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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바뀌는 생명과 죽음 (누가복음 10:10~16)
16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다. 제자들이 가서 했던 말은 어떤 말? 친구만나서 어떤 말 할 때 그 사람들이 여러분 말 잘 들음? 사람과 사람 사이에 통하는 말은 듣는다. 부동산 정보 정치 얘기... 미용얘기 드라마 얘기. 황후의 품격. 매회 한명씩 죽어나가는 얘기. 축구 얘기.
사람이 에너지를 쏟아붓는 일들. 이 세상살이에 필요한 것들이 걸려있을 때는 입술이 바짝 마르도록 신경쓴다. 지면 낭패. 우리가 나누는 대화는 이 세상살이 육체의 즐거움 주는 얘기. 너희 말을 듣는자. 제자들이 무슨 말을 했기에?
영접하지 않거든 거리에 나와서 이렇게 말해라 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겠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라. 동네와 먼지 한톨 인연 맺지 않고 끊어버리겠다. 단호
추수에 관한 이야기- 심판. 살고자 하는 인간들에게 심판을 얘기한다. 이기고자 하는 팀에게 가서 너희 진다 하면 기분 나쁠 것. 베트남 대사관에 전화해서 오늘 베트남 진다. 이렇게 말하면 우릴 쫓아낼 것. 쫓겨날 때 먼지 한 톨 털어버리며 하나님 나라 가까이 온 줄 알라
살고자 하는 자들에게 심판 얘기 죽음 얘기한다면 제자들 쫓아내는 빌미가 된다. 압축해서 말하면 예수께서 십자가 죽은 이유. 간단. 예수님이 계속해서 병자 고치고 오병이어로 먹이고 죽은 자 살렸으면 안 죽었을 것. 그다음 왕이 됐을 것
예수님이 한껏 기대감 부풀어올린 다음 심판을 선언. 그들의 모든 가치를 주님께서 무시했기 때문에 죽인 것. 오병이어로 잔뜩 먹여놓고 나서 한다는 말이 배부르냐? 이 쓰레기야. 친구 불러다가 잔뜩 먹이고 네가 나를 만난 건 밥 얻어 먹으려는 거지 식충아?
우리가 사람 만나는 이유. 그를 만남으로 나에게 돌아오는 유익. 네가 나를 만나 밥 먹은 이유는 나한테 뭐 나올까 싶어 노리고 있는거지? 듣는 사기꾼 기분나쁠 것. 병 고치고 먹이고 치유한 다음 던지는 말이 그들의 숨겨진 육성 건드린다. 곱게 치료하는 것 아니고.
치료받으러 나온 환자한테 하는 말씀이 네 죄를 용서함 받았다. 그가 원하고 바랐던 것은 단순히 육체의 병 고치는 것. 예수님은 그 죄의 사안 먼저 얘기하신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이유는 우리 육체 소망 들어주는 척 하면서 그 배후에 숨어있던 죄악성 지적하고 심판하셨기 때문. 인간의 가치를 주님은 인정하지 않으셨다.
제자들 나와 복음 증거할 때 똑같다. 기본적으로 하나님 나라 얘기. 하나님 나라 가까이 왔다는 말은 이제 인간 나라 끝났다. 인간나라 심판을 말씀. 히나님 나라의 핵심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으로 너희에게 모든 것 주어진다.
그 말이 왜 거부할만한 말? 예수 십자가 죽으심으로 너희에게 모든게 주어진단 말은 뒤집어 말하면 따라서 너희 행하는 모든 것 아무 쓸모 없어 전제. 그건 다 하나님 심판 저주 받아 마땅.
우리 기대. 내가 노력하고 신경쓰고 이룬 내 행함 가치 챙기고 거기서 +@로 예수 십자가 죽으심 챙기고 싶어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이미 갖고있던 바구니에 듬뿍 들어있던 내 노력 내 인생 결정체 엎어버리고 주님 것으로 채운다고 오시기 때문에 우리는 거부. 우리는 예수님과 그분이 행하신 것보다 내 가치 더 중시.
아이들 키울 때 먹이고 입히고 키웠던 십몇년 이상의 세월. 중요한 건 다 들어갔지만 가끔 아이들은 사소한 장난감 아빠가 건드렸다고 불같이 화낸다. 예수님은 자기의 죽으심으로 모든 걸 준비해놨지만 우리는 내 힘으로 챙긴 것 가치를 중시.
신문. 법정 개인회생 법인회생 파산 붐빈다. 회사부도 회생신고 않고 파산. 보험설계사 건설회사 사장. 사업하는 사람들은 30년간 투자한 사업체가 어린아이 소중히 여기는 장난감과 같은 것. 망하게 한 예수 용서못한다
아이 장난감=어른 자동차 사업체 부동산. 주님께선 그런 모든 가치 쳐버린다. 그럴 때 대체적으로 예수 원망하고 파이팅할 준비. 너희 말을 듣는 자는 내 말을 듣는 것이다 할 때 제자들이 증거했던 말은 십자가 복음 전파하는 말. 그 전제로 항상 그들에 대한.
새로운 건축을 위해서는. 본인이 원하는 것을 짓기 위해서는 지금 있는 허접한 구조물 털어내야. 철거가 선행. 너희들이 세워놓은 인생의 모든 그림들을 싹 밀어버리겠다. 하나님의 심판이. 우리는 항상 바라고 기대하는 인생의 그림들이 있다.
2019년 공부해야지 돈 벌어야지. 모든 그림은 다 자기를 위한 그림. 아이 건강 남편 일 잘되고 내가 하는 사업 잘 되고 교회 잘 되고. 온갖 개인적 그림 있다. 우리는 그런 소원 안고 주님 앞에 두 손 모아 기도. 크신 은총 베푸사 새해에는 애들 건강 공부 잘하고.....
우리가 설계한 모든 그림 자체를 복음은 부정. 어떻게? 소돔성에 불 내리듯 노아시대 홍수 내리듯. 그게 제자들의 말. 하나님 나라 가까이 왔다 = 너희들 설계한 모든 나라 무너진다. 아니라는 것. 한편으로 우리에게 기쁨.
카페 인수인계. It’s not your business. 우리 혜화동 교회 어떻게 하면? it’s not your business 교회 네꺼 아냐. 니 애들 아냐. 제 건강. it’s not your business 네 몸 네 것 아니고 네 인생 네 것 아니다. 오늘밤 네 목숨 거둬가면 너의 고민하는 몸뚱아리
사람의 생명이 코의 호흡에 있다 가치가 없다. 주의 복음 네가 하는 모든 고민 갈등 모든 생각에 대해 네가 신경쓸 일 아니다. 근거는 예수께서 이미 십자가에 피 흘려 너를 샀다. 우리는 다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의 노예
주님이 피로 값 주고 샀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자신에 대한 소유권 주장할 수 없다. 주님이 주장. 우리가 다 주님 것인데 계속해서 우리한테 네 인생 너의 것이라 말하는 그 음성은 어디서 온 음성? 마귀에게서. 네 인생 네 관계 네 몸 다 네 것 다 네가 챙겨야.
내가 운영하는 카페. 사소한 일인데도 망할까 싶어. 그런데 주님께서는 여유롭게 한 마디 네 비즈니스가 아니다. 엄밀히 말해 복음이 왜 사람 열받게? 때로는 무기력하게? 우리 개인으로부터 나오는 어떤 것도 하나님 나라와 상관 없다는 것을 늘 전제하기 때문.
우리 삶 자체가 우리께 아니라는 선언 자체가 한편으론 기분나쁘고 힘빠진다. 구원은 어떻게 정해짐? 창3 15 여자의 후손과 뱀의 전쟁 통해 이미 결정나는 것. 예수 그리스도와 마귀와의 전쟁 통해 이미 결정난 것. 우리 개인 역량과 아무상관 없다.
너희 구원에 대해 네가 손 떼라는 그 선언 그 복음이 사람들로부터 거부감 일으키는 표어. 자기 구원 위해 뭔가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그 사람들한테는 너희 구원에 대해 네가 손 때 네 구원 it’s not your business. 너와 상관없이 여자의 후손과 뱀의 대결 통해 확정.
이제부터 네가 바랄 것은 여자의 후손이 너를 구원하기 위해 어떤 경로 거쳐 구원 이뤘는가 여자의 후손 예수님이 하신 일에만 주목하는 것밖에 없다. 너의 구원과 너의 심판에 대해 네가 손을 떼라 그게 복음이 전하는 메시지이기 때문에 사람들 어렵게 한다.
특히 교회 사랑하고 복음 사랑한다고 뭔가 헌신한 경우 더더욱 그렇다. 자기 행함 통해 구원 유지할 수 있다는 믿음이 허상 따라가는 믿음. 너희 행함 선함 기도생활 개인적 헌신으로 네 구원 유지할 수 있다는 그 헛된 메시지에 속아 마귀 종 노릇.
네 구원 네가 책임져야. 소돔성처럼 예수 말씀 안 믿으면 심판. 소돔성 사람 음란했다 음란하지 말아라. 두로와 시돈 교만했다. 교만하지 말아야. 성경에서 자기 자신 삶 세워나가기 위한 모든 조치들을 당겨서 자기 반성 촉구하는 것이 마귀 속임수.
네 구원 너 아니면 누가 챙기랴 그 메시지에 속아 자기 구원에 매달린다. 그러나 성도는 자기 구원 챙기려 시도하다가 이게 아니네 하고 자기 시도 실패로. 자기 구원 노력이 자기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 매일 발견하는 쪽으로 성령이 우리를 끌어간다.
그런 과정에서 늘 새롭게 우리 구원 이미 준비해두신 예수 헌신만 드러난다. 성령께서 우리 끌어가시는 코스. 그런 복음 자체가 사람들로 하여금 이 세상 실상 제대로 못 보게 하는 어둠이 된다.
12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날에 소돔이 그 동네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소돔성을 이야기. 13 벳세다 두로 시돈 가버나움. 다 동네 공간 말한다. 소돔 가버나움 모든 공간이 하나님 심판 대상. 한마디로 세상. 세상이라는 이 동네는 하나님 심판 대상. 공간적 차별 없다.
이번 정권들어 이민 많이 갔다. 한국 떠나 미국 가면 거긴 하나님 심판 적용되지 않음? 세상은 어딜 가나. 미국 가나 호주 가나 한국 북한 하나님 심판 대상. 어떻게 앎? 애굽에서 이스라엘 끄집어냄으로 애굽이란 동네 심판. 이스라엘이 가나안 들어간 이후 이 땅은 약속받은 땅이다. 가나안 땅 그들이 신성시했을 때 그 땅 심판해버리고 그들을 포로로 바벨론으로 옮긴다.
어느 공간이든 심판 대상. 그 땅에 살고 있는 인간 자체가 하나님 심판 대상. 선악과 먹고 타락한 인간들 어디든지 하나님 심판이 따라와서 폭격. 사도바울은 갈6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 없으니
이 십자가 자랑하면 사람들로부터 외면 박해. 사도바울 왜 목 날아감? 베드로 왜 거꾸로 못박혀 죽음?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사랑하다가. 사도요한. 예수 십자가는 모든 인간 행함 멸시 무시. 왜 그걸 자랑?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해 그러하다
예수 십자가는 세상의 관점과 나의 관점이 영원히 어긋나는 중요한 어긋남의 동기가 된다. 세상이 나를 대해 못 박혔다. 사도바울이 예수 십자가 안에 들어와보니 세상은 다 하나님 심판 가운데 놓였다는 사실이 보인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와보니 세상이 이미 심판받은 것. 세상과 나는 이미 상관없다. 세상이 나를 대하여 못박혔기 때문에. 세상은 이미 죽은 세상. 여러분이 볼 때 세상 죽은 세상으로 보임? 활발하고 생기 넘치고 희망 넘치고. 대부분 그렇게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 부러워한다.
그러나 예수님 십자가 우리에게 덮쳐오는 순간 십자가 속에서 보면 하나님이 예수 십자가에 죽였다는 것은 모든 세상 심판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십자가 속에 들어오니 세상은 이미 하나님 심판안에. 아무리 돈 많이 벌어도 죽는다.
인도 부자 결혼. 전세기 400대. 결혼식 비용만 천억원. 시종드는 하인만 600명. 그 부자는 얼마나 죽는게 아까울까. 사는게 힘든 사람들은 빨리 죽어도 괜찮겠다 천국이 낫겠지 헛꿈. 세상이 나를 대하여 못박힌다. 예수 십자가 속에 있을 때만 어딜 가나 심판 가운데 세상을 보게 된다.
놀라운 것은 세상이 또 나를 볼 때 저 병신 가난뱅이 라고 본다. 끝없는 엇갈림. 그래서 사도바울이 총독 봤을 때도 부러울 게 없다. 하나님 진노 심판이 로마제국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바울은 알기 때문에. 그 총독도 바울 볼 때 꾀죄죄한 못난이 공부많이해서 미친 또라이.
예수 십자가의 복음과 세상이 접촉점 있다는 착각 버려야. 영원히 엇갈린 만남. 예수 십자가 복음을 통해 세상과 친해질 길이있겠지. 착각. 세상은 셉자가 복음 증거하는 자 봤을 때 미친놈 또라이로 본다. 예수 못박아 죽이듯.
반대로 예수 십자가 복음에 들어온 사람은 세상 심판 대상으로 밖에. 홍수가 다 쓸어버릴 세상. 만약에 20층 대저택 가운데 내일모레 유성 떨어져서 하룻밤 600명 다 죽고 부자 죽었다면. 그걸 알고 있다면. 그 집 부러워할까.
그래서 그가 제시하는 모든 말에 신뢰를 둘 수 없다. 내일모레 망할 사람. 반대로 그 부자가 우리봤을 때 거지가 와서 복음 떠들고 있으니 마찬가지로 안 들린다. 십자가 복음과 세상 컨택지점 없다.
이영훈 목사 유명? 조용기 목사? 알 턱이 없다. 애들한테는 아웃오브안중. 신문에서는 제일 큰 교회 싣는다. 평양에 병원. 우리가 구제하고 병원 짓고 학교 지어주면 세상과 컨택지점 생긴다. 그런데 예수 십자가 복음 증거하면 아무래도 연결지점이 없다.
예수 십자가 복음은 세상을 향한 심판 선언하기 때문. 세상은 교회한테 제발 우리 존재가치 알아다오. 나는 살아야돼 인권 존중해줘 교회가 민주주의 위해 애를 써줘. 십자가 복음은 심판을 얘기한다.
세상과 교회가 연결되는 지점은 없다. 잘 지내다가도 예수 십자가 복음 말하는 순간 갈라져버린다. 십자가 복음이 지금 네가 살아있다는 것은 산게 아니야. 삶과 죽음 바꿔버린다.
살아있다는 것. 바벨론 왕이 다니엘 친구들 풀무불에. 죽이려고 넣었는데 안죽음. 그 가운데 인자. 예수님이 그 속에. 그것은 너희들이 살아있다는 삶과 죽음의 개념이 예수 십자가에 들어오면 바뀐다.
진짜 살아있는 것은 풀무불 속에 있고 밖에 있는 것은 죽음. 우리는 여기가 산 자의 세계. 죽어라고 풀무에 던졌는데 풀무속에 생명. 그 생명이 우리 바라보고 니들이 죽은거야 말한다.
생명과 죽음이란 개념이 십자가 사이에 두고 바뀐다. 이걸 누가 믿음? 성령께서 다가와서 지금 네가 그렇게 집착하는 흰머리 피부 재생 기를쓰고 지키려는 네 살아있음 자체가 죽은 것. 안티에이징 아무리 외쳐도 결국 늘어나는 주름살 흰머리. 줄어드는 건 머리카락. 죽음에 있다는 증거.
결론. 뭘 어떻게 하라는? 안티에이징 하고 미용 신경쓰고 운동하고 비타민 먹고 잘 챙겨야. 그 노력 가운데 예수의 영이 우리에게 문득 다가와서 그것이 바로 죽어있다는 증거라는 것을 알려줄 때 그 과정을 통해 십자가에 죽는 죽음 안에 생명을 준비해놓으신 그 주님의 식탁을 문득 바라볼 수 있다면.
안티에이징 하며 그걸 믿고있는 자와 안 믿는자 사이의 차이. 자유함과 평안 담대함. 어차피 해도 안해도 죽는다는 것을 아는 자는 알고 바르는 것. 필사적으로 바르는 자는 거기 매이는 것. 사업할 때 안하면 망한다 죽는다 절박한 심정으로 하는 자와 어차피 마지막 결론은 죽음속에 있음을 아는 자는 다르다.
주님께서 복음을 성령을 통해 부어주심으로 이 세상에서 벗어난 자로 우리를 살게 하신다. 똑같이 홍해바다 들어왔지만 이스라엘은 빠져나오고 애굽군대는 죽는다. 그걸 통해 이스라엘은 살아도 본인이 산게 아니라는 사실 안다.
성도는 살아도 내가 산 게 아니다. 내가 지금 산 것은 그리스도 안에 산 것이다 바울의 고백처럼 지금 내가 사는 것은 살기 위한 내 노력과 애씀으로 사는 것 아님을 안다. 예수의 죽음 안에 살고 있다. 예수 십자가 죽음 혜택으로 내가 존재. 그때 우리는 이 사업 망하나 안망하나 예수님 죽음이 준 생명 속에.
밖에서 볼 때는 카페 망한 것. 십자가 복음 안에 있다면 카페 하나 안하나 나를 살게 하는 것은 예수님. 예수 생명 속에 내가 들어있는 것. 그래서 십자가 속에 들어온 자와 밖에 있는 자는 절대 교류 안된다. 무슨 말을 해도 어긋난다.
한해 정리하는 때. 사실 시간 자체 무의미. 인간 임의로 잘라놓은 것. 다만 성령께서 십자가의 사건으로 다가올 때 우리가 이미 망한 자 죽은 자 가난한 자 그 사실을 알 때 지금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은 그리스도 예수 복음 증거하라고 주어진 하나의 수단. 그 순간 우리에게 자유.
이미 우리는 끝난 인생. 죽은 자로 인생 산다. 하나의 덤처럼. 우리 삶 자체가 너희 말을 듣는 자는 내 말 듣는 것이다 예수 말씀처럼. 십자가 복음이라는 것은 나 자신도 들을 수 없는 말. 우리는 우리 살아있음 의심할 수 없으니까.
그런데 성령께서 십자가 사건 몰고오면 그 순간 안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은 죽음의 현상들이다. 이미 우리 삶 끝나있다. 바퀴벌레 거미 압사. 절반쯤 터져 버둥대는 바퀴는 죽은 것? 산 것? 휴지에 말아 변기에 넣고 물을 내린다.
우리 인간은 이미 생명없는 백성. 살아보겠다고 늙지 않겠다고 버둥거림. 주님 보시기에 이미 죽은 것. 이미 생명의 소스가 없다 그냥 버둥거림.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 죽음 속에 있다. 십자가 속에 생명이 숨겨있다.
너희가 이미 죽었고 너희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감춰져 있기 때문에 땅에 것을 생각말고 위에 것을 찾으라. 너희생명 이미 죽어서 따로 하늘에 보관. 지금 우리가 아는 이 목숨은 이미 죽은 것. 그저 살기 위해 망할까 싶어 버둥대다 결국 죽음. 요양병원.
총신대 총장. 환자복 입고. 버둥버둥 하다 결국 멈춤. 평생을 버둥대다 이미 가는 것. 이미 하나님의 심판이 우릴 눌러놨다. 생명의 소스 빠져나갔다. 바울. 이미 너희 생명 다른데 보관되어 있어 하늘에 감춰져있다. 그 생명 있는데 지금 생명에 너무 애쓰지 말라
우리는 이 버둥거림 멈추지 못하기 때문에 그건 이미 죽은거라 정죄하는 것 거부. 살아야돼 하다 죽음. 살기위해 먹다 결국 죽음. 우리 생명 하늘에. 이 생명은 폐기처분. 벤츠가 준비되어 있으니 중고차는 버리듯. 또다른 생명이 십자가 안에 다가올 때 예수 피로 속죄받고 씻겨진 생명 다가올 때마다 그 생명으로 우리 생명 볼 수 있는 안목이 열릴 수 있기. 그 순간 자유 평안 담대함의 순간.
하나님 아버지 감사. 심판 소식이 기생 라합에게는 복음이었던 것처럼 우리 몸을 향한 하나님 심판 소식이 십자가 안에서 참된 자유 기쁨 될 수 있도록 축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