 똑 같은 사람이다. 이삭도 그렇고 야곱도 그렇고 다 그렇다. 모세도 40세의 모세를 보라. 얼마나 똑똑한 사람인가? 그런데 그 사람은 사람을 많이 죽일 사람이다. 똑똑한데 사람을 많이 죽일 사람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어서 이스라엘을 구원한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하나도 헛일이 없다.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것, 특성, 그런 것들이 좋은 것 같은데 그것들을 안 쓸 때가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 완전히 새로 빚어져야 한다. 그래서 니고데모로서는 안 된다. 새로 빚어져야 되니까 안 되는 것이다. 그 사람이 성경 지식이 없겠는가? 인품이 없겠는가? 모든 것이 다 있는데 거듭나야 된다니까 꽉 막혀서 안 되어 가고 말았다. 참 훌륭한 사람이다. 생각해보면 그 당시 예수라는 사람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30살 된 사람이고 시골 청년이다. 이름이 있는가? 성이 있는가? 아무 것도 없는 목수의 아들이다. 유대인의 공회원인 그 사람이 밤에라도 찾아왔다는 것은 대단한 사람이다. 엄청나게 수양이 된 사람이다. 그런데도 거듭나야 된다고 하니까, 다시 나야 된다고 하니까, 위로부터 나야 된다고 하니까, 콱 막혀 버렸다. 그러니까 비밀이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3:8)고 했다. 이 말은 정말 답답한 말이다. 억장이 무너지는 말이다. 알고 보면 전혀 모르는 말이다. 내가 성령을 받아야 된다고 생각할 때 여러 가지 책을 봤는데 그 중에 하나가 ‘성령론’이라는 책이 있다. 대천덕신이라는 분이 쓴 책인데, R.A.토레이가 쓴 책인데 읽어 보면 뭔가 나올 줄 알았는데, 마지막에 가니까 역시 그 소리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것처럼 성령으로 난 사람도 이러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어떻게 하면 성령으로 나는가를 알아보려고 했는데, 마지막 소리가 너무나도 허무한 소리가 나왔다. 예수님도 니고데모에게 안 그랬겠는가? 그리고 제시한 것이 광야에 세워진 놋 뱀이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요3:14) 이 말은 다른 수가 없다는 말이다. 저런 사람도 안 되는데 어떻게 되겠는가? 이런 말이다. 우리는 그런 비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죽은 자가 살아난 비밀을 가지고 있고,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한 하나님 아들이라는 비밀을 우리가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비밀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알고 보면 너무 행복하다. 어제 아침에는 일어나서 밥상에 앉아서 관유가 생각나서 이야기를 했다. 제사장 위임식 때 쓰는 기름, 어떻게 이런 기름이 다 부어지는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너무 감사했다. 지나간 일이지만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생각하면 너무 감사하다. 내가 한 일은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것을 죽기 전에 표현해야겠다고 해서 돈이 들지만 출판했다. 무료로 주면 좋은데 다 무료로 못 주고 만원씩인가 받았다. 만원이 아까운 사람도 있을 것이고, 만원이 100만원만큼이나 귀중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만약 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비밀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큰 가치가 있겠는가? 우리는 그리스도의 비밀을 맡은 자들이다.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엡5:32) 그리스도와 교회도 큰 비밀이다. 깨끗한 양심에 그리스도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 것이다. 디모데전서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딤전3:9)라는 말이 있다. 우리가 비밀이 없이 어디 가서 설교한다고 해 봤자 헛일이다. 교훈하러 가는 것이다. 그것이 없이 다른 사람이 하라고 해도 잘한다. 비밀을 전하러 가는 사람이라는 이 마음을 가지고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겠다. 그러면 우리 자신도 밭에 묻힌 보화를 발견할 수 있는 사람처럼 그렇게 행복하고, 듣는 사람도 그 말을 듣고 달라지는 사람이 생기게 된다. 다 받아들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받아들이는 사람이 생기게 된다. 그리고 평생을 따라 오는 사람이 생긴다. 이상한 일이다. 옛날에는 내가 사람을 모으기도 어렵지만 평생을 같이 살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저절로 평생을 같이 살게 되었다. 비밀! 우리는 비밀결사대다. 너희가 명확하게 말하게 해주기를 기도한다면 내가 아주 확실하게 이 비밀을 말하게 될 것이다. 바울도 더 확실하게 더 완전하게 말하기를 바랐던 것 같다. 우리의 소원은 그것이다. 어떻게 하면 확실하고 완전하게 표현해서 그렇지 않다는 사람이 없을 때까지 시간을 단축시키겠는가? 그것이다.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는 그런 뜻으로 한 말이다.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지금도 주님이 어서 오시면 더 밝아지지 않겠는가? 주님이 오시면 더 확실해지지 않겠는가? 주님이 오시면 더 쉬워지지 않겠는가? 그래서 아무도 하나님을 알라고 하지 않고, 어린아이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다 알게 되기를 바란다. 유치원 아이들에게 뭐라고 해야 되는가? 이것이 고민이다.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뭐라고 해야 되는가도 고민이다. 다 고민이 아닌가? 알아듣도록 말을 해야 되니까 이런 것이 우리의 과제다. 어떻게 하면 이 비밀을 알기 쉽게 말하겠는가? 이 비밀을 어떻게 하면 보여줄 수 있겠는가? 이것이 우리의 과제다. 여러분에게 이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이 말씀을 드렸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