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에 발표한 최지인님의 글입니다.
노오란 음표가 아가의 웃음처럼 팔랑거리며 떨어지는 거리. 딱히 약속이 없어도 가벼운 신발을 챙겨 신고 부담 없이 산책하기에 좋은 요즘이다. 사진 속 풍경의 주인공이 되어 걷다가 어깨에 살풋이 내려앉는 낙엽 하나에서 흠칫, 우주의 무게와 질서도 느껴보고 가을이 보낸 노을빛 연서에 작정하듯 젖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기후변화 탓인지 기다리다 기다리다 그 기다림에 지쳐버릴 쯤에야 배달된 연인의 편지처럼 요즘의 가을은 뒤늦게 다가와 잠깐 머물다 떠나가 버리기에.
갓 풀해 다린 옥양목의 바삭하고 정갈한 느낌을 닮은 가을의 공기. 갈대가 바람을 몸 안에 담기 위해 스스로 자신의 속을 비워내듯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이 스스로 몸을 비우고 가벼워지는 시기. 그것이 가을에 숨어있는 정조(情調)의 실체이기도 하겠지만 가을은 꼭 부모님을 닮았다. 공들여 거둬들였던 모든 것들을 속까지 훨훨 털어 남김없이 주시고도 늘 더 줄 게 없음이 안타까워 애를 태우시는. 그래서일까, 비어가는 풍경이나 공간들을 바라보노라면 왠지 마음이 허전하고 허기가 찾아들 듯 쓸쓸함이 찾아든다.
무릇 가을 들판, 그 정경뿐일까. 인생의 가을을 맞는 심정 또한 마찬가지다. 이럴 때 허기진 마음과 빈속을 함께 채워주는 것 역시 투박하지만 속 깊은 정이 들어간 어머님표 밥상이다. 고기어(魚)에 가을추(秋), 한마디로 ‘가을고기’를 이르는 추어탕. 이 가을, 절대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음식인 추어탕은 어머님의 그리운 체취와 함께 어릴 적 양동이를 들고 추수 끝난 빈 논 물꼬를 뒤적이던 추억의 맛까지 불러내 지쳤던 삶이 발걸음에 거짓말처럼 힘을 실어준다.
어릴 적 시골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기억이겠지만 비온 뒤 붓도랑엔 어김없이 미꾸라지가 넘쳐서 몇 명이 힘을 합쳐 위에서 아래로 훑어 내려가면 반들반들한 미꾸라지가 팔딱팔딱 춤을 추듯이 튀어 올랐다. 그러면 밑에서 그물(반도)을 펼치고 기다리고 있다가 그물 가득 우글거리는 미꾸라지며 민물고기들을 준비해 온 양동이에 퍼 담았다. 금세 가득 찬 양동이를 들고 마당을 들어서면 일하시다 말고 달려 나온 어머님께서 부엌을 들락날락하시면서 저녁 내내 분주해지셨다.
마당에 큰 솥을 내걸고 물이 설설 끓으면 밭에서 한아름 솎아낸 시래기를 삶아냈다. 덩달아 바빠져서 바가지 가득 빨간 고추며 파란 청양고추를 따오거나 절구통에 마늘을 찧고 들깨를 득득 갈아 양념장 만들기를 거드는 건 아이들 몫이었다. 깨끗이 씻은 미꾸라지를 왕소금 한바가지를 넣어 이물질을 토해내게 하고 부글부글 미끌거리는 거품을 깨끗이 씻어낸 뒤 펄펄 끓고 있는 가마솥에 넣어 푹 익히다 보면 구수한 냄새가 집 울타리를 넘어 마을로 퍼져 나갔다.
툇마루에 앉아 다리를 까딱거리면서 눈길은 마당 한구석에서 김을 폴폴 올리는 가마솥에 고정돼 있던 그때, 허연 수증기와 함께 구수한 냄새를 풍기며 배속의 허기를 있는 대로 발동시킬 즈음의 심부름은 차라리 고문이었다. “봐라 봐라, 저 윗집 할배부터 우선 모셔오고, 아랫집 철이 할매도 니가 부축 좀 하고 오이라 뜨신 거 한 그릇씩 자시게 하구로..얼른 퍼뜩 갔다 온나이~...” 마당을 다 덮을 듯 멍석이 내다 깔리고 부엌의 대접이란 대접은 다 동원되어 이미 냄새로 기별을 받고 모여든 동네 사람들은 뜨거운 인정을 훌훌 불며 나눴다. 사람이 많으면 물 몇 바가지 더 부어 양을 늘렸고, 밥이 모자라면 서로의 손에 들고 온 보리밥을 커다란 양푼에 쓸어 넣고 한가득 추어탕 국물을 넘치도록 부어 옹기종이 모여 앉아 함께 먹었다. 너 나 할 것 없이 다들 곤궁한 시절이라 어쩌다 한 솥 가득 끓여낸 추어탕은 모든 이웃 사람들의 훌륭한 영양식이자, 모처럼 부른 배를 두드리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끄윽 소리 내어 만족한 트림을 하는 날이기도 했다.
많은 영양소가 들어있어 서민들의 대표적인 건강 음식으로 알려진 추어탕에는 양질의 단백질과 비타민 A까지 다량으로 들어 있어 피부를 튼튼하게 보호하고, 세균의 저항력을 높여 주며 호흡기도의 점막을 튼튼하게 해준다. 또한 원기와 숙취 해소를 비롯하여 정력 유지 등을 위한 강장 식품으로 애용되어온 미꾸라지는 콘드로이친이라는 점액물질을 함유하고 있어 인체의 혈관과 장기를 깨끗이 해주어 노화방지 효과를 지닌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게다가 소화흡수가 빨라 위장질환이 있는 환자나 수술 전후의 환자에게도 좋은 영양식이며 성장기의 어린이나 수험생, 임산부 노인에게도 필수적으로 도움을 주는 음식이다.
추어탕의 요리 방법은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한 가지, 사랑과 인정을 버무린 ‘사람 사는 맛’이란 것만은 누가 뭐래도 부인할 수 없는 공통점이다. 밀가루에 넣어 튀김옷을 입히듯이 하여 고추장을 풀은 물에 마늘, 파, 고추 등의 양념 및 약간의 우거지를 넣고 팔팔 끓여서 먹기 바로 전에 계란을 몇 개 풀고 후추를 치면 술안주로도 훌륭한 강원도식 추어탕이요, 주로 통미꾸라지를 사용해 얼큰하게 푹 끓여내면 경기도식 추어탕이다. 그런가 하면 서울 추어탕은 사골국물과 두부, 버섯이 들어가는 게 특징이며, 남도식은 된장과 들깨가루가 더해져 구수한 맛이 일품이다. 그렇다면 우리 부산의 추어탕 맛은 어떨까. 삶은 미꾸라지를 뼈째 갈아서 걸러내 된장과 다진 마늘, 소금과 간장으로 조물거려 미리 간을 배게 한 시래기와 함께 푹 끓여 낸 뒤, 향긋한 방아 잎을 넣고 살짝 한 번 더 끓인다. 먹기 전에 기호에 따라 다진 청양고추와 다진 마늘, 산초를 넣어 먹는데 그 깊은 맛과 향은 뚝배기가 다 비워질 때까지 지속된다.
혀보다 목젖이 먼저 반응을 보이는 음식, 추어탕. 뜨겁지만 칼칼한 맛은 이마에 송송 맺히는 땀을 닦으며 시원하다는 느낌으로 이어지고 넉넉하게 들어간 시래기를 젓가락으로 건져서 숟가락에 얹어 후~우 불다보면 먹는 재미까지 더해진다. 아픈 배도 낫게 하는 어머니 손맛 추어탕은 과식해도 배탈이 나지 않아 몇 그릇이고 다시 청해 먹고 두두룩한 배를 눕듯이 마루 기둥에 기대 앉아 느긋한 포만감에 젖게 하던, 우리 모두의 아름답고 맛있는 추억이다. 다랑이 논 추수가 끝나고 아침저녁으로 살얼음이 끼기 시작할 즈음, 삽을 들고 논으로 나가 이랑 사이를 삽으로 푹푹 뜨다 보면 흙 속에서 꾸물꾸물 기어 나오던 미꾸라지. 환경오염으로 인해 이젠 보기 힘든 풍경이 되었지만 정이 있고, 따뜻한 이웃이 있고, 소박한 웃음이 있었던 그 때가 그리울 때면 한 그릇 뚝배기 가득 넘치는 추어탕집의 문을 열고 들어서 보자.
요즘은 우리 부산을 찾는 외국관광객들에게도 추어탕은 필수적인 맛 기행 코스에 들어있다고 한다. 기본적인 추어탕에 더해 추어탕칼국수, 추어탕수제비, 새알추어탕도 많이 찾는 음식이라고 하니 앞으로 좀 더 특화되고 응용된 추어탕 요리법을 개발해 우리 부산의 다양한 맛을 확보하는 것도 행복한 숙제가 아닐까.
글 · 최지인 / 시인
첫댓글 시에서는 건질 수 없는 수필의 맛이 철철 넘치는 글, 다시 한번 최작가의 진면목을 봅니다. 그리고 먹고싶다.젤 맛있는 추어탕먹어러 가요, 내가 쏠깨요.
반송 가는 길에 있는 원조 추어탕. 언제 먹으려 갑시다.
백시인 다리 푸는 날 연락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