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선거일 이른 아침 부산 3호선 전철 안은 승객이 많지 않아 널찍해 보인다. 승객 대부분은 60대 이상 노인들이고 배낭을 멘 사람이 많다. 나처럼 사전투표는 했을까.
전철 3호선을 타고 물만골 배산 망미를 지나 수영에서 2호선으로 환승한 후 동백역에서 내렸다. 간비오봉수대 옥녀봉 장산을 거쳐 장산 북쪽 끝자락으로 내려가는 종주산행을 할 요량이다.
동백역에 접한 아파트 옆 들머리에서 봉수대로 오르는 길이 나있다. 산자락 초입부터 짙은 초록 숲길이 산객을 맞이한다. 보라빛으로 만발한 수국이 아파트 뒤 산허리를 휘도는 길 주변에 늘어서 있는 모습이 천상의 화원같다.
고도가 조금 오르자 하늘로 치고 오를 듯 높은 키를 자랑하던 센텀 빌딩 숲이 소나무 사이 눈 아래로 굽어 보인다. 2백여 미터를 올랐을 뿐인데 까치 꿩 등 산새들의 세상이다.
간비오봉수대는 해발 148미터로 그리 높지 않지만 장산에서 해변 쪽으로 뚝 떨어져 앉아 있다. 먼 바다와 수영 광안대교 센텀 해운대 동백섬 등이 한눈에 들어오는 천혜의 봉수터다. 경상좌도 수군절도사 관할 하에 황령산과 기장 남산 봉수대를 연결하면서 조선 초부터 1894년까지 봉수를 올렸다고 한다.
봉수대에서 내리막 길을 지나 평탄한 능선 오르막이 시작되는 곳에 53보병사단 울타리가 쳐져있다. 부대에 딸린 유격장 산 허리로 난 길을 가볍게 걷는다. 일찍한 시각 부지런한 주민들은 가벼운 차림으로 능선에서 내려오거나 산자락으로 난 둘레길을 따라 걷고 있다.
능선을 지나 옥녀봉 오르는 오르막 길에 멀리서 뻐꾸기 소리가 산행 친구마냥 그치지 않고 따라온다. 지난 주말 고향 친구 부고를 접하고 생곡(生谷)으로 내려갔었다. 작년 고향에 들렀을 때 잊고 있던 33년 전 추억을 되살려 주던 그 친구, 장터 정류소에서 잠시 얼굴을 본 것이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유년기 추억을 함께 기억할 친구가 이제 이 세상에 없다는 것, 산정에서 세상을 굽어보며 지나온 길도 여유롭게 되돌아 볼 장년에 생을 마감한다는 것, 봄날 홀연히 뚝뚝 떨어지는 동백을 보는 듯 허망하다. 여름 한 철 목놓아 울어대는 뻐꾸기는 내년에도 찾아올 것이다. 뻐꾹 소리를 들을 때면 그 친구 생각이 더 간절할듯 싶다.
시간 반만에 도착한 해발 383미터 옥녀봉 정상엔 거대한 바윗돌들이 모여 있다. 뒤돌아 보니 지나온 긴 능선과 해운대 광안리가 가까이 있고 저 멀리 이기대와 아파트 숲 사이로 오륙도도 모습을 보인다.
대천공원 쪽에서 옥녀봉으로 올라온 여우 한 분이 중봉 가는 오르막 길을 앞서 올라간다. 중봉은 해발 403미터로 표지석이 없고 바위들이 봉우리를 대신하고 있다. 앞쪽 멀리 모습을 드러낸 장산 정상, 오른편 해운대쪽 능선 아래로 용암이 흘러내린듯 바위 너덜길이 짙푸른 숲을 관통하고 있다.
산정이 가까와질수록 붉은 보라빛 싸리꽃은 색깔이 더욱 선명하고 짙다. 벌들은 이 꽃 저 꽃 옮겨다니며 꿀 모으기에 여념이 없다. 중봉 아래 고개에서 장산 정상은 1km여, 너른 나무계단이 구불구불 정상 쪽으로 나있다. 계단이 끝나는 곳에 전망대가 있고 오르막 길을 조금 더 오르면 정상이다.
정상으로 난 오르막 길 옆에 늘어선 나무들을 굴비 엮듯 밧줄로 감아 놓았다. 밧줄에 묶인 자리가 눈물인듯 젖어 있고 목이 조인 노송이 신음을 내뱉는 듯 하다. 기둥을 세우고 목책을 치면 될 것을 누가 한 것인지 인간의 이기심과 무개념의 일면을 보는 듯해서 마음이 씁쓸했다.
장산(萇山) 정상은 군 통신시설이 차지하고 있고 정상 표지석은 그 남쪽 울타리 밖 에 서있다. 6.25 때부터 출입이 제한된 정상 되찾기 시민운동이 결실을 맺어 언젠가는 그 정상에 서 보았으면 좋겠다. 금정산과 백양산에 이어 부산에서 세 번째 높은 해발 634m 장산은 옛날 장산국이 있던 곳이라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억새 만발한 환상적인 모습은 계절에 묻고 자신을 전망대 삼아 산객에게 송정 해운대 광안 황령산 금련산 등 부산의 미려한 풍광을 선사한다.
장산 밑 좌측 8부능선을 휘도는 쾌적한 숲길은 선선한 바람과 함께 오롯이 걷는 길이다. 왼편으로 바다처럼 펼쳐진 낮은 주택과 아파트 숲 사이로 솟구치는 돌고래 무리마냥 낮은 산들이 검푸른 등을 드러내고 있다.
장산 북쪽 능선을 차지한 공군부대 앞으로 다가서자 귀가 따갑도록 접근금지 경고방송이 너댓 차례 흘러나온다. 부대를 좌측으로 우회하는 길, 철책에 '과거지뢰지대' 경고 푯말이 여러 군데 붙어 있다. 6.25때 낙동강 전선이 최후의 방어선이었을 터인데 지뢰가 묻힌 내력과 '과거'가 어느 때인지 궁금하다.
어제 북미 정상회담이 있었다. 철의 장막과 죽의 장막에 이어 이 땅에 남아 있는 남북간 남남간 빈부간 노사간 이념과 반목의 보이지 않는 장벽도 산산이 부셔져 해운대 해변 모래처럼 한데 어울리면 좋겠다.
산길 중간 간간이 야생화들이 눈에 띈다. 한 번 봐 달라고 웃음 짓는 그 모습을 외면할 수 없어 한 번씩 바라보며 인사를 건넨다. 장산 북쪽 능선 부대가 차지한 울타리가 끝나는 평탄한 능선에 장산마을, 억새밭, 반여동 쪽으로 난 아스팔트길 삼거리를 만난다. 아스팔트길을 벗어나 억새밭 쪽 400여 미터 고지에 너른 평원이 펼쳐져 있다.
생태경관 보전지역인 그 초장을 관통하는 500여 미터, 만발한 야생화들의 진한 향기가 코끝을 파고 든다. 야생화에 몽롱히 취한 나를 깨우려는듯 장끼 한 마리가 꺼억꺽꺽 소리를 지르며 초지를 가로질러 숲으로 내려앉는다.
시야가 트이고 완만하고 얕은 능선이 넓게 펼쳐져 가슴이 시원하고 마음이 평온하다. 시편 말씀 한 구절이 떠올랐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너른 초장이 끝나고 만나는 장산로는 반송동과 구곡산 갈림길이다. 여기서 북쪽으로 난 고도 500여 미터의 호젓한 솔숲 길은 부산시와 기장군을 경계짓는 능선이다. 그 길 중간중간 마을로 난 갈림길이 만나는 지점 체육시설이나 쉼터에는 주민들이 한가롭게 휴식을 하고 있다. 꽃다래공원에서 올라오는 길 능선 체육공원은 바이크족 산행객 동네주민 등이 쉬며 숨을 고르고 있다. 철봉에 매달려 보는데 턱걸이 한 개도 버겁다.
능선 아래 반송동 경찰특공대 쪽에서 소총 사격소리가 기슭을 들썩이며 울린다. 반송으로 내려가는 길을 외면하고 장산의 북쪽 끝자락인 안평 쪽으로 직진했다. 그 능선 길은 사람이 다닌 흔적이 적어 거미줄이 얼굴에 걸리고 잔가지와 망개 넝쿨이 앞을 가로막는 불편한 길이다.
안평역이 있는 동네에 가까워지면서 좁고 음침하던 산길이 밝아지며 기슭은 주동산교회 뒤로 내려선다. 축대 비탈에 무궁화와 철쭉이 발랄하게 핀 교회 벤치에 앉아 목을 축이고 허기를 달랬다.
좌우로 밭을 끼고 방천에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석대천을 따라 전철4호선 안평역으로 갔다. 배 모양으로 공중에 떠 있는 역사가 웅장하고 미려하다. 우주로 떠나는 은하철도마냥 역사를 벗어난 두 냥 협괘전차는 내 별을 향해 출발했다. 좌측으로 장산 긴 능선이 새로 사귄 친구마냥 멀찍이까지 따라오며 배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