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성우(안토니오)聖人의 고향(故鄕)이고 묘소(墓所)가 있는 곳으로 신앙공동체의 모습을 200여 년을 간직하고 있는 평화의 은혜가 가득한 성지 입니다. 평화의 은혜가 가득한 이곳 구산 성지는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과 여덟 분의 순교자가 묻히신 거룩한 聖地(성지)입니다. 이곳 뒷산이 거북 형상을 닮았다 하여 거북 구(龜)자와 뫼 산(山)자를 써서 구산 이라고 하였습니다. 구산은 한강변 미사리 조정 경기장 옆에 위치해 있으며, 순교자들의 숨결이 200여 년 동난 고스란히 살아 숨쉬는 곳입니다.서울에서 불과 20분 거리 내에 있으며, 시원스레 뚫려있는 강변도로와 중부고속도로, 구리 - 판교 고속도로를 이용해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교통상의 편리함이 구산 성지를 찾는 순례자들에게 매력적인 요소이기도 합니다. 구산 성지가 어느 곳을 말하는지 잘 모른다해도 카페촌으로 유명한 미사리와 조정 경기장 하면 "아, 거기!"하며 고개를 끄덕일 것입니다. 경기도 하남시 망월동 387 - 10번지에 위치한 구산 성지는 한국성인 103위성인 중 71번째 나오는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을 비롯하여 박해시대에 많은 순교자가 탄생한 유서 깊은 성지라는 데서 교회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습니다.김성우 안토니오 성인은 양반의 자제로 유복한 가정과 존경받는 가문에서 태어난 그가 신앙의 험난한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1830년경입니다. 경주 김씨 계림군파(鷄林群波) 15대 손인 김영춘의 맏아들로 정조 19년(1795년) 구산에서 태어난 그는 만집(萬集), 문집(文集), 두 동생과 함께 세례를 받고, 친척과 이웃을 입교시켜 구산을 지금의 교우 촌으로 만들었습니다.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은 유방제 신부로부터 보례를 받고, 한동안 유방제 신부를 모시고, 회장직을 수행하며 온 마을에 복음을 전하였으며, 1836년 모방(Maubant) 나(羅) 신부가 입국하자 자기 집에 모시고 우리말과 조선의 풍습을 가르치기도 하였습니다.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이곳 구산에서도 그 여파가 밀려와 그는 공소의 회장으로서 사학(天主學)의 괴수로 지목되어 한양 포도청으로 압송되어 곤장과 치도곤을 맞으며 배교 하라는 재판관의 강요에 아무런 굽힘없이 『나는 천주교인이요. 살아도 천주교인으로 살고 죽어도 천주교인으로 죽을 따름이오.』라는 말로 오늘날 우리의 심금을 찡하게 울리는 그의 굳은 신앙심을 표현한 명언을 남겼습니다. 성인은 다시 형조 감옥으로 이송되었으나, 그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음을 안 관장은 결국 1841년 윤 3월9일(4월29일) 그를 교수형에 처하였습니다. 그 때 그의 나이 47세였으며, 옥에 갇힌 지 2년이 지난 시기였으며, 그의 유해는 후손들에 의하여 비밀리에 거두어져 이곳 구산 성지에모셔졌습니다. 성인의 굳은 신앙심은 결국 1925년 7월 25일 로마 교황청의 시복조사를 거쳐 『한국 79위 복자』위에 올랐으며,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창설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한국을 방문하신 교황 바오로2세에 의하여 한국 103위와 함께 성인으로 시성 되셨습니다.
현재 급격한 도시화의 이농현상에도 불구하고, 이 곳 구산 마을은 전통적인 신앙공동체의 모습을 200여 년을 간직하고 있는 귀중한 교회의 얼이 살아있는 평화의 은혜가 가득한 성지입니다. 이곳 구산 성지가 평화의 은혜가 충만한 이유는 성인과 순교를 모신 곳이지만 피 흘림의 순교지는 아니었다는데 있습니다.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은 서울에서, 8인의 순교자들은 남한산성에서 순교하신 후에 이곳 구산에 모셔졌습니다. 천상의 얼을 받으신 성인과 순교자들을 모신 곳이기에 그분들의 전구로 평화로움이 가득한 성지가 되었으리라 여겨집니다. 우리 성현들의 진리탐구 정신과 천주공경 신앙은 우리들뿐만 아니라, 내일의 후손들에게 계승발전 시켜 나가야 하겠습니다.우리 성현들의 업적이 지닌 경신예절의 종교적인 측면과 진리탐구의 학문적인 면을 발전시키기위하여 이곳 구산 성지에 순교 기념 성전과 기념관이 건립될 계획으로 있습니다.
이곳 구산성지에 세워진 성모상은 구산성지와 구산성당 초대신부(1979-1984)이며 성모님에게 특별한 신심을 갖고 계시던 故 길 홍균(이냐시오 1931-1988)신부님이 꿈속에서 알현한 성모님의 모습을 당시 서울대학교 미대학장이신 김세중(프란치스꼬)화백에게 작품을 의뢰, 김세중 화백이 마지막 작품으로 심혈을 기울여 조각한 작품입니다. 왕관을 쓰시고 오른손에 지시봉을 들고 계시는 특별한 모습의 성모님은 가정과 온 인류의 평화를 기리시는 "우리의 도움이신 성모마리아"로서 국내에서는 물론 세계적으로 하나밖에 없는 소중하고 귀중한 성모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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