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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없애기 위해서 애쓰는 게 수행이 아닙니다. 생각은 없어질 수가 없어요. 부처님이라고 해서 생각이 없는 사람이면 얼마나 인생을 사는 게, 그렇게 살 수 있을까요? 생각이 없다면. 생각은 다 일어나지만 그 생각을 믿지 않는 것이지요.
생각은 그냥 인연 따라왔다가 가는 거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지요. 생사법이라는 사실을 아는 겁니다. 이 얘기를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생사법 혹은 불생불멸법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즉,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들은 전부다 생사법 혹은 생멸법이라는 말을 써요. 이 세상 모든 것들은 전부다 생겨나면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생멸법. 법이라는 건 어떤 존재라는 뜻이에요. 삼라만상, 존재를 법이라고 합니다.
모든 게 전부다 생멸법 아닌 것이 없어요. 그런데 생멸법은 인연 따라 생겨났다가 인연이 다하면 사라진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어요. 모든 생멸법은. 그런데 생멸법 아닌 게 있을까요? 어떤 ‘것’이라고 얘기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전부다 생멸법입니다.
나라는 존재? 생겨나면 반드시 사라지는 거지요. 내가 가지고 있는 나의 어떤 명예, 지위, 권력, 돈, 재산,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 이게 전부다 생멸법입니다. 한번 생겨나면 사라지는 것들이지요. 내 생각, 내가 옳다,라고 고집하고 있는 그 생각,
그것도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것이지요. 모든 게 전부다 생겨나고 사라집니다. 그런데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은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인연 따라왔다가 인연 따라 가요. 그건 내 뜻대로 왔다가 가는 게 아니라 인연, 자기의 법칙에 따라서 자기 인연 따라왔다가 갑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 인연이 언제인지를 명확히 아는 걸 도인이라고 착각을 해요. 내가 언제쯤 죽을까요? 그걸 맞히는 사람을 도인이라고 착각을 합니다. 내가 언제쯤 성공할까요? 그걸 알아맞히는 걸 도인이라고 생각한단 말이지요.
인연 따라 생겨나고 인연 따라 사라지는 모든 것들은 그냥 인연 따라 생겨나고 인연 따라 사라질 뿐이지. 우린 지금까지 그전에 도인이라고 여러분들이 머릿속에 그림 그려놨던 모든 허상은 인과법, 인연법을 명확하게 언제쯤 어떤 일이 벌어질지에 대해서 아는 사람.
그래서 그걸 잘 피해 가면 일어날 것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도록 바꾸어줄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을 도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고 그런 산업으로 지금까지도 돈벌이를 잘 해 먹고 있지요. 점쟁이를 찾아가는 이유가 그거 아니겠어요?
“나에게 언제쯤 뭔가 문제가 생길지 알아맞혀서 그 문제를 피해가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심지어 어떤 점쟁이는 별 이상한 짓을 다 시켜요. 그냥, 그냥 차라리 굿을 해라. 이러면 그냥 속 편하게 굿 하나 할 텐데.
뭐 제가 이런저런 상담을 해본 결과 뭐 이상야릇한 것을 시키는 사람도 있고. 요상한 것을 시켜서 그렇게 하면 이 재앙을 없앨 수 있다,라고 확신을 하는 것이지요. 삼재팔난이 나에게 안 온다. 안 오는 방법, 비법을 알려준다.
제가 그때 아마 입춘 설법 때도 얘기했었는데. 그때 인터넷에 몇 가지를 찾아봤더니 그런 나한테 오는 재앙을 피해 가게 하는 부적을 써주는 사람들, 또 그런 방법을 알려주고 본인이 뭔가 기도해주고 굿을 해주고 그러면 그게 딱 사라진다.
그러면서 광고 문구에 엄청난 우환이 들면 돈으로 얘기할 수 있느냐. 수백억, 수천억, 수 천만 원, 날릴 수 있는 것을 단돈 삼십만 원의 부적만 쓰면 딱 사라진다. 이렇게 광고를 하는데 그 광고가 먹히는 것이지요. 언제나 그런 광고는 먹혀 왔습니다.
그런 것에 조바심 내는 사람이 언제나 있었기 때문에. 부처님을 뭐 예언해주는 사람. 어떤 특정한 괴로움이 언제 올지를 딱 알아맞혀서 요렇게 하면 그게 안 나온다. 이걸 맞혀주는 사람. 그런 식으로 불교를 생각하면 외도입니다. 외도.
참된 불법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럴 거 같으면 부처님 당신에게, 부처님의 가족에게, 부처님의 나라에 왜 그렇게 처절한 일들이 벌어졌을까요? 부처님이 계시는데. 부처님이 그걸 다 막았어야지요. 부처님 고향이 멸망당했거든요.
아주 피로 물들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그런 걸 다 바꿀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부처님의 힘이라면, 그 운명을 다 바꿨어야지요. 그런데 그게 부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공연한데 애쓸 필요가 없어요.
이 얘기를 듣고 너무 서운해하시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야, 나는 그런 불교라면 나는 별로 안 가겠다’ ‘믿고 싶지 않다’ ‘나는 뭔가 신통 자재하고 이런 사람을 원한다’ 어쩔 수 없습니다. 그렇게 원한다면 그 사람은 제가 무슨 얘기를 해도 그런 사람을 찾아가게 돼 있고.
그런 사기꾼에게 걸려들게 되어있고. 제가 이런 사기꾼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도 상당히 못마땅할 겁니다. 내가 아는 그분은 사기꾼이 아닙니다.(웃음) 삶의 운명에 대해서 안다. 확실히 알 수 있다. 이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단, 실제 점을 보고 이러는 분들 중에는 그런 얘기를 하는 분도 계시더라구요. 백 프로 확실하진 않다. 확실하다. “백 프로 확실할 순 없습니다.” 이렇게 확실하게 얘기하시는 분도 계시더라구요. 그러나 대충 점을 쳐보니까 약간 확률적으로 “이런 게 뭐 이런 거 같더라.”
그런 정도라는 얘기를, 제가 아는 분 중에도 이렇게 그런 걸 좀 하는 분들이 계세요. 물어보니까, 백 프로 확신한다는 건 있을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본인들이 확신을 안 가지고 얘기하면 사람들의 주머니가 열리겠느냐.
본인이 확신을 가진 것처럼 얘기를 해야 된다는 거죠. 방편으로. 안 그러면 안 믿으니까. 그러고 그렇게라도 위안을 받고자 하는 사람이 많다는 얘기를 하더라구요. 그러면서 본인이 내가 하는 게 그렇게 나쁜 짓은 아니다.
그렇게 너무너무 힘들어서 위안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그런 위안을 주는 사람도 필요하지 않느냐. 뭐 그렇다면 그럴 수 있겠다. 그렇게 얘기하고 말았지요. 그래서 그것을 제가 무조건 폄하하거나 나쁘다,라고 얘기하고자 하는 마음이 아니라.
그래서 바른 분들은 그렇게 하더라도 결국에는 바른길을 갈 수 있도록 자꾸 이끌어주기 위해서 노력하는 분이 계시거든요. 그래서 뭔가를 내가 원하는 특정한 무언가를 정해놓고 그거를 좇아가는 삶. 그래서 거기 휘둘리고 구속되는 삶. 그것은 나를 행복하게 해줄 수가 없다,라는 사실에 눈뜰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제 이 단순한 것이, 이 단순한 것이 너무나 어려워지기 시작합니다. 현실에서. 내 생각을 포기할 수가 없거든요. 내가 추구하는 마음에 집착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집착을 다 버리라는 게 아니에요.
그걸 다 그만두라는 게 아니라 그걸 가지고 있고, 그걸 열심히 살아가기는 하지만 그럴 수도 있고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지요. 본인 스스로. ‘이렇게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어’ ‘될지 안 될지 몰라’ ‘그러고 안 되는 것이 나를 위해 더 좋을 수도 있어’ ‘난 알 수 없어’ ‘내가 내 미래를 어떻게 알아,
부처님도 모르는 미래를. 내가 어떻게 알아’ ‘나에게 어떤 일이 벌어져야 더 좋은지를 내가 알 수 있을까’ ‘난 몰라’ 그런데 뭐는 알까요? 진리만이 아는 것이지요. ‘안다’ ‘모른다’ 표현을 하면 안 되지만.
그러니까 나라는 생멸법에 의지해봐야 그건 생겨나고 사라지는 허망한 겁니다. 진실일 수가 없어요. 백 퍼센트 사실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생겨났다 사라지는 거가 아닌 것. 생멸법이 아닌 것. 불생불멸법. 그런 뭔가가 있다면 거기에 의지해야 되겠지요.
‘귀의한다’는 표현을 쓰잖아요. 돌아가 의지한다. 나의 본성, 나의 본질, 나의 본바탕, 그 본바탕이 뭐예요. 불법승 삼보입니다. 내가 본래 부처고. 본래 진리, 법이고. 본래 내가 청정한 승이라는 그리고 돌아가는 그곳이 진짜 내가 의지해야 될 바인데.
그 의지해야 될 바는 뭔가 딱히 정해져 있는 뭔가가 아니에요. 그래서 무위법이라는 표현도 씁니다. 어디에도 의지할 바가 없다. 고정된 실체적인 뭔가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를 방편으로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보십시오.
우리는 지금까지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실재라고 여기면서 살았습니다. 나도 실재고. 내 바깥에 있는 모든 것도 실재야. 실재라고 생각하니까 거기 집착이 생기는 거지요. 이게 진짜가 아니라 허망한 꿈이라는 걸 알면 꿈속의 내용에 집착하지 않잖아요.
어젯밤 지나간 꿈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다시 그 꿈으로 뛰어 들어가서 그때 그 돈을 벌어야지’이런 생각을 하지 않지요. 꿈이라는 사실을 아니까. 오늘 밤 꿈을 꿉니다. 그런데 깨고 나면 꿈 깬 감 동시에 꿈속에 있는 모든 것들은 그냥 사라져버려요.
집착하지 않습니다, 전혀. 나를 구속하지 않는 것이지요. 이것처럼 삶 자체가 생멸법으로써 하나의 꿈과 같다는 것이지요. 이 모든 것들은 생겨나고 사라지는 허망한 생멸법이기 때문에 실재가 하나도 없어요. 진실한 건 하나도 없습니다.
전부다 그냥 왔다가 가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냥 왔다가 가는 것은 왔다가 가도록 내버려 둬야 되는데. 왔다가 가는 것 중에 내 눈에 들어오는 것. 내 마음에 드는 것이 몇몇 개가 눈에 띄기 시작한단 말이지요.
그러면 몇몇 개가 눈에 띄는 것을 집착하고, 가지려고 애쓰고, 내 식대로 바꾸려고 애쓴단 말이지요. 그러고 싫은 것들은 거부하려고 애쓰고, 밀쳐내려고 애쓰고, 내 인생에 왜 이런 것이 등장해서 나를 이렇게 괴롭히느냐. 하고 싸우고 욕하고 막 밀쳐내려고 애쓴단 말이지요.
이렇게 취사간택을 합니다. 좋은 건 취하려고 애쓰고. 싫은 건 버리려고 애쓰고. 좋은 건 가져지지 못해서 괴롭고. 싫은 건 버려지지 못해서 괴롭고. 이 양극단이 우리를 언제나 괴로움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런 삶이 바로 중도적이지 못한 극단에 치우친 삶입니다. 집착하는 삶. 극단에 치우친 삶. 그게 바로 취사간택하는 삶이다. 왜 취사간택하지 말라고 하느냐. 이 모든 것들은 보세요. 석가모니 부처님을 잠깐 떠올리면 석가모니 부처님의 이미지가 이렇게 머릿속에 그려집니다.
천 원짜리 돈의 이미지를 그리면 돈이 이렇게 그려집니다. 동전 하나도 그림 그려지고. 모든 게 아들, 딸, 남편, 아내, 부모님, 생각만 하면 바로바로 머리의 이미지로 그려지거든요. 상이 이렇게 그려집니다. 상이 그려지는데.
상이 그려졌다가 바로 사라지지요. 상이 그려졌다가 바로 사라지는 것처럼. 생각은 그렇게, 제가 ‘사과’를 하나 그려보세요. 하면 사과가 딱 그려져요. 그러다가 또 다른 얘기를 하면 또 다른 얘기를 집중하다 보니까 ‘사과’라는 이미지는 사라집니다.
이것처럼 사과라는 이미지가 여기 어딘가에서 생겨났다가 사라졌어요. 생겨났다가 사라진 것처럼 생멸법입니다. 사과라는 이미지가 생겨났다가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어디서 생겨났다가 어디로 돌아갔지요. 생각 속에서라고 말은 했는데.
그게 그 생각 속이 어딘지. 뭐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하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뇌 속에서, 뭐 생각 속에서 뭐 뇌가 무슨 작용을 일으켜서 뭐 이렇게 얘기할 수 있겠지만 그건 그냥 망상이고. 생각이고. 상이고.
그렇다,라고 내가 상을 그린 거뿐이고. 실질적인 거는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뭐냐 하면 그 그림이 어딘지 모르겠는데 분명히 그려졌다가 사라졌다,라는 그 사실. 그 사실만 분명합니다. 내가 그 사과라는 이미지를 생겨나게 했고 사라지게 했어요.
내가 사과라는 이미지를 창조했습니다. 조물주가 되어서 갑자기 사과를 창조했다가 사과를 소멸시켜 버렸습니다. 사과라는 어떤 하나의 존재가 하나의 생멸법이 생겨났다가 사라졌어요.
그것처럼 우리가 지금 사과라는 이미지를 생각했다가 없어진 것처럼. 그런데 그 이미지에 여러분은 집착하지 않지요. 그렇게 생겨났다 사라진 것처럼. 그런데 여러분들은 인생에서 이처럼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아무것도 없는대서 갑자기 사과란 이미지를 그렸다가 없애버린 것처럼.
갑자기 여러분들은, 어느 날 갑자기 문득 친구 집에 갔다가 와서는 친구 집이 좋아 보여요. ‘야, 우리도 이사를 가야 되겠다’ ‘우리도 집을 사야 되겠다’ 혹은 무슨 세탁기, 건조기가 좋아 보이고. 요즘에 그러데요. 건조기 얘기했더니
아, 스님 요즘 엄마들에게 설법을 하시려면 요즘 최신 트렌드를 아셔야 됩니다.(웃음) 건조기는 한 물 갔고. 요즘에는 뭐 뭐라더라. 스타일러〜 아! 네, 스타일러. 이런 게 이제 갖고 싶다는 얘기를 하시더라구요.
그러니까 친구 집에 갔다 왔더니 스타일러를 보고 나니까 야, 이게 너무 좋아 보이는. 그럼 갑자기, 갑자기 스타일러가 사고 싶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생각을 백 프로 믿지만 않으면 그것은 스타일러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으로 잘 살아왔어요. 지금까지.
그런데 갑자기 머릿속에서 ‘스타일러를 사야 되겠다’라는 생각을 일으키는 건 상관없는데. 그걸 진짜라고 믿고 이게 없으면 안 될 거라고 집착을 하기 시작하면서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그 생각을 진짜라고 집착하면 그 생각이,
진짜라고 증명시켜주는 수많은 일들이 자꾸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친구들을 만났는데 저 친구는 보니까 깔끔해 보이고. 나는 왠지 이렇게 툭툭 터니까 먼지가 나는 거 같고.(웃음)
‘이게 다 스타일러가 없어서 그래’ 남편이 회사 갔다 왔는데 먼지를 풍기고 온다고 하면서 “스타일러만 사줘서도 이런 일이 안 벌어지잖아” 하고 얘기를 할 수도 있고. 뭔가 자꾸 누구네 집에 가도, 누구네 집에 가도 자꾸 스타일러가 있는 집만 보이기 시작하고. 그럴 수 있다는 것이지요.
즉, 스타일러가 나를 괴롭힌 것이 아니라 내 머릿속에서 ‘스타일러를 사야 되겠다’라고 일으킨 그 생각. 그 생각을 믿었기 때문에. 그냥 그 생각은 할 수 있지요. 그래서 그냥 가볍게, 가볍게 남편한테 “야, 이거 좋던데 뭐 사줄 수 있으면 사주고
아니면 말구, 나도 뭐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지만 그냥 한번 얘기해 보는 거야.” 이렇게 던졌는데 사주면 고마운 거고. 그렇게 얘기까지도 하지 말라는 건 아니지요. 그런데 ‘그것을 반드시 가져야 돼’라고 과도하게 집착할 필요는 없지요.
젊었을 때 20대 때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길거리를 지나갑니다. 대학교에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어떤 한 사람이 눈에 띄기 시작해요. 그 사람이 갑자기 사랑스럽기 시작하고. 그 사람이 갑자기 좋아지기 시작해요.
그 사람의 정말 좀 어이없는 행동도 되게 멋있어 보이고. 되게 나쁜 남자 스타일인데 그게 괜히 매력이 느껴지고. 막상 결혼해서 보니까 이게 나쁜 놈은 맞는데.(웃음)
그때는 괜히 나쁜 남자 스타일처럼 보여서 멋있어 보였단 말이지요. 그러면 사실은 아무 일이 없어요. 그 사람이 뭔 일을 해도 아무 일이 없는데. 갑자기 그 사람에게 빠지기 시작하면서부터 그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이 나를 신경 쓰이게 만들지요.
그 사람이 딴 사람한테 말만 걸어도 괜히 질투가 날 수도 있겠지요. 그러니까 이렇게 아무 일이 없는데, 갑자기 한 생각 일으켰을 때 내가 상을 만들어놓고 그 상을 진짜라고 믿기 시작하면.
그런데다가 제가 우리 장병들도 만나 보면은 사랑하는 여자 때문에 뭐 탈영을 하고 싶고, 자살하겠다. 뭐 이런 친구들이 가끔 있는데. 그 친구들의 특징은 뭐냐 하면 ‘그 여자는 반드시 내 여자가 돼야 된다’라는 집착에 완전히 빠져있는 스타일입니다.
‘사귀다가 헤어질 수도 있지’ 이런 생각 자체를, 가능성을 아예 생각을 안 하고 있어요. ‘이 사람 때문에 나는 살고 있다’ ‘이 사람과 헤어지면 내 인생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러니까 이 세상의 그 어떤 아름답고 예쁜 사람도 눈에 안 보이지요.
그 친구만 눈에 보이는 거지요. 완전 사로잡혔기 때문에. 그런다고 해서 그 사람과 헤어지고 나면 진짜 죽느냐. 그렇게 근근이 버티고 버티다가 나중에 또 다른 사람을 사귀잖아요. 갑자기 이등병 때 죽을 거처럼 그렇게 막 그러던 친구가
갑자기 상병 돼가지고 새로운 여자 친구 사진을 보여주면서 막 신이 나있는, 또 친구들이 있단 말이지요. 그렇게 막 신나서 옛날의 그 친구가 나는 내 인생의 정말 전부인 줄 알았는데 그거는 내가 진정한 사랑을 찾기 위한 과정이었던 거 같다.
저는 진정한 사랑을 찾았습니다. 이래요. 그러다가 더 어이없는 건요. 병장이 되면서 그 사랑하던 여자가 나를 목매는데도 불구하고 군화 발을 거꾸로 신습니다.(웃음)
그 아주 상처를 주고 군화 발을 탁 거꾸로 신고 이럴 수도 있는 것이지요. 이 모든 것들이 내가 그렇게 관심을 가지기 전에는 그 사람에게 뭔 일이 일어나도 별 상관이 없었는데. 내가 마음을 내고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부터
내가 ‘저 사람은 내 사람이 돼야 돼’라는 집착을 하면서부터 그 사람의 별거 아닌 한 마디 한 마디가 너무나도 큰 비중으로 다가와서 나를 울고 웃게 한단 말이지요. 특정한 직업을 ‘내가 이 직업을 가져야지’ ‘이런 데 취직해야지’
라고 생각을 내면 그 생각이 나를 계속 스트레스받게 만듭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이 직장이 아니라 다른 직장을 가야 되는 사람일 수도 있어요. 그런데 인생의 어느 순간 이 집착했던 마음 때문에 계속 시달릴 수가 있는 것이지요.
그것처럼 모든 일이, 이 세상 모든 일이 전부다 내가 만든 생각 때문에 만든 괴로움이라는 것이지요. 본래 실질적인 괴로움은 없습니다. 여러분을 정말 괴롭게 만드는 뭔가는 없습니다. 내가 특정한 한 생각에 고집했기 때문에 괴로운 것일 뿐이지요.
죽음이 괴로움일까요? 죽음이 무조건 괴로움이 아닙니다. 시한부 인생 선고를 받은 사람이 뭐 처음에는 막 난리, 난리 치고 막 받아들이지 못하고 화를 내고 짜증스러워하고 절망하고 이러다가 나중에 받아들이고 나면
지극히 평화로워지고 고요해지고 죽음을 받아들이고 나면 아주 도인처럼 된다고 하는 이유가 죽음도 받아들이고 나면 그게 괴로움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이처럼 모든 괴로움은 내 스스로 생사법.
내 목전에서 내 눈앞에서 생겨났다 사라지는 것들 중에 특정한 것을 쥐고 집착하고 ‘이렇게 돼야 돼’라고 했기 때문에 그때부터 그것이 나를 발목 잡는 것이 된 겁니다. 진짜는 뭔가? 실제는 뭘까요? 너무나도 단순한 겁니다. 너무나도 뭐랄까.
아무것도 아닌 것이지요. 여러분들이 꿈꾸는 그렇게 놀랍고 신비롭고 이런 일들이 벌어지지 않습니다. 진실은. 실제는. 진리는. 왜 그럴까요? 진리는 그냥 지금 이대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어려운 말 쓸 필요도 없이.
삶에서 진짜, 진짜는 뭐예요? 지금 눈앞에 이렇게 드러나 있는 이거밖에 없잖아요. 생각은 전부다 허상이잖아요. 집에 뭐가 있을 거야. 집에 가면 내가 어제 만들어놓은 뭐가 있고. 저녁때 뭘 해야 되겠고. 뭐 남편은 어떻게 하고 있을 거고.
자식은 어떨 것이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 그건 그냥 생각이지요. 지금 이 바깥에 갑자기 지구가 멸망해 있을지 어찌 알겠습니까. 내 생각을 가지고 모든 과거나 미래와 연결되어 있는, 생각은 전부다 과거 아니면 미래와 연결될 수밖에 없어요.
일으킨 생각은 전부다 진짜가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에 있는, 이 순간만이 진실이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내 눈앞에 있는 지금 이대로. 내 눈에 보이는 이것. 해석하기 이전에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이것은 관심조차 없을 뿐 아니라,
항상 머릿속에 있는 상의 세계만 나를 충족시켜줍니다. 상의 세계를 추구하는 것. 그래서 내가 추구하던 상의 세계가 현실로 되는 것. 그것만을 그 허상만을 좇는 버릇 때문에 이 아무 맛도 없고 냄새도 없고 밍밍한.
그냥 말 그대로 평상심이라고 하는, 이 아무것도 아닌 이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제가 지금 하는 말을 여러분이 듣고 있다고 생각을 하시고. 또 여러분 인생을 여러분이 살고 있다고 생각해요.
‘내 인생 내가 살지’ 여러분 숨 쉬는 거 여러분이 숨 쉬시나요? 여러분이 숨쉬기 위해서 애써야지 숨이 쉬어집니까? 내가 애쓸 필요가 전혀 없는데 숨이 제가 알아서 쉬고 있지요. 여러분이 숨 쉰 건가요? 숨이 제가 알아서 쉬고 있지요.
거기 내가 개입될 필요가 있습니까? ‘내가 했다’라는 확신이 있습니까? 그냥 숨이 쉬어지고 있어요. 내가 애쓰지 않아도. 졸리면 희한하게 졸리면 자게 돼요. 그러니까 ‘내가 자는 거지’ 이렇게 생각하겠지만 진짜 내가 자는 게 맞을까요?
그냥 졸리면 그냥 제가 알아서 눈이 감겨집니다. 그런데 아무리 눈을 감고 자려고 해도 많은 분들이 그러시데요. 스님 법문은 너무 잘 졸려요.(웃음) 아주 잠이 안 올 때 그냥 법문 틀어놓으면 아주 금방 잔다고.(웃음) 그게 법문을 잘 듣는 방법입니다.
잘 듣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왜냐면 머리를 많이 굴리면서 들으면 안 졸리거든요. 그런데 별생각 없이 그냥 들으니까 그냥 듣다 자는 거지요. 그래서 법문 듣다가 그렇게 졸리는 게 부끄러운 게 아닙니다. 당연히 그럴 수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내가 잔다고 생각하지만 진짜 내가 자나요? 그냥 자집니다. 저절로. 밥을 내가 먹는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하나하나 계산해서 숟갈을 여기 끝까지 가는 것을 정확히 계산해서 넣지 않거든요.
막 딴 생각 하고 딴 얘기 하고 전화하고 TV를 보면서도 저절로 입안에 착착 아주 착륙을 제대로 합니다. 봄여름 가을 겨울을 내가 조작하지 않아도 봄여름 가을 겨울은 신기하게도 알아서 찾아오고 있어요. 들숨 날숨도 알아서 쉬어지고.
밥도 알아서 먹고. 화장실 가고 싶을 때 알아서 가고. 모든 것이 저절로, 저절로 무위법으로써 거기 내가 개입될 뭔가가 없습니다. 제가 지금 설법을 계속하고 있는데 ‘내가 듣는다’고 생각하잖아요, 여러분이. 그래서 ‘내가 잘 들어야지’ 생각하잖아요.
‘잘 들어야지’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잘 들으려고 애쓰는 그것은 나라는 자아를 강화시키는 거지요. 지금 여러분이 듣고 있는 게 아닙니다. 내가 생각하고 해석하는 건 내가 하는 거예요. ‘저 양반이 설법을 좀 잘하나 못하나’
이제 오늘 예를 들어 처음 들으신 분들 같으면 ‘이 양반이 설법을 진짜 잘하나 못하나’ ‘저 중에 맞는 말이 있고 틀린 말이 있나’ ‘내 생각 내 견해와 일치하나 일치하지 않나’ 사실 여러분 제가 하는 말을 ‘맞어’ ‘맞어’ ‘맞어’
하고 듣는 것도 제대로 듣는 게 아닙니다. 내 머릿속에 있는 생각 가운데 맞는 것, ‘내가 맞다’ 고 생각 하는 걸 저분이 얘기하면 ‘맞어’ ‘맞어’ ‘맞어’ 하는 거잖아요. 자기 안에 있는 개념, 이미 들어있던 개념을 강화시키는 거밖에 안 돼요.
그러구 또 반대로 ‘저건 틀렸어’ ‘저건 틀렸어’ 하고 듣는 것도 똑같이 분별하는 겁니다. 그래서 뭐 어떤 곳에 가면요. 법문할 때마다 뭐 대답하라고 그러고. 뭐 대답을 잘 해야지 된다, 그러고. 뭐 질문할 때마다 대답을 막 하고 액션을 하라고 하고
막 맞으면 고개 끄덕이라고 하고. 막 이렇게 하는 곳도 있던데. 사실은 그렇게 막 호응하면서 들을 필요가 없구요. ‘맞아’ ‘아니야’ 이런 생각을 일체 하면서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사실은 가끔 이렇게 설법을 하다가 제가 문득문득 이렇게 보면요.
약간 좀 이렇게 뭐랄까. 소름이 끼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이 한 이백여 분 되는 분들의 눈이 있잖아요. 너무 한 분도 졸지도 않고 한 분도 이렇게 흐트러짐이 없이 너무나도 저한테 와서 강력하게 꽂히기 때문에.
‘어떻게 이렇게까지 집중도가 있을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제가 막 문득문득 놀랄 때가 있는데. 그때 여러분들의 모습이 어떠시냐면 꼼짝을 하지를 않고 이렇게 호응도 안 하고 계산을 하는 거 같지 않고, 그냥 듣습니다. 그냥. 그냥 듣는 거지요.
‘내가 듣는다’는 생각도 없어요. 그냥 듣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어지간하면 필기하고 이러지 말라는 게, 필기한다는 건 뭐예요? 저 양반이 하는 말 중에 맞는 걸 필기하잖아요. ‘야, 이거 진짜 맞어’ 하는 거 필기하잖아요.
내 머릿속에 필기할 것과 안 할 걸 취사간택한다는 거예요. 통째로 듣지 않고 들어야 될 말, 버려야 될 말을 머릿속에서 계속 분별하고 있다는 소리입니다. 그러면 공부의 진도가 안 나가지요. 자기 머릿속에서만 맴돌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사실은 이 텅 빈자리에 모든 것은 그냥 왔다가 가거든요. 내 목전에서, 눈앞에서 왔다가 갑니다. 내 목전에서 왔다가 가요, 모든 것들이. 여러분 아들딸? 아들, 딸이 실제 있습니까? 실제 있는 건 뭐만 있어요? 지금, 지금 이것만 있어요.
지금 아들, 딸이 있어요? 없어요? 아들, 딸은 내가 아들, 딸에 대해서 생각할 때 아들, 딸의 이미지가 딱 떠오르죠. 그죠. 내가 생각할 때만 떠오르는 이미지. 상으로써 아들, 딸을 떠올립니다. 그러면 그 아들, 딸은 실제 있는 게 아니라 상으로 있어요.
상으로. 내 머릿속에 내 아들이라는 상을 그림 그린, 그러니까 20살인 아들이 20년 전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 내가 생각을 떠올리는 그 순간 아들이 태어납니다. 왜? 언제나 눈앞에 목전만이 진실한 당처이기 때문에.
다른 곳에 있는 거, 다른 시간에 있는 거, 그 진실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만 진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괴로움은 항상 언제 있는 거예요? 과거나 미래와 연동되어 있는 것들입니다. 미래에 대한 걱정, 근심. ‘자식이 이렇게 되면 어쩌지’
‘남편이 이렇게 되면 어쩌지’ ‘내가 나중에 아프면 어쩌지’ 하는 오만가지 걱정이 전부다 생각이 만든 허망한 상이지요. 그 상을 믿을 필요가 없고. 그 상을 좇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 상을 따라가면서 울고 웃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로지 지금 이 순간 그냥 진실은 이 자리. 이거밖에,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이거밖에 없거든요. 제가 이거라고 얘기를 하는 것은 경험하곤 있지만 이 경험을 내 생각으로 해석해서 경험하는 것 말고 해석하기 이전에 날것으로 경험.
맨 느낌으로서의 느낌. 그 어떤 해석과 판단에 들어가기 이전에 그저 이 생생한 경험. 이건 아무런 느낌이 없습니다. 좋거나 나쁜 느낌도 없고. 아무런 맛이 없어요. 내가 듣고 ‘설법을 내가 듣지’ ‘내 인생을 내가 살지’ ‘그러니까 내가 열심히 살아야지’
그러니까 나라는 아상이 생기면 열심히 살, 내가 생기고. 열심히 해야 될 뭔가가 생기고. 열심히 해야 될, 추구해야 될 바가 생겨서 계속해서 삶이 무거워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진실은 나라는 자아 상도 하나의 생각입니다. 이 몸뚱아리?
이것도 하나의 경계, 하나의 대상이에요. 「반야심경」에도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개내지’ ‘무의식계’ 오온개공이라는 말이 ’이 존재는 실제 공하다’라는 얘기에요. 차차 이제 공부를 하겠지만. 실제 공한 것을 진짜라고 착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의 인생은 그 허망한 허상, 허상을 쥐고 그게 맞는다고 생각하면서 그것과 싸우면서 ‘인생은 괴로워’ 생각하며 살았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당장 10분 후에 괴로울 거라고 할지라도 그 10분 후에 괴로울 예정이니까,
지금 괴로운 게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은 아무런 일이 없어요. 이 설법을 들을 때 ‘이 듣는 게 나다’ ‘내가 듣고 있다’ 그렇게 하면 내 맘대로 들을 수 있어야 되잖아요. 그럼 지금부터 제가 얘기하는 것을 지금부터는 듣지 말아 보세요. 오 분 동안.
제가 하는 얘기를 절대 들으면 안 됩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를 절대 들으시면 안 되고 귀를 막아보란 말이지요. 그런다고 해서 막아지지가 않습니다. 들려요. ‘내가 듣는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듣는 게 아닙니다. 나는 ‘내가 듣는다’
라고 착각하고 있지만 내가 듣는 게 아닙니다. ‘눈이 본다’라고 여기잖아요. 눈이 보는 걸까요? 눈이 보면 눈앞에 보이는 건 다 봐야 되잖아요. 다 봅니까? 학교 운동장에 가면 그 아이들 몇 백 명이 뛰어노는데 그 몇 백 명이 눈에 다 보입니까?
내 아들만 눈에 확 들어오지요. 내가 의식을 가지고 붙잡은 대상만 눈이 딱 띠기 시작합니다. 여기 계신 많은 분들을 제가 뵙지만 다음번에 보면 제가 얼굴이 많이 익숙한 분도 계실 수 있고. 그렇지 않은 분도 계실 수 있겠지요. 다 보는 게 아닙니다.
‘내가 본다고’ 여기지만 ‘내가 본다’라는 건 하나의 생각입니다. 그럼 뭐가 볼까요. ‘내가, 여기 내가 있고 저기 바까에 대상이 있어서 내가 저 바깥에 대상을 본다’ 이렇게 여기지만 그게 아니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생한 사실은 이 소리를 지금 듣고 있어요.
그런데 이 소리의 내용을 좇아가서 ‘아, 저 설법이 좋은 설법인가’ ‘나쁜 설법인가’ ‘옳은가’ ‘틀린가’ 이걸 판단하고 그걸 좇아가는 거는 분별심입니다. 중생의 분별심이에요. 어떤 대상을 보고 ‘좋다’ ‘나쁘다’ ‘맞다. 틀리다’ ‘옳다’ ‘그르다’
라고 따지는 것은 중생의 마음, 분별심이구요. 상으로 분별상으로 보는 것이데. 분별하지 않고 볼 수도 있는 것이지요. 이것을 큰스님들이 법상에 올라가서 이걸(죽비) 이렇게 보입니다. (죽비로 설법대를 두드리며) 그리고 이렇게 법을 드러내 보인단 말이지요.
이 말은 이렇게 할 때 우리 불자들은 ‘야, 저 스님 큰스님이네’ ‘내가 모르는 뭔가를 자꾸 하네’ ‘나는 모르고 저분은 아는 뭔가가 있어서 지금 저분이 저렇게 하는구나’ 해서 뭔가 상을 가져요. ‘저분이 하는 저걸 내가 알아야 되는데, 나는 왜 모르지’
여러분 이거 모릅니까. 지금 이걸 몰라요? 그러니까 머리로 꼬지 말고. 머리로 해석하지 말고. 보이지요. 이거 뭐예요? (죽비〜) 이렇게 얘기하지 말고.(웃음) 이렇게 얘기하는 거는 벌써 죽비라고 한번 거른 거잖아요.
거르고 생각하고 해석한 거잖아요. 생각하고 거르고 해석하지 말고 그냥 이거 보이지요. 이 뭐예요?라고 물어보는 건 제가 그냥 여러분들 보고 걸려들으라고 하는 거예요. 여기 걸려들지 말지는 그냥 여러분이 스스로 걸려들어도 되고 안 들어도 되고 상관없습니다.
죽비라고 하는 그 물건이라고 말을 하든 뭐 뭐라고 해도 상관없는데. 아주 단순하게 그냥 이거는 지금 보고 계시지요. 이게 뭔지는 이거 말고 전혀 태어나서 처음 보는 걸 가지고 흔들어도 그게 뭔지는 모르더라도 뭘 흔들었는지 모르더라도
이걸 제가 이렇게 흔들고 있는데. 이게 누구 명함인지 여러분이 모르더라도 ‘그냥 이거 흔들고 있다’라는 그 사실은 알아요. 뭔지는 몰라도. 그 내용물이 뭔지에 관심 가지는 거는 중생심이고. 그래서 이게 제가 흔드는 것이 ‘맞는지’ ‘틀리는지’
‘옳은지’ ‘그른지’를 따지는 건 중생심이고. 그 중생심은 다 다르지요. ‘죽비를 보고 있다’ ‘뭐 이렇다’ ‘저렇다’ 이 소리를 (죽비를 손바닥에 치며) ‘크다’ ‘작다’ ‘맞다’ ‘틀리다’ ‘좋은 소리다’ ‘나쁜 소리다’ ‘이 죽비소리다’ ‘무슨 소리다’
‘아, 스님 목소리가 좋다’ ‘나쁘다’ 이건 다 내 중생심이지요. 중생심을 따라가지 않더라도, 않더라도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죽비를 손바닥에 치며) 이 소리를 똑같이 듣고 있어요. 해석하기 이전에 똑같이 듣고 있습니다.
해석하기 이전에 지금 이것을 똑같이 보고 있습니다. 해석하기 전에 이걸 보면 이거 뭐죠? 말을 할 필요가 굳이 없습니다. 여기에 머릿속으로 ‘아, 저기에 깨달은 사람은 보이지만 나에게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있으니까 저걸 흔드니까 난 저걸 알아야지’
하고 알려는 마음을 자꾸 이렇게 가지게 되면 그 알려는 마음이 장애가 되어서 안다는 거는 알 식(識) 자는 알려는 나와 아는 대상이 있어야 되잖아요. 일 더하기 일은이라는 사칙연산을 알려면 사칙연산이라는 대상과 계산하는 내가 있어야지 내가 그걸 알 수 있어요.
나와 상대가 나누어져 있어야 알 수 있습니다. 둘이 아닌 불이법. 하나는 알 수가 없습니다. 대상으로 나누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눈이 눈을 볼 수 있습니까? 눈이 눈을 볼 수 없어요. 그런데 눈이 바깥에 많은 대상을 봄으로써 ‘아, 이게 눈이 작용하고 있구나’
‘여기 눈이 있구나’라는 걸 그냥 확인할 수는 있지요. 눈이 있다,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지만 눈이 눈은 볼 수 없습니다. 이렇게 이 소리를 (죽비를 손바닥에 치며) 내가 듣는 게 아니란 말이지요. 귀가 듣는 게 아닙니다.
무안이비설신의라 했잖아요. 이 귀가 듣는 게 아니고 어떤 의식이 듣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소리를 듣고 있어요. 뭔지 보이진 않지만 알 순 없지만 뭔가 듣고 있는 무언가가 확실하게 있습니다. 이건 확실해요.
아까 생각을 이미지를 떠올렸을 때 ‘아버지’ 하면 아버지 그림이 딱 그려졌다가 딱 사라졌어요. 어디서 생겨나고 어디서 사라진지 모르겠는데. 확실한 건 그 아버지 그림을 잘 그렸는지 못 그렸는진 모르겠는데.
아버지의 그림을 그리던 사과의 그림을 그리던 다보탑의 그림을 그리던 그림의 내용물은 상관이 없고 뭔가가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그 작용이 일어났어요. 그것은 확실하지요. 거지요. 이 소리를 (죽비를 손바닥에 치며) 듣는다,
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이게 무슨 소린지. 이걸 알 필요가 없단 말이지요. 이거를 듣는다,라는 그거 자체가 듣고 있는 뭔가가 있다,라는 걸 확인시켜주고 있는 거지요. 지금. 이렇게 보여주고 있는 것 자체가 내가 지금 보고 있다,
라는 그 사실. 보는 대상을 쫓아가서 바깥을 쳐다보면 이게 죽비가 보이잖아요. 이 보고 있는 바깥 대상의 죽비를 보지 말고 제가 이렇게 죽비를 들든, 이렇게 컵을 들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바깥 대상은 우린 관심 밖이니까.
여러분들의 관심은 이 컵에 떨어져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이걸 보고 바깥을 향해 좇아간다. 이런 표현을 써요. 바깥을 향해 도를 좇아가선 안 되고. 회광반조 하라는 말이 뭐냐면. 이게 보일 때 이게 죽비냐 아니냐 뭐냐 이걸 보라는 것이 아니라
이걸 보는 놈이 지금 있으니까 보고 있어요. 보고 있는 작용이 나에게 지금 일어나고 있다,라는 그 사실은 확실한 사실이거든요. 그 사실을 자각하라는 것이거든요. 바깥을 좇아가는 게 아니라 여기 어딘가에서 이것을 보는 무언가 말로 표현할 순 없지만.
이건 뭐 이 자리라고 하든, 보는 놈이라고 하든, 뭐라고 얘기해도 되고 뭐라고 얘기하지 않아도 되지만 이 뭔가가 있습니다. 뭔가 이름 붙일 수 없는. 그렇다고 이걸 “크다. 작다,”라고 얘기할 수가 없어요. “네 거다. 내 거다,”라고 얘기할 수도 없고.
노란색인지 파란색인지 얘기할 수가 없습니다. (죽비를 손바닥에 치며) 이걸 듣는데 귀가 듣는 게 아니고 내가 듣는 게 아닌데 어쨌든 이게 이상하게 들리고 있어요. (죽비를 손바닥에 치며) 그런데 누가 듣습니까? 그 듣는 그놈은 모양이 있습니까?
사람처럼 모양이 있나요? 크기가 있나요? 아무것도 없어요. 둘로 쪼개진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가 하나를 확인할 때는 뭔가 아는 대상으로 쪼개지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가 하나를 확인하는 것은 눈이 눈을 확인할 때 눈이 뭔가 막 확인되고 이런 것이 아닌 것처럼.
그래서 유식이라는, 불교에서도 이런 표현을 씁니다. ‘보는 것이 본다’라는 작용을 여기서 보는 측면과 저쪽에서 아, 그 용어가 뭐였더라. 보이는 대상을 바깥에 실제 뭐가 있고 안에 실제 뭐가 있는 게 아니라 내 마음 하나가 바깥에 보이는 대상인 것처럼 드러나고 안에 있는 것처럼 드러난다,라는 표현을 씁니다.
실제 뭔가 두 개가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 소리가 바깥에 있어서 내 귀가 소리를 듣는다고 하면 이 소리 (죽비를 손바닥에 치며)는 여기 있고. 여러분 귀는 거기 있잖아요. 그런데 귀만 있어도 이걸 (죽비를 손바닥에 치며) 들을 수 없지요.
자고 있다면 들을 수 없거나, 당장 죽은 사람 시체 앞에 가서 (죽비를 손바닥에 치며) 아무리 두드려도 그 시체는 들을 수가 없거든요. 이 소리만 있어도 들을 수가 없습니다. 소리와 귀가 인연 화합했을 때만 이 소리를 들을 수 있어요.
이 소리라는 건 실체가 없습니다. 진실이 아니에요. 그냥 인연이 화합하면 그냥 일어났다 사라지는 거예요. 이 소리에 집착할 필요가 있습니까? 없어요. 소리에는 관심 가질 필요가 있습니까? 없지요. 소리는 허상이니까.
인연 따라 생겼다 사라지는 거니까. 어떤 사람이 여러분에게 욕을 했거나 여러분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을 했습니다. 너무 듣기 싫어하는 말을 나한테 했다. 그 말을 듣고 엄청 화가 나겠지요. 그런데 그 말은 (죽비를 손바닥에 치며) 이것과 똑같습니다.
그 말의 내용을 좇아갈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말의 내용은 왔다가 가는 거예요. (죽비를 손바닥에 치며) 이것처럼. (죽비를 손바닥에 치며) 이 소리가 여러분을 괴롭힙니까? (죽비를 손바닥에 치며) 이 소리가 여러분을 즐겁게 합니까?
그냥 소리가 일어났다 사라질 뿐이지. 이거는 아무런 힘이 없어요. 핸드폰 소리가 오늘은 안 울리네요. 핸드폰 소리가 막 울릴 때 그 소리는 여러분을 괴롭힐 아무런 의도도 없고. 그 소리는 여러분들을 괴롭게 만들 수가 없습니다.
그런 힘이 없어요, 그 소리에는. 그런데 이 중에 어떤 사람은 핸드폰 소리를 듣고 웃을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핸드폰 소리를 듣고 아주 짜증스럽게 눈을 확 흘길 수도 있단 말이지요. 눈을 흘기는 사람은 그 소리가 이 사람이 눈 흘기게 만들었다고 여겨요.
‘저 사람이 핸드폰을 꺼놓지 않아가지구 내가 이렇게 화가 난 거야’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그건 상이지요. 그게 진실인가요? 내가 그렇게 그 소리를 듣고 짜증을 냈을 뿐이지. 그 소리에는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그냥 인연 따라왔다가 가는 생멸법이에요. (죽비를 손바닥에 치며) 이 소리와 똑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소리를 진짜라고 믿어요. 왔다가 가는 상을 진짜라고 믿습니다. 의식으로 붙잡아서 분별심 가지고 ‘이렇게 설법 들을 때는 핸드폰을 꺼나야지. 예의가 있는 거야’
예의도 없는 사람이라는 상을 만들어서 그 사람에게 덮어 씌워요. 그 소리에다 덮어 씌워서 스스로 괴로워합니다. 그 소리는 아무런 힘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그 소리에 힘을 부여해 준 거지요. 내가 그 소리에게 휘둘리기로 작정한 건 나입니다.
그 소리가 아니라. 아들이 게임을 하는 것은 (죽비를 손바닥에 치며) 이 소리와 똑같습니다. 생멸법이에요. 남편이 아주 여러분들이 싫어하는 것을 자꾸 한다. 남편이 자꾸 담배를 피우고 들어오고 술 먹고 늦게 들어온다.
그건, 사실은 그것 자체가 여러분을 괴롭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게 어떻게 여러분을 괴롭힐 수가 있겠어요. 그것을 가지고 내가 이미지로 상을 그려서 ‘저렇게 하다가 저 사람이 술 많이 먹고 병이라도 나면 어쩌지’
이렇게 상으로 만들어놓고 그 상을 심각하게 믿기 시작한다면 ‘저러다가 곧 쓰러져 어떻게 되면 어쩌지’ 그런 생각을 강하게 믿고 있을 때 그 생각이 나를 괴롭히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즉, 일어나는 모든 것들은 허상입니다. 허상.
그래서 그것을 좇아갈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좇아갑니다. 그 상을 좇아갑니다. (죽비를 손바닥에 치며) 이 소리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소리를 듣는 ‘여러분이 회광반조해서 듣고 있다’라는 그 자각 자체.
그것이 여러분의 진정한 여러분이거든요. 왜? 이 소리는 왔다 갈 거니까. 그런데 여러분, 이 소리를 듣는 그 자리는 왔다가 갑니까? 여러분이 집중해야지만 들을 수 있어요? 집중 안 해도 들려요. 애써야지 들리나요? 무위법입니다.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들려요. 아무런 힘쓸 필요도 없고, 애쓸 필요도 없고. 저절로 들려요. 그 힘쓰고 인생을 고리타분하게 살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저절로 살게 돼요. 제가 작년에 원광사 있을 때 뭐 이런저런 큰 행사들이 많이 있었는데.
처음 그 절에 있을 때는 큰 행사들이 있을 때 큰 행사가 있으니까 ‘야, 이때 내가 어떻게 처신해야 되고’ ‘어떻게 일을 해야 되고’ 막 할 일이 너무 많으니까 ‘하나하나 놓친 게 있나’ 막 이렇게 이랬는데. 몇 번 하고 나니까 어떤 생각이 드느냐면
‘그냥 그대가 하니까 저절로 다 하는구나’ 고민할 필요가 없더라구요. 그냥 저절로 하게 되더라구요. 그런데 괜히 그때 ‘뭔가 또 놓치는 건 없을까’ 온갖 고민들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 준비는 하더라도 거기에 얽매여서 스트레스받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지요.
지금 이 사실을 한번 잘 보세요. (죽비를 손바닥에 치며) 이 소리는 아무 문제가 없다. 제가 “야, 인마.” 하고 욕을 했다. “야, 인마.” 하는 그 말은 아무런 영향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에게 가서 꽂히는 아무 이유가 없어요.
그런데 그 말에 힘을 실어줄 필요가 여러분이 없는 것이지요. 그 말의 의미를 좇아갈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그 말을 사용해서 써먹고 내가 필요한 말을 듣고 활용은 할지언정. 그걸 믿을 필요는 없는 것이지요.
모든 여러분들에게 누가 비난을 하던, 칭찬을 하던, 여러분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던, 나쁜 일이 일어나던, 자식이 좋은 대학교를 가던, 좋은 회사에 취직하던, 진급을 했던, 떨어졌던, 그 모든 것은 (죽비를 손바닥에 치며) 이것과 똑같습니다.
그냥 인연 따라 생겨났다 인연 따라 사라질 뿐입니다.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내가 하는 게 아닙니다. 진리가 말하자면 그냥 진리가 그냥 진리 자기 갈 길을 가는 거예요. 내가 거기다 개입해서 ‘이래야 돼’ ‘저래야 돼’
혹은 어떤 특정한 모습을 보고 ‘화난다’ ‘짜증 난다’ 이럴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그건 그냥 (죽비를 손바닥에 치며) 이것처럼 왔다가 갈 뿐입니다. (죽비를 손바닥에 치며) 이 소리에 우리가 시비를 걸 필요가 없는 것처럼.
여러분 인생에 등장하는 그 모든 것들에 그 모든 생멸법에 시비를 걸 필요가 없어요. 그냥 그것은 전부다 등장했다 퇴장할 뿐입니다. 인연 따라왔다가 인연이 다하면 갈 뿐이죠. 관심 가져야 될 유일한 것은 왔다가 가는 것이 아닙니다.
생멸법이 아니라 불생불멸법. 둘로 쪼개지는 건 전부다 허상이에요. 둘로 쪼개지는 거는. 둘로 쪼개지지 않는 것. 이 소리를 들을 때 (죽비를 손바닥에 치며) 이 소리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이 소리를 확인하고 있는 이 확인되고 있는
(죽비를 손바닥에 치며) 이것은 엄연한 생생한 진실이잖아요. 생생한, ‘이 소리가 무슨 소린지’ 이거는 두 번째 자리에 떨어진 것이고. ‘그냥 이 소리를 생생하게 듣고 있다’라는 이건 여러분들이 확인하고 있잖아요.
‘이 확인하고 있다’라는 이사실이 중요한 것이지. 그 내용물을 좇아가는 것은 두 번째 자리에 떨어진 중생심이다. ‘집성제’ 괴로움의 원인이 될 뿐이다. 진실은 인연 따라 생겨나는 여기에 시비 걸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이게 공하다’
라는 사실을 이게 상일뿐이니까 허망하다. 범소유상 개시허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누가 나한테 뭐라고 하더라도 아파트값이 올라가던 떨어지던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됩니다. 그것은 생겨났다 사라지는 허망한 것이기 때문에.
수행을 하다가 놀라운 신비체험을 했던 아무런 체험을 하지 않던 뭐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신비체험을 하는 그놈이 내가 아니라. 신비체험을 화려한 체험을 하던 화려하지 않은 체험을 하던 그 체험을 하는 그 자리가 진실이지.
그 내용물을 좇아갈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되면 여러분의 이게 이제 주인공 자리라고 표현을 합니다. 나의 본래 자리. 본성 자리. 나의 본래 자리는 아무 일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드러났다 사라지도록 텅 빈 공간으로만 그냥 이렇게 있어요.
(죽비를 손바닥에 치며) 이 소리가 등장하고 사라졌잖아요. 여러분 인생, 눈앞에서, 목전에서 삶이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그런데 거기다가 ‘좋은 일이고’ ‘나쁜 일이라고’ 해석하는 건 내 생각이 하는 거지요. 생각을 그렇게 좇아가면서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위빠사나에서는 그냥 있는 그대로 보라고 하는 것이지요. 이 세상 모든 것은 그냥 있는 그대로 봐줄 뿐. 알아차릴 뿐이지. 해석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어디에도 좇아가서 거기에 울고 웃고 할 뭔가가 아닙니다.
우리가 관심 가질 것은 내 바깥에 있는 수없이 많은 경계를 좇아갈 것이 아니라 그 경계를 확인하는 이 자리. 다시 나 자신으로 돌아와서 자기에게로 돌아와서 소리가 등장하고 퇴장하고. 냄새가 드러났다가 사라지고.
생각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어떤 생각을 많이 하는 건 상관없습니다. 생각을 없애야 되는 게 수행이 아닙니다. ‘생각이 등장하고 사라지는구나’ ‘이 허망한 생각이 일어났다 사라지는구나’ 어디서 이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지. 그 바탕,
그 본래 자리, 이것들이 등장했다 퇴장하는 그 자리. 그 본처로 돌아가는 것. 반본환원. 모든 것이 등장하면 퇴장하는 곳이 있고. 등장하려면 어딘가에 등장한 자리가 있어야 되잖아요. 어딘가 뭔가 있어야 되잖아요. 생각이 일어나려면 어딘가 생각이 일어나야 되잖아요.
그런데 그걸 가지고 ‘생각이야’ ‘뇌야’ ‘뇌하수체가 뭐 어쩌고저쩌고’ 이렇게 하면 그건 망상이고.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삶을 살게 하는, 여러분을 숨 쉬게 하는, 들숨 날숨이 저절로 일어나게 하는,
봄여름 가을 겨울이 이렇게 움직이게 하는. 여기서 내려다보면 수많은 차가 왔다 갔다 하고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데 그 모든 걸 움직이게, 하는 그 모든 것이 가능하게 하는, 이 모든 생멸법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도록 허용해주는 그것이 진실이지. 그것만이 진짜지.
그 내용물은 진짜가 아니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 내용물에 속아서 내용물 때문에 울고 웃고 하는 일이 없어야 되겠지요. 그러니까 이제 이 마음공부하는 사람들의 관심사는 그 내용물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이제 현실에서 늘 스스로를 이렇게 관찰하면서 보면 ‘아, 허상에 좇아가고 있다’라는 것이 하나하나 생생하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점점 이렇게 자신의 공부가 익어가고 그렇게 되시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구요.
이제 반야심경을 다음 주부터 본격적으로 공부를 할 예정이고. 반야심경은 불교의 모든 기초 교리가 다 담겨있습니다. 대승불교, 초기불교의 모든 교리가 다 담겨 있어서 불교를 체계적으로 공부할 수 있고.
‘야, 어떻게 불교교리가 이렇게까지 정말 절묘할 수가 있을까’ 그러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교리가 다 이 하나를 끝까지 그냥 이 하나만을 가리킬 수가 있을까’ 하는 것을 우리가 이제 또 공부를 통해서 공부를 할 수가 있게 되고.
하여간 이 공부를 통해서 여러분들의 현실이 조금 더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가 있고. 또 여러분의 어떤 나아가서 여러분들의 참된 진실. 그 진실에 눈뜨고 그 진실의 자리에 딱 뿌리를 내리고 있음으로써 겉에 드러난 현상,
경계에 휘둘리지 않는 여여하고 한결같은. 이런 어떤 여러분의 참된 성품이 드러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앞으로 한 학기, 우리가 이렇게 공부를 하겠습니다. 네, 오늘 고생하셨습니다. 〜〜박수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_()_
하나가 하나를 확인하는 것은 눈이 눈을 확인할 때 눈이 뭔가 막 확인되고 이런 것이 아닌 것처럼.
이 소리가 여러분을 괴롭힙니까?
그 소리는 아무런 힘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그 소리에 힘을 부여해 준 거지요. 내가 그 소리에게 휘둘리기로 작정한 건 나입니다.
여러분 인생에 등장하는 그 모든 것들에 그 모든 생멸법에 시비를 걸 필요가 없어요. 그냥 그것은 전부다 등장했다 퇴장할 뿐입니다. 인연 따라왔다가 인연이 다하면 갈 뿐이죠.
경계에 휘둘리지 않는 여여하고 한결같은. 이런 어떤 여러분의 참된 성품이 드러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_()_ 감사합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보살님,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