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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역사 안에 건축된 교회
2014년 4월 27일(일)
(고전1:26~31))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31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교회는 창세전에 선택 되었고, 아담과 하와로서 예표 되었으며, 역사 안에서 건축 되었다. 이 경륜은 인간을 창조하기 전에 예정 된 것임으로 하나님의 문제이며, 아담과 하와로서 예표 되었기 때문에 생명의 문제이고, 역사 안에서 건축되기 때문에 인간과 관계 된 하나님의 목적이며 사실이다. 이 문제는 인간과 관계되지마는 먼저 하나님의 절대적 필요에 따른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땅 위에서 자신을 표현하려면 연합체로서의 한 몸이 필요하다.
지난 시간에 창세전에 선택된 교회에 대해서 말씀을 했다. 왜 이 말씀을 드리냐 하면 교회는 지금 땅위에 있고 현재적이다. 교회만 보면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갈 것인지 분간하기가 어렵다. 교회의 형편이 항상 좋은 것이 아니고 문제가 많기 때문에 어디로 갈 것인지를 알기가 어렵다. 그런데 창세전에 선택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비록 지금은 요동하고 있을 지라도 갈 곳을 분명하게 알게 된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창수가 나게 되면 세상은 완전히 어두워지게 된다. 혼란스럽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뭘 알고 있는가? 하늘은 항상 맑게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장마 때 비가 지루하게 올지라도 언젠가는 맑은 하늘이 비칠 것이라고 믿고 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교회가 창세전에 선택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기 전에 교회라는 목적을 가지고 그것들을 창조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교회의 위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된다.
우리 자신의 형편을 본다고 하더라도 이것을 가지고 뭐가 되겠냐는 생각이 들 수도 있고 세상의 교회들을 보더라도 희망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항상 ‘하늘에서 선택되었다. 하나님의 계획이 있어서 이 일이 일어났는데 오다가 중간에서 잘못되었다.’ 이렇게 알게 되면 항상 희망이 있다. 이것을 이해서 사도 바울은 “창세전에 우리가 택함받았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도 어쩌다가 예수를 믿게 되었다. 어쩌다가 교회를 오게 되었다. 그러면 그때는 그럴 형편이었으니까 교회를 왔지, 이런 일이 있었으니까 교회를 왔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언젠가는 그런 일이 아니면 나갈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고, 형편이 대단히 어려웠을 때 교회를 왔는데 형편이 풀리니까 교회를 나갔다는 이런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그런 형편이 있기 전에 이미 하나님이 나를 알고 있었구나! 내가 택함을 받았었구나!’ 이것을 아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다.
누구나 보면 교회를 온 것이 표면적인 형편 때문에 온 것같다. 저런 사람은 정말 교회에 올만하다. 저러니까 와야지 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저 사람은 왜 교회를 왔을까, 잘 먹고 잘 사는 데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내용을 보면 다 사정이 있어서 왔다. 그러니까 사정이 있어서 오게 된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선택이 있어서 오게 된 것인가? 이게 아주 중요하다. 오게 된 것이 사정과 간접적인 관계가 있지만 영원한 관계 안에서는 사정 이전에 하나님의 택하심이 있다는 것이다. 교회는 그렇게 선택된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교회가 어떤 일이 있다할지라도 반드시 하나님이 계시는 한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성취될 것이라는 믿음이 생기게 된다. 내 인생도 그렇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할 수도 있고 뒤집어졌다 엎어졌다 할 수도 있다. 그럴 때만 생각하면 ‘야~ 이거 하나님이 언제는 나를 축복해주더니 지금 이런 것을 보면 하나님이 변했나 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내 형편에 상관 없이 그 이전에 ‘하나님이 어떤 계획이 있어서 나를 불렀다. 하나님이 쓸 데가 있어서 나를 불렀구나.’를 것을 알게 되면 요동치지 않는다.
내 인생을 돌아봐도 우여곡절이 많았었는데, 뒤로 와서 생각해보면 아~ 하나님이 무슨 일이 있어서 그때 그런 일이 있었구나 이렇게 알게 된다. 그때 그렇게 되지 않았으면 지금 이렇게 쓰여지지 않았겠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떤 사람 앞에서 내가 하나님의 목표를 나타내려고 하는데 나타낼 자료가 없는데, 내 일생에서 지나간 우여곡절이 딱 자료가 될 때가 있다. 그때 ‘아~ 내가 그때 우여곡절을 겪었던 것은 오늘을 위해서였구나.’ 이렇게 알게 된다. 그래서 인생이 해석이 된다. 지나간 일 중에 굉장히 어려운 일들이 많고 원한도 있었고 말썽도 있었고 많았었는데 그 자리에 오게 되면 싹~ 없어진다.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해서 그 일이 있었다는 것으로 알게 될 때 우리의 지난 일은 모두 백지가 되고 싹 사라져버리고 반대로 그것이 은혜로 해석이 된다. 참 신기하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그러니까 늘 새롭다. 세상에서는 한 번 원한이지면 영원히 원한을 지게 된다. 한 번 미운 놈은 영원히 밉고 한 번 잘 못되면 영원히 잘 못되고 그렇다. 바꿀 방법도 없고 해석할 방법도 없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서는 늘 새롭게 해석이 되니까 축복이 된다. 모든 것이 축복이 된다.
나무를 보면 비료를 줘야 잘 되는데, 이 비료가 대부분이 썩은 것이다. 쌩쌩한 것은 비료가 안 되고 썩어야 비료가 된다. 요즘 농촌에 가면 뭘 뿌리는데 냄새가 아주 고약하다. 음식물 쓰레기 같은 것을 썩혀서 비료를 만들고 하는데 그것이 들어가면 나무가 잘 자란다. 그러니까 생명에 뿌리면 비록 그것이 썩은 것이지만 생명을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우리의 환경이 이렇게 되기도 하고 저렇게 되기도 한다. 그때 당시에 생각하면 이런 환경은 나에게 없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누구나 다 있다. 그런데 그것이 뒤에 어느 날 가보면 야~ 그때 이래서 이랬구나 오늘을 위해서 있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된다. 인생이 넉넉하게 보상될 뿐만 아니라 축복으로 해석되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일도 어떤 사건도 저주가 저주로 그냥 넘어가는 일이 없다. 항상 그것이 새롭게 축복으로 바꿔진다.
생명의 세계를 보면 그렇다. 우리 몸을 보면 더러운 것이 많이 생긴다. 기계가 움직이게 되면 더러운 것이 많이 생기듯이 사람의 몸도 밥 먹고 살다보면 똥도 생기고 많이 생기게 된다. 그렇게 생기는 것인데, 이런 것들이 생기지만 생명이 살아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자꾸 씻어내면서 늘 새로워진다. 뱃속에 똥이 없으면 얼마나 깨끗하고 좋겠냐는 것이다. 그런데 뱃속에 똥이 없으면 안된다고 한다. 뱃속에 똥이 있어도 아무 상관이 없다. 다른 곳에 똥이 있으면 썩는데 뱃속에 똥이 있으면 창자가 썩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똥이 있다고 용종이 생기고 암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다른 것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분명히 똥은 더러운 것인데도 생명은 거기서 살고 있다. 오히려 그것이 없으면 안 된다고 한다. 맞는 말인지 아닌지 모르겠는데, 요즘 아이들에게 아토피가 많다. 왜 아토피가 많은가에 대한 이유가 어떤 학자에 따르면 옛날에는 뱃속에 회충이 많이 있었는데 지금은 회충이 없어서 아토피가 생긴다고 한다. 그러니까 뱃속에 회충을 넣어주면 아토피가 없어진다고 한다. 이것을 인권문제가 있어서 못한다고 한다. 신기한 일이다. 어떻게 같이 공존하는지.
또 우리 장 속에는 중국인구보다 몇십배 많은 세균들이 살고 있다. 같이 살고 있다. 세균들이 없으면 우리는 영양분을 흡수할 수 없다. 1차적으로 세균들이 먼저 먹고 소화해서 내놓은 찌꺼기를 우리가 먹고 있는 것이다. 그놈들이 소화를 해서 내놓지 않으면 우리는 살지 못한다. 쌀이 어떻게 내 피 속을 돌아다니겠는가. 그런데 그놈들이 먹어서 우리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게 만들어준다. 그러니까 생명이 아주 신기하다.
그러니까 창세전에 선택했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잘 생각해 보라! 내 인생을 돌이켜보면 ‘내가 알기 전에 나를 알고 있었구나! 오늘을 위해서 그때가 있었구나!’이렇게 알게 된다. 나도 후회되는 것이 참 많았다. ‘이랬으면 할 걸, 저랬으면 되었을 걸, 그때 이랬으면 되었을 걸 왜 그때 꼭 그랬을까?’ 이런 것이 많았다. 그래서 껄껄 하다가 죽는다고 한다. 그런데 그것이 한꺼번에 싹~ 해결된다. 어느 날 내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 들어와서 한꺼번에 해결되면서 ‘꼭 그것이 있어야 했구나, 그것이 아니었으면 안 되었겠구나. 꼭 필연적으로 있을 것이 있었구나.’ 하게 된다. 나는 순탄하게 자랐으면 그래서 잘되었으면 교장선생님 하다가 정년퇴직했지 싶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꼬여서 안 되고 말았다. 그 길을 가지 못했다. 이것을 생각하면 참 억울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 안에 와서 보니까 그것이 참 하나님의 신기한 방법이고 또 나보고 하라면 그렇게 할 거냐는 것이다. 나보고 처음부터 하나님이 ‘너는 내 일만 해야돼!’했으면 하겠냐는 것이다. 그러니까 빌빌 꼬아서 나를 그것만 하도록 해놓았다. 그런데 그것이 축복이었다.
그러니까 창세전에 교회가 선택되었다. 우리는 창세전에 선택된 사람들이다. 이것이 아담과 하와로 예표 되었다. 교회는 이렇게 둘이 연합하는 것이다. 다른 것 둘이 합해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와로 예표 되었다. 그런데 이것이 하늘에서는 되었지만 땅위에서 어떻게 전개되는가 하는 것이 오늘의 말씀이다.
역사 안에서 건축된 교회! 방금 “창세전에~”한 것은 역사가 아니다. 이제는 창세전에 선택된 교회가 역사 속에서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가? 이 경륜은 인간을 창조하기 전에 예정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나의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의 문제다. 인간의 문제이기 전에 하나님의 문제다. 교회는 하나님의 문제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로 예표 되었기 때문에 이것은 생명의 문제다. 교회는 교리나 제도와 같은 문제가 아니고 생명의 문제다. ‘아담의 갈비뼈를 빼서 하와를 지었다.’는 것은 생명의 문제다. 그러니까 교회는 철저하게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생명의 문제다.
그런데 역사 안에 와서 문제가 복잡해졌는데 그것은 교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교회가 교리 제도 같은 것으로 발전하다보니까 생명의 문제가 교리의 문제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지식으로 흘러갔다.
그리고 역사 안에서 건축되었다. 역사 안에서 건축되려면 인간과 관계가 된다. 교회가 그냥 하늘에서 딱 내려온 것이 아니고 이 교회가 인간과 관계된다. 인간과 관계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목적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을 때 왜 지었는가 하면 바로 이 교회, 이 연합체를 위해서 지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역사 안에서 건축되기 때문에 인간과 관계된다. 그냥 된 것은 인간과 관계가 안 된다. 역사 안에 있으려니까 인간과 관계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목적이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 뭔가? 그것은 바로 교회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형 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목적이 사실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 문제는 인간과 관계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고 먼저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필요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아~ 사람은 교회를 가야되! 교회가 필요해!’ 이렇게 했기 때문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필요 때문에 생긴 것이다. 이것을 아는 것이 참 중요하다.
우리 인간의 필요 때문에 생겼다면 있다가 없어져도 되고 불필요하면 가버리면 된다. 그런데 하나님의 필요 때문에 된 것은 우리 생각과 다를 수밖에 없다. 지금 유럽에 있는 교회들은 거의 썰렁하고 썰물상태에 있다. 그 교회들은 역사 속에서 뭔 일인가를 많이 했다. 공헌을 많이 했다. 그런데 역사에 공헌한 그것이 다 하고 나니까 할일이 없어져서 교회에 갈일이 없어졌다. 그 사회가 교회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제는 사회와 나라가 다 하고 있으니까. 사회가 그렇게 기독교 문화화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교회에 갈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기독교인이라고 하면 추수감사절에 한번가고 부활절에 가고 하면 그냥 기독교인이다. 생활자체가 기독교인 생활을 있으니까 그렇다. 집에는 성경찬송 다 있고 그렇다. 굉장히 잘 지어놓은 예배당들이 텅텅 비어있는 실정이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목적은 아직도 변하지 않았는데 인간의 목적은 변했다. 인간의 목적을 위해서 일했던 인간의 목적으로 세워졌던 교회들은 이제 쓸데가 없게 되었다. 아무데도 필요 없게 되었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땅 위에서 자신을 표현하려는 연합체로서의 한 몸이 필요하다는 이것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갈망이다. 어떤 사람은 이 말을 가지고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하나님이 뭐가 부족하냐. 하나님은 완전하다는데 말이지. 저 사람들은 하나님이 불완전하다고 한다.”고 한다. 이런 것은 귀가 잘 못 뚫려서 문제인 것이다. 그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갈망이 있다. 왜냐하면 몸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마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손이 없다고 하면 어떻게 하겠냐는 것이다. 마음이 아무리 있으면 뭐하냐는 것이다. 손이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한다. 몸이 있어야 내 마음을 표현할 수 있다. 몸에 와야 실제적인 것이 되지 몸이 있을 때까지는 실제적인 것이 못된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얼마나 몸을 갈망하냐는 것이다.
우리 몸에는 어디 있는지는 모르지만 마음이 있다. 그런데 눈이 하나 없으면 너무 불편하다. 아주 없는 사람도 있는데 그 사람은 얼마나 눈을 갈망하겠는가. 천만금을 주고 바꾸겠는가, 뭘 주고 바꾸겠는가? ‘온 천하를 다 주더라도 눈 하나만 있으면...’ 이렇게 생각하지 않겠는가? 그만큼 갈망이 크다.
반대로 우리 인생은 하나님에 대해서 그 만큼 갈망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러니까 사람의 갈망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오신다든지, 사람의 갈망에 따라 하나님이 말씀 하신다든지, 이렇게 된다면 우리는 억만 분의 일도 하나님을 맛볼 수 없다. 왜냐하면 갈망이 그렇게 없기 때문이다. 음식이 많으면 뭐하는가? 내가 식욕이 없는데... 음식이 많이 있는데도 먹고 싶은 마음이 없다면 내 속에는 안 들어온다. 그래서 나는 뷔페에 가면 손해다. 아주 손해 막심하다. 비싼 뷔페를 가면 더 막심하다. 나는 먹어봐야 겨우 5000원치 밖에 못 먹는다. 그런데 뷔페의 가격은 20000원, 50000원 이런다. 너무 억울한 것이다. 누구 좀 큰 사람을 데리고 가야지 나 혼자가면 억울하다.
하나님은 영이시라 절대적 갈망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빗나가도 또 데려오고 빗나가도 또 데리러 오고 그런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이 그런 갈망이 없다면 귀찮은 녀석들 가면 그만이지 않은가? 생각해 보라. 왜 속 썩이는 녀석들을 잡아다 놓고 속이 썩겠는가? 그런데 워낙 갈망이 많으시고 갈망이 크시니까 그저 눈이 하나 있든지 없든지 간에, 다리가 하나 있든지 없든지 간에 다 불러 모으신다.
이것을 신약 성경에서는 비유로 말씀하고 있다. 잔치를 한다고 초대장을 보내고 잔뜩 준비를 해 놓았는데 사람이 몇 명 안 온 것이다. 왜 안 오는가 했더니 이 사람은 이런 핑계가 있고 저 사람은 저런 핑계가 있고 다 핑계가 있어서 안 온다. 이 사람들은 배가 안 고픈 사람들이다. 배가 안 고플 때 누가 잔치를 차려 놓고 초대를 하면 귀찮다. 배가 부르면 감사하기는 한 데 귀찮다. 그런데 배가 고플 때는 누가 보리밥이라도 주면 너무나도 감사한 것이다.
잔치를 벌려 놓았는데 아무도 안 온단 말이다. 잔치를 하려면 자기 레벨에 맞는 사람들을 초대할 게 아닌가? 잔치에 오는 사람들을 통해서 자기의 품위를 높여 보려고 하는 것이 사람의 생각이다. 그런 쪽으로 초청을 하려고 하는 데 이 사람들은 하나도 안 왔단 말이다. 그래서 2급지에다 초대장을 보냈다. 자기가 보내기는 그렇지만 그래도 없으니까 어떻게 하겠는가 하고 보냈다. 그들도 역시 안 오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화가 나서 길 어귀에 가서 그냥 아무나 불러 오라고 했다. 그 아무나 불러오라고 하는 사람들 속에는 누구도 있는가 하면 절름발이도 들어 있고 형편이 없는 사람들도 있고 정말 그 잔치의 품위를 손상시킬 수 있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북적거리고 노래도 부르고 싸움도 하고 이래야 잔치가 되지 음식을 차려 놓았는데 파리만 날리고 있으면 주위에 더 창피하다. 그런 비유를 들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찾으시려고 오신 것이다. 그래서 그런 말씀을 하셨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께 부름 받은 것은 우리가 생각을 해서 ‘내가 예수를 좀 믿어야 할 텐데.’ 이런 생각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갈망 때문에 우리가 왔다. 이것은 신기한 일이다. 지금 교회 같은 곳에 가면 굉장히 열심이 있는 사람들이 많다. 밤낮을 구별하지 못하고 기도만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무슨 갈망이 그렇게 많은지! 하여간 애걸복걸하면서 눈물, 콧물 다 흘려가면서 하나님에게 매달리는 사람이 참 많다. 많은 데 그런 사람들을 보면 얼마나 애타게 하나님을 찾고 있는가 싶다.
그런데 그게 아니란 말이다. 그게 아니고 딴 욕심이 있어서 그런 것이다. 다른 생각이 있어서 그렇다. 그리고 그렇게 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오시고 그렇게 안 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안 오신다면 그 하나님은 왔다가 배척받고 갈 것이고 왔다가도 배척받고 갈 것이다. 내가 아쉬우면 불러대고 내가 아쉽지 않으면 나가라고 할 것이다. 안 그렇겠는가? 하나님을 데리고 살려면 귀찮다. 일일이 간섭하고 하니까... 나 혼자 자유롭게 살고 싶은데 하나님이라는 보이지도 않는 존재가 머리 위에 있어서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하면 불편하다. 그러니까 조금만 형편이 좋아지면 나가라고 한단 말이다. 그게 우리 인간이다. 누구나 다 그렇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그런데 그분이 갈망을 해서 우리를 불러 놓았기 때문에 내가 거기서 졸리든지, 짜증을 부리든지 소리를 지르든지... 우리 인간의 생각으로는, 선악과를 가지고 있는 인간의 생각으로는 볼 수 없지만 너무 배고프면 어떻게 하겠는가? 사람이 너무 배가 고프면 선악과가 소용이 없다. 양반도 사흘 굶으면 담 넘어가지 않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 있다. 보통 때는 어떻게 양반이 담을 넘어 가겠는가? 그렇지 않은가? 항상 갓을 쓰고 다니는 사람들이 아침을 굶고 나오면서도 이빨을 쑤시고 나온다는 데 그런 양반들이 어지간하면 그러겠는가? 그런데 너무 배가 고프면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도 너무 배가 고프시기 때문에, 너무 갈망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찾아 왔다. 이것을 알고 나니까 내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 전에는 내가 하나님을 붙잡아 보려니까 잘 안 되었다. 기도를 하면 올 것 같다가도 가 버리고 올 것 같다가도 가 버리고 그랬다. 여기까지 왔다가 가 버린다. 아침에는 온 것 같은 데 저녁에 보면 없다. ‘어디로 가 버렸는가?’ 그래서 또 막 마음을 가다듬어서 부르고 부르짖고 하는 데 그렇게 하면 마음에는 오는 것 같다. 오는 것 같은데 어느 날 보면 없다. 대명동에 있을 때는 있었는데 서문시장에 가니까 없어져 버렸다.
그러니까 우리가 만약에 하나님을 찾는다면 하나님을 찾아서 만날 사람이 아무도 없다. 끈질기게 우리를 따라 다니니까 그래서 오는 것이다. 끈질기게 따라 다니니까 말이다.
호세아서는 그런 이야기다. 마누라가 집을 나간다. 가출을 잘 한단 말이다. 그래서 어디에 가 있는가 했더니 어디에 가서 있다. 그래서 좋게 달래서 데리고 왔다. 그런데 며칠 있다가 또 나갔다. 어디에 가 있는가 했더니 돈에 팔려가 버렸다. 그래서 보리 서 말 가지고 가서 다시 사 왔다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가 호세아서 이야기다. 그러니까 가출한 아내를 계속해서 잊지 못하고 찾아오고 또 찾아오고 그 이야기를 하는 데 무엇을 이야기 하는가 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이렇게 찾고 있다.’ 그 이야기를 지금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남자가 오죽이나 아쉬우면 그런 여자를 늘 찾아다니겠는가? 생각해 보라. 잘난 남자 같으면 찾아가겠는가? 그런데 너무나도 가난한 남편인가 보다. 그래서 아무 것도 없으니까 보리를 가지고 갔다. 쌀을 가지고 갈 형편이 못 되니까 보리를 가지고 가서 사온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남편되신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하려고 호세아는 그 마음을 가지고 그 글을 썼다.
우리가 부름 받은 것은 우리의 열심 때문만이 아니고 우리의 갈망 때문만도 아니다. 그렇다고 안 그래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가 비록 절대적인 갈망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갈망에 비하면 새발의 피라는 말이다. 내가 정말 죽게 되어서 하나님을 찾았다. 그런데 내가 아무리 죽게 되어서 하나님을 찾았다고 해도 하나님이 나를 찾은 것에 비교하면 ‘그것은 새 발의 피다.’ 이런 말이다. 그 말을 하기 위해서 한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일부러 하나님을 안 찾아야겠다. 그러면 하나님이 나를 쫒아 오겠지.’ 이러면 안 된다. 그러면 안 된다, 안 돼. 그리고 열심히 갈망을 해서 하나님을 쫒아 다니는 사람을 보고 ‘야! 저거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다.’ 이렇게 생각해도 안 된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그 사람대로 열심히 하나님을 찾고 있는데 자기는 그러지도 않으면서 잘난 체 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그게 잘 난 것은 아니다.
가. 연합체로 지으심
전능자가 사람을 창조하실 때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라고 했고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고 아담의 갈빗대로 하와를 지으시니 ”........하셨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표현체)으로서의 교회는 개인이 아니라 한 목적을 위한 연합체라는 것이며 갈빗대를 뽑아서 하와를 지었다는 것은 생명의 연합체라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다.
문제는 하나님의 갈망이, 절대적인 갈망이 우리를 찾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갈망은 개인으로 충족시킬 수 없다. 어떤 한 사람만 있으면 되는 게 아니다. 그래서 연합체를 지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다고 할 때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이렇게 되어 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라고 했다.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라는 말은 사람 자체가 하나의 연합체라는 뜻이다. 남자만도 아니고 여자만도 아니고 ‘둘이라야 인간이다.’ 그 말이다.
영어로 처녀를 ‘미스(Miss)’라고 한다. 미스는 뭐가 모자란다는 말이 아닌가? 맞지 않은가? 맞는지 아닌지 모르겠다. 미스다. 잘못했다든가. 모자란다든가 좌우간에 별로 좋은 단어는 아니다.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했다. 또 2장에 가면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해서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했다.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요즘에는 홀로, 외로이 이런 사람이 인기가 더 있고 이런 것인데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나님의 세계는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한다. 하나님 자신이 독처해 보니까 안 되겠는 모양이다. 그렇지 않은가? 하나님은 독처하신 분이다. 가장 독처하신 분이 하나님이다. 누가 옆에 있겠는가? 아무도 없다. 천사들이 아무리 있다고 하더라도 자기와 친구가 되겠는가? 그러니까 하나님은 정말로 독처하는 분이다. 그래서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한다. 하나님도 스스로 생각할 때 ‘나 혼자 있으면 안 되겠다.’ 이렇게 생각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돕는 배필이 필요하다.’ 이 말이다.
그래서 아담의 갈빗대로 하와를 지었다 이 말이다. 갈빗대를 빼서 하와를 지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갈망을 가지신다면 뭘로 사람을 만들었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당신의 생명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는 구나. 생명을 드려서 창조하는 구나. 그냥 장난감 만들 듯이 하는 것이 아니구나.’ 이것을 우리가 알 수 있다.
이렇게 말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는 개인이 아니라 한 목적을 위한 연합체’라는 뜻이다. 교회는 어떤 개인이 아니고 연합된 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한 새사람’이라고 되어 있다. 이 말은 연합체라는 의미다.
갈빗대를 뽑아서 하와를 지었다는 말은 뭔가 하면 생명의 연합체라는 뜻이다. 세상에는 연합체가 많다. 그런데 갈빗대를 빼서 지었다는 말은 생명의 연합체라는 뜻이다. 서양 사람들은 이것을 남여 동등권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머리에서 뽑은 것도 아니고 발에서 뽑은 것도 아니고 가운데서 뽑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동반자라고 한다. 그 사람들은 그렇게 해석한다. 그게 아니고 갈빗대라는 말은 생명의 표시다. 다른 것들은 죽은 체 하고 가만히 있으면 된다. 눈도 감고 있으면 되고 가만히 있으면 되는 데 갈빗대는 가만히 있을 수 없다. 계속해서 숨을 쉬어야 된다. 그러니까 이것은 생명의 표시다. 살았다는 표시란 말이다. 갈빗대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죽었다는 말이다. 사람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려면 코에다 대어 본다. 콧김이 나는 지 안 나는 지 확인한다. 콧김이 어디에서 나는가? 갈빗대가 움직여야 나온다.
그러니까 갈빗대는 생명의 표시다. 갈빗대를 빼서 지었다는 말은 생명의 연합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아담과 하와가 모양은 다르게 생겼지만 둘이 아니고 하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둘이 연합하여 한 육체가 될지니라.’ 하였고 ‘두 사람이 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더라.’ 했다. 왜 그런가? 한 생명이니까 그렇다.
생명이 다르면 부끄러운 것이다. 개와 사람은 너무 다르다. 만약에 내가 사람처럼 안 생겼고 개처럼 생겼다고 생각해 보라. 속은 사람인데 개처럼 생겼다면 부끄럽다. 똑 같이 생겨야 되는 데 같은 생명체는 안 부끄럽다. 개들은 다 똑 같은 생명체니까 가다가 길바닥에다 똥을 싸거나 오줌을 싸도 자기들끼리는 아무런 부끄러움이 없다. 그런데 사람 앞에 오면 좀 부끄러울 것이다. 사람을 만나면 그놈이 좀 부끄럽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자기들끼리는 전혀 부끄럽다는 생각이 없다.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라.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더라.’ 이 말은 한 생명이라는 말이다. 교회는 한 생명이다. 사람은 많고 모양은 달라도 한 생명이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버리고 생명을 떠나서 선악을 아는 지식을 먹고 사단의 목적을 따라서 바벨을 건설하고 하나님을 대적하게 되었다. 바벨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을 위한 왕국으로서 세상 끝 날까지 있다가 새 예루살렘이 등장할 때 무너지게 될 것인데 이것은 창세기 3장으로부터 11장에 이르는 과정으로 예시 되었다.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왕국의 도성이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버리고, 이렇게 신성한 목적을 버리고 말았다. 남자와 여자로, 배필로, 한 생명으로, 갈빗대로 이렇게 하나님은 사람을 찾고 있고 인정하고 계시는 데 사람은 그것을 버렸단 말이다. 그 아주 귀중한 목적을 버렸단 말이다. 에베소 교회에 말씀할 때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다 있는데 한 가지 중요한 것을 버렸다.’ 는 것이다. ‘처음 사람을 버렸느니라.’ 이 말은 가장 중요한 것을 버렸다는 말이다. 사람은 이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버렸다.
그리고 생명을 떠나서 지식을 먹고 사람의 목적에 따라서 바벨을 건설하게 된 것이다. 바벨을 건설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다. ‘우리가 높아지자. 우리의 이름을 세상에 빛내자.’ 이것은 하나님을 대적한다는 뜻이다. 바벨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을 위한 왕국이다. 이것이 세상 끝 날까지 같이 가다가 예루살렘이 등장할 때, 새 예루살렘이 등장할 때 무너지게 된다. 이것이 요한 계시록의 증언이다.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저런 성이 어떻게 무너지는가? 상고들이 그렇게 봤다는 것이다. 멀리서 보면서 ‘저렇게 큰 성이 어떻게 무너질 수 있는가?’ 이렇게 하던 성이라는 말이니까 도저히 무너질 것 같지 않은 성인데 무너지더라는 것이다. 새 예루살렘이 등장하니까 말이다.
창세기 3장에서 11장의 과정에서 이것이 예시되었다. 어떻게 사람은 하나님의 목적을 버리고 과정을 거쳐서 바벨론이 되는가를 창세기 3장부터 11장까지 써 놓은 기록이 전부 그 이야기다. 가인과 아벨로 시작을 해서 라멕으로 해서, 열 사람의 장수 족으로 해서 네피림으로 쭉 간다. 그것이 어디로 가는가 하면 바벨로 간다. 이것이 세계 역사의 원형이고 세계의 역사는 이것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똑 같다. 창세기 3장에서 바벨로 가는 과정 안에 있는 그 계시는 지금 역사에서도 똑 같이 작용하고 있다. 현재의 바벨론은 어디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그대로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통치하는 왕국의 도성이다. 이게 비교된다. 창세기 3장으로부터 시작해서 선악과를 먹고 건설한 바벨론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속함을 받고 건설한 새 예루살렘과 이것이 마지막까지 비교된다.
길이 중요하다. 당신은 지금 어느 길에 있는가? 창세기 3장에서 11장에 이르는 그 길에 있는가 아니면 바벨론으로 가는 길에 있는가 아니면 새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있는가? 노선이 중요하다. 생명나무로 가는 노선인가 아니면 선악으로 가는 지식의 노선인가? 노선을 잘못 타면 내가 혼자 아무리 잘하려고 해도 안 된다. 우리는 기차를 타려고 해도 표를 꼭 확인해서 타야하고, 배를 타려고 해도 표를 꼭 확인해서 타야하고, 비행기를 타려 해도 표를 확인해야 한다. 비행기 같은 경우는 중요해서 표를 몇 번씩이나 확인한다. 타는 사람이 맞는지 내가 가는 목적지가 맞는지 몇 번씩 확인을 거친다. 우리도 우리 인생이 가는 길을 확인해야 한다. 내가 바벨론으로 가고 있는지 아니면 새예루살렘으로 가고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나. 연합체로 부르심
1) 이스라엘을 부르심
하나님은 바벨의 시대와 상황에서 아브람 일가를 부르시고 야곱의 열두 족속을 애급에서 불러내어 가나안 땅에 한 왕국을 세우게 하셨다. 그들은 모두 야곱의 아들들이었음으로 한 족속이었고 한 연합체였다. 그들은 당시의 상황에서 하나님을 대신하고 표현할 유일한 연합체였던 것이다.
이 두 과정 속에서 하나님은 역사적으로 한 연합체를 부르신다. 첫 번째로 는 이스라엘을 부르셨다. 오늘 고린도전서 1장 26절 이하를 읽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을 부른 것을 통해 어떤 성질의 사람을 불렀는가를 알기 위해서다. 하나님은 노아와 그 가족을 불렀고, 바벨의 시대적 상황에서는 아브라함과 그 가족을, 그 다음에는 야곱과 그 열 두 아들을 불렀다. 이들 부르심은 모두 개인적으로 부름이 아닌 가족적인 단체적 부름이다. 고대 사회는 가족으로부터 시작해서 씨족, 부족으로 발전한다. 이 사람들로 가나안에서 왕국이 되게 했다. 개인으로써는 왕국이 되지 않는다. 그들은 모두 야곱의 아들들이었으므로 많지만 이스라엘이라고 한다. 야곱이 얍복강에서 받은 이름이 이스라엘이다. 그래서 야곱의 열두 아들을 이스라엘이라고 한다. 이것은 한 족속이고 한 연합체이다. 그들은 당시의 상황에서 하나님을 대신하고 표현할 유일한 연합체였다.
하나님은 개인으로 표현할 수도 있지만 그것으로 하나님을 다 표현할 수 없다. 태평양의 물을 컵 하나로 다 담지 못한다. 하나님은 어떻게 한 개인이 다 표현할 수 없다. 코끼리 한 마리도 한 개인이 다 표현하기 어렵다. 동쪽을 보고나면 서쪽을 잊어버리고 서쪽을 보고나면 동쪽을 잊어버린다. 토끼는 쪼그만 해서 내려다 볼 수 있지만 코끼리는 워낙 커서 내려다 볼 수 없고 이 쪽 보고 나서 저 쪽 보려고 하면 다 잊어버린다. 물론 머리 좋은 사람은 그렇지 않겠지만. 하물며 하나님을 한 사람이 어찌 다 알겠는가? 불가능하다.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큰 실수는 하나님을 한 개인으로 표현하려고 한 것이다. 한 개인을 위대한 사람으로 존경하고 추앙하는 것은 참 좋은 일 같지만 반대로 한 사람이 표현한 하나님을 전부로 생각하면 문제가 생긴다. 한 사람은 위대하고 놀라워도 한 개인으로는 하나님을 다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연합체가 필요하다. 내 마음의 크기가 내 손바닥만 한지 집채만 한지 모르겠지만 이 마음도 내 온 지체를 다 동원해야 표현할 수 있다. 머리카락 하나까지도 내 마음을 표현하는 데 필요하다. 머리스타일을 이렇게 했다는 것은 내 마음의 성격을 표현하는 것이다. 내가 상고머리를 하고 나왔으면 내 마음이 달라진 것이다. 특히 여자들은 헤어스타일이 달라지면 마음이 달라진 것이다. 남자도 그런 것이 있다. 머리카락 하나까지도 다 자기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하물며 하나님이 자기를 표현하는 데 한 개인으로 표현하겠는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해 보려고 노력을 하지만 되지 않는다. 아무개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면 불가능하게 된다. 어떤 사람이 히말라야산에 올랐다고 해서 모든 인류가 다 그렇게 해보려고 하면 모든 인류는 다 멸망이 된다. 그런 사람들을 주장하고 내 세우면 모두 다 불합격되기 때문에 인류는 멸망한다. 어린 아이를 피아노 학원에 보내면 피아노 학원 선생님은 다 천재라고 한다. 그 말을 들으면 모두 화려한 무대에 오른다고 생각하지만 만 명에 한 명도 오르기 어렵다. 정상에 오른다는 것은 어렵다. 정상에 오른 사람만 바라보고 있으면 밑에 있는 사람은 다 바보 멍청이가 된다. 사람은 꼭 히말라야 산에 올라 가야고 한다면 나는 멸망이다. 사람은 한라산 꼭대기에 걸어서 올라가야 한다고 하면 나는 멸망이다. 나는 올라갈 수 없다. 내 평생에 치악산에 한 번 올라갔다. 충주에 있을 때 형제들이 올라가자고 해서 갔는데 해발고도가 1288m이다. 그것이 내 일생 최고 기록이다. 지금은 그것도 불가능하다. 썬다싱 같은 사람이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고 하면 그렇지 못하는 사람은 다 멸망이고 예수 믿어도 헛일이다. 이것이 잘못된 생각이다. 하나님을 어느 한 사람으로 표현할 수 없다. 이것을 알면 우리는 편안해진다. 애굽에서 불러낸 열두 족속은 한 족속 한 연합체였다. 그들은 당시의 상황에서 하나님을 대신하고 표현할 유일한 연합체였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목적과 뜻을 따르지 않고 자신들의 목적과 소원만을 추구하다가 결국 멸망하고 하나님의 유일한 연합체로서의 신분과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목적과 뜻을 따르지 않고 자신들의 목적과 소원만을 추구하다가 결국은 망했다.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자기들을 불렀는데 하나님의 뜻은 제쳐놓고 자기 나라 자기 뜻만 생각했기 때문에 망할 수밖에 없었다.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은 표면적인 역사로 보면 약소국이니까 멸망했다. 그런데 예언자들은 우리가 약소국이어서 망한 것이라고 절대로 하지 않고 우리는 다 여호와를 배반했기 때문에 망했다고 했다. 여호와를 배반했다는 말은 그의 목적을 이탈했다는 말이다. 조선왕조는 당파싸움만 하다가 망했다. 우리는 그렇게 망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오로지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진 국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만 지켰으면 하나님이 어떤 방법으로도 보호했을 것이라고 해석한다. 망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떠났기 때문이다. 해석이 다르다. 이 사실이 중요하다. 내가 하나님의 뜻에 부름 받지 않았다면 내 뜻을 추구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내가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부름 받았다면 내 뜻을 추구하면 내 멸망이다. 군대로 부름 받은 사람은 특수한 목적이 있어서 부름 받았다. 국가에서 특수한 목적이 있어서 밥을 주고 옷을 준다. 그 곳에서 자기 목적을 추구하고 있으면 멸망이다. 하나님의 신성한 목적과 뜻 안에서 우리가 부름을 받았으면 그 뜻을 따라야 한다.
이스라엘은 결국 멸망하고 하나님의 유일한 연합체로서의 신분과 지위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2) 교회로 부르심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망하고 로마제국이 이스라엘을 지배하던 상황에서 예수를 통하여 교회를 불러내셨다. 제국은 또 하나의 바벨이다. 바벨은 하나님 같이 되려고 거역한 인간이 자기 야망을 실현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교회를 불러내신 바벨의 상황과 그 원리는 동일하다.
그래서 대안으로 교회(敎會)로 부른 것이다. 이스라엘을 부르시고 이스라엘이 멸망했기 때문에 교회로 불렀다. 만일 이스라엘이 성공했으면 그것이 교회니까 교회는 없어도 된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멸망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가버렸다. 그래서 교회로 부른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망하고 로마제국이 이스라엘을 지배하던 상황에서 예수를 통하여 교회를 불러내셨다. 제국은 도 하나의 바벨이다. 바벨은 하나님 같이 되려고 거역한 인간이 자기 야망의 실현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교회를 불러내신 바벨의 상황과 그 원리는 동일하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망하고 로마제국이 이스라엘을 지배하던 상황에서 예수를 통하여 교회를 불러낸 것이다. 똑같다. 제국은 또 하나의 바벨론이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벨론이나 페르시아나 희랍, 로마의 강대국들 틈에서 마지막 망할 때 앗수르에 망하게 되고 로마에 망하게 되어 망했으니 결국 제국에게 망했다. 이 제국들은 이름은 달라도 다 결국은 바벨이다. 바벨은 하나님 같이 되려고 거역한 인간이 자기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 바벨이다. ‘우리 이름을 빛내자. 흩어짐을 면하자. 하늘에 오르자.’ 한 이것이 거역하고 나간 인간의 야망이다. 그것으로 만들어 진 것이 제국이다. 그러므로 바벨에서 불러내진 상황은 이스라엘을 불러내신 상황이나 하나님이 교회를 불러내신 상황과 동일하다. 교회가 불러내진 상황은 로마 제국 하에서 불러냈다.
교회는 사단이 지식으로 세워놓은 사망(창1:2)을 생명으로 물리치고, 하나님 같이 되려는 자들의 폭력(창6장)을 인격으로 심판하고 지배하여 하나님이 통치하는 세계를 이루게 하시려고 이 땅에 세워진 것이다.
교회는 사탄이 세워놓은 사망을 지식으로 물리치고,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하는 자들의 폭력을 인격으로 심판하고, 지배하고 하나님이 통치하는 세계를 이루시게 하려고 이 땅에 세워진 것이다. 바벨의 상황에서 왜 불렀는가? 바벨을 심판하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게 하려고 불렀다. 로마 제국 하에서 왜 교회를 불렀느냐? 로마 제국을 심판하고 더 새로운 나라를 세우게 하려고 불렀다.
과거로 돌아가서 생각해보면 창세기 1장 1절에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다.” 그런데 2절을 보면 그런데 라는 말이 없는데 그런데 라는 접속사를 넣어서 읽어보면 그런데 “땅은 공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더라.”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땅을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땅을 원래 그렇게 창조해놓았느냐? 아니면 하나님은 그렇게 창조하지 않고 진짜 좋은 땅을 창조해놓았는데 누가 방해꾼이 와서 만들어 놓았느냐? 이것에 대해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원래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었다는 설이 있고 한쪽에서는 하나님은 그렇게 만드실 수가 없다. 완전하게 만들었는데 물이 와서 덮어버린 것이라는 것이다. 그 물은 사탄의 물, 사망의 물이다.
성경에서 작은 물은 생명의 물이다. 그런데 큰물은 사망의 물이다. 이번에 세월호도 큰물에 넘어진 것이다. 도랑물에 넘어졌으면 아무도 죽지 않는다. 신천에서 넘어졌으면 아무도 죽지 않는다. 뉴스거리가 되고 재미있어서 세계 모든 사람이 관광을 하러 왔을지도 모른다. 사람이 죽지 않는다. 그런데 큰물은 사망의 물이다. 홍해, 사망의 물이다.
사망의 물이 땅을 덮었을 때 전능자가 개입하여 땅을 건지셨고, 그 땅을 다스릴 자로서 사람을 지으셨던 것과 같이 네피림의 폭력이 땅에 가득 할 때(창6:13) 노아를 불러 방주를 짓게 하시고, 바벨의 거역이 하늘을 찌르려 할 때 이스라엘을 불러 세웠으며, 희랍- 로마가 사상과 무력으로 세계를 지배할 때 교회를 부르시고 세우셨다. 이것이 역사 안에 세워진 교회와 그 상황이다.
사망의 물이 땅을 덮었을 때, 그 때 전능자가 개입을 했다.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시더라는 말은 하나님의 신이 오셔서 그 땅에 앉으려고 와보니 물이 덮여서 앉을 수가 없어서 앉을 자리가 없어서 너풀거리고 배회했다는 것이다. 비행기가 떴다가 내리려고 하는데 착륙지가 없으면 뱅뱅 돈다. 그 얘기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앉을 자리가 없어서, 하나님이 있을 자리가 없었다.
그러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할 때 왜 그렇게 창조했느냐 하는데 하나님이 그렇게 창조한 것이 아니라 사탄이 그것을 물로 막아서 하나님이 거기 앉지 못하도록 했다. 이것은 뒤에도 똑같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어놓았다. 그런데 사탄이 와서 선악과를 먹여서 이탈하게 했다. 주인이 밀을 뿌려놓았는데 원수가 와서 가라지를 뿌렸다는 말이나 다 같은 말이다. 그 때, 그 땅을 덮었을 때라는 말은, 사탄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고 막았을 때, 전능자가 개입해서 땅을 건졌다.
창세기 1장 1절 이후에는 땅은 창조됐다는 말이 없다. 물을 갈라내니까 땅이 나온 것이다. 물과 물을 갈랐더니 바다와 육지가 나오게 되었다. 그러니까 원래 있었다. 원래 있었는데 물속에 잠겨 있었다. 땅은 물에 잠기면 아무것도 소용이 없다. 조금 잠기면 미나리 깡이라도 하지만 많이 잠기면 소용이 없다. 아무 소용없는 땅이다. 그러니까 이 땅을 다스릴 자로서 사람을 지은 것이다.
창세기 1장 27절에 땅을 정복하고 지배하고 다스리라고 했다. 땅을 다스릴 자로 사람을 지었다. 왜? 사탄이 와서 물로 덮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람의 임무는 무엇인가? 사탄이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사람의 임무이다. 사탄이 늘 그것을 지배하는데 사탄이 지배하는 데가 바다에 덮인 물이다. 사탄이 지배하는 상태를 다른 말로 표현을 하면 땅이 물을 덮어버렸다는 말이다. 우리 인생들을 봐도, 인류 사회를 봐도 하나님이 지어놓으신 사람들은 물속에 가라앉아 있다. 물이 너무 커서 덮어버리기 때문에 그 물에 밀려다니고 있다. 그러니까 사람을 왜 지었느냐? 이 땅을 건져서 땅을 지배하고 다스리게 하려고 만들었다. 땅에서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고 지배하고 다스리라.
그러면 이 물이 무엇인가 보자. 창세기 3장 이후에 보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이것이 큰물이다. 그 다음에 라멕에 와서 한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가인을 위해서는 벌이 칠 배 일진데 라멕을 위해서는 벌이 77배다.” 하는 말이 나오는데 왜냐하면 내가 가인보다 폭력을 더 많이 했다는 말이다. 이것은 폭력을 말한다.
그리고 창세기 6장에 가면 네피림들이 나오게 된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다 각기 좋아하는 데로 아내를 삼았다.” 그것은 장수요 용사요 이런 사람들이었다는데 그것은 네피림이라는 뜻인데, 네피림의 폭력이 땅에 가득할 때, 그 때 노아를 불러냈다. 그래서 방주를 짓게 한 것이다. 배는 아무리 물이 많아도 뜬다. 그러니까 구원의 방주를 짓게 했다.
바벨의 거역이 하늘을 찌르려고 할 때 이때 아브라함을 불러내서 이스라엘을 만드신 것이다. 희랍 로마가 사상과 무력으로 세상을 지배할 때 교회를 부르셨다. 교회는 그 때 태어난 것이다. 이것이 역사 안에 교회의 상황이다. 그러니까 교회는 세워질 때 평시같이 좋은데 세워진 것이 아니고 적진에 세워진 것이다.
사망의 물이 덮여있을 때 그것을 갈라내고 사람을 지었고 네피림의 폭력이 극에 달했을 때 노아를 불러서 방주를 세웠고 바벨론의 횡포가 심해질 때, 하늘을 찌르려고 할 때 아브라함의 일가를 불러냈다. 그러니까 교회는 언제 불러냈냐? 그것은 로마제국이 세계를 통치할 때 불러냈다. 로마 제국의 통치는 희랍의 사상과 로마의 무력이 합해진 것이다. 대제국이다. 거기서 불러냈다.
그러니까 교회는 결국 약자다. 큰 세계 속에 들어온 약자이다. 그래서 핍박을 받게 된 것이다. 여기서 교회가 실패하느냐 성공하느냐 이 문제였다. 우리 생각에 어떻겠는가? 성공하겠는가? 실패하겠는가? 성공하면 좋겠는데 여기서 성공하기 어려운 것이다. 왜냐하면 무지 큰 바다에서 살아남기가 어렵다. 마찬가지로 그 제국 속에서 교회가 살아나기기 쉽지 않다. 왜냐하면 성질이 서로 다른 것이다. 세상과 비슷하려면 교회가 생길 수 있다. 세상과 비슷하게 하면 사람도 많이 모을 수 있다. 그러니까 그 세상과 합류하면 잘된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교회의 고유성을 지키려고 하면 핍박을 받게 된다. 결국 교회가 실패했다.
가) 교회가 실패함
이런 상황 아래서 하나님은 사단과 싸우고 있고 이 싸움의 한 복판에 위치한 것이 인간(아담과 하와)이며, 이스라엘이고, 교회다. 그런데 아담은 하나님 같이 되려다가 위치를 이탈하여 사단에게 끌려갔고, 이스라엘은 자기 소망을 이루려다 멸망했으며, 교회는 세력을 얻으려 하다가 희랍- 로마에 합류 된채 그 안에서 그들과 겨루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사탄과 싸우고 있다. 이 싸움의 한 복판에 위치한 것이 인간이고 교회이다. 이 싸움의 한 복판이 인간, 이스라엘, 교회이다. 왜 싸우는가? 어떻게 생각하면 인간, 이스라엘, 교회 때문에 하나님은 싸우는 것이다. 자기 백성이니까 그렇다. 그러니까 남의 땅에, 사탄이 만들어 놓은 땅에 하나님께서 자기 씨를 뿌려놓았다.
요즘 농사짓는데 가보면 잡초가 우거진 땅을 개간해서 거기다 씨를 뿌린다. 그러면 잡초들이 뭐라 하겠는가? ‘왜 우리 땅에 와서 네가 씨를 뿌렸느냐?’고 생각하고 텃세를 할 것이다. 그러니까 잡초가 마구 나는 것이다. 그러면 농부들도 그 싸움이다. 요즘 농사짓기 어려운 것이 그 싸움이다. 어떻게 하면 이 잡초를 없애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비상수단으로 나온 것이 제초제이다. 도저히 손으로는 뽑을 수 없고 인건비도 나오지 않으니까 한방에 싹 없앨 수 있는 방법을 택한 것이 제초제이다. 아주 무서운 약이다. 이것을 먹으면 누구도 사람은 살아나지 못한다. 다른 약은 먹어도 위를 세척하면 산다고 한다. 그런데 제초제를 먹으면 절대로 못산다. 그러니까 이것은 쥐약이다. 이것을 가지고 농사를 짓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조금만 치지 않으면 도로 나와 버린다. 지독하다. 그러니까 농사짓기가 어렵다.
이런 싸움을 하나님이 하고 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제초제를 뿌릴 수는 없다. 로마 제국 속에 교회를 심어놓고 교회를 살게하기 위해서 제초제를 뿌리 버리면 간단하기는 간단한데 하나님이 제초제를 뿌릴 수 없다. 그것도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것도 살리고 저것도 살리려니까 어려운 것이다. 둘 다 살려야하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다.
아담은 하나님 같이 되려하다가 위치를 이탈해서 사탄에게 끌려갔다. 왜 실패했는가 하는 것인데 하나님 같이 되려하다가 실패했다. 하나님 같이 된다는 말은 신(新)과 같이 된다는 말이다.
인간에게 부족한 점을 보충해서, 사람이 못하는 것이 무엇이냐? 내 맘대로 못하는 것이 있는데 벽 뒤에 뭐가 있는지 모른다. 아주 간단하게 생각하면 그렇다. 여기서 기둥 뒤에 계신 분은 누구인지 내가 모른다. 기둥 뒤에 숨어 계신 분은 모르는데 X- RAY 같이 투시해서 볼 수 있는 눈이 있으면 좋은데 못한다. 그것뿐인가? 인간이 하고 싶어도 못하는 것이 너무 많다. 결정적으로는 죽고 싶지 않아도 죽어야 한다. 이것은 어쩔 수가 없다. 이것이 그런 인간의 제한성이다. 그러니까 아담은 무엇이 되고 싶었느냐 하면 그런 제한이 없는 존재가 되고 싶었다는 말이다. 신이 되고 싶었다.
그렇게 비스므레 하게 된 사람을 보고 사람들은 굉장히 신령하다고 생각한다. 사람을 보자마자 당신은 김씨다 이씨다 이렇게 다 맞추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을 보면 참 신령하다고 한다. 손을 얹기만 하면 병이 팍팍 낫는 사람을 보고 참~ 신령한 능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이렇게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아담이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자기가 그렇게 해보고 싶었다는 말이다. 우리도 지금 그렇게 해보고 싶으면 아담처럼 사탄에게 끌려가는 것이다. 인간의 위치에서 인간의 자리를 지키려고 하지 않고 인간 이외의 다른 존재가 되려고 하면 끌려가게 된다. 원숭이처럼 나무를 타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원숭이의 종이 된다. 왜 그런가? 매일 원숭이에게 가서 레슨을 받아야 하니까 그렇다. 나무 타는 레슨을 받아야 할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그렇게 되고자 하는 것의 종이 되는 것이다.
아담은 신과 같이 되고 싶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천사와 같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천사에게 끌려가게 된 것이다. 그런데 세계의 모든 종교가 바라는 것이 천사같이 되고 싶은 것이다. 참 이상하다. 너무 너무 속아 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 내용은 ‘나를 천사같이 되게 해 주십시오.’하고 있다.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다. 사람이 사람되게 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해야 하는데 사람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전부 천사같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이렇게 온 세상이 속아있다. 나는 그래도 신통하게도 30세에 처음 교회에서 설교를 하면서 “나는 왜 예수를 믿는가? 나는 사람 되려고 예수를 믿는다.”고 했다. 아마 그 사람들이 놀랐을 것이다. 다~ 신이 되려고 하는 판에 사람 되려는 사람이 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때 사람 되려는 것이 무슨 뜻인지는 몰랐을 것이고 나도 확실히는 몰랐었다. 확실히 몰랐는데도 예수 믿는 것은 사람이 되려는 것이다, 좋은 사람이 되고 옳은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렇게 설교를 했는데 지금 생각하니까 신통하게 알아맞힌 게 되었다. 그렇지 않고 그때 내가 신이 되고 싶다고 했으면 지금 얼마나 부끄러웠겠냐는 것이다. 그때 알든지 모르든지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고 내가 평생 그 말을 해도 부끄럽지 않다.
이것은 내가 유교에서 배워서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어려서 한문을 조금 배웠다. 거기는 전부 사람 되라는 얘기뿐이다. 그래서 그런지 교회를 다녀도 신기같은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사람 되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 사실 선친께서도 교회 가는 것을 허락했던 것은 사람 되라고 가라했었다. 예수 믿어서 천당에 가라고 보낸 것이 아니고 거기 가면 좋은 말 듣고 좋은 사람이 된다고 해서 보냈다.
그러니까 아담은 왜 실패했는가? 신이 되려고 했기 때문이다. 아주 쉬운 말로 하면 천사같이 되려고 하다가 실패했다. 이렇게 생각하면 된다.
이스라엘은 왜 실패했나? 이스라엘은 약한 나라다. 중동에서 대단히 약한 약소국가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강대한 나라가 될 수 있나를 생각했다. 강대한 나라가 부러웠을 것이다. 우리도 중국처럼 땅이 컸으면 좋을 것을 왜 인구는 4000만 밖에 안 되나? 적어도 5억이 되었으면 일본이 우리를 무시하지 못했을 텐데, 일본 사람들은 아무래도 우리를 무시한다. 인구가 2억에 가깝다. 우리하고는 비교가 안 된다. 땅도 우리보다 훨씬 넓고 그렇다. 물론 문화도 앞서 있다. 당연히 자기들이 볼 때 우리는 조그만 나라다. 지금 우리가 기적적으로 경제사 성장해서 세계무대에 올라있으니까 그렇지 정말 형편없는 나라다. 그것마저도 반으로 쪼개져서 싸우고 있는 형편이다. 이런 것을 보면 지정학적으로 우리나라와 사정이 비슷하다. 약한 나라라서 강대해지는 것이 꿈이다. 그래서 그들은 늘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강대한 나라가 되게 해 주십시오.’했던 것이다. 예언서를 읽어보면 다른 나라들이 와서 조공을 바치는 그런 꿈들이 나온다. 세계 모든 민족이 와서 절을 하는 장면들이 나온다. 옆에서 큰집을 보니까 그런 것이 부러웠던 모양이다. 이런 것만 늘 생각하다가 멸망했다.
이 사람들이 강대한 나라가 되려면 땅덩어리가 그런데 강대국이 되겠냐는 것이다. 중국처럼 땅이 커야 강대국이 되지 그렇게 작은 땅덩어리를 가지고 무슨 강대국이 되겠냐는 것이다. 안 된다. 그런데 강대한 나라가 되려고 했다. 하나님이 그들을 부를 때는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려고 불렀다. 그런데 제사장 나라가 되려고는 생각하지 않고 강대국이 될 생각만 했다. 그래서 보기 좋게 강대국에게 망하고 말았다. 이스라엘은 강한 나라가 되려다가 망했다.
교회는 왜 실패했나? 교회 역시 핍박 중에 있었다. 로마제국이 지배하는 땅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핍박 중에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우리도 핍박 받지 않고 세상과 같은 세력을 얻어볼까 한 이것이 교회의 꿈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했다. 이때 사람들은 승리했다고 만세를 불렀다. 콘스탄틴을 기독교에서는 굉장히 위대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자기는 무슨 생각으로 기독교를 인정했겠냐는 것이다. 황제의 입장에서는 무엇을 해도 황제의 목적을 위해서 한다. 국회의원은 무엇을 해도 국회의원이 될 생각만 한다. 마찬가지다. 황제도 무엇을 해도 자기가 황제권을 가지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예수를 위해서 살겠냐는 것이다. 어린양 예수와 어떻게 같이 앉아있을 수 있겠냐는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사람과 어떻게 같이 앉아서 밥을 먹을 수 있겠냐는 것이다.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이 사람대로 교회를 이용하려고 생각한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의 세력이 커가니까 그런 것이다. 그때 당시에 세계를 지배하는 데 있어서 제일 어려운 것이 종교였다. 다른 것은 무력으로 하면 되는데 종교는 무력으로 안 된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가장 강대하고 강성한 종교를 선택해서 국교화 시키느냐 이것이 콘스탄티누스의 목적이었다. 기독교가 가장 세력이 크니까 기독교를 받아들여서 국교화 시키고 세력을 만든 것이다. 둘이 목적이 같았다. 교회도 세상과 같은 세력을 가지고 싶었고 콘스탄틴도 세력을 가지고 싶었던 것이다. 둘다 똑 같이 세력을 가지고 싶었던 것이니까 만나서 야합이 된 것이다. 그렇게 해서 황제가 되고 교황이 되고 했던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세력 다툼을 해서 어느 때는 교황권이 황제권보다 더 높을 때가 있었고 어느 때는 황제권이 교황권보다 더 높을 때도 있었다. 이렇게 하다가 희랍화 되고 로마화 되면서 교회는 그렇게 변질되고 말았다. 세상처럼 되고 싶어서 세상처럼 하다가 변질 된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정말 세계적이다. 캐톨릭이라는 말이 우주적이라는 뜻인데 당당하게 우주적인 교회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세력을 가지고 세계 선교를 했는데 제국의 힘을 가지고 선교를 하는데 누가 막을 수가 있는가? 결국 교회는 세상 세력을 이용하려다가 반대로 세상 세력에 이용을 당했다. 그러나 이용한다고 해서 누구라도 100% 이용하는 것은 불가능해서 항상 섞이게 되어있다.
북한에 간첩으로 침투된 사람이 있었는데 얘기를 들어보면 우리나라는 간첩으로 들어와도 여관 같은데 머물면 아무도 알 수가 없기에 숨어서 살수가 있는데 북한엘 가면 빤히 드러나기에 숨을 데가 없다고 한다. 반장이 다 지키고 있는데 어디에 가서 숨겠는가? 살 데가 없는데 어떻게 그곳엘 갔다 오는가 하면 그쪽 사람과 타협을 하고 이중간첩 노릇을 하게 되는데 왔다갔다 하다보면 어느 쪽에서 죽여 버린다고 한다.
그러니까 세상의 세력을 얻으려고 하면 당연히 세상에다 뭔가를 지불해야 한다. 서로 주고받아야 무역이 될 것이 아닌가? 그래서 결국 교회는 희랍화 되고 로마화 되고 만 것이다. 그것이 현재의 교회가 된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강하게 해서 이렇게 안되도록 하면 안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스라엘처럼 약하게 하지 말고 좀 더 강대한 국가로 만들어 세계를 지배하게 해서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면 다 믿도록, 전군신자 운동을 하면 다 나와서 세례를 받듯이 그런 식으로 되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때 군대에 갔다 온 사람들은 예수를 믿던지 안 믿던지 다 나오라고 하면 나와야 되고 세례를 받으라고 하면 다 세례를 받아야 했다. 그것이 전군 신자 운동이다.
그래서 예수를 믿게 된 사람이 많았다. 물론 안 믿는 사람도 많지만, 그렇게 좀 강하게 해서 선교를 하면 얼마나 좋겠냐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 나라가 얼마나 더 빨리 확장이 되겠냐는 것이다. 우리 같으면 그렇게 하겠는데, 대통령도 믿는 사람을 세우고 어떻게 하든지 교회로 가게 하면 좋을 것 같은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를 않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이해 할 수 없는 것이다.
나) 하나님은 약한 자로서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심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약한 인간을 강하게 하지 않으시고 그 나약한 인간 연합체를 통해서 사단을 물리치고 자신의 왕국을 세우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약한 자로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오늘 읽은 성경 말씀에 보면 그렇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신다는 것이다. 이러니까 우리가 참으로 이해하기 곤란한 것이다. 나약한 인간을 강하게 하면 아담처럼 실수를 안 할 것이 아닌가? 사람에게도 천리안을 주고 천사 같은 능력을 줬으면 사람이 왜 천사를 부러워했겠는가? 그런데 약점이 너무너무 많은 것이 인간이다. 그러다 보니 천사를 부러워한 것이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이 사람을 너무 약하게 만들어 놓아서 그렇다는 것이다. 우리 생각은 그렇다.
연합체로 부르신 이유는 한 개인 개인은 약하지만 연합하면 커진다는 것이다. 나약한 인간은 연합체를 통해서 사탄을 물리치고 하나님 왕국을 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다. 사탄은 큰 통나무배인데 하나님은 그 보다 더 큰 통나무배를 만들어서 전쟁을 하려는 것이 아니고 작은 판자 조각을 연결해서 배를 만들어서 통나무배와 전쟁을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하나님이 좀 이해가 된다. 통나무배는 아무리 커도 한계가 있지만 판자 조각으로 연결한 배는 한계가 없이 만들 수가 있다. 1000톤 2000톤 10000톤 20000톤 30만톤 만들 수가 있다. 판자 조각 하나로는 참 약하지만 연합될 수만, 연결될 수만 있다면 통나무배보다 훨씬 좋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동산에서 함께 할 인간은 흙으로 지어지고 생기를 받은 자로서 생명의 공급을 영원히 받아야 할 의존적인 존재로 지어졌고, 땅위에 왕국을 세울 이스라엘은 양식이 없어서 그것을 구하려고 애급에 내려갔다가 노예 되었던 가련한 백성이었으며, 교회로 부름 받은 사람들 역시 이탈한 천사의 능력이 부러워서 팔려갔던 자들로서 예수께서 피로 값 주고 산 자들이다(행20:28).
하나님의 동산에서 함께 할 인간을 왜 하필이면 흙으로 지었는가? 돌로 짓던지 금으로 짓던지 하면 좋을텐데 흙으로 지어서 생기를 받았고 생명공급을 영원히 받아야 할 의존적인 존재로 만들어 놓았다. 한번 만들어졌으면 그냥 그대로 자동화되어서 자동기계처럼 그렇게 만들어 놓았으면 참 좋을 것인데 생명으로 만들었기에 생명은 계속해서 먹어야 되고 공급을 받아야 한다. 공급 받을 존재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공급을 받으려면 항상 의존을 해야 된다.
땅위에 왕국을 세울 이스라엘은 양식이 없어서 그것을 구하려고 애굽에 내려갔다가 노예가 되었다. 이스라엘이 자기 땅에 농사가 잘 되어서 곡식이 항상 많았더라면 뭐하려고 애급에 내려가겠는가? 그런데 그 땅이 흉년이 많이 드는 땅이기에 흉년이 들면 애급으로 내려가야 했던 것이다. 아브라함 때도 그랬고 이삭 때도 그랬다. 흉년이 들어서 밑으로 내려갔고 밑으로 내려가기만 하면 실패를 했던 것이다.
이스라엘은 양식이 없어서 구걸하러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노예가 되고 말았다. 교회로 부름 받은 사람들도 역시 이탈한 천사의 능력이 부러워서 세상에 팔려갔던 사람들이다. 세상 세력이 부럽고, 황제의 권리가 부러웠던 것처럼 교회도 그런 권리를 갖고 싶었다. 그렇게 하다 결국 무엇이 되고 말았는가. 노예가 되고 말았다. 이런 사람들을 예수님께서 피로 값 주고 사온 것이다.
하나같이 다 이런 인간은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는 것을 보면 다 이렇다. 흙으로 만든 인간, 양식이 없어 애굽으로 내려갔던 이스라엘, 세상이 부러워 세상에 팔려갈 수 밖에 없는 교회 이런 것들을 보면 다 실패할 수밖에 없는 재료 들이다.
이들은 하나같이 능력이 없어서 피해를 입은 자들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언제나 사단에게 유혹을 받을 소질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강하게 하여 강한 자들을 이기게 하지 아니하시고 자신이 인간에게 주신 인격만으로 강한 자(사단)를 물리치려 하신다.
이들은 하나같이 능력이 없어서 다 패해를 입은 자들 같이 보인다. 능력만 있었더라면 그렇게 안 해도 되고, 능력만 있었더라면 사단을 부러워 할 필요도 없고, 로마제국을 부러워할 필요도 없고 그렇게 했을 텐데 능력이 없어서 그렇게 했다. 그렇다면 그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하나님이 능력 없이 만들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무슨 이야기를 하면 하나님이 잘 못 지어서 그런 것 아니냐고 한다.
그러므로 이들은 언제나 사단에게 유혹을 받을 소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 것으로 보인다. 지어진 사람은 항상 그런 소질을 가지고 있다. 항상 그런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강하게 하여 강한 자들을 이기게 하면 좋을 것 같은데 그렇게 하지 아니하시고 자신이 인간에게 주신 인격만으로 강한 자(사단)를 물리치려 하신다. 사람에게는 인격밖에 주신 것이 없다. 그것으로 이기게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기가 참 어렵다. 우리 생각 같으면 이해하기 쉽다. 우리 생각대로 강하면 강한 것으로 대응하면 되고 북한이 원자탄 만들면 우리는 수소탄 만들면 되고 이러면 되는데 하나님 생각은 우리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지금 우리나라가 국방비로 소모하는 돈이 엄청나게 많다. 왜냐하면 북한에서 핵을 개발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이번에 3차 실험에 성공하게 되면 원자폭탄을 제조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큰 문제걸이다. 돈이 얼마만큼 드는지 어떻게 아는가 하면 원자폭탄을 발사하여 떨어뜨리면 그것을 공중에서 그대로 받아 도로 되돌려 보내 북한에 떨어지게 하는 그런 기계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려면 얼마나 돈이 많이 들겠는가!
이북은 군사기지를 전부 지하에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평양시내 지하철이 150M란다. 전부 방공으로 쓰려고 만들어서 그렇다. 왜냐하면 6.25때 너무나 많은 공습을 받아서 그렇게 해 놓았다. 자기들은 포를 쏘고 미사일을 쏘면서 다 지하로 들어가 버리면 여기서 아무리 폭격을 해도 안 된다. 그런데 그 지하를 뚫고 들어가는 폭탄이 있다. 그 폭탄하나가 독일서 오는데 수십억짜리이다. 내가 들었는데 너무나 돈이 많은 천문학적 숫자라 기억이 안 난다. 그런 것을 몇 개 사오려고 계약을 했다고 한다. 그런 것 아니면 벙커를 뚫을 방법이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는 이해가 된다. ‘돈만 있으면 그렇게 해야지 당연하지! 왜 그것을 준비하지 않고 있나!’ 오히려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것도 없이 인격하만 주고 강한 자를 물리치라고 하셨다. ‘李목사는 맨날 인격이야기만 하고, 준 것은 아무것도 없이 마리지!’ 이렇게 해가지고 어떻게 사단을 물리칠 것인가! 이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나약한 인격으로 바벨을 건설 할 능력을 가진 사단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수 있다는 것인가? 세상의 상식 안에서 이 믿음이 가능한가? 누가 보아도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아담은 이 인격의 위치가 약하다고 무시하고 능력을 찾아서 바벨을 건설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런 인간이 어떻게 능력의 천사와 그 추종자들을 이기고 하나님의 왕국이 된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어떻게 나약한 인격으로 “인격”이라는 말이 다른 말이 아니다. 십자가에 달면 죽을 수밖에 없는 그것이다. 바벨을 건설 할 능력을 가진 사단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수 있다는 것인가? 이 말이다. 세상의 상식 안에서 이 믿음이 가능한가?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것을 믿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믿고 있는 것인가? 예수님이 능력이 많으니까 내가 빌면 준다는 이 믿을 갖고 있다. 이 믿음은 갓바위 부처님을 믿는 믿음과 똑같은 것이다. 그래서 수능시험 볼 때가 돌아오면 예수 믿는 사람은 예배당에 가서 기도하고 절에 다니는 사람은 갓바위에 가서 기도 한다. 그 믿음이지 다른 믿음이 아니다. 지금 여기서 어린양이 호랑이를 이긴다. 이것을 믿으라고 하면 누가 믿겠는가! 아무도 믿을 수 없다. 누가 보아도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정말 불가능한 이야기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정말 불가능한 이야기가 많다.
아담은 이 인격의 위치가 약하다고 무시하고 아담도 당연히 우리처럼 그랬을 것이다. 무시하고 능력을 찾아서 바벨을 건설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인간이 어떻게 능력의 천사와 그 추종자들을 이기고 하나님의 왕국이 된다는 말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봇짐 싸고 갈 일이다.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제자들이 십자가까지 따라 갔다가 뒤돌아 갔다. 이와 똑같다. 지금 우리도 이 믿음이 안 생기면 봇짐 싸가지고 가야 한다. 여러분들이 다 가버리면 나는 큰일 이다. 말할 사람도 없고, 들어줄 사람도 없고 그런데 이렇게 가지 않고 말도 안 되는 말을 여러분이 들어주고 있는 것이 너무 너무 감사한 일이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다른 교회에 가 보면 말 되는 소리를 한다. 기도하면 뭐가 된다. 기도하면 뭐가 낫는다. 이런 것들은 말이 된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매일 안 되는 소리만 하고 있는데 그래도 그것이 좋다고 듣고 있는 것을 보면 너무 너무 신기하다. 그래서 여러분과 나는 “천생연분”이다. 잘 생각해보면 이것이 신기한 일이다. 보통일이 아니다. 어린양의 왕국이 어떻게 승리를 하겠는가! 생각해 보면 이치에 안 맞는다. 황야의 무법자 사자 앞에서 “라이온 킹” 램스 킹 이런 게 있겠는가? 없다. 라이온 킹 밖에 없다.
그러나 예수의 메시야 되심을 믿는 사도들은 이 인격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역사 안에 세워진 교회를 우해서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고 하였다(히12:2).
그러나 예수가 메시아 돼야 된다. 이것을 믿는 사람들은 이 인격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역사 안에 세워진 교회를 향해서, “믿음의 주여, 또 온전케 하신 예수를 바라보자.” 믿음의 주는, 이 믿음의 주를 말한다. 이런 믿음을 창조해 주신 분이다. 도저히 우리한테는 없는 믿음인데, 병 낫는다는 믿음을 갖기도 어렵지만 그건 그래도 옆에 사람이 낫는 거 보면 가능한데, 어린양이 왕국이 된다는 것은 도저히 우리 속에는 없다. 그 믿음을 창시해 주시는 분이다. 이 믿음을 주신 이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신 예수를 바라보자. 그러니까 예수를 바라봐야 승리한다는 뜻이다. 도저히 세상을 바라보면 승리할 수 없는데, 예수를 바라봐야 승리한다는 것이다.
다) 예수는 인격으로 승리하심
아담은 사단의 능력을 보고 유혹 되었으며 그 안에 있는 인류는 하나 같이 인생과 역사의 해법을 이 능력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은 능력을 얻기 위한 전쟁터다. 그래서 능력은 능력을 부르고 전쟁은 또 전쟁을 부르고 있다.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능력을 얻고 유지하기 위한 비용을 얻기 위해 자기 생명과 인격을 걸어놓고 있는 것이다.
아담은 사단의 능력을 보고 유혹됐다. 그 안에 있는 인류는 하나같이 인생과 역사의 해법을 이 능력에서 찾고 있다. 종교적으로 그것을 찾고 있다. 그러므로 세상은 능력을 얻기 위한 전쟁터다. 왜 이렇게 세상이 시끄러운가. 능력을 얻으려고 서로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능력을 얻으려면 돈을 벌어야지, 능력을 얻으려면 부정도 해야지, 돈을 벌려니 배도 한 칸 더 올려야지, 돈을 벌려니까 정원을 초과해야지, 돈을 벌려니까 화물을 더 많이 실어야지 다 돈 때문에 그렇다. 그리 안하면 뒤쳐져 못 배긴다. 능력은 능력을 부르고, 전쟁은 또 전쟁을 부르는 것이 지금 세상이다. 계속 무기경쟁을 하고 있다.
6.25때 우리가 사용하고 있던 무기보다, 월남전에 사용되는 무기는 훨씬 더 앞선 무기다. 우리나라에서는 제초제 이런 거 안 뿌렸다. 그러나 월남전에는 뿌렸다. 그리고 기관총은 쏘면 많이 쏜 것 같다. 그런데 어느 사실을 찍어 온 사진을 봤는데, 이는 깜깜한 밤에도 적외선을 통해서 보면 밑에서 사람들이 이동하는 것이 다 보인다. 그러면 거기 가서 재 뿌리듯이 폭탄을 확 뿌리면 수 천만 조각들이 내려가서 다 몰살한다. 그런 폭탄이 있다. 개미처럼 사람들이 막 떼를 지어 가다가 한방 떨어지면 싹없어진다. 그런 무기가 다 있다. 그러니까 갈수록 더 무서운 무기가 나온다. 옛날무기처럼 총소리 안 난 무기도 이제 나온다. 총소리 대포소리 나면 시끄러우니까, 조용하게~~ 세상은 계속 전쟁의 전쟁을 계속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만일 지금 세계가 군비경쟁을 하지 않는 다면, 100억이 되도 다 잘 먹고 살 수 있다. 군비에 쏟아 놓은 돈이 엄청나게 많다. 한쪽에서는 굶어죽고 막을 길이 없다.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능력을 얻고 의지하기 위해서 지불한 비용은 생명과 인격을 걸어놓고 지불하고 있다. 죽을지 살지 모르고 해야 된다. 왜냐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원자폭탄이 만일 세상에 터진다면 인류는 다 멸망이다. 적을 없앨려고 만든 무기지만 언제 그것이 나한테 돌아올 수 있다. 그러니까 생명을 걸고 싸우고 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사단의 능력 앞에 하나님이 정해주신 진실한 인격을 가지고 승리하셨다. 돌로라도 떡을 만들어 먹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을 조롱하는 사단 앞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정해 주신 인격만을 제시하셨다. 그런데 그 결과는 마귀는 물러나고 천사들이 예수를 섬기더라는 것이다(마4:1~참).
그런데 예수께서는 사탄의 능력 앞에 하나님이 정해주신 진실하신 인격만 가지고 승리하신 분이다. 이것을 아는 것이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다. 돌로 떡을 만들어 먹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 왜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 했는가. 예수님께서 주리신지라 했다. 금식하시고 주리신지라. 사람이 배가 고프면 돌가루라도 떡을 만들어 먹고 싶은 것이 그때 심정이다.
대지라는 펄벅 소설을 보면, 중국에서 너무너무 배가 고파서 옆집에서는 김이 폭폭 올라온다. 다 굶어죽게 생겼는데 저 집에 먹을 것이 있나보다. 하고 온 동네사람들이 와서 보니까 뭘 끓이고 있는데 흙을 끓이고 있었다. 돌로 떡을 만들어 먹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너무 배고프면 돌가루라도 먹어야 한다. 이런 사탄의 유혹에도 예수께서는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먹고 사는 것이다. 이 인격을 말한다. 인격만 제시했다. 아무능력도 제시한 것이 없다. 그런데 그 결과는 마귀는 물러나고 천사들이 와서 수종을 들더라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계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미국과 소련의 경쟁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이 세계를 이야기한다. 우리도 마찬가지 이런 상황에서 우리 인격만으로 승리 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이다.
또한 예수께서는 종교권력과 세상권력에 의해서 죄 없이 십자가에 처형당하셨다. 능력 앞에서 죽임을 당하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를 다시 살리시고 산자와 죽은 자의 주가 되게 하셨고(롬14:9), 사도들은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하는 새 하늘과 새 땅 안의 왕국을 제시하고 있다(계22:5).
롬14:9 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계22:5 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
또한 예수께서는 종교적인 세력과 세상적인 권력에서 죄 없이 십자가에서 죽었다. 능력 앞에서 한 마리 어린양처럼 죽임(처형)을 당했다. 권세 능력 앞에서.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를 다시 살리시고, 산 자와 죽은 자의 주가 되게 하였다. 하나님은 예수를 십자가에서 뛰어내리게 하지 않고, 예수를 부활하게 해서 산 자와 죽은 자의 주가 되게 했다. 주란 말은 창시자란 말이다. 그러니까 산 자의 주도 되고, 죽은 자의 주도 된다. 사도들은 이런 사람들을 보고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하는 새 하늘과 새 땅 안에 왕국을 지시하고 있다.
그러니까 수소폭탄을 가지고 있는 분들을 위해서 이 말이 한 것이 아니고, 인격으로 사탄을 물리친 사람을 보고 한 말이다. 왜냐면 이 세상 전체는 사탄이 지배하고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니까 세상을 이기는 힘이 어디에서 나오느냐 하면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능력은 인격을 무시하고 조롱한다. 그리고 인격의 위치를 벗어나서 신과 같이 되라고 유혹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통치를 바라보는 참 된 교회가 세워질 수 있는가? 분명한 것은 하늘의 뜻이 아직은 땅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예수께서도 이것을 인정하시고 기도하라 하셨다(마6:10) 그러나 더 분명한 것은 하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능력은 인격을 무시하고 조롱한다. 그리고 인격의 위치를 벗어나서 신과 같이 되라고 유혹을 계속하고 있다. 나도 할 수만 있다면 진작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통치를 바라보는 참된 교회가 세워질 수 있는가? 나도 그런 유혹을 받을 때가 많다. 아~ 이런 상황에서 좀 능력을 가지면 정말 통쾌하게 승리를 하겠는데 하는 유혹을 받을 때가 있다. 정말 손 좀 봐놓을 사람들이 많은데 이런 능력만 좀 있다면 아주 통쾌하게 손을 봐서 완전하게 무릎을 꿇게 할 수가 있다. 그렇지 않은가? 아무리 대항하고 뭐한 척해도 기적이 일어나면 꼼짝 못한다. 사람은 기적 앞에서는 아주 꼼짝 못한다. 그런 사람들한테 여러 말 할 것 없이 기적 한 방으로 굴복시킬 수가 있다. 여러 말 할 필요가 전혀 없다. 그런 능력을 안주니 어떻게 하겠나? 그러니 당하고 있는 것이다. 욕도 얻어먹고 당하고 있고 비난도 받고 있고 우리 선교를 방해하고 있고 계속 그래왔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참된 교회를 세울 수 있나? 분명히 하늘의 뜻은 땅에서 아직 다 이루어지지 못했다. 예수님께서도 이것을 인정했다. 그러니까 그렇게 기도하라했다.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 주옵소서."
아직 땅에서는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더 분명한 것은 하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져야하기 때문에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지금 다 이루어져서가 아니라 하늘의 뜻은 꼭 이루어져야하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라)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안에서 교회는 승리 함
그러므로 가능하다. 가능해야 한다. 불가능하다면 인류에게는 희망이 없는 것이다. 경험해 보고 가능하기 때문에 사도들이 믿고 전한 것이다. 현실의 상황을 보면 어디를 보아도 불가능이다.
그러나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는 예수를 바라보면 가능하다.
그리스도는 그의 몸인 교회로 승리를 하게 될 것이다. 이것을 개인적으로 생각해보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있을 수가 없는 일이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깊이 하다보면 한계에 딱 부딪힌다. 내가 어떻게 신령한 사람이 될 수 있을지라도 그러나 세상은 그냥 그대로 있다. 결국 알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다. 세상은 그대로 있으니까 갈 곳이라고는 천당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몸인 교회로 승리한다. 몸인 교회로 승리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또 가능해야된다. 만일 불가능하다면-여기에 희망이 없다면 인류는 희망이 없는 것이다. 그대로 이렇게 폭탄 제조하다가 망하고 만다. 다른 길이 없다. 인류가 유엔총회에서 폭탄 다 없애버리고 평화롭게 살자고 하겠는가? 그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어떤 경우에도 불가능하다.
사도들은 작은 세계이었지만 -비록 소아시아지방이라는 작은 세계였지만 또 교회라는 작은 사람들 속에서였지만 가능한 세계를 봤다. 몸으로서 가능한 세계를 봤다. 그래서 그것을 믿고 전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오늘 우리도 몸으로서의 상태를 우리가 보게 되면 아 이것이 세상을 이기겠구나하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나 개인으로는 안 되지만 몸으로서 한다면 가능하다. 현실의 상황을 보면 어디를 봐도 불가능하다. 그러나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는 예수를 바라보면 가능하다.
몸은 머리에 달려있다. 머리의 어떠함이 몸의 어떠함이 된다. 아담은 실패 했으나 예수는 승리하셨다. 이것은 사실이며 우리의 믿음의 원천이다. 그러므로 아담의 머리 됨 안에서 선악을 아는 지식으로 만들어진 종교는 실패해도 그리스도의 머리 되심 안에서 생명으로 연합 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은 반드시 승리하게 된다.
나는 안 되지만 이것은 결국 교회를 바라보면 또 가능하다. 왜냐하면 몸은 머리에 달려있다. 내 몸은 왜 이렇게 생겼는가? 내 머리가 그렇게 생겼기 때문이다. 머리가 살면 몸도 살고 머리가 죽으면 몸도 죽는다. 과학적으로 분명하게 분석은 못하지만 머리의 어떠함이 몸의 어떠함이 된다. 내 손가락은 왜 다른 사람의 손가락과 다르게 생겼나? 그것은 내 머릿속에 있는 어떤 유전자가 다르기 때문에 사람마다 손가락이 다 다르다. 지문도 다 다르다. 왜 지문이 다 다른가? 내 머리가 그렇게 생겼으니까 - 내 생명이 그렇게 생겼으니까 그렇다. 머리의 어떠함이 몸의 어떠함이 된다.
아담은 실패했지만 머리이신 예수는 승리했다. 아담의 세계가 왜 실패했는가? 아담이 실패했기 때문이다. 머리인 아담이 실패했기 때문에 아담의 모든 세계가 다 실패이다. 예수는 새로운 세계의 머리이다. 이 머리가 승리하면 다 승리하게 된다. 이것은 사실이고 우리의 믿음의 원천이다. 예수가 승리한 사건이 간단하게 단 한 사람의 승리가 아니다. 어떤 성자의 일이 아니다. 새로운 인류의 머리로서 승리한 것이다. 첫 열매가 되었다.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었다. 우리의 믿음의 원천이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아담의 머리됨 안에서 선악을 아는 지식으로 만들어진 종교는 실패했어도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안에서 생명으로 연합 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은 반드시 승리하게 된다. 다음 주에 몸으로 세워진 교회에 대해서 말씀드리겠다.
<기도>
은혜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 인간의 생각으로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주님께서 우리 앞에서 승리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머리되신 주님 안에서 몸 된 교회가 반드시 승리할 것을 확신하고 주님 우리는 당신이 가시는 길을 따라가기 원하고
당신이 제시하신 길을 믿기 원하고 당신과 함께 한길을 가기를 원합니다.
사도들과 함께, 주님과 함께, 우리의 길이 연합의 길로 몸을 이루는 길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길로 가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