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4.06.01 11:00
나렌드라 모디 인도총리는 누구인가<하>
윌리엄 달림플(William Dalrymple)은 인도 관련 책으로 유명한 영국인 저술가다. 그의 책 ‘정령들의 도시(City of Djinns)’ ‘마지막 무굴인(The Last Mughal)’ ‘흰색의 무굴인들(White Mughals)’ ‘9개의 생활(Nine Lives)’은 인도 서점가의 베스트셀러였다. 지금도 스테디셀러로 인도 지식층의 사랑을 받는다.
‘정령들의 도시’는 인도 수도 델리에 관한 많은 속 깊은 이야기를 들려줬고, ‘마지막 무굴인’은 영국의 식민 지배에 저항해 일어났던 1857년 ‘세포이반란’(영국 시각에서 본 표현) 당시 델리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 인도인 부인을 둬서 그런지 인도인 못지않게 아니 인도인보다 인도에 대해 잘 얘기를 풀어놓는다. 그의 책을 읽으면서 나는 조선일보의 뉴델리 특파원 근무 당시 인도를 더 깊숙이 알게 됐다.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12억 대국의 지도자가 될 것이 확실시되는 시점에서 윌리엄 달림플이 미국 잡지 ‘뉴리퍼블릭’에 모디에 대해 긴 글을 썼다. 글 제목은 ‘인도의 새 총리는 네오-파시스트인가, 개혁가인가’다.
‘정령들의 도시’는 인도 수도 델리에 관한 많은 속 깊은 이야기를 들려줬고, ‘마지막 무굴인’은 영국의 식민 지배에 저항해 일어났던 1857년 ‘세포이반란’(영국 시각에서 본 표현) 당시 델리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 인도인 부인을 둬서 그런지 인도인 못지않게 아니 인도인보다 인도에 대해 잘 얘기를 풀어놓는다. 그의 책을 읽으면서 나는 조선일보의 뉴델리 특파원 근무 당시 인도를 더 깊숙이 알게 됐다.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12억 대국의 지도자가 될 것이 확실시되는 시점에서 윌리엄 달림플이 미국 잡지 ‘뉴리퍼블릭’에 모디에 대해 긴 글을 썼다. 글 제목은 ‘인도의 새 총리는 네오-파시스트인가, 개혁가인가’다.
-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가 지난 5월 26일 뉴델리의 대통령궁 앞 야외에서 취임선서를 하고 있다. /AP
모디 총리의 정치 역정에는 두 가지 변곡점이 있다. 첫째는 2002년 구자라트 폭동이고, 다른 하나는 2008년 타타자동차의 나노 모델 생산라인의 구자라트주 유치이다. 구자라트 폭동은 앞에서 영국인 저술가 달림플이 모디 총리는 ‘네오-파시스트’라고 표현했을 때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그는 구자라트 인도 폭동 당시 힌두 주민들을 선동, 무슬림에 대한 보복 폭력을 사주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당시 희생자 수는 엇갈리나, 인도 주요 일간지 힌두스탄타임스가 2012년 2월 보도한 구자라트 폭동 10주년 특집기사를 보면 ‘1200명이 죽었다’고 되어 있다. 구자라트주에서 무슬림이 많은 피를 흘린 뒤 모디가 얻은 것은 무엇이었나. 그는 당 안팎은 물론 인도 사회에서 적지않은 비판을 받았지만 구자라트주 내 힌두들의 압도적 지지를 받아 권력 기반을 다졌고, 이후 주총리 4선 가도를 달렸다. 잔혹한 정치인인 것이다.
구자라트 폭동 6년 뒤인 2008년 타타자동차 나노 모델 공장 유치는 그가 ‘친기업 정치인’으로 이미지로 변신하는 전기가 됐다. 윌리엄 달림플이 모디는 ‘개혁가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때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내가 그를 안 건 2002년 구자라트 폭동과 관련되어서였다. 2006년 3월 초 당시 조선일보 뉴델리 특파원이던 나는 구자라트주 최대도시 아메다바드에 갔다. 델리의 인디라간디공항에서 비행기로 약 2시간 반 정도 걸리는 거리였을 거다. 아메다바드 방문 목적은 4년 전에 일어난 구자라트 폭동 현장 취재였다. 인도에 근무하러 가기 전에는 구자라트 폭동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엄청난 사건이었다. 인도 밖으로는 어떻게 이런 일이 안 알려졌나 할 정도였다. 주 정부가 집단 폭력 사태를 수수방관하고 뒤에서 조장했다는 얘기까지 듣고 있으니 말이다.
구자라트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나는 인도 현대자동차에 도움을 요청했다. 현대차는 승용차 부문에서 인도에서 2위의 위상을 자랑한다. 인도 전역에 강력한 네트워크를 갖고 있다. 구자라트 내 현대차 딜러를 한 군데 소개해 줬다. 아메다바드의 현대차 딜러 수렌드라 샤루마 사장은 델리에서 내가 취재 목적을 “구자라트 폭동 현장 방문”이라고 하자 영 마땅치 않아했다. 그는 전화통화에서 “매우 민감한 문제다.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고 몇 차례나 강조했다. 그는 내가 아메다바드에 도착할 때까지 구자라트 언어 통역를 구해주지 않았다. 찾지 못했다고 둘러댔다. 나는 현지 여행사를 통해 20대 후반의 남자 가이드 S를 소개받았다.
S를 앞장세워 구자라트 폭동 당시 인명피해가 컸던 나로다 파티야 지역에 갔다. 나로다 파티야에서는 2002년 2월 28일 힌두 폭도 1만5000명이 몰려와 난동을 부렸고 84명의 무슬림이 불에 타 죽었다. 동네 입구에는 경찰 막사가 다섯 개 서 있었다. 동네에 들어가려면 누런색의 천막 옆을 지나가야 했다. 비교적 깨끗한 힌두 거주지역을 지나니 무슬림 거주지역이 나왔다.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빈민가였다. 맨발인 아이들과 그 행색, 구역질이 나올 것 같은 길거리의 오물, 꼬질꼬질한 건물들. 아이들에게 과거 피해 현장을 보여달라고 하니 한 집으로 데려간다. “이 집에서 무슬림 10명이 불에 타 죽었다. LPG 가스통에 불을 붙여 집안으로 던졌다.” 참사의 현장은 좁은 통로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면 있는데, 방 크기가 7㎡도 안 된다. 환한 낮인데도 안은 어두컴컴하고 입구가 아니면 빠져나갈 데도 없다. 당시 이 안에서 꼼짝없는 공포 속에서 최후를 맞았던 사람을 생각하니 숨이 턱 하고 막혔다.
동네를 빠져나오는 길에 천막 파출소에 들어가려고 했다. 동네 상황을 물어보고 싶었다. S가 극구 말렸다. 오나가나 기자들은 못 말린다는 것이다. 들어갔다간 경찰관이 자기 다리를 부러뜨릴 거라고 했다. 그는 “경찰 무섭다. 우리가 타고 다니는 차 번호를 조회할 거다. 어디를 들쑤시고 다니는지 알아본다. 나를 찾아낼지도 모른다. 외국 기자를 도왔다고 보복을 당할 수도 있다.” 그는 진짜 떨고 있었다.
- 2002년 구자라트 폭동 피해의 한 현장인 나로다 파티야 동네. 위 사진의 집 안에서 10명의 무슬림이 불에 타 숨졌다. /최준석 편집장
발단은 2월 27일 구자라트주 고드라 기차역에서 일어난 화재 참사였다. 힌두교의 성지 아요디아에 다녀오던 힌두단체 회원 58명이 고드라역에서 열차가 정차하고 있는 동안에 일어난 방화로 불에 타 죽었다. 고드라는 아메다바드에서 160㎞ 떨어진 지점에 있다. 참극 뒤에 ‘무슬림들이 방화해서 힌두들이 죽었다’는 유언비어가 돌았다. 이는 그렇지 않아도 인종갈등의 역사로 점철됐던 구자라트 사회에 또 다른 대비극을 불렀다. TV가 생중계로 보여주는 고드라역 화재 참사 장면에 힌두 주민들은 극도로 흥분했다.
폭동은 그렇게까지 확대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나렌드라 모디 주총리가 이끄는 주정부가 적극적으로 폭동을 진압하려 했으면 말이다. 나렌드라 모디 당시 주총리는 “작용에는 반작용이 있다”는 말로, 힌두들을 되레 선동했다. 고드라역 희생자들의 사체를 아메다바드 한복판으로 옮겨왔다. 이를 본 사람들은 미쳐 날뛰었다. 폭동은 결국 모디 휘하에 있는 주정부의 방조 속에 자행됐다. 또 인도국민당(BJP)과 같은 힌두민족주의사회단체인 VHP(종교단체)와 바즈랑 달(청년단체)이 폭동을 주도했다.
2002년 2월 구자라트 폭동 당시 가장 많이 알려진 현장은 아메다바드의 굴바르그 소사이어티이다. 이곳에서는 전직 하원의원이 힌두 폭도들이 몰려와 에워싸고 위협하자 전화로 수시간 동안 구조를 필사적으로 요청했으나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하고 죽었다. 72살의 은퇴한 정치인이자 전직 연방 하원의원인 이산 자프리(Ehsan Jafri)는 2월 28일 정오쯤 손녀 아니카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아니카는 아메다바드로부터 남쪽에 있는 항구도시 수랏(Surat)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손녀는 3월 1일 학교에서 춤 발표회가 있는데 할아버지가 올 수 있느냐고 물었다. “출발하셨어요”라고 아니카는 물었고 할아버지는 “이곳 사정이 좋지 않구나. 폭도들이 도처에 있다. 전화를 끊어야겠다”고 말했다. 자프리는 그때 전화를 수없이 걸고 있었다. 많은 폭도들이 “무슬림을 죽여라”는 구호를 외치며 화염병과 자전거 체인, 칼로 무장하고 몰려와 있었다.
그의 집에는 공포에 사로잡힌 이웃 무슬림들이 몰려왔다. 전직 하원의원의 집에 있으면 안전할 것이라고 믿었다. 자프리의 부인 자키아는 “그이가 도움을 요청하는 전화를 100통 이상 했다”고 말한다. 그녀는 살아남았다. 그녀에 따르면 자프리는 구자라트 경찰 총장, 아메다바드 경찰 최고책임자, 구자라트 주정부 최고행정공무원 등 수십 명에게 빨리 경찰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한 증인은 자프리가 나렌드라 모디 주총리에게도 전화를 했다고 법정에서 말했다. 자프리 전 의원은 델리에 있는 부총리 L K 아드바니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같이 하원에서 일했기 때문에 아는 처지였다. 그날 아드바니 부총리와 같이 있었던 한 BJP 관계자는 아드바니가 모디 주총리의 사무실에 직접 전화를 걸어 자프리에 대해 물었다고 말한다.
오후 2시30분, 폭도들은 동네의 출입 게이트를 부수고 밀고 들어왔다. 자프리의 집까지 들어왔다. 여자들은 강간당하고 산 채로 불에 태워졌다. 남자들은 “자이 스리 람”(람 만세라는 뜻의 힌디어. 람은 인도 서사시에 나오는 힌두 왕)이라고 외치라고 강요받았다. 그런 다음 사지가 잘렸다. 아이들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법정에 나중에 제출된 기록에 따르면, 자프리는 폭도들에 의해 옷이 모두 벗겨졌고 그런 뒤 손과 발이 잘렸다. 몸통은 불이 붙은 장작더미에 던져졌다. 굴바르그 소사이어트에서 59명이 죽었다고 경찰 공식 보고서는 말하나, 독립적인 조사는 사망자 수가 69명 혹은 70명이라고 말한다.
- 2002년 촬영한 인도의 무슬림 거주지. 환경이 열악하다. /최준석 편집장
인권단체 ‘휴먼 라이츠 워치’는 한 보고서에서 모디의 주정부가 집단학살에 연루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보고서는 “공격이 사전에 계획됐다. 경찰과 주정부 관리들이 광범위하게 당시 조직되었다”고 말한다. 폭동 뒤 정치권 안팎의 후폭풍은 거셌다. 야당은 말할 것도 없었다. 당시 같은 당 소속의 A B 바지파이 총리는 모디에 대해 불만을 표시했다. 구자라트에서 일어난 일이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인도의 지식인 그룹은 구자라트 폭동에 경악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이쉬스 난디는 2002년 구자라트 폭동 몇 달 후 내놓은 유명한 에세이에서 모디 당시 주총리를 “파시스트”라고 비난했다. 다른 몇몇 학자는 구자라트 폭동을 “집단 학살”이라고 했고, 다른 이들은 “국가 테러”라고 개탄했다.
모디 주총리는 영악했다. 구자라트 폭동의 민심을 자신의 정치적 성과로 연결시켰다. 몇 달 간의 정치적 후폭풍이 가라앉자 모디 주총리는 주 의회 선거를 예정보다 앞당겨 조기 실시했다. 결과는 압승이었다. 폭동의 후유증으로 힌두들은 결속력을 보였고 인구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힌두들의 몰표는 모디에게 쏠렸다. 그는 구자라트 폭동의 파장 속에서 치른 선거에서 가볍게 승리했다. 당시 야당 지도자인 소냐 간디 국민회의당 실력자는 모디 주총리를 “죽음의 상인”이라고 비난했다.
모디의 BJP 내 위상이 강화되면서 반대 정치 세력은 끈질기게 모디 주총리의 2002년 구자라트 폭동 당시 역할과 관련해 유죄를 받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그는 끝내 정치적 공세를 피하고 덫에 걸리지 않았다. 수차례 진행된 법원의 공식적인 조사에도 불구, 그는 유죄를 선고받은 적이 없다. 그의 측근들은 일부 유죄를 선고받았다. 2002년 폭동과 관련해서는 22명이 최종적으로 살인, 살인기도, 폭동음모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는데 이 중에는 모디의 주정부에서 장관(2007~2009)이었던 마야 코드나니도 포함되어 있다. 그녀는 28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마야 코드나니는 나로다 바티야 학살에 참여, 유죄를 선고받았다. 그는 구자라트 폭동 사건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첫 여성이자 주 의원이다.
모디는 구자라트 폭동과 관련, 행정부가 희생자들을 보호하지 못한 데에 대해 지금까지 한 번도 사과한 적이 없다. 일말의 후회를 보인 적도 없다. 그는 구자라트 폭동 관련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기를 거부한다. 지난해 그는 아주 드물게 그 주제에 대해 언급하면서 무슬림들의 고통을 “달리는 차에 깔린 강아지”에 비유한 바 있다. 그는 폭도들의 행동을 절반은 옹호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미국 워싱턴포스트에 그는 “무고한 시크교도가 미국에서 9·11 테러 이후에 살해됐다. 왜냐? 테러분자처럼 보
모디 새 인도총리, 개혁가인가? 파시스트인가?
나렌드라 모디 인도총리는 누구인가<하>
윌리엄 달림플(William Dalrymple)은 인도 관련 책으로 유명한 영국인 저술가다. 그의 책 ‘정령들의 도시(City of Djinns)’ ‘마지막 무굴인(The Last Mughal)’ ‘흰색의 무굴인들(White Mughals)’ ‘9개의 생활(Nine Lives)’은 인도 서점가의 베스트셀러였다. 지금도 스테디셀러로 인도 지식층의 사랑을 받는다.
‘정령들의 도시’는 인도 수도 델리에 관한 많은 속 깊은 이야기를 들려줬고, ‘마지막 무굴인’은 영국의 식민 지배에 저항해 일어났던 1857년 ‘세포이반란’(영국 시각에서 본 표현) 당시 델리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 인도인 부인을 둬서 그런지 인도인 못지않게 아니 인도인보다 인도에 대해 잘 얘기를 풀어놓는다. 그의 책을 읽으면서 나는 조선일보의 뉴델리 특파원 근무 당시 인도를 더 깊숙이 알게 됐다.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12억 대국의 지도자가 될 것이 확실시되는 시점에서 윌리엄 달림플이 미국 잡지 ‘뉴리퍼블릭’에 모디에 대해 긴 글을 썼다. 글 제목은 ‘인도의 새 총리는 네오-파시스트인가, 개혁가인가’다.
‘정령들의 도시’는 인도 수도 델리에 관한 많은 속 깊은 이야기를 들려줬고, ‘마지막 무굴인’은 영국의 식민 지배에 저항해 일어났던 1857년 ‘세포이반란’(영국 시각에서 본 표현) 당시 델리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 인도인 부인을 둬서 그런지 인도인 못지않게 아니 인도인보다 인도에 대해 잘 얘기를 풀어놓는다. 그의 책을 읽으면서 나는 조선일보의 뉴델리 특파원 근무 당시 인도를 더 깊숙이 알게 됐다.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12억 대국의 지도자가 될 것이 확실시되는 시점에서 윌리엄 달림플이 미국 잡지 ‘뉴리퍼블릭’에 모디에 대해 긴 글을 썼다. 글 제목은 ‘인도의 새 총리는 네오-파시스트인가, 개혁가인가’다.
-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가 지난 5월 26일 뉴델리의 대통령궁 앞 야외에서 취임선서를 하고 있다. /AP
모디 총리의 정치 역정에는 두 가지 변곡점이 있다. 첫째는 2002년 구자라트 폭동이고, 다른 하나는 2008년 타타자동차의 나노 모델 생산라인의 구자라트주 유치이다. 구자라트 폭동은 앞에서 영국인 저술가 달림플이 모디 총리는 ‘네오-파시스트’라고 표현했을 때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그는 구자라트 인도 폭동 당시 힌두 주민들을 선동, 무슬림에 대한 보복 폭력을 사주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당시 희생자 수는 엇갈리나, 인도 주요 일간지 힌두스탄타임스가 2012년 2월 보도한 구자라트 폭동 10주년 특집기사를 보면 ‘1200명이 죽었다’고 되어 있다. 구자라트주에서 무슬림이 많은 피를 흘린 뒤 모디가 얻은 것은 무엇이었나. 그는 당 안팎은 물론 인도 사회에서 적지않은 비판을 받았지만 구자라트주 내 힌두들의 압도적 지지를 받아 권력 기반을 다졌고, 이후 주총리 4선 가도를 달렸다. 잔혹한 정치인인 것이다.
구자라트 폭동 6년 뒤인 2008년 타타자동차 나노 모델 공장 유치는 그가 ‘친기업 정치인’으로 이미지로 변신하는 전기가 됐다. 윌리엄 달림플이 모디는 ‘개혁가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때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내가 그를 안 건 2002년 구자라트 폭동과 관련되어서였다. 2006년 3월 초 당시 조선일보 뉴델리 특파원이던 나는 구자라트주 최대도시 아메다바드에 갔다. 델리의 인디라간디공항에서 비행기로 약 2시간 반 정도 걸리는 거리였을 거다. 아메다바드 방문 목적은 4년 전에 일어난 구자라트 폭동 현장 취재였다. 인도에 근무하러 가기 전에는 구자라트 폭동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엄청난 사건이었다. 인도 밖으로는 어떻게 이런 일이 안 알려졌나 할 정도였다. 주 정부가 집단 폭력 사태를 수수방관하고 뒤에서 조장했다는 얘기까지 듣고 있으니 말이다.
구자라트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나는 인도 현대자동차에 도움을 요청했다. 현대차는 승용차 부문에서 인도에서 2위의 위상을 자랑한다. 인도 전역에 강력한 네트워크를 갖고 있다. 구자라트 내 현대차 딜러를 한 군데 소개해 줬다. 아메다바드의 현대차 딜러 수렌드라 샤루마 사장은 델리에서 내가 취재 목적을 “구자라트 폭동 현장 방문”이라고 하자 영 마땅치 않아했다. 그는 전화통화에서 “매우 민감한 문제다.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고 몇 차례나 강조했다. 그는 내가 아메다바드에 도착할 때까지 구자라트 언어 통역를 구해주지 않았다. 찾지 못했다고 둘러댔다. 나는 현지 여행사를 통해 20대 후반의 남자 가이드 S를 소개받았다.
S를 앞장세워 구자라트 폭동 당시 인명피해가 컸던 나로다 파티야 지역에 갔다. 나로다 파티야에서는 2002년 2월 28일 힌두 폭도 1만5000명이 몰려와 난동을 부렸고 84명의 무슬림이 불에 타 죽었다. 동네 입구에는 경찰 막사가 다섯 개 서 있었다. 동네에 들어가려면 누런색의 천막 옆을 지나가야 했다. 비교적 깨끗한 힌두 거주지역을 지나니 무슬림 거주지역이 나왔다.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빈민가였다. 맨발인 아이들과 그 행색, 구역질이 나올 것 같은 길거리의 오물, 꼬질꼬질한 건물들. 아이들에게 과거 피해 현장을 보여달라고 하니 한 집으로 데려간다. “이 집에서 무슬림 10명이 불에 타 죽었다. LPG 가스통에 불을 붙여 집안으로 던졌다.” 참사의 현장은 좁은 통로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면 있는데, 방 크기가 7㎡도 안 된다. 환한 낮인데도 안은 어두컴컴하고 입구가 아니면 빠져나갈 데도 없다. 당시 이 안에서 꼼짝없는 공포 속에서 최후를 맞았던 사람을 생각하니 숨이 턱 하고 막혔다.
동네를 빠져나오는 길에 천막 파출소에 들어가려고 했다. 동네 상황을 물어보고 싶었다. S가 극구 말렸다. 오나가나 기자들은 못 말린다는 것이다. 들어갔다간 경찰관이 자기 다리를 부러뜨릴 거라고 했다. 그는 “경찰 무섭다. 우리가 타고 다니는 차 번호를 조회할 거다. 어디를 들쑤시고 다니는지 알아본다. 나를 찾아낼지도 모른다. 외국 기자를 도왔다고 보복을 당할 수도 있다.” 그는 진짜 떨고 있었다.
- 2002년 구자라트 폭동 피해의 한 현장인 나로다 파티야 동네. 위 사진의 집 안에서 10명의 무슬림이 불에 타 숨졌다. /최준석 편집장
발단은 2월 27일 구자라트주 고드라 기차역에서 일어난 화재 참사였다. 힌두교의 성지 아요디아에 다녀오던 힌두단체 회원 58명이 고드라역에서 열차가 정차하고 있는 동안에 일어난 방화로 불에 타 죽었다. 고드라는 아메다바드에서 160㎞ 떨어진 지점에 있다. 참극 뒤에 ‘무슬림들이 방화해서 힌두들이 죽었다’는 유언비어가 돌았다. 이는 그렇지 않아도 인종갈등의 역사로 점철됐던 구자라트 사회에 또 다른 대비극을 불렀다. TV가 생중계로 보여주는 고드라역 화재 참사 장면에 힌두 주민들은 극도로 흥분했다.
폭동은 그렇게까지 확대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나렌드라 모디 주총리가 이끄는 주정부가 적극적으로 폭동을 진압하려 했으면 말이다. 나렌드라 모디 당시 주총리는 “작용에는 반작용이 있다”는 말로, 힌두들을 되레 선동했다. 고드라역 희생자들의 사체를 아메다바드 한복판으로 옮겨왔다. 이를 본 사람들은 미쳐 날뛰었다. 폭동은 결국 모디 휘하에 있는 주정부의 방조 속에 자행됐다. 또 인도국민당(BJP)과 같은 힌두민족주의사회단체인 VHP(종교단체)와 바즈랑 달(청년단체)이 폭동을 주도했다.
2002년 2월 구자라트 폭동 당시 가장 많이 알려진 현장은 아메다바드의 굴바르그 소사이어티이다. 이곳에서는 전직 하원의원이 힌두 폭도들이 몰려와 에워싸고 위협하자 전화로 수시간 동안 구조를 필사적으로 요청했으나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하고 죽었다. 72살의 은퇴한 정치인이자 전직 연방 하원의원인 이산 자프리(Ehsan Jafri)는 2월 28일 정오쯤 손녀 아니카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아니카는 아메다바드로부터 남쪽에 있는 항구도시 수랏(Surat)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손녀는 3월 1일 학교에서 춤 발표회가 있는데 할아버지가 올 수 있느냐고 물었다. “출발하셨어요”라고 아니카는 물었고 할아버지는 “이곳 사정이 좋지 않구나. 폭도들이 도처에 있다. 전화를 끊어야겠다”고 말했다. 자프리는 그때 전화를 수없이 걸고 있었다. 많은 폭도들이 “무슬림을 죽여라”는 구호를 외치며 화염병과 자전거 체인, 칼로 무장하고 몰려와 있었다.
그의 집에는 공포에 사로잡힌 이웃 무슬림들이 몰려왔다. 전직 하원의원의 집에 있으면 안전할 것이라고 믿었다. 자프리의 부인 자키아는 “그이가 도움을 요청하는 전화를 100통 이상 했다”고 말한다. 그녀는 살아남았다. 그녀에 따르면 자프리는 구자라트 경찰 총장, 아메다바드 경찰 최고책임자, 구자라트 주정부 최고행정공무원 등 수십 명에게 빨리 경찰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한 증인은 자프리가 나렌드라 모디 주총리에게도 전화를 했다고 법정에서 말했다. 자프리 전 의원은 델리에 있는 부총리 L K 아드바니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같이 하원에서 일했기 때문에 아는 처지였다. 그날 아드바니 부총리와 같이 있었던 한 BJP 관계자는 아드바니가 모디 주총리의 사무실에 직접 전화를 걸어 자프리에 대해 물었다고 말한다.
오후 2시30분, 폭도들은 동네의 출입 게이트를 부수고 밀고 들어왔다. 자프리의 집까지 들어왔다. 여자들은 강간당하고 산 채로 불에 태워졌다. 남자들은 “자이 스리 람”(람 만세라는 뜻의 힌디어. 람은 인도 서사시에 나오는 힌두 왕)이라고 외치라고 강요받았다. 그런 다음 사지가 잘렸다. 아이들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법정에 나중에 제출된 기록에 따르면, 자프리는 폭도들에 의해 옷이 모두 벗겨졌고 그런 뒤 손과 발이 잘렸다. 몸통은 불이 붙은 장작더미에 던져졌다. 굴바르그 소사이어트에서 59명이 죽었다고 경찰 공식 보고서는 말하나, 독립적인 조사는 사망자 수가 69명 혹은 70명이라고 말한다.
- 2002년 촬영한 인도의 무슬림 거주지. 환경이 열악하다. /최준석 편집장
인권단체 ‘휴먼 라이츠 워치’는 한 보고서에서 모디의 주정부가 집단학살에 연루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보고서는 “공격이 사전에 계획됐다. 경찰과 주정부 관리들이 광범위하게 당시 조직되었다”고 말한다. 폭동 뒤 정치권 안팎의 후폭풍은 거셌다. 야당은 말할 것도 없었다. 당시 같은 당 소속의 A B 바지파이 총리는 모디에 대해 불만을 표시했다. 구자라트에서 일어난 일이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인도의 지식인 그룹은 구자라트 폭동에 경악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이쉬스 난디는 2002년 구자라트 폭동 몇 달 후 내놓은 유명한 에세이에서 모디 당시 주총리를 “파시스트”라고 비난했다. 다른 몇몇 학자는 구자라트 폭동을 “집단 학살”이라고 했고, 다른 이들은 “국가 테러”라고 개탄했다.
모디 주총리는 영악했다. 구자라트 폭동의 민심을 자신의 정치적 성과로 연결시켰다. 몇 달 간의 정치적 후폭풍이 가라앉자 모디 주총리는 주 의회 선거를 예정보다 앞당겨 조기 실시했다. 결과는 압승이었다. 폭동의 후유증으로 힌두들은 결속력을 보였고 인구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힌두들의 몰표는 모디에게 쏠렸다. 그는 구자라트 폭동의 파장 속에서 치른 선거에서 가볍게 승리했다. 당시 야당 지도자인 소냐 간디 국민회의당 실력자는 모디 주총리를 “죽음의 상인”이라고 비난했다.
모디의 BJP 내 위상이 강화되면서 반대 정치 세력은 끈질기게 모디 주총리의 2002년 구자라트 폭동 당시 역할과 관련해 유죄를 받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그는 끝내 정치적 공세를 피하고 덫에 걸리지 않았다. 수차례 진행된 법원의 공식적인 조사에도 불구, 그는 유죄를 선고받은 적이 없다. 그의 측근들은 일부 유죄를 선고받았다. 2002년 폭동과 관련해서는 22명이 최종적으로 살인, 살인기도, 폭동음모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는데 이 중에는 모디의 주정부에서 장관(2007~2009)이었던 마야 코드나니도 포함되어 있다. 그녀는 28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마야 코드나니는 나로다 바티야 학살에 참여, 유죄를 선고받았다. 그는 구자라트 폭동 사건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첫 여성이자 주 의원이다.
모디는 구자라트 폭동과 관련, 행정부가 희생자들을 보호하지 못한 데에 대해 지금까지 한 번도 사과한 적이 없다. 일말의 후회를 보인 적도 없다. 그는 구자라트 폭동 관련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기를 거부한다. 지난해 그는 아주 드물게 그 주제에 대해 언급하면서 무슬림들의 고통을 “달리는 차에 깔린 강아지”에 비유한 바 있다. 그는 폭도들의 행동을 절반은 옹호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미국 워싱턴포스트에 그는 “무고한 시크교도가 미국에서 9·11 테러 이후에 살해됐다. 왜냐? 테러분자처럼 보인다는 게 이유였다. 미국에서 교육받은 사람이 도발받을 수 있다면, 왜 2002년에 대해 말하는가? 그것은 과거의 일이다. 무엇이 문제인가?”라고 말했다. 그는 뉴욕타임스에는 당시를 돌아보며 “유일한 유감은 언론을 잘 다루지 못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BJP는 그러면 이제 무슬림 시민들과 어떤 관계를 갖고 있을까? 모디가 속한 정당 BJP는 지난 5월12일까지 약 두달간 계속된 총선거에서 무슬림은 단 두명 공천했다. 무슬림 인구비율(13.4%)대로라면 하원의원 후보로 55명은 공천해야 했다. 그의 최측근 아밋샤(BJP사무총장)는 “무슬림을 공천한 정당에 투표하지 말라”고 말해 논란을 일으켰다. 위험한 신호들이다. 구자라트 폭동의 불씨는 14년이 지났지만 살아있다.
- 최준석 주간조선 편집장인다는 게 이유였다. 미국에서 교육받은 사람이 도발받을 수 있다면, 왜 2002년에 대해 말하는가? 그것은 과거의 일이다. 무엇이 문제인가?”라고 말했다. 그는 뉴욕타임스에는 당시를 돌아보며 “유일한 유감은 언론을 잘 다루지 못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BJP는 그러면 이제 무슬림 시민들과 어떤 관계를 갖고 있을까? 모디가 속한 정당 BJP는 지난 5월12일까지 약 두달간 계속된 총선거에서 무슬림은 단 두명 공천했다. 무슬림 인구비율(13.4%)대로라면 하원의원 후보로 55명은 공천해야 했다. 그의 최측근 아밋샤(BJP사무총장)는 “무슬림을 공천한 정당에 투표하지 말라”고 말해 논란을 일으켰다. 위험한 신호들이다. 구자라트 폭동의 불씨는 14년이 지났지만 살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