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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 김시헌-여백에 그린 허무의 표정 (2006년 봄)
수필세계 사랑방
여백에 그린 허무의 표정
김시헌 선생님과의 대화
대담 : 홍억선(본지 주간)
기록 : 강여울(시인·수필사랑문학회 회원)
사진 : 노경애(수필가·디카450 회원)
우수를 며칠 앞둔 2월 17일(금), 바람의 끝은 아직 매서운데 햇살은 눈부시게 투명했다. 대구에서 안양은 생각보다 멀었다. 일행은 금강휴게소에서 잠시 쉬었을 뿐 부지런히 고속도로를 달렸다. 무료함을 달래듯 오늘 기록을 맡기로 한 강여울이 수필 한 편을 암송했다.
지금은 봄이다. 움츠렸던 겨울의 생명들이 새 기운을 차린다. 날고, 기고 뛰면서 봄을 즐긴다. 그 광경을 보고 있으면 나도 그 속에 한 조각 생명이란 것을 깨닫는다. 한 포기의 풀이 되고 한 마리의 새가 되어서 그들과 더불어 흔들고, 뛰고, 날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리하여 나를 잃어버린, 전체가 되어서 영원한 생명으로 지내고 싶다.
(김시헌의「유한, 무한」중에서)
초행길임에도 큰 어려움 없이 선생님께서 사시는 율목주공아파트를 찾을 수 있었다. 아파트는 수리산을 병풍처럼 둘러놓고 작은 개울을 끼고 있었다. 근처 식당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일행이 선생님 댁에 들어선 것은 오후 두 시가 다되어서였다.
반갑게 맞아 주시는 선생님을 따라 들어간 거실 한가운데는 러닝머신이 놓여 있었다. 선생님께서는 날마다 그 위를 천천히 걸으시면서 마음으로는 수리산을 오르시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베란다에 놓인 화초들도 햇볕을 받아 수줍은 듯 저희들끼리 몸을 기대고 낯선 방문객들의 눈길을 어쩔 줄 몰라 했다. 응접실 탁자 위에는 방금 선생님의 손길에서 놓여난 듯 장자 우화집 內篇 『虛』가 몇 권의 책들과 더불어 놓여 있었다. 이 모든 것들 위에도 햇볕은 편하게 다릴 뻗어 ‘햇살 가득한 집’이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마침 사모님께서 출타 중이어서 대접을 잘 못하게 되었다며 선생님께서 손수 다과상을 내오시자 강여울과 노경애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냥 앉아 계시라 해도 “이거 한 번 타 마셔 봐. 브라질산 커피야. 그리고 이건 이강주인데 『수필과 비평』 사의 서 사장이 보내 준 거야.” 하시며 깊은 정을 내신다.
하루 한 건의 만남
자리를 잡고 선생님의 근황을 여쭈어 보았더니 “나도 모르게 나이가 너무 많아져 버렸어.” 하시며 가벼운 웃음을 비추시며 몸도 무겁고 걷는 것도 귀찮아지는 것이 나이 탓인 것 같다고 하셨다. 얼마 전에 『수필문학』을 하는 강석호 씨가 안양에 와서 연락이 왔는데도 날씨가 추워서 나가지 못했다면서 미안한 표정을 지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 만나자고 연락이 오면 반갑고 기운이 난다고 하셨다.
-약속이 있는 날은 할 일이 생겼다 싶어 기분도 좋아지고, 만나서 차를 마시고 잡담을 해도 재미가 있고 그래요. 요즘은 하루 한 건이면 족해요. 무엇을 하든 하루 한 가지 이상은 하기가 힘들어. 오늘은 이렇게 후배들이 멀리 대구서 왔으니 바로 한 건의 만남이 된 거지.
-을지로 3가에 가면 청소년훈련원이 있는데 그 곳에 탁구장이 있어요. 탁구대가 여섯 대나 돼. 매주 목요일 오후에는 그 곳에서 탁구를 쳐요. 탁구가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등에 땀도 나고. 같이 치는 짝이 있어요. 수필문우회 회장이 허세욱 씨인데 그분이 탁구를 좋아하고 잘 쳐요. 이제는 짝이 늘어서 수필문우회 회원만 여섯 명이나 돼. 천안에 사는 최병호 씨가 가장 멀리서 오고, 정진권 씨, 문혜영 씨, 그리고 또 재미있는 수필을 쓰는 강호형 씨도 오지. 그렇게 한 시간쯤 탁구를 치고 나서는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잡담도 하고 그래요. 그게 재미있어. 동네 노인들이야 만나도 할 얘기도 별로 없고 잘 만나지도 않아요. 그래서 시간이 나면 지하철을 타고 서울 을지로로 나들이를 가곤 해요.
수리산 구구봉
-안양에 온 지가 벌써 5년째야. 그전에는 서울 올림픽공원이 있는 잠실 쪽에서 한 십 년 살았어. 그 곳에는 공원도 있고, 석촌 호수도 있고, 백제 고분도 있고 산책할 곳이 많아 좋았어요. 이곳은 그런 산책로는 없지만 수리산이 좋아요. 산봉우리가 하도 많아서 한 번 세어 보았어요. 열여덟 봉우리가 되더라고. 퇴계 선생의 시조에 보면 청량산 육육봉이란 구절이 있거든. 그것을 두고 세간에서는 6+6이니 열두 봉이다, 6×6이니 서른여섯 봉이다 하고 의견이 분분했어요. 내가 안동여중고에 근무할 때 학생들과 청량산을 올랐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학생들에게 세어 보라고 했었지. 조금씩 차이가 있긴 했지만 서른여섯 봉은 거리가 멀고 열두 봉우리가 맞다는 결론을 얻었어요. 수리산은 그보다 많은 열여덟 봉우리니까 이구 십팔 해서 ‘수리산 구구봉’이라고 수필에도 썼어요.
-그리고 요즘 취미삼아 수묵화를 흉내내고 있어요. 수묵화 책을 앞에 놓고 임화를 하는 셈인데 이게 재미있어요. 아직 먹도 제대로 갈 줄 모르지만 예전에 노인복지회관에서 서너 달 배운 것을 바탕으로 창의성 운운하며 혼자서 즐기고 있는데 하루에 두세 시간은 금방 가버리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그래 내 맘에 좀 잘 그렸다 싶으면 저렇게 문에 붙여 두고 며칠을 바라보기도 하고.
선생님 말씀처럼 현관 입구에는 겨울 나목을 그린 수묵화 한 점이 걸려 있었다. 자세히 보니 가지 끝은 겨울이고 아래쪽 가지는 새잎이 터질 듯 눈들이 부풀어 있었다.
-문학적 고향은 대구라고 할 수 있지만 내 고향은 안동 임하댐 꼬리부분에 있는 천전(川前)이야. 내[川]의 앞[前]이라는 뜻이지. 요즘은 고향뿐 아니라 어디에도 잘 가지 못해요.
안동 길안에 스님이 된 한 친구가 있어요. 불교대학을 나온 이 친구에게 법사로서 남에게 모범 되는 것이 뭐냐고 물었더니 잠자는 중에 죽음으로 건너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라고 해. 그리고 내가 아는 어떤 노인은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구십이 넘었어요. 그런데 문병 오는 사람마다 붙들고는 팔십이 넘도록 살지 마라 하는 거야. 왜냐하면 팔십이 넘으면 잡병이 와서 행복보다 불행이 많다는 거지. 듣고 보니 다들 옳은 말이구나 싶었어요. 이 세상 모든 생물은 고통을 느끼고 언젠가는 끝나는 허무와 닿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지. 그런 고통을 생각하면 인생이 허무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래도 어떻게 내 생명을 맘대로 하겠어?
예전에 수필 강좌 할 때 수강생들에게 더러 질문을 해 보면 행복하다는 사람보다는 불행하다는 사람이 훨씬 더 많았어. 그러나 삶이 고통이고 허무라고 해도 이기고 극복해야지. 나는 우리 모두가 자연에서 난 생물이니 자연 따라 살다가 자연 따라 가면 된다고 생각해요. 그러면 나를 버틸 수 있는 힘이 생겨요. 모든 생물은 죽는다. 그러므로 자연 따라 살다가 자연 따라 가는데 그 끝인 죽음을 어떻게 고통 없이 잘 맞이할 것인가가 요즘의 중요한 내 생각인 거지.
문득 선생님의 「해질 무렵」이라는 글이 생각났다. 그 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여백 속의 한가한 사람”인 나는 여섯 살 손녀와 백화점 나들이를 갔다가 곧 피로를 느낀다. “아침해는 흰빛인데 저녁해는 붉은빛이 되는 것은 피로 때문일까?”
선생님의 쓸쓸한 표정을 읽고 얼른 말을 바꾸어 요즘 자주 만나시는 분들에 대해서 여쭤 보았다.
-서울에서 친하게 지낸 친구로 윤모촌 씨, 정봉구 씨가 있었는데 다 돌아가셨어요. 그 외 가까운 사람들도 건강 문제도 있고 자주 만나고 그러지는 못해요. 나이가 많아 자리에 앉았다 일어서면 처음에는 잠시 어질하고 그래요. 그러니 밖에 나가는 것도 꺼리게 되고. 몇 달 전에 대구에 간 길에 김진태 씨를 만나고 싶었는데 그분도 건강이 좋지 않다고 해서 전화 통화만 하고 말았어요.
-정년퇴직하고 서울에 올라와 일 년이 조금 지났을까. 서정범 선생님의 소개로 전화를 했다며 서울국립도서관에서 수필 강좌를 해 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시작해서 몇 군데 문화센터 수필창작반하고 인천의 중앙도서관하고, 또 경기전문대학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지. 지금은 정해 놓고 나가는 곳은 없어요. 더러 수필 모임에 갔다가 갑작스럽게 부탁을 받아 본의 아니게 즉강을 하는 수가 있긴 해요. 얼마 전에는 오창익 씨가 특강을 해 달라고 해서 한 번 강의를 한 적이 있었어요.
수필과의 인연
-수필을 쓰게 된 계기라? 아주 오래 전의 이야기지. 처음에는 소설을 쓰고 싶어서 여성지에 콩트 같은 것을 써 보내곤 했었어요. 그러던 언젠가 영남일보를 보다가 문화면에 실린 수필을 보았는데 나도 써 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거야. 그래서 ‘30대의 고뇌’라는 제목으로 수필 한 편을 써 보냈는데 ‘하강 좌표 30대’로 제목이 바뀌어 실렸더랬어요. 그걸 보고 나도 수필을 쓰면 되겠구나 하는 자신감이 생겼지요. 그러다 안동에서 대구로 전근을 왔지요. 그런데 중앙문단이니 지방문단이니 하면서 끼리끼리 어울리더라고. 나도 지방신문, 도정월보에 더러 수필을 발표를 했던 터라 굳이 섞이고 싶지 않았지. 그래서 혼자서 작정하고 수필을 써 보았지요. 그렇게 쓴 수필을 1966년에 『현대문학』에 보냈는데 몇 개월 후에 책이 왔더라고. 「私談」이라는 글이었는데 그것이 본격적으로 수필을 쓰게 된 계기가 되었던 것 같아요.
-현대문학에 발표를 하고 이삼 년 후쯤 되었을까. 낙동다방을 하던 이화진 씨가 나오라고 해서 갔더니 장인문 씨를 소개해 주는 거야. 그렇게 만나서 동인회를 만들어 보자는 얘기가 나왔어요. 그래서 도청에 가서 도정월보를 뒤져 다섯 번 이상 발표한 사람을 열 명쯤 뽑아서 처음으로 ‘경북수필문학동인회’를 만들었지요. 다음해 ‘수필문학회’로 이름을 바꿨는데 문교부에 등록을 해 놓은 같은 이름의 동인회가 있더라고요. 우리는 등록이 안 된 상태라 ‘영남수필문학회’로 다시 이름을 바꿨지요.
지금이야 건강도 그렇고 그때의 동인들과 자주 만나지 못해요. 김규련 씨, 정휘창 씨, 견일영 씨, 또 몇몇 분이 서울에 오면 차 한잔하자고 연락이 와요. 수필문우회 회원들과 가끔 만나고, 수필창작반에서 공부한 사람들이 더러 찾아오고 그러지.
-수필집을 몇 권 냈는데 맨 처음 수필 입문집이라 할 수 있는 것이 김진태, 장인문 씨와 함께 낸 3인 수필집 『散文散策』이에요. 장인문 씨는 이화진 씨 소개로 만나게 되었고, 김진태 씨는 학부형으로 처음 만났어요. 이분이 원래 아동문학가였는데 내가 하루는 가정방문을 갔더니 학부형이라고 인사를 하며 “제가 김진탭니다” 하는 거야.
그런데 20년이 더 지나서『散文散策』2집이 나왔지. 수필문학사 강석호 사장이 ‘수필 청록집’이라며 평을 재미있게 쓰고 2집을 만들었지.
허무의 표정
아끼시는 작품이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곧바로「여백」이라고 대답하셨다. “「여백」은 최근에 쓴 논리적이고 철학적인 작품인데 내가 이 정도로 쓸 수 있었나 싶을 정도 아끼는 작품”이라고 하셨다. 이 작품이 실린 책의 제목이 『허무의 표정』인 이유를 선생님은 “인생은 허무하니까”라고 하셨다.
여백은 남아 있는 면적이다. 써도 되고 안 써도 되는 여유스러운 지역이다. 텅 빈 느낌을 주는 한가한 곳이다. 넉넉하고 넓고 크지만 쓸모가 별로 없다. 그러면서 여백은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표정을 가지고 있다. (중략)
노년은 인생의 여백이다. 하던 일을 놓아 버리고 머리에 흰 눈을 인 채 어슬렁어슬렁 거리를 다닌다.
손도 비고 마음도 비고 몸도 비었다. 비어야 떠나기가 쉽다. 가벼워야 날기가 좋다. 몸은 땅에 있지만 마음은 날아야 어디론가 간다. 그리하여 인생의 끝을 눈앞에 두고도 초조하지 않다. 속에는 아직 덜 꺼진 불씨가 있을지 모르지만 겉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살이 빠지고 기운이 없고 다리가 휘청거리지만 표정은 언제나 표백된 맑은 빛이다. 어느 날 후루룩 자기 자리를 떠난다 해도 미련이 없다. 그러한 미련 따위는 세월 속에서 이미 하나 둘씩 놓아 버렸다. 인생의 여백! 그것에도 낭만이 있다. 떠나는 것을 아쉬워하지 않는 허허한 낭만이다. (중략)
마음의 여백은 무한대이다. 우주가 들어간다 해도 여백은 남는다. 그렇게 볼 때 여백은 그 곳에 있기만 하지 않고 스스로 만들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2002년도에 발표된 이 작품은 선생님의 체취가 그대로 배어 있다. 선생님의 몸이나 표정에서 무게가 느껴지지 않았던 것도, 여백 속의 학처럼 고요와 평화가 감지된 것도, 이 글에서 느껴지는 달관의 경지 때문인 것 같았다.
또 애정이 가는 작품을 여쭈었더니 「아들」이라는 작품을 남들이 좋아하더라고 하셨다. 고등학교 삼 학년인 아들이 밤에 공부를 하다가 마당에서 역기 운동하는 모습을 문구멍으로 내다보며 저절로 나오는 웃음을 소재로 쓴 글이라고 하셨다.
-내 글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주제의식? 뭐랄까. 내 글은 삶의 근원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이 되는 것 같아요. 사람들이 내 글은 너무 철학적이라 어렵다 하기도 하는데 아마 그것은 인간 근원에 대한 대답 자체가 어렵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수필과의 인연이 시작되기 전에 벌써 해방과 6·25를 겪으면서 실존주의 철학이 내게 깊은 허무의식을 심어 준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안병욱, 김형석을 비롯한 철학수필을 탐독했던 영향도 있지요. 세월 따라 지금은 조금 바뀌어서 주변에서 보고 듣고 겪는 여러 현상들 속에서 철학을 발견하려고 하지요.
요즘 수필은 주변에서 경험하고 일어나는 현상에 대해서는 참 재미있고 섬세하게 잘 표현을 하는데 인간 삶의 근원에 닿는 울림 같은 것은 아예 없거나 있어도 아주 적은 것이 아쉬워요.
선생님은 독자가 바보가 아니니 좋다는 독자가 많은 작품이 좋은 글이 아니겠느냐고 하셨다. 수필이 문학이기 위해서는 감동이 있어야 하고, 이 감동은 작가의 사상과 감정의 드러남에 있지 않겠냐고도 덧붙이셨다. 내친김에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수필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해 보았다.
생각하는 사람
-수필이라, 거참 어려운 질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사람」이란 글에서도 그런 말을 한 것 같아요. 수필은 자기가 체험한 사실이나 경험한 여러 현상 속에서 이것이다 하고 오는 느낌, 감동, 그 의미를 독자에게 전해 주는 것이 아닌가 해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철학이 다르니 어떤 수필이 좋으냐는 질문의 정확한 답은 다들 다르겠지요. 나는 수필에 그 사람의 철학이 담겨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내가 철학적 수필을 좋아해서인지 모르지만……. 요즘 젊은 작가들의 수필을 보면 재미는 있어요. 섬세하고, 세련된 묘사와 문장 그런 것은 좋은데 무엇을 말하는가 하는 주제의식, 그러니까 철학은 많이 부족해요. 좋은 문장에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하는 철학이 담긴다면 더 좋은 수필이 되지 않을까 해요. 요즘 사람은 선배들에게 옛날 것을 못 벗어난다고 하는데 나는 옛날 것이 다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새로운 것도 좋긴 하지만 옛날처럼 찔러 주는 의미는 부족하거든. 그런 점이 요즘 수필에 합쳐지면 더 좋겠지요.
-물론 잘 쓰는 젊은 작가들도 많아요. 작품집이 오면 읽어 보고 가슴에 탁 하고 오는 것이 있으면 그 느낌을 엽서로 써 보내기도 해요. 오늘도 이명선이라는 젊은 작가에게서 전화가 왔었어요. 지난번 수필집을 보내 와서 읽어 보다가 처음 오는 느낌이 있어 적어 보냈더니 기분이 좋았던가 봐요.
이명선 작가에 대한 말이 나와 반가웠다. 본지 봄호에 ‘우리 시대의 수필작가’로 이명선 씨의 작품을 집중 조명하기로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마침 강여울이 경북수필 동인지 2집에 수록된 선생님의 머리말 몇 구절을 찾아 읽었다.
수필은 한길에서 갈려 나간 논둑길이다. 소록소록 내리는 가을비이고 높은 하늘에 깔린 무수한 별이다. 몇 백 년 묵은 노송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 휘어진 가지에서 수필을 느낀다.
수필은 호젓하면서도 군색하지 않고, 멋이 있으면서도 방탕하지 않고, 소박하면서도 우둔하지 않다. 수필은 건강하지만 파격을 좋아하고 야유스럽지만 악의가 없고 날카롭지만 따갑지 않다. 수필은 길이가 짧지만 소설이 담겼고 리듬은 없지만 시가 있다. 수필은 부담 없게 걷는 산책과 같고 장바구니를 든 아낙네와도 같다. 그 속에는 꿈을 돌아보는 낭만이 있고 고초를 극복하는 철학이 있고 생사를 초월하는 우주가 있다.
허구성에 대하여
-정진권 씨와의 허구 논쟁? 우리의 논쟁을 차주환 씨는 ‘신사 논쟁’이라고 수필을 쓴 적이 있어요. 아마 그만큼 서로 격을 높여 가면서 벌였던 토론이었던 거지.
논쟁의 시작은 그분이 수필의 폭 넓은 문학적 수용을 위해서 허구를 도입해야 한다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하면서 시작됐어요. 그 논문을 읽는 순간 아니라는 생각이 와서 그에 반하는 수필의 본질론을『수필공원』에 실었었어요. 그렇게 해서 지면으로 서로의 논지를 몇 번 주고받고 했던 거지요. 지금은 둘 다 조금씩 절충했다고 해야 하나? 나는 ‘허구’는 안 되지만 ‘허구성’은 된다고 보고 있고, 정진권 씨도 허구보다 폭이 넓은 ‘상상력’ 쪽으로 기운 상태라고 봐야 하나?
이야기의 사실적인 묘사를 위해서는 사실이 아닌 것이 끼여들 수 있는데 이것을 난 허구성이라고 봐요. 그러니까 허구와 허구성은 다르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수필은 사실의 문학이니 없는 이야기, 허구는 안 되고 체험의 문학적 묘사를 위한 허구성은 허용을 하자는 거지요. 상상은 사실 허구를 포함한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것을 아우르기 때문에 훨씬 범위가 크다고 할 수 있어요. 수필은 소설처럼 만들어 낸 이야기가 아니고 체험을 토대로 작가의 사상과 감정을 드러내는 문학이잖아요. 내가 수필을 선택한 이유도 있는 그대로의 나를 털어놓으면 되기 때문이었어요.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 주면 거기에 나의 철학이 있고, 사상이 있고 그렇지 않겠어요?
여백 속의 학(鶴)
출타하신 사모님을 대신하여 선생님의 따님이 외출에서 돌아와 잠시 목례를 나누었다. 주방에서 뚝딱뚝딱하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어느새 김이 모락모락 나는 탕수육과 홍합을 내왔다. 음식은 정갈하고 맛깔스러웠다. 선생님께서는 이제야 제대로 된 안주가 나왔다며 이강주와 5년이나 숙성시켰다는 매실주를 따르며 자꾸 권하셨다. 일행은 송구해 하며 목을 축였다.
흥이 오른 강여울이 특유의 착착 감기는 목소리로 선생님의 「두 가지의 나」라는 글을 낭송했다.
하나는 나 속에 갇혀 있고
하나는 세계 속에 나와 있다.
하나는 나만을 움직이고
하나는 우주를 움직인다.
하나는 물질 속에 갇혀 있고
하나는 허공 속에 함께 있다.
하나는 시간 속에 묶여 있고
하나는 영원에 통해 있다.
하나는 있는 듯이 없고
하나는 없는 듯이 있다.
지그시 눈을 감고 계시던 선생님께서는 잘 읽어서 시 같다며 호쾌하게 웃었다. 생각난 김에 본지 『수필세계』에 대하여 여쭈어 보았다.
-지방에서 잡지를 만든다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 텐데 그 많은 작가를 폭 넓게 발굴해 글을 싣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야. 『수필세계』가 잘 나온다는 이야기는 문단에서 듣고 있어요. 상반기, 하반기로 나누어 일년에 딱 두 사람만 엄선해 신인을 배출하는 것도 놀라운 일이고, 특히 편집이 신선하고 다양해서 좋아요. 나도 지난호에 수필론을 실은 적이 있지만 작품을 쓰는 대로 보낼게요. 남들과 똑같은 잡지를 만들지 말고 나름대로 특색이 있는 잡지를 늘 생각해 봐요.
그렇지 않아도 수필문우회 변해명 씨께서 중앙에서 만드는 잡지를 따라가는 데 신경 쓰지 말고 지방의 특색을 살려 지방의 작고 수필가 순례 같은, 예를 들어 한흑구 선생 특집 글을 실어 보라고 하더라는 조언을 소개했다. 선생님께서는 한흑구 선생님 말씀이 나오자 잠시 눈을 감았다.
-내가 범우사에서 출판한 한흑구 선생의 『보리』라는 수필집에 ‘한흑구론’을 썼어요. 그때는 사람을 잘 모르기도 하고 해서 그분의 책과 글을 읽고 나름대로 썼는데 잘 썼다고 해서 안심을 했지요.
그분을 처음 만난 것은 ‘경북수필’을 만들 당시 회장님으로 모시려고 포항까지 찾아가서였어요. 당시 포항수산대학에 계셨는데 전화를 했더니 한흑구 선생님을 모르지 않겠어요? 본명이 한세한이니까 당연했지.
그런데, 포항에 살기 때문에 대구의 문학회 회장은 할 수 없다며 거절했어요. 다만 회원으로는 넣어 주면 하시겠다고 했지. 모임이 있으면 꼭 오셨어요. 키도 크고, 술도 잘하시고, 머리도 좋으셨어요. 그분이 돌아가셨을 때 장례식에도 갔었는데. 살아생전 바다를 너무나 좋아하셨기에 바다가 바라다보이는 곳에 무덤을 만들었어요. 나중에 이장을 했다는 소문이 들리던데 어디로 이장을 했는지는 모르겠어. 장례식에서 돌아와 「바닷가에 잠자시는 한흑구 선생님」 이라는 글을 신문에 싣기도 했어요.
선생님께서는 한흑구 선생님의 수필집 『보리』를 한 권 주겠다며 일어나셨다. 책을 가지러 방으로 가시는 선생님의 처음 몇 걸음이 흔들렸다. 선생님의 몸이 너무나 가벼워 마치 바닥이 손바닥을 펴서 불안한 듯 선생님을 받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며 내내 떠올린 낱말이 명경지수(明鏡止水)였다. 이 말은 선생님의 수필이 “반짝이는 상상력보다 깊이 있는 사색으로 조탁한 발견의 언어이다”라거나 “현란한 문체나 역동적 구성보다는 신실한 문장과 정직한 직조가 있다”라는 평자의 말들과 상통하는 것이기도 하다. 선생님은 수필에서 느껴지는 이미지 그대로 서두르지 않고, 화려하게 꾸미지 않고, 비약하지 않으며 담담하고 진실하게 우리를 대하셨다. 마치 명경지수에 자신을 비추고 선 학(鶴)처럼.
자리를 옮겨 아파트 화단에서 선생님과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사진을 찍던 노경애는 선생님의 건강이 염려되어 몇 번이나 옷깃을 여미어 드렸다. 선생님께서 댁으로 들어가시는 것을 보고 돌아오려 했으나 기어이 우리가 떠나는 것을 보고 들어가시겠다고 하셨다. 선생님은 우리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오래도록 그 자리에 서 계셨다. 선생님을 둘러싼 여백이 점점 넓게 퍼지는 것을 느끼며 우리는 갔던 길을 되짚어 왔다.
선생님께서 「서울살이」라는 글에서 “안동 껑껑이로 30년, 대구 문둥이로 30년을 살았으니 이제 서울 양반으로 30년을 살려면 90살이 되겠지요.” 하신 그 말씀이 꼭 현실이 되길 소망했다. 차창 밖은 어느덧 어둠이 먹물처럼 번지기 시작하였고, 부지런한 별들은 벌써 길잡이를 나서고 있었다.
1925년 경북 안동군 임하면 천전동 출생
1947년 안동농림고등학교 사범과 졸업
1954년 중등교원 검정고시 합격
1965년 경북대학교 부설 중등교원 양성소 졸업
1966년 『現代文學』에 「私談」 발표로 문단에 나옴
1968년 대구에서 ‘경북수필동인회(현재의 영남수필문학회)’ 창립
1969년 동인지 『隨筆文學』 간행. 한국문인협회 회원
1970년 경북수필문학회 회장
1972년 3인 수필집 『散文散策』간행. 펜클럽 한국본부 회원
1975년 5인집 『人生의 妙味』 간행
1977년 한국수필가협회 이사
1978년 경북문화상 수상
1980년 수필문우회 회원
1987년 한국수필문학상 수상
1991년 서울로 이사
1993년∼서울국립도서관, 인천중앙도서관, 백화점 문화센터의 수필창작반 강의
1994년 경기전문대학 강사
1996년 신곡문학상 수상
1999년 수필문학상 대상 수상
저서
1982년 『멋을 아는 사람』
1984년 『두만강 푸른 물에』
1988년 『오후의 사색』
1994년 『散文散策』(제2집)
2000년 『해질 무렵』(선집)
2003년 『허무의 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