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하는 발은 아름답다(롬10장 9-15절)
사람들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어떤 사람은 꽃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티 없이 해맑은 어린아이의 웃음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젊음과 아름다운 여인을 말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외적으로 볼 수 있는 아름다움은 영원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쁜 꽃은 세월이 가면 시들어 버리고, 해 맑은 어린아이의 웃음은 어린이가 성장하면서 사라지고, 젊음과 아름다운 여인도 세월의 흐름과 함께 시들어 가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 선생은 오늘 본문에 선교하는 발이 아름답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롬 10장 15절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고 말하고 있습니다.
좋은 소식은 영어로 Good News, 복된 소식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Gospel, 복음인데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전도 또는 선교라고 합니다. 바울 선생은 이 좋은 소식을 전하는 발이 가장 아름답다고 했는데 왜 선교를 하는 발이 아름다울까요?
첫째로: 생명을 소생케 하는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되면 변화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옛 사람이 변하여 새사람이 되었고, 마귀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율법의 사람에서 은혜의 사람이 되었고, 죄인이 변하여 의인이 되었습니다. 저주의 사람에서 축복의 사람이 되었고, 병든 사람이 건강한 사람으로, 육의 사람이 영의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영멸의 사람에서 영생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 단어들과 삶을 비교해 보면 굉장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옛 사람, 마귀의 종, 율법의 사람, 죄인, 저주, 병든 사람, 육의 사람, 영멸의 사람 이 모두가 다 죽음과 관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는 다는 것은 생명의 삶으로 완전히 바뀌는 것을 의미합니다.
엡 2장 1-5절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마귀는 지금도 우리를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하기를 원하지만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생명을 주시고 더 풍성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요 10장 10절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 6장 35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러시아가 낳은 위대한 작가 도스토예프스키, 그가 하나님을 만나기 전의 삶은 고난의 삶이었습니다. 신앙심이 깊고 자상했던 그의 어머니는 남편의 학대에 시달리다 결핵으로 사망하였고, 철저한 폭군으로 농민들을 학대하던 아버지는 결국 농민들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열여덟 살에 아버지의 끔찍한 죽음을 목도하고 큰 충격을 받은 그는 간질 발작을 일으켰는데, 이것은 평생 그의 지병이 되었습니다.
청년 시절, 오직 그의 관심은 문학과 사회주의로 흘러갔습니다. 기독교를 권력에 기생하는 종교로 간주하여 혐오하였고, 철저한 무신론자임을 자처했습니다. 사회주의를 통해 세상을 바꿔 보겠다는 신념으로 비밀 조직에 가담한 그는 결국 체포되어 총살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사형대에 묶인 도스토예프스키는 28년의 삶을 돌이키며 후회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내 인생이 이렇게 끝나다니...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정말 보람 있게 살 텐데...”
그런데 사형집행이 막 시작될 무렵 멀리서 한 병사가 흰 손수건을 휘날리며 달려왔습니다.
“황제의 특명이오! 집행을 중지하시오!” 그는 기적적으로 생명을 건지게 됩니다.
그는 유배지인 시베리아로 가는 도중 기차가 멈췄을 때 어느 부인으로부터 작은 책 한 권을 받았는데, 그것은 바로 신약성경이었습니다. 그는 그 책을 가슴에 소중히 품었습니다. 수용소에서 온갖 흉악한 범죄자들과 부대끼면서, 혹독한 추위와 싸우며 힘든 노동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틈틈이 성경을 읽었습니다. 작은 성경 속에서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누가 내게 ‘그리스도는 진리가 아니다’라고 증명한다 할지라도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있고 싶다. 나는 진리보다도 차라리 예수와 함께 있고 싶다.”라고 고백했습니다.
4년간의 유배 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주옥같은 소설들을 써 내려갔습니다. 참혹한 수용소 생활을 담은 “죽음의 집”, 불우한 도망자의 끝이 구원으로 이루어지는 “죄와 벌”, 수용소에서 만난 사람들을 형상화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이르기까지 불후의 명작을 남겼습니다. 그가 겪은 모든 고통이 작품 속에 스며들어 새롭게 태어난 것입니다.
마음속에 증오를 품고 교회를 혐오했던 청년, 외톨이, 가난뱅이, 간질병자인 도스토예프스키는 예수를 만나 위대한 작가로 변했습니다. 죽어야 했던 그는 유배지에서 생명을 안고 돌아온 것입니다.
어떠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어떠한 상황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예수의 복음이 들어가면 생명의 역사, 즉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발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둘째로: 기쁨의 축제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삶에서 기쁨을 빼앗는 것들이 있는데 그것은 근심, 염려, 걱정, 스트레스, 두려움, 그리고 질병, 이러한 것들입니다. 인간의 능력으로 통제할 수 없는 이러한 것들은 끝없이 인간의 기쁨과 웃음을 빼앗아 갑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러한 것들을 큰 기쁨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천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릴 때 목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선포합니다.
눅 2장 10-11절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모든 환경을 기쁨의 축제로 바꾸는 능력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7장에 스데반 집사가 복음을 전하다가 돌로 맞아 순교를 당할 때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일어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져 나가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예루살렘의 핍박은 하나님의 의도였을 수도 있습니다. 당시에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할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행 8장 6-8절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복음이 선포되어지는 곳에 기쁨의 축제가 있습니다.
저는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것은 청년의 때에 열심히 전도하러 다닌 일입니다. 저는 종암동에 살았기 때문에 매주 주일이면 오전 8시에 청년구역 식구들과 만나서 종암경찰서 앞에서 합심으로 기도하고 “한 그룹은 주신 예식장” 앞에서 전도하고, 다른 그룹은 미아리에 있는 새한 병원에 가서 전도합니다. 그곳에는 거의 교통사고 환자들이 많이 입원하고 있는데, 우리는 조를 나누어서 복음을 전하는데 약 1시간가량 전도를 합니다. 한번은 한 병실에 들어갔을 때 약 40대의 크리스천 자매 환자를 만났습니다. 그 환자는 수술을 했는데 통증이 심하고 특히 열이 많아서 굉장히 고통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함께 갔던 형제님과 치료를 위하여 합심하여 기도할 때 이 자매님이 땀을 비 오듯이 흘리더니 일순간에 열이 내려가고 통증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얼마나 이 자매님이 기뻐하는지요. 그 은혜를 체험한 자매님은 기뻐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평신도 때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예수 믿는 우리에게 이러한 권세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12제자를 전도자를 보내실 때 마 10장 7-8절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말함.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 가다가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못 걷는 사람을 고쳤을 때 예루살렘에 큰 기쁨이 임하였고, 고침 받은 환자는 너무 기뻐서 뛰기도 하고 걷기도 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했고, 그날에 구원받은 수가 5천명이나(행4:4) 되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그곳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된 소식으로 인하여 염려와 근심과 두려움이 질병이 사라지고, 은혜와 치료와 임하기 때문에 큰 기쁨의 축제의 장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주님은 항상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기쁘게 산다는 것은 행복하게 산다는 것입니다. 기쁘게 산다는 것은 웃으며 산다는 의미입니다. 기쁨은 웃음을 동반합니다.
“데일 카네기”가 “웃음 예찬”이란 글에서 웃으며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했습니다.
“웃음은 별로 소비되는 것은 없으나 건설하는 것은 많으며, 웃음을 주는 사람에게는 해롭지 않으나 받는 사람에게는 넘친다. 웃음이 없이 참으로 부자가 된 사람도 없고, 웃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정말 가난한 사람도 없다. 웃음은 가정에 행복을 더하며, 사업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며, 친구 사이를 더욱 가깝게 하고, 피곤한 자에게 휴식이 되고, 실망한 자에게는 소망이 되고, 우는 자에게 위로가 되고, 인간의 모든 독을 제거하는 해독제이다. 그런데 웃음은 살 수도 없고, 빌릴 수도 없다."
영국 속담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하루를 기쁘게 살려느냐? 이발을 해라.
한 주간을 기쁘게 살려느냐? 자동차를 사라. 한 달을 기쁘게 살려느냐? 결혼을 해라.
일 년을 기쁘게 살려느냐? 새 집을 사라."
그러나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잠깐의 기쁨을 주기는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영원하지는 않습니다. 진정으로 영원한 기쁨은 그리스도 안에서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교하는 발이 아름답다.
셋째로: 사랑을 실천하는 모법이 되기 때문이다.
사랑에는 엄청난 변화의 힘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9장에 여리고에 사는 삭개오는 세리장이요 부자였습니다. 키가 작은 삭개오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보기 위하여 뽕나무(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밑을 지나가시다가 삭개오를 발견하고 쳐다보면서 말씀하시기를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너의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삭개오는 너무 기뻐서 주님을 영접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삭개오는 완전히 변화되어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눅 19장 7-9절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세상 사람들이 삭개오를 보는 눈과 예수님이 삭개오를 보시는 관점이 전혀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율법의 눈으로 삭개오를 보았기 때문에 죄인으로 보았고, 예수님은 삭개오를 긍휼의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용서받은 의인으로 본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이 지니고 있는 엄청난 능력입니다. 사랑은 약한 것 같으나 사람을 완전히 변화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속에는 아주 무서운 사상이 자리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헬라철학의 이원론 사상입니다. 세상에서 성과 속을 구분해 놓고 자신은 항상 거룩한 삶을 살고 있다고 착각하는 삶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완벽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주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세상을 정죄하고 심판합니다. 그곳에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사랑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입은 자들은 사랑을 실천합니다.
1979년에 노벨 평화상을 받은 테레사 수녀에게 영국 방송기자가 물었습니다.
“소외되고 가난하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테레사 수녀는 “자신이 버림받은 존재라는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사랑 받는 존재라는 생각을 가지고 더 어려운 사람들을 섬기는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아프리카 선교사였던 리빙스턴이 죽은 지 3년 후에 한 목사님이 아프리카에 있는 그분의 사역지로 가서, 그곳에 있는 원주민들에게 리빙스턴이 어떤 일을 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원주민들이 대답했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했습니다.”
원주민을 변화시킨 능력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그들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사랑에는 말이 필요 없습니다. 사랑을 실천하면 변화는 일어나는 것입니다.
요 3장 16-17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주님은 사랑을 말로만 하신 것이 아니라 몸의 실천으로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롬 5장 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아프리카의 성자인 앨버트 슈바이처 박사에게 한 부인이 다가와 물었습니다. “당신은 위대한 학자이며 천재적인 음악가입니다. 그런데 당신 같은 사람이 어떻게 이런 오지에서 생명을 바쳐 일을 합니까?" 슈바이처 박사는 지그시 눈을 감은 채 부인을 향해 말했습니다.
"저는 말로 사람들을 감동시킬 만한 재주가 없답니다. 사랑을 아무리 열심히 설명해도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이 거의 없더군요. 그래서 행동으로 사랑을 설명하려는 것뿐입니다. 나는 사랑을 베풀면서 '건강'과 '행복'을 선물로 받았어요."
복음에는 엄청난 은혜와 축복이 있습니다. 우리가 직접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없지만 복음을 전하는 발을 통하여 축복의 통로는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발이 아름답다고 생각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