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화. 동반 자살
신성한 매실 758
최림이 마지막으로 경찰서에 근무하는 날이었다.
내일 바로 파출소로 이동해야 하므로 그는 자신의 물품을 챙기고 있었다.
퇴근 무렵이었다.
마치면 근처 허름한 술집에서 술이나 한잔할까, 하는데 한 통의 전화가 왔다.
굵직한 남자 목소리였다.
“아직도 날 쫓고 있소?”
최림은 그로부터 전화가 올 줄 알았으므로 직감적으로 그인 줄 눈치챘다.
그래도 최림은 직접 그를 확인하고 싶었다.
“그날 경찰서 습격은 완벽하더군요. 그런데 누구시죠?”
“하하. 그 작전의 설계자입니다.”
그는 꽤 여유가 있어 보였다.
“그렇군요. 그런데 용건이?”
“이왕 체포될 거면 이 사건 때문에 가장 애먹은 최 형사님에게 기회를 줄까 해서요. 내일 시간 되겠습니까?”
“…….”
최림은 내일 첫 근무지로 가는 날인데 또 연차를 내야 하나, 하고 생각했다.
그래도 그는 그를 만나고 싶었다.
“좋습니다. 그녀도 함께 볼 수 있습니까?”
“누구?”
“민서라, 아니, 민채원 씨 말입니다.”
“아! 물론입니다. 그날 그녀 때문에 경찰서에 일찍 복귀하지 못하여 서장에게 한 소리 들었으니 내일 따지면 되겠네요. 하하.”
“몇 시에 어디로 가면 되겠습니까?”
“오후 5시, 지리산 천왕봉에서 뵙겠습니다.”
“네? 그리 먼 곳까지?”
“오시고 안 오시고는 최 형사님 마음입니다. 그럼, 이만 끊겠습니다.”
다음날 최림은 발령받은 파출소에 전입신고만 하고 조퇴했다.
다행히 지구대는 지리산으로 올라가는 초입 길과는 그리 멀지 않았다.
아침부터 여름이 시작되려는 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최림은 그날처럼 도평마을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걸어 올라갔다.
불과 며칠 전 그는 요한 공동체 마을을 찾기 위해 그 길을 뚜벅뚜벅 걸었다.
걷다 보니 어느새 중간지점에 다다랐다.
이쯤에서 그는 합동수사본부로 자리를 옮긴 조민태 형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무래도 전두태를 만나는 걸 말해야 할 것 같았다.
“혼자만 아시고 계시고, 아직은 비밀로 해주세요.”
“알았어. 그래도 일 끝나면 반드시 연락해 줘.”
조 형사는 떨리는 목소리로 최림에게 당부했다.
“알겠습니다.”
왼쪽은 천왕봉 오른쪽은 요한 공동체 마을이 나오는 두 갈래 길이였다.
최림은 오른쪽 길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때는 그 길로 내려갔다.
그런 후, 민서라와 예상치 못한 정사를 나누었다고 생각하니 설핏 웃음이 나왔다.
최림은 그곳에서 걷고 또 걸었다.
마침내 지리산의 최고봉 천왕봉이었다.
비는 더욱더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그 비 때문에 이곳엔 둘을 제외하곤 아무도 없었다.
그곳에 두 남녀만 등을 지고 멀리 아래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최림은 자신이 왔음을 헛기침으로 알렸다.
빗소리가 요란했다.
“잘 오셨소.”
그가 먼저 뒤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녀, 민채원이 돌아보며 최림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
최림은 기분이 묘했다.
“술 한잔해야죠. 체포될 땐 체포되더라도 …….”
전두태는 품속에서 소주병과 종이컵 세 개를 꺼냈다.
빗물이 흘러 얼굴 형체를 알아보진 못했어도 두 사람의 입에서는 술 냄새가 났다.
아마 둘은 전주가 있는 모양이었다.
최림은 엉겁결에 그가 따라주는 술을 받아 마셨다.
이어 그도 그리고 그녀도 돌아가며 술을 마셨다.
“이제 체포해도 되겠습니까?”
최림이 진담 반, 농담 반으로 물었다.
“채원이에게 먼저 물어보시죠.”
전두태는 입가에 희미하게 웃음을 지었다.
이미 짐작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이름이 민서라인지, 민채원인지 그런 것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체포할까요?”
그러자 민채원이 웃었다.
“그래도 우리 둘은 그날 뜨겁게 만리장성을 쌓았는데 설마요?”
최림은 속으로 뜨끔 했다.
“그렇다면 절 왜 불렀습니까?”
최림은 민채원이 건네준 술을 마시며 물었다.
그런데 그 대답은 민채원이 아닌 전두태가 했다.
“우리가 행한 이 일의 증거가 되어 주십시오.”
“네?”
“최 형사님은 사건이 일어난 후 이 일의 본질을 유일하게 깨닫고 계속 접근했었지요. 그러다 보니 이젠 우리가 했던 이 의로운 일을 범죄라고 생각하지 않을 거라 확신합니다.”
“증거?”
“네, 당신이 보고 들었던 모든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제대로 알려주시면 됩니다. 나와 채원이 그리고 심판자를 자칭했던 젊은이들이 이 악한 세상을 천 년 왕국으로 만들려는 노력을요.”
“…….”
최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계속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건 무슨 꿍꿍이지?’
이번엔 민채원이 품속에서 뭔가를 내밀었다.
“이건?”
“편지와 제가 차고 있던 목걸이입니다. 최 형사님이 서울 언니 집에 갔더군요. 언니에게 이걸 전해주세요. 그리고 제가 살았던 원룸 사장님께 죄송하다고 전해주세요. 아드님과 친구분은 곧 집으로 돌아갈 겁니다.”
“원지 둔치 방화살인범 청년 둘을 말하는 거죠?”
최림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네. 최 형사님만 입 닫으면 그와 친구는 무사히 고향 집으로 돌아가겠죠.”
최림은 그녀가 건네준 것을 받았다.
“그런데 궁금하네요. 당신은 어찌 그리 저에 관하여 잘 아십니까? 우리가 실제로 만난 적은 딱 두 번이잖아요.”
그러자 민채원이 웃었다.
“하하. 최 형사님 주위에도 우리 신도들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네?”
최림은 전두태의 말에 섬뜩했다.
“자! 이만. 오늘 만남은 의미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건배 한 번 하시죠.”
최림은 ‘마지막’, 이란 말에 가슴이 서늘했다.
“천 년 왕국의 완전한 심판을 위하여! 그날이 올 때까지! 위하여!”
“위하여!”
“ …….”
하지만 최림은 술을 마시지 않았다.
하지만 그 둘은 마지막 남은 한 방울까지 술을 마셨다.
그런 후 그 둘은 놀랍게도 등을 지고 바위 끝에 위태롭게 섰다.
‘뭐야?’
“안돼!”
최림이 소리치자 민채원이 잠시 뒤를 돌아봤다.
그녀의 표정은 웃고 있는지 울고 있는지 묘했다.
“안 돼요!”
전두태가 입을 떼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어 민채원의 노래도 들렸다.
“제발!”
빗속에서 한 줄기 바람이 불었다.
최림이 손을 뻗었을 때는 둘은 손을 꼭 잡고 밑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아!~’
그때 그의 귀에는 둘이 떨어지면서 부르는 노래가 가득했다.
“때가 왔음이라. 온 세상 악한 자들이 불에 태워질 때, 천 년 왕국이 왔음이라. 태워라, 처단하라, 때가 왔음이라, 천 년 왕국이 왔음이라.”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당황한 최림은 얼른 조민태 형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뭐? 전두태와 민채원이 방금 동반 자살했다고? 거기 어디야?”
“네, 천, 천왕봉입 ….”
“알았어. 바로 충동할게.”
최림은 마침내 이 말만 하곤 심한 현기증으로 자리에 쓰러졌다.
읍내 병원이었다.
최림이 눈을 떴을 땐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수애가 와 있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서울의 미오도 그 곁에 있었다.
제일 먼저 반겨준 이는 역시 수애였다.
“이제 깨어났네.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야.”
“수애?”
최림은 눈물이 핑, 하고 돌았다.
그동안 수사를 핑계로 전화도 자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수애는 TV를 보고 단숨에 서울에서 이곳으로 내려온 것이다.
“고마워. 부모님의 원수를 갚아줘서. 난 네가 이 일에 성공하리라고 믿었어.”
“내 부모님의 원수였기도 하지.”
그때 미오가 끼어들었다.
“그동안 정말 수고했어. 너의 활약으로 결국, 전두태를 잡았네.”
“누나?”
최림이 허공에 대고 누군가와 이야기하자, 수애가 깜짝 놀랐다.
“누구랑 대화하는 거야? 누나는 또 누구고?”
최림은 한편으론 그녀의 질문이 우스웠지만,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도 끝난 마당에 솔직하게 미오의 존재에 대해 말해주었다.
“아, 보이지 않는 존재이지만 널 무척 도와주시던 분이구나.”
“그런 셈이야.”
그러자 수애는 최림 앞에 있다고 예상하는 미오에게 인사를 건넸다.
“언니, 안녕하세요? 수애라고 합니다.”
“네, 알아요. 직접 보니 정말 예쁜 얼굴이네요. 최림이 복 받았어.”
“아니에요. 호호.”
최림은 둘이 웃는 모습을 보고 금방이라도 일어날 것 같았다.
“참, 누나. 합동수사본부 사람들도 다녀갔어요?”
“응, 사건 직후부터 어제까지 모두 다녀갔지만, 네가 의식이 없었어.”
“그랬구나. 그런데 우리 팀에선 왜 누나만 왔어요? 다른 사람은요?”
최림의 질문에 미오는 잠시 머뭇거렸다.
“사실, TV를 보고 나서 우리 팀은 사실상 해체되었어.”
“악령퇴치반 말씀입니까?”
“응. 마이클은 본국으로 돌아갔고 나를 비롯한 몇 명만 남았어.”
최림은 마이클을 보지 못한 채 그가 미국으로 갔다고 하니 약간 서운했다.
그래도 한편으로 전두태가 제거된 이상, 그가 남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