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내민 고개짓]
음력 12월의 바깥 공기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게 만든다. 햇살이 넓게 펼쳐지기 전 집을 나선다. 거실에서 내려다보이는 테니스장에는 기합 소리가 멀어지더니 사람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다.
길게 그늘진 산자락에 햇볕이 쫓아온다. 어슴푸레하던 나무등걸이 잠깐 사이에 본래의 모습을 드러낸다. 철봉대에 매달려 몸통을 끌어 올린다. 눈에 들어오는 햇살의 각도가 달라졌다. 계절마다 비슷한 시간대에 매달려 단지 아래 공원을 바라본다. 봄, 여름과 달리 눈부심이 사라지고 태양은 오른쪽으로 기울어졌다.
여섯 그루의 매화나무는 외롭지 않게 도서관 입구를 지킨다. 길을 오가는 이들에게 꽃잎과 열매를 철 따라 안긴다. 만물이 추위에 떨고 있는 1월 가지에는 꽃망울이 맺혔다. 이른 날에 꽃을 피워 봄을 가장 먼저 알려주는 꽃, 불의에 굴하지 않는 선비의 절개를 상징하여 난초, 국화, 대나무와 함께 사군자라 하여 표상으로 삼았고 늙은 몸에서 정력이 되살아나는 회춘回春을 의미하기도 한다.
사랑을 상징하는 꽃 중에서 으뜸으로 고결한 마음, 기품과 인내가 꽃말이기도 하다. 한방에서는 다양한 효능으로 수렴, 지사, 구충 치료에 처방한다. 흰 매화는 꽃받침이 분홍빛을 띠는 백 매화와 꽃받침이 녹색인 흰 매화가 있는데 이를 청매화라 부르기도 한다. 조선 시대에는 청매화를 가장 높게 보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한국의 4대 매화는 고봉 매, 선암 매. 화엄 매, 율곡 매로 절이나 서원에 있고 천연기념물이다. 붉은 매화를 홍매화, 흰 매화를 백매화라 부르지만, 꽃 색깔만 다를 뿐 같은 종이다. 꽃피는 시기가 남부지방은 1월부터 3월이고, 중부지방은 3월에서 4월이다. 열매는 매실로 꽃은 매화다. 괴도 일지매는 재물을 털고 난 곳에 매화 가지를 두고 가는 공통점을 보이기도 했다.
성리학자 퇴계 이황은 매화를 아껴서 이것을 소재로 많은 시조를 남겼고, 평소 마당에 심은 매화나무를 아껴 이 나무를 두고 매형, 매선 이라고 불렀다고 하며, 임종쯤에 “저 매형에게 물을 주어라”할 정도였단다. 매화와 참됨을 나누고 배려와 존중을 실천하였으리라. 매화나무는 잎을 틔우기에 앞서 꽃부터 먼저 피어난다. 겨울이 끝나기 전부터 홀로 피어 봄이 올 때까지 그윽한 향기를 세상에 드러내는 기품있는 꽃이 매화다.
몽글몽글 가지마다 솟아난 자태는 가는 발걸음을 멈추고 바라보게 만든다. 녹색과 흰 망울을 드러낸 모습이 추위에 웅크린 우리를 조롱하듯 고개를 내밀고, 말라 죽은 듯 시커먼 몸통에서 새 생명을 뿜어낸다. 두툼한 겉옷을 챙겨 입는 계절에 신비한 자연의 힘을 접한다. 눈 속에 핀 설중매를 떠올리며 언제 닥칠지 모르는 차가운 기온도 아랑곳하지 않고 홀연히 꽃눈을 키우고 있다. 추위와 바람을 견디고 꽃을 안겨주는 겨울 속의 봄꽃 매화가 사랑스럽지 않을 수 없다. 하루하루 달라지는 꽃봉오리를 바라보고 또 관찰한다.
외롭지 않게 길동무가 있다. 세 그루씩 두 팔을 벌려 나란히 이웃해 자란다. 도심 속의 자연 감상 장소다. 아침 산책을 나서는 나에게 기쁨과 기다림을 안겨주는 친구가 되었다. 사람 사는 세상과 달리 조급함도 변덕스러움도 없다. 한 가지만 지켜나가면 된다. 따로 약속하지 않더라도 언제나 한곳에 머물고 조용하지만 나날이 달라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매화는 관상수로 널리 심어졌으나 지금은 매실 수확을 목적으로 재배되어 매화의 기품을 찾기가 어렵다. 사람 키 높이에 맞춰 가지치기하고 열매를 얻기에 적합하도록 관리가 되고 있다. 꽃피는 계절에는 양산 원동과 하동, 광양 등이 관광객들로 등이 떠밀려 다닐 정도다. 오래된 매화의 자태를 만나는 일은 따로 산사를 찾아 나서야 한다.
그 옛날 누렸던 매화의 기품은 자료 속에서 찾아지고 흔한 꽃에서 멀어져 열매 수확기에만 관심거리다. 집마다 항아리에 담아 매실청이나 매실주를 얻기 위해 뒤편에 감춰둔 상비약이요 집안 보물로서의 희귀성도 잃었다.
시골집 대문 앞 두 그루의 매실나무가 떠올려진다. 하나는 가지가 사방으로 뻗어 수확할 수 있다. 때맞춰 가지치기하고 퇴비를 넣는다. 작은 나무는 이제 뿌리를 내리고 작은 가지를 드러낸다. 잘 보살펴 매실 알맹이를 손에 넣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머지않은 따뜻한 날에 활짝 핀 꽃을 안겨주게 되리라. 그때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내 사람들의 관심을 받을 것이다. 긴긴 겨울 찬 기운을 견디고 꽃소식을 전해주는 매화의 기운을 기다린다. 사람들이 가까이하지 않는 시간에 영양분을 공급하고 꽃눈을 키워 우리 앞에 빛을 보여준다. 매화를 아끼는 이유이기도 하다. 자연의 대 섭리에 몸을 낮춘다.
‘매화는 결코 향기를 팔지 않는다’라고 했던가. 긴 인생에서 평탄할 수만 없다. 등성이가 높으면 골짜기도 깊다. 잎이 돋지 않을듯한 고목에서 새롭게 꽃이 피고 열매를 맺듯, 지금은 어렵고 힘들어도 꺾이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다 보면, 맑고 그윽한 매화처럼 울긋불긋 꽃길을 지나, 기품을 안고 결실을 얻는 매실나무처럼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