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운루駕雲樓의 가駕자字는 ‘멍에 가’자다
꽃샘추위
눈 녹은 38선에 봄이 오누나
전설속의 신선이 아니라도 금년엔 아마도 누가 우리를 도우러 올 것 같은 기분이다.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857~?)
당나라에 유학하여 17세 때 타국에서 과거에 급제... 귀국 후에는 난세에 실망하여 전국을
유랑하였다. 유불선을 두루 통달한 친서민적인 도학자, ‘선생님’이란 칭호보단 ‘선생’이란
호칭이 더 친근하다. 꽃샘추위와 어울린다.
경북 의성군 단촌면 구계리 116번지 등운산騰雲山 고운사孤雲寺
원래는 고운사高雲寺였던것이 최치원선생의 아호를 따 고운사孤雲寺로 바뀌었다고 전한다.
‘꽃샘추위’라 하면, 야외에선 단연 ‘삼양라면’이 제격이다
솔 향 그윽한 우거진 노송아래... 잔디광장에서 ‘후루룩’ 라면국물 한 그릇을 뚝딱해 보면...
진한 세월에 버금가는 후련한 맛이 난다 약간은 추워야 제 맛이다
‘고운사’ 가는 길.
꼬불꼬불한 산길...꾸불꾸불한 소나무...중중첩첩쌍곡선
최치원선생은 곱슬머리였을까.
가물다
봄 가뭄, 꽃샘추위, 보릿고개, 이런 3박자의 협공 속에서 옛날서민들은 어떻게 버티었을까.
머리가 시리다. 어디 마땅한 중절모라도 없나. 생계형아버지들에게 씌워드리고 싶다. 저승에 가면
무시무시한 염라대왕의 첫마디가 ‘고운사에 다녀왔느냐’라고 불서佛書에 전한다.
가운루駕雲樓
‘구름이 멍에를 쓴 누각’
최치원선생이 직접세운 ‘가운루’기둥 3개가 의미심장하다.
세심하게 살펴보니, 흐르는 계곡물에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정교한 건축술로 다시 통나무 기둥을
얹어 육중한 누각을 받치고 있다. 고운선생의 원대하고 심오한 구상이 함축되어 있는 듯하다.
왜 하필이면 3개의 기둥이었을까. 다사다난의 원칙이 흐른다. 하나라도 힘을 잃으면 누각이 무너진다.
삼권분립인가.
‘고운사’에 가 보았느냐‘
‘가운루’에 올라보았느냐‘
같은 뜻의 말일 게다
망각은 편하다
그러나 최치원선생은 그렇게 얘기하지 않았다. 얽히고 설 켰는데 어찌 편하랴
-시름 겨워하노라-
모르긴 몰라도 최치원선생은 ‘가운루’에 올라앉아 불철주야 시름겨워 했을 것이다.
할 일이 많다는 건지, 할 일을 못한다는 건지 해량하기 어렵다.
.
-시름-
순수한 우리나라 말이다. 멋있는 걱정...아마도 최치원선생 때부터 유래되지 않았나싶다.
그 후 한산도 수루에서 충무공께서 장렬한 정점을 찍었고...
-깊은 시름 하는 적에-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깊고 진한 시름에 잠겨있으리라. 이 시름덕분에 우리나라가 유지
되고 있는 건 아닐지... 어쩌면 ‘가운루’에 올라보지 않고선 민생民生이란 단어를 함부로
입에 올릴 자격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 때도 지금과 같은 난세였다면, 구름이 멍에를 두를만하다.
먼지가 날 정도로 팍팍한 서민들의 삶은 아량 곳 하지 않고 덤벙대는 위정자들...
다 죽어도 자기는 살아야겠다는 책사들... 봄이 되기 전에 어서 ‘가운루’에 가서
가슴에 더운피가 있는지의 여부를 체크해야 할 것이다.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선생
도인답게 고종명일시도 남기지 않고 후조를 타고 이승을 하직했다.
최치원선생이 타고 날아간 새...무슨 새였을까. 신라천년의 옥새였었나.
圓柱
‘가운루’아래, 계곡물대신 지난가을산産 낙엽이 수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