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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3바나바와 사울의 파송
13장부터는 사도행전의 후반부에 해당한다. 여기서부터 사울(바울)이 중심 인물로 등장한다. 바울은 짧은 기간 바나바와 함께 사역하기도 했지만(게다가 처음 팀 사역에서는 두 번째로 그 이름이 언급되다가), 얼마 되지 않아서 그가 주도적으로 선교하게 된다. 이러한 모든 일은 성령의 지시에 따른 교회에 의하여 된 일이었다.
13:4-12구브로에서
바나바와 사울이 소아시아까지 이르는 선교 운동을 시작한다. 서쪽 육로로 가면 직행할 수 있는 곳임에도, 그들은 일찍이 복음을 받아들인 구브로(11:19-21)로 배를 타고 건너간다.
13:13-52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바울과(누가는 이제 그의 이름을 이렇게 부르기 시작한다) 바나바는 배를 타고 소아시아 남쪽 해안으로 돌아온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바울은 회당을 찾아가 사도행전에서 가장 긴 설교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행전의 나머지 부분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복음 전도 과정의 모형을 보게 된다. 즉, 일부 유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만, 이방인들이 훨씬 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동시에 다른 유대인들은 선동하여 사도들의 선교를 강력하게 저지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15:1-21예루살렘에서의 만남
이고니온은 로마 제국이 다스리던 갈라디아 지방 비시디아 안디옥 동남쪽 약 130킬로미터에 위치한 도시로, 4-5일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오늘날 터키의 주요 도시들 중의 하나인 “코뉴아”이다. 로마 글라우디오 황제(주후 41-54년)는 자기 자신을 기리기 위하여 이 도시에 클라우디코니움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나중에 하드리안 황제(주후 117-138년)가 이 도시를 로마 식민지로 삼았다.
14:8-20루스드라와 더베에서
이고니온 서남쪽으로 약 30킬로미터 떨어진 루스드라는 로마의 식민지였다. 더베는 이고니온 동남쪽 97킬로미터 지점, 갈라디아 지방의 경계선에 위치한 도시였다. 글라우디오 황제는 이 도시에 “글라우디오-더베”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붙였다. 루가오니아는 로마 제국이 다스리던 갈라디아 지방의 한 구역을 가리킨다.
14:21-28수리아 안디옥으로 돌아오다
바울과 바나바는 고난과 핍박 그리고 많은 위험을 무릅쓰고, 이전에 방문했던 세 도시와 버가를 다시 방문한다. 그것은 새롭게 만들어진 교회들을 그들이 그만큼 소중히 여겼기 때문이다. 이 후에 그들은 안디옥 선교 기지로 돌아와서 그 동안의 선교여행 결과를 보고한다.
15:1-21예루살렘에서의 만남
“예루살렘 공회”를 개최한 이유와 시기에 대해서는 15:1-41 큰 단락 요약을 보라. 이방인 개종자들을 위하여 야고보가 네 가지 요구 사항을 제시하였다. 처음 두 가지는 이방인들의 전형적인 죄, 즉 우상 숭배와 음행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나머지 두 가지는 유대인 기독교인들과 이방인 기독교인들 사이의 친교를 깰 수 있는 위험스러운 것이다. 즉 목매어 죽인 짐승을 먹는 일과 고기를 피째 먹는 문제에 관한 것이다. 우상(15:20)에게 제물로 바쳐졌기 때문에 종교의식상 부정한 것이므로 먹지 못하도록 금지된, 그러한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은 이방인들에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런 음식을 먹는 일에 함께 참여하지 않으면 이방신 축제에서 소외당하기 때문이다. 야고보가 제시한 요구 사항들은 대체로 유대교 선생들이, 비유대인들이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자 할 때에 지키라고 제시하는 필수 사항과 대동소이한 것이었다. “음행을 멀리하라”는 지시는 레 18:6-18에 언급된 내용을 말하는 것으로, 당시 이방인들은 우상을 숭배하는 행위 가운데 종종 음행을 하였으며, 혼외 성관계를 예사로 가졌기 때문에 이런 지시를 하였다고 본다.
15:22-35이방인 신자들에게 보내는 편지
공회 결정 사항에 대해서는 15:1-41 큰 단락 요약을 보라. 예루살렘에서 지지를 받은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 돌아가서 보고를 한다.
15:36-41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서다
3년 동안 연합 선교를 통하여 많은 열매를 맺었는데, 바울과 바나바는 선교 도중에 돌아간(13:13) 바나바의 조카 마가 요한의 문제로 의견의 불일치가 발생하여 갈라서게 된다. 이러한 분열이 있었지만, 나중에 바울은 마가를 “동역자”(몬 24; 골 4:10-11; 딤후 4:11)라고 부른다.
출처: 굿 뉴스 스터디바이블 단락요약
13:1-3예루살렘 교회에서는 장로들*이 12사도들과 나란히 그리고 12사도들과 함께 치리 기구로서 역할을 수행했다(11:30과 해설 참조). 이와는 달리 안디옥 교회 에서는 치리권이 명백히 선지자들과 교사들 의 동아리에 놓여 있었다. 이 양자의 기능이 엄격하게 구분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언급된 사람들 가운데서 누가 선지자 인지 누가 교사 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더구나 그들 가운데 2명은 곧 사도라고 또한 지칭된다(14:4,14와 해설 참조). 여기에 기술된 교회 헌법은 바울이 설립한 교회들에서도 역시 그 역할을 수행할 것이다(고전12:28; 엡4:11 참조). 그런데 이러한 교회 헌법에는 예루살렘에서 추방당한 '헬라파 사람들'의 특수한 정신 상태가 각인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추방당한 이래로 그리스도 복음의 선포자로서 떠돌아 다녔으며 안디옥 교회도 또한 설립했던 것이다(8:1; 11:19와 해설 참조). - 시므온 은 '흑인'(라틴어로는 '니게르'), 즉 아프리카 사람이다. 루기오 는 구레네 (=키리네) 출신이다. 마나엔 (히브리어로는 '므나헴')은 신분이 높은 유대 가문 출신으로서 헤롯 왕가의 궁전에서 헤롯 안티파스와 함께 자랐다. 이 안티파스는 바로 예수가 살던 지역의 군주가 된 사람이다(헤롯2*). - 한 예배 집회에서(2절. 금식하다 , 마6:16-18과 해설 참조) 한 예언자의 입을 통하여 지시가 내리기를, 선교의 사역을 위하여 두 사람을 따로 세우라 고 했다(성령의 솔선권에 대해서는 10:19와 해설 참조, 부르다 . 롬1:1; 갈1:15-16 참조). 그 다음 예배 때(3절)에 공식적인 파송 의식이 행해졌다. 여기서 안수 (6:6의 관련구절과 마5:23의 해설 참조)는 종신적인 직분에 임명하는 것(딤전4:14; 5:22; 딤후1:6처럼)을 뜻하지 않고 하나의 특정한 한시적인 과업을 위탁하고 축복하는 것을 뜻한다. 선교사를 두 번째로 파송하는 것은 눅10:1과 일치한다(막6:7 해설 참조). 바나바 가 첫째 자리에 언급된 것은(7절; 14:12,14; 15:25) 안디옥 교회의 시각에서 볼 때에 그가 우위를 차지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11:22,24와 해설 참조). 바나바와 사울*이 위임받은 기획과 더불어 비로소 본래적으로 '교회적인' 형태를 띤다. 즉 그 선교 활동이 공식적으로 교회로부터 출발하고 교회가 담당하고 선교사들이 교회에 결과를 보고해야 하는 한에서 그러하다(14:26-27 참조).
13:4-5여행 경로에 관해서는 지도3(제1차 선교여행)을 보라. 구브로 (=키프로스)는 바나바의 고향이다(4:36-37 참조). 그리스도교 복음의 첫번째 선포(11:19)는 별다른 성과가 없었던 듯하다. 언제나 선교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회당 에서 선포하였다. 유대인들 은 여전히 복음 소식의 첫째 수신인이다(9:20; 13:14-16; 14:1; 16:13; 17:1-2,10,17; 18:4,19-21,26; 19:8; 28:17,23; 롬1:16 참조). 유대인들의 거절이 명백할 때에야 비로소 선교사들은 비유대인에게 향했으며(13:44-47; 17:4-5; 18:6; 28:24-28) 독자적인 교회를 설립하였다(18:7; 19:9). - 요한 에 대해서는 12:25와 해설을 보라.
13:6-8 구브로 는 원로원이 관할하는 지방으로서, 총독이 통치했다. 이 총독은 바보 에 주재했다. 마법사(<개역한글판>에는 '박수'라고 번역됨. 박사*)는 당시의 그리스-로마 세계에 만연하였던 정체가 분명하지 않은 인물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들은 짐짓 초자연적인 지식과 능력을 과시하면서 종교적으로 의지할 데 없는 대중들의 호의와 금전을 획득하고자 했다. 그들은 종종 또한 궁정 신학자 및 궁정 점성가로서 높은 지위에 올라서 생계비를 벌기도 했다. 이러한 '환경'을 상대하여 그리스도교 선교는 옳음을 입증하며 관철해 나아가야 했다. 유대 지역으로부터 떠나서 이방 세계로 더 멀리 나아가면 갈수록 더욱 그러해야만 했다(8:9-24, 더 나아가서 19:19 참조). 이러한 환경 속에서 유대인들 은 형편에 따라서는 아주 특별한 존경을 얻게 되었다. 왜냐 하면 그들은 한 분이신, 특별히 강력하고 신비스러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서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19:13-14 참조). 그 거짓 선지자 는 자기의 돈벌이 자리를 잃을까 두려워하였다. 엘루마 는 바예수 (Barjesus)의 번역이 아니라 아람어 '할로마'(haloma=해몽가/마법사)의 그리스어적 음역이다.
13:9-11바울은 성령이 주시는 능력과 밝은 눈으로(9절) 그 마법사를 꿰뚫어 보고 그 죄를 확인시키고서(고전14:24-25 참조) 그를 하나님의 심판에 붙였다(고전5:3-5 참조). 그 마법사는 예수의 편에 속한 것이 아니라('바예수'='예수의 아들'이란 그의 이름에 근거하여 상정할 수 있듯이) 예수의 적대자, 즉 악마의 편에 속한다. 10절에 언급한 모든 비방을 우리는 이 악마를 겨냥하여 주장할 수 있듯이 또한 이 마법사를 겨냥해서도 주장할 수 있다(요8:44; 마13:39 참조). 의도적으로 남에게 하나님의 진리의 빛을 빼앗는 현혹자는 육체의 맹인이 되는 벌을 받는다( 얼마 동안 '[하나님이 정하신] 그 시점까지'). 주의 손 에 대해서는 겔13:9; 14:9 참조. - 9절에 나오는 이름 바꾸기에 대해서는 용어 해설 사울*을 보라.
13:12로마가 지배하는 전 세계에 미치는 그리스도교 선교를 기술하는 바로 벽두에 로마 제국의 한 고위 관직자의 회개를 보도할 수 있다는 사실은 누가에게 중요하다('안내'를 보라). 그의 반응에 관해서는 눅23:47을 참조하라.
13:13-15<사도행전>의 서술에서 이제부터는 바울 이 으뜸가는 자리를 차지한다(13절. 14:12,14; 15:25의 예외에 대해서는 13:2 해설 참조). 유대 그리스도인인 마가 요한 이 바울과 바나바를 버리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아마도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운 이방 선교가 그 때에 아직도 요한에게 의심스럽게 여겨졌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12:12,25; 13:5 참조). 비시디아 안디옥 ('비시디아'는 지방 이름이고 '안디옥'은 도시 이름이다. 즉 '비시디아 지방에 있는 안디옥'을 뜻한다)은 남부 갈라디아('남부 갈라디아'는 비시디아와 루가오니아 지방 일대를 가리키며 '북부 갈라디아'는 오늘날의 앙카라를 중심으로 한 지역을 가리킨다)의 행정 관청과 군사 사령부의 소재지였으며 여기에는 아마도 상당히 큰 유대인 공동체가 있었을 것이다. 으레 그렇듯이 선교사들은 회당 에서 설교함으로써 시작했다(5절과 해설 참조). 성경 해석에는 이스라엘의 모든 성인 남자들이 참가할 수 있었다(눅4:16-21 참조). 예배를 질서정연하게 진행하는 책임은 회당장이 맡았다. 회당장들 (15절)이라고 복수로 표현된 것은 대표 기구 전체를 뜻할 것이다.
13:16-25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백성의 역사가 성취되었다. 그러므로 누구나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7장의 스데반 연설도 그렇게 주장한다). 바울은 오직 가장 중요한 사실들만을 언급한다. 조상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애굽 으로부터 탈출, 가나안 정복(450년이라는 햇수는 애굽 체류 400년에다 광야 생활 40년, 그리고 가나안 정복 기간 10년을 합한 것이다). 이러한 정보는 모두 다윗 을 목표로 하여 진행한다. 22절에 표시된 바와 같이 다윗은 이미 이스라엘을 위한 구주 (눅2:10-11과 해설 참조)이신 예수의 전조와 예형(豫型)과 같은 분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다윗의 씨 에서 나오게 될 것이라고 했다(23절. 삼하7:12,16 참조). 세례자 요한 에 관한 정보를 비교적으로 폭넓게 삽입한 것(24-25절. 눅3:15-16 참조)은 요한을 메시야로 여기는 경향이 있는 청중들을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18:25-28; 19:1-5 참조, 요한의 제자들*). - 전체 연설은 처음부터 단지 이스라엘 사람들 (16절. 2:22,29,36; 3:12 참조)만을 겨냥하고 있을 뿐 아니라 명백하게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 (16,26절)을 겨냥한다. 이 사람들은 38절에서 형제들아 라는 부름말 속에 편입된다.
13:26-31 이 구원의 말씀 (26절. 10:36 참조)을 바울은 베드로의 설교(2:22-24; 3:13-15; 4:10; 5:30-31; 10:38-40)로부터 알려진 대조 도식에 따라 전개한다. 이 대조 도식은 유대인의 악한 행위와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대조시키며 끝에 가서 증인 으로서 사도들에 대한 지적을 내세운다(31절. 1:8과 관련구절 참조). 누가에 따르면 바울은 단지 이 증인들 을 지시할 수 있을 따름이다. 바울 자신은 9:1-9절에 기술된 그의 회개 때의 환상 체험에도 불구하고 또 고전15:8과 갈1:1,15-16에 기술된 그의 그리스도 현현 체험에도 불구하고 누가가 보기엔 사도들*의 동아리에 속하지 않는다(1:21-22 참조). - 기록한 (29절), 눅18:31; 24:25-27,45-46 참조. 나무 , 5:30과 해설 참조.
13:32-37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 (눅1:55,72-73 참조)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예수를 일으키신 부활 사건에서 결정적으로 성취되었다(32-33절. 5:30 참조). 예수의 부활은 하나님의 오른편에 높이 올리우심(2:33 참조)과 동일시되며 약속된 다윗 후손이 그의 통치권에 임명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여기서 시2:7이 성취된다(그 구절의 해설 참조).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부활시키고 왕위에 앉히심으로써 다윗에게 약속하신 은사 (즉 구원을 가져오는 영원한 통치의 약속, 삼하7:15-16 참조)를 성취시키셨다. 이 약속의 성취는 눈앞의 청중에게(= 너희에게 )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모든 세대들에게도 해당된다. 이 은혜의 약속이 다윗 개인에게는 성취되지 못했다(36절). 그것은 예수에게서 성취되었다(37절. 2:25-32 참조). 그것은 그의 통치에 굴복하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구원과 생명을 일으키도록 작용할 것이다(3:15-16; 5:31; 13:46,48 참조).
13:38-41예수를 통하여 이제 죄 사함의 은사가 제공된다(2:38; 5:31; 10:43; 눅24:47 참조). 38 하반절과 39절의 발언은 궁극적인 구원에 참여하는 가능성을 원칙적으로 또한 비유대인들에게도 열어놓는다. 구체적으로 비유대인들이란 여기서 누구냐 하면 바로 그 자리에 임석해 있는 '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 '(16,26절 참조)이다.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근거하여 선사되는 것이지 율법 성취에 근거하여 선사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울서신의 중심적인 발언을 생각나게 한다(38-39절 해설 참조). 그러나 누가의 서술에 따르면 처음으로 그것을 진술하고 상응하는 귀결을 끌어낸 사람은 베드로였다(10:36,43과 해설 및 15:7-11 참조). 40-41절의 경고는 이 자리에서 매우 엄하게 들린다. 이제 이방 선교(=이방 사람들에 대한 선교)가 눈앞에 떠오른다(41 하반절의 일 에 대해서 2절; 14:26 참조). 그것은 막힘 없이 대규모로 펼쳐질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유대인들이 여기에 반응하는 적대감도 역시 거세질 것이다(44-45,50절을 보라).
13:42-43 유대인 과 이방인으로 구성된 한 신앙 공동체의 최초의 핵심이 생겨났다(개종자*와 '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 '은 서로 구별된다. 그러나 여기서는 16절과 26절에서처럼 동일한 동아리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은혜 는 설교를 통하여 접근된다(14:3; 20:32 참조). 그것은 한 새로운 거룩한 삶의 영역과 같은 것이다. 사람은 믿음을 통하여 그 안에 들어가서 그 안에 머물러 있으며 믿으면서 거기에 친숙해져야 한다.
13:44-49 온 성 (44절)은 그 성의 거의 전 주민을 가리킨다. 이는 16절과 26절의 '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 '만이 아니다. 유대인의 시기 속에는 이스라엘과 유대교가 그 정체성을 상실할 것이라는 우려가 섞여 있다. 만일 비유대인들이 먼저 율법을 수용함이 없이 하나님의 백성에 접근하는 길을 획득한다면 말이다. 다시 말하면 율법과는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대한 믿음이 종말에 새로워진 하나님 백성에 소속하는 데 필요한 유일한 조건이 되어야 한다면 말이다. 유대인 편에서 제기한 비방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담겨 있을 것이다. 즉 유대인들은 이것이 하나님의 의도라는 사실을 격렬하게 부정하며 예수가 참으로 메시야일 수 있다는(9:22; 18:28 참조) 사실을 격렬하게 부정한다는 사실 말이다. 그러나 선교자들에게 있어서는 이스라엘과 세계를 위한 영생(46,48절)이 중요한 문제이다. 만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 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이스라엘을 비껴서 이방인 에게로 갈 것이다(46절). 사49:6 말씀은 예수 자신에게 해당되는 말씀이다(눅2:32 참조). 그러나 여기서는 선교사들에게 내리시는 주님(=예수)의 지시로 나타난다. 유대인들의 비방(45절)과 대조적으로 이방인들은 찬송(48절. 눅5:25-26과 해설 참조)으로 응답한다.
13:50-5250절의 사건 경위는 아마도 다음과 같이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유대인들 이 회당에 참석하는 상류층 부인들(이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다)을 선동하여 선교사들을 도시 밖으로 추방하게 했다. 이 부인들의 남편들과 아들들은 아마 그 도시의 고위 관리로서 이 일에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이다. 티끌 을 떨어버림은 분리를 실행하고 심판을 선고하는 하나의 상징 행동이다(눅9:5; 10:10-11 참조). 52절에 대해서는 눅6:22-23; 행5:41; 살전1:6 참조.
14:1-7 이고니온 은 안디옥에서 동쪽으로 약 140km 떨어져 있다. 이고니온은 루가오니아 지방의 수도이며 비옥한 농경 지역의 중심지다. 사건의 경과는 안디옥에서 일어난 것과 유사하다. 허다한 헬라인들 (1절)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로 볼 수 있다. 2절의 마음 은 사람의 생명의 중심, '정서', 또는 그 사람 자체를 뜻한다(22절; 2:43; 15:24; 눅1:46 참조). 이러한 표현은 히브리적 인간상에 상응한다. 표적과 기사 는 3:12-16에 대한 해설과 고후12:12의 관련구절을 보라. 8-10절은 하나의 구체적인 사건을 보도한다. 관원들 (5절)은 그 곳의 유대 공동체의 관리들이다(3:17; 4:5,8; 눅23:13,35; 24:20 참조). 유대인들은 일종의 사형(私刑) 행위로 선교사들을 돌로 치려고 했다. 그것은 그들이 선교사들의 선포를 참람된 것으로 느꼈다는 것을 나타낸다(레24:10-16 참조).
4절: 4절과 14절에서 바나바와 바울을 사도 로 지칭하는 것은 안디옥에서의 진술 방식을 채택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시리아의 안디옥에서는 선교와 교회 설립을 하도록 성령의 부르심을 받고 교회로부터 그에 상응하는 위탁을 받아 파송된 형제들을 사도라 칭했다(13:1-3과 해설 참조). 이러한 사도 개념은 누가의 사도 개념과 구별되며(1:21-22와 해설 참조) 또한 바울 자신의 사도 개념과도 역시 구별된다.
14:8-10치료에 관해서는 3:1-8에 베드로와 (요한)에 관한 보도 참조. 바울은 이번에는 회당에서 그리고 유대인들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 앞에서 연설하지 아니했다(9절). 분명히 그는 개방된 광장에서 순전한 이방인 청중 앞에서 연설하였다.
14:11-13여기에서 보고되는 것은 이교적 종교성의 입장에서 이해할 만한 반응이다(10:25; 12:22와 해설 참조). 무리가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말하였기 때문에 바나바와 바울은 거기에서 행해지는 일을 곧바로 이해할 수 없었다. 쓰스 (='제우스', 로마 신화로는 '쥬피터')는 올림피아의 신들 가운데 가장 높은 신이며 허메 (로마 신화로는 '머큐리')는 위계가 훨씬 낮은 신으로서 신들의 길 안내자, 대변자, 사자이다. 바울을 바나바의 하위에 두는 것에 대해서는 13:2에 대한 해설을 참조하라.
14:14-18 옷 을 찢는 것(14절)은 신성모독적인 짓거리에 대한 놀람의 표현이다(막14:63-64 참조).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이제 꿰뚫어 보았던 것이다. 모든 신적인 위광을 철저히 분쇄하기 위하여 그들은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그들과 동일함을 보여주고 큰 소리로 외치기를 자기들도 죽고 마는 인생에 불과하다고 했다(15절). 이러한 항의로부터 시작하여 하나의 복음선포 연설이 전형적인 형태로 전개된다. 회당에 속한 유대인들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이들은 비로소 자기들의 거짓된 신들(문자적으로는 '헛된 것, 허탄한 것'. 렘2:5; 8:19; 사44:9-20 참조)로부터 돌아서서 모든 것을 창조하신 참 하나님께로 돌아와야만 한다. 이러한 기본적인 회개 작업은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이 직접으로 이방인들 을 상대로 하는 경우에는 앞으로는 언제나 떠맡아야 하는 일이다(17:22-30; 살전1:9; 엡2:11-12 참조). 이 일도 역시, 아니 바로 이 일이 복음 의 설교이다(15절). 눅24:47과 상응하게 여기서 회개가 가능하게 되고 죄사함이 제공되는 한 그것은 복음의 설교이다. 이러한 설교는 이스라엘을 상대로 하는 경우에 필요로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심오하고 훨씬 더 폭넓은 것이다. 왜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전에는 비유대인들에게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다 (16절)는 사실이 그들 편에서 죄가 없고 심각한 죄의 결과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롬1:18-32; 엡2:1-3 참조). 다른 한편으로 이것은 하나님이 이 시대에 이방인들 을 전적으로 외면하셨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더욱이 하나님은 자기의 창조의 선물을 통하여 이방인들에게도 역시 늘 관심을 보내셨다(17절. 시104:13-15; 145:15-16; 렘5:24 참조). - 이방인들 앞에 행한 이 첫번째 설교는 구조와 내용으로 판단할 때에 이방 설교의 한 조각이라 볼 수 있다(그러한 설교의 완전한 형태는 17:22-31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는 우선 그릇된 길에 빠진 이방 종교의 가장 나쁜 표현(즉 우상 숭배 따위)을 방어하는 것이 주요 관심사이다. 그러나 루스드라에서도 역시 바나바와 바울은 이것 이상으로는 성공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19-20절과 해설 참조).
14:19-20 이고니온 에서 두 사도에게 행하려고 했다가 행하지 못한 일(5절)을 뒤쫓아 온 유대인들이 이제 루스드라에서 해치운다(고후11:25; 딤후3:11 참조. 안디옥 은 비시디아의 안디옥을 가리킨다. 13:14 참조). 루스드라의 무리가 그 폭행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는 사실은 그들이 바나바와 바울에게 실망을 해서 그들에게 무관심했거나 또는 심지어 적대적으로 맞섰다는 것을 나타낸다. 20절을 통하여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한 루스드라에서도 사람들이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제자들 , 11:26에 대한 해설을 보라).
14:21-22 더베 라는 도시는 갈라디아 주('주'는 로마 제국의 행정 구역을 가리키는 명칭)의 동남쪽 맨 끝 구석에 위치해 있다. 이 도시는 이 제1차 선교여행의 마지막 지점이다. 바나바와 바울은 갓 설립한 교회들을 귀로에 다시 한 번 방문한다. 이 교회들은 생겨날 때에 이미 유대인과 이방인으로부터 적대적 행위를 경험하였으며 이제 또한 한층 더 그들의 적대감에 노출되어 있다. 바나바와 바울이 이 도시들을 이렇게 곧바로 다시 방문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22절의 우리 는 선교사들과 새 회개자들을 함께 포함한다(살전3:4 참조). 예수를 메시야로 고백하는 사람은 모두 그분의 길을 걸어가도록 초대받는다(눅24:26; 21:12-19 및 딤후3:12와 관절구절 참조).
14:23-25신생 교회들의 조직적인 공고화에 대해서도 보도할 수 있는 것은 누가에게 중요하다. 누가가 여기서 장로들 의 임명에 관해서 말할 때에는 그가 자기 시대의 형편과 이상을 이 초기시기로 소급시키는 것처럼 보인다(딛1:5; 딤전5:17,19와 '안내' 참조, 더 나아가서 13:1 해설 참조). - 버가 에서는 분명히 지나오는 길에 복음이 선포되지 않았다(13:13-14 참조). 바닷가에 위치한 앗달리아 는 항구도시로서, 거기에서 바나바와 바울은 배를 타고 그들의 선교여행의 출발점으로 돌아가게 된다.
14:26-28이제 완성된 일 은(13:2 참조) 이방인들 가운데 행하는 선포이다. 이 선포의 결과로 이방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대한 믿음에만 근거하여 종말의 구원 공동체에 받아들여진다(27절). 그들은 먼저 할례나 모세 율법의 수용을 통하여 옛 하나님 백성에 편입되는 절차를 거치는 것이 아니다. 이 일 (=이방선교)로 말미암아 멸시하는 사람들 , 즉 유대인들이 망하게 될 운명에 처하게 된다(13:41). 따라서 이 이방선교는 그리스도교 교회 내부에서도 역시 심각한 분열의 시련을 몰고 올 것이다(15장).
15:1-2 유대 로부터(즉 예루살렘으로부터, 11:1; 15:24 참조) 온 사람들은 철저히 유대기독교적 입장을 대변한다. 그들의 주장인즉 약속의 성취에 참여하고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은 할례*라는 언약 표시와 모세 율법의 준수를 통하여(12절 다음의 해설 참조) 하나님 백성인 이스라엘에 소속되든지 또는 편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메시야 예수의 오심은 이스라엘에 주신 약속이 성취되기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위의 주장에 원칙적으로 아무런 변화를 일으키지 못했던 것이다. 만일 이들의 주장이 맞다고 하면 안디옥 교회 내의 많은 사람들은 구원의 바깥에 서 있는 셈이며 이 교회의 선교 사업 (<개역한글판>에는 '일'이라고 번역되어 있음. 14:26 해설 참조)은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며 구원이 없는 사역일 것이다. - 갈2:1-2에 따르면 바울은 이 예루살렘 여행을 신적인 지시에 따라 착수하였다. 그러나 신적인 지시와 교회의 위임은 서로 배제해선 안된다(13:2-3 참조). - 장로들 에 대해서는 11:30과 해설 참조.
15:3-5대표단은 육로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데 도중에 베니게 (='페니키아', 11:19절)와 사마리아 (8:4-25)에 있는 교회들을 방문한다. 이 교회들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추방당한 헬라파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세운 것이다(8:1과 해설 참조).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온 일 에 대한 대표단의 보고를 듣고 모두 크게 기뻐했다. 예루살렘 교회에 이르러서 그들은 전체 회중들과 교회의 지도 기구(11:30과 해설 참조)로부터 영접을 받았다. 5절은 어떤 집단으로부터 반대가 야기되는지를 명백히 밝혀준다( 바리새파* ).
15:6-12유대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은 몇몇 사람들 (5절)의 사고와 정서에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총회에서는 어떤 합의에도 이르지 못한다. 그래서 지도 기구는 바나바와 바울과 더불어(12절) 비개방 회의(6절)에서 그 문제를 토의한다. 그러나 여기서도 많은 변론 이 일어난다(7절). 마침내 베드로는 하나님이 이루신 사실들을 지시함으로써 그 논쟁을 종결짓는 데 성공한다(7 하반절에 대해서는 10:1-43 참조. 8-9절에 대해서는 10:44-48; 11:15-17 참조. 마음을 아시는 , 10:34-35 참조).
9절에서 다시 한 번 명백해지는 것은 '정결' 문제가 분명히 논쟁의 핵심을 이룬다는 사실이다(10:14-15; 11:2-3 참조). 유대교인들과 철저한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의 백성이 - 바로 메시야의 공동체도 역시 - 정결을 통하여 구원을 받는 자격을 얻는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이 정결은 할례와 율법의 지시(특히 정결 규정)에 따르는 삶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종말의 거룩한 공동체 안에는 정결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존재해서는 안되며 정결하지 않은 자들 과의 교제가 더 이상 있어서는 안된다(쿰란 공동체의 견해 참조, 쿰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10장에 보고된 사건들을 통하여 다음 사실을 명백히 하셨다. 종말을 위하여 그리고 종말의 하나님 백성에 소속되기 위하여 요구되는 정결은 오직 하나님이 주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만 회복된다(9절). 또 이 정결은 믿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시는 종말적 성령 선물을 통하여 회복된다(8절. 겔36:25-27 참조). 사람이 계속해서 그리고 새로이 할례와 율법 인수를 조건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정면으로 도전하는( 하나님을 시험하다 . 10절) 셈이다.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 (10절)라고 표현한 베드로의 말에 대하여 전에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은 다른 의견을 개진할 수 있을 것이다(빌3:6 하반절 참조). 그렇지만 바울도 11절의 발언은 전적으로 지지할 것이다(빌3:7-9; 행13:38-39와 해설 참조). - 11절은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의 마지막 말이다! 12절에 이르러서 바나바와 바울 (이름의 순서에 대해서는 부록의 본문 비평 주를 보라)이 이 회의석상에서 한 번 발언할 기회를 얻는다. 베드로처럼 그 둘도 역시 하나님이 함께 하신 사실들( 표적과 기사 , 14:3과 해설 참조)을 지시해 보인다. 이렇게 내디딘 선교의 길이 옳음을 하나님 자신이 이런 사실들로써 입증해 주셨다.
15:13-18 야고보 는 회합 처소의 주인이며 회합의 주재자이다. 그는 원시교회를 지도함에 있어서 베드로의 후임자로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12:17 참조). 그는 베드로의 입장에 선다(14절. 권고 [眷顧]하신, 눅7:16과 해설 참조). 그는 성경을 통하여 그 입장이 입증된 것을 발견한다. 16-17절은 암9:11-12를 그리스어 번역에 따라 인용한 것이다. 16절의 예언은 다윗의 자손 예수가 하나님의 오른편 옥좌에 추대되시고(2:34-36 참조) 그리고 사도들이 곧 이어서 옛 하나님 백성으로부터 종말의 새 이스라엘을 모았다는 사실(2:39와 해설 참조)에서 성취되었다. 그러나 역사 전체의 의미와 목적은 다음 일에서 마침내 비로소 성취된다(17절). 그 남은 자들 , 즉 인류의 나머지(유대인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을 가리킴)가 하나님께 돌아오며 모든 이방인들 이 종말적인 이스라엘에 편입된다는 사실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방 사람들(=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 )에게 그의 구원의 통치권을 제기하신다. 이러한 모든 일이 일어나는 데서 하나님은 옛날에 결정하신 일을 행하실 따름이다(18절. 이 구절은 사45:21로부터 작성한 것을 포함하며 사45:14-25의 전체 단락을 배경으로 지시한다).
15:19-21만일 베드로의 주장을 원칙적으로 옳다고 한다면 그리고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할례와 율법을 전수받도록 강요받지 않는다면, 이제 유대 그리스도인과 이방 그리스도인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하나의 새로운 길이 모색되어야 한다.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이방 그리스도인과의 교제를 통하여(이것으로 말미암아 많은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 부정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러한 불안감을 끊임없이 줄 필요 없이 양 집단이 공존할 수 있는 하나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 야고보는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준수해야 할 네 개의 요구 사항을 제시한다. 그들이 이것을 준수하면 유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들과 더불어 식탁 교제를 갖는 것을 허용하는 정도의 의식적 '정결'을 소유하게 된다. 1) 이방의 신들을 위한 제의적인 도축에서 생긴 고기를 금하는 것 및 이교 문화적인 축제의 식사에 참석하는 것을 금하는 것( 우상의 더러운 것 , 고전10:14-22 참조). 2) 모세의 율법에 금지된 근친간의 혼인을 금하는 것( 음행 은 레18:6-18의 의미로 말한 것임). 3) 모세 율법의 규정에 따라 도살하지 않은 짐승에서 생기는 고기를 금하는 것(따라서 목매어 죽이는 짐승은 피가 흘러나올 수 없어서 그 살 속에 피가 고여 있다(레17:13-14 참조). 4) 피를 먹는 것을 금하는 것(레17:10-12 참조). 이 규정들은 모두 레17-18장에 있으며 예로부터 유대 땅에서 유대인들과 함께 살아가고자 원하는 모든 비유대인들이 준수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것은 세계의 모든 회당에서 안식일마다 낭독되는(21절) 모세 율법의 구성 내용이다. 그래서 그것은 기본적으로 도처에 알려져 있는 것이다.
15:22-29공식적인 결의를 체결하는 자리에 다시금 전체 회중이 참가한다(22절. 6절 참조). 그러나 결의 사항을 전달하는 편지는 지도 기구의 이름으로 발송된다(23절). 이 지도 기구가 이 결의에 대하여 궁극적으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28절은 이 결의가 성령 의 뜻에 순종하여 결정되었음을 말한다(1:24-25; 5:32 참조). 그 배경에는 성령이 교회와 그것을 책임진 지도자들이 만장일치로 체결한 결의 사항을 통하여 성령이 말씀하신다는 확신이 놓여 있다. 사도들과 장로들 은 스스로를 이방 그리스도인들의 형제들 이라고 분명하게 지칭하며 이방 그리스도인들을 형제들 이라고 부른다(23절. 13:38; 13:16 해설 참조). 소란을 일으킨 자들은 책망을 받는다(24절). 그 반면에 바나바와 바울은 그들의 사역이 옳다는 인정을 완전히 받는다(25-26절). 유다 (22,27절)라는 이름은 여기에서만 언급된다. 실라 ('사울'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라틴어로는 '실바누스')는 바울의 동역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40절에서 18:5까지, 살전1:1의 관련구절을 보라). 이 결정이 갈2:6에 나오는 바울의 진술과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용어 해설의 '사도훈령*' 참조.
15:30-35 선지자들 (32절)에 관해서는 13:1과 해설 참조. 원시기독교 선지자들의 으뜸가는 본래적인 기능이 무엇인지가 여기서 분명해진다(고전14:37 참조).
15:36-41제2차 선교여행의 출발은 심각한 갈등의 어두운 그림자로 드리워져 있다. 바울은 마가 요한 을 선교여행에 또 한 번 데려가는 것을 단호히 거절한다. 이 일 때문에 바울은 결국 바나바 와 갈라서게 된다. 결별의 근거는, 바울이 보기에 바나바도 마가와 마찬가지로,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운 이방 선교에 대한 사상 배후에 분명하게 그리고 충분할 정도로 일관성 있게 서 있지 못했다는 사실에 있을 것이다(마가 요한에 대해서는 13:13과 해설 참조, 바나바에 대해서는 갈2:13 참조). 그러한 갈등이 사도회의 이후에도 아직 가능했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표시한다. 즉 사도회의에서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운 이방 선교를 위한 기본 결정이 내려지기는 했지만 이로써 그 실천에서는 어려운 문제들이 비로소 시작되었다는 사실 말이다(사도훈령*). 실라 (40절)에 대해서는 22,27절과 해설 참조. 41절에서 수리아와 길리기아 에 있는 교회들에 대하여 공식적으로 최초로 언급된다(23절, 9:30 해설 참조). 여행 경로에 대해서는 지도3 참조(제2차 선교여행).
출처: 해설 관주 독일어성서공회판 본문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