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완의 '서장'통한 선공부] <27> 서장 (書狀)
하운사(夏運使)에 대한 답서
도는 묵묵히 계합할 수 있을 뿐
"편지를 보니, 도(道)에 계합하면 하늘과 땅이 같은 곳이요, 뜻하는 바가 다르면 얼굴을 마주 보아도 초나라와 월나라 만큼이나 떨어져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진실로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전하지 못하는 묘(妙)함입니다. 그 전하지 못하는 묘함은 그대가 뜻을 내어 저에게 편지를 쓰고자 할 때, 붓을 잡고 종이를 펼치기도 전에 이미 양 손에 주어져 있습니다. 그러니 또 무엇 때문에 견인위(堅忍位)와 구경위(究竟位)를 기대하여 뒷날을 기다리겠습니까? 이 도리(道理)는 오직 증험(證驗)해 본 자라야 묵묵히 서로 계합할 뿐, 속인들에게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첫째 사람 : 도(道)는 본래 완전히 갖추어져 있어서 조금도 모자라거나 지나침이 없다. 마치 진흙으로 여러 모양의 물건을 빚어 만들 때, 만들어진 물건은 온갖 다양한 색깔과 모양을 갖추고 있으나 그 재료는 전부 동일한 진흙이듯이, 앞에 나타나는 온갖 다양한 경계(境界)는 전부 도의 작용으로 나타난다. 도가 보는 작용을 하여 온갖 색깔의 경계가 나타나고, 도가 듣는 작용을 하여 온갖 소리의 경계가 나타나고, 도가 냄새 맡는 작용을 하여 온갖 냄새의 경계가 나타나고, 도가 맛보는 작용을 하여 온갖 맛의 경계가 나타나고, 도가 느끼는 작용을 하여 온갖 감촉의 경계가 나타나고, 도가 생각하는 작용을 하여 온갖 의식의 경계가 나타난다.
이처럼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하고, 생각할 때에 이미 도가 그곳에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들을 떠나서 달리 도를 찾거나 닦는다거나 설명하려 한다면, 그것은 허황된 이름과 관념을 세우는 어리석은 짓일 뿐이다.
그러므로 '도는 닦을 것이 없으니 다만 오염되지만 말라'고 하는 것이고, 또 '찾지 않으면 도가 늘 눈 앞에 있지만 찾으려 하면 도는 결코 얻을 수가 없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마거사는 침묵하여 모든 보살들의 분별심을 잠재우고 도를 오롯이 드러내었으며, 이조혜가 스님은 단지 절하는 것만으로 도를 드러내어 보리달마의 법을 계승하였으며, 임제 스님은 앞에 나타나는 자가 있으면 모조리 대기대용(大機大用)의 활발한 작용을 행하여 도의 존재를 드러내었던 것이다.
도는 언제 어디서나 이처럼 밝게 드러나 있기 때문에, 한 마디 말을 하지 않아도 눈밝은 사람에게는 이미 도가 분명한 것이다. 그러나 이 비밀을 알지 못하고 헛된 모양과 이름만을 따라다니는 어리석은 속인은, 도를 설명하고 활작용(活作用)을 보여주어도 오히려 이름과 모양만을 쫓아서 더욱 번다한 망상에 빠질 뿐이다. 도의 비밀스런 존재는 오직 증험(證驗)해 본 사람만이 아직 입을 열지도 않고 붓을 들기도 전에 묵묵히 계합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 사람 : 도(道)라니 무슨 더러운 소리냐? 도도 없고 부처도 없고 깨달음도 없다. 여기에서는 티끌 하나도 용납지 않는다. 털 끝만한 차이가 곧 하늘과 땅의 차이이며, 번갯불처럼 빠르더라도 이미 어긋난 것이다.
셋째 사람 : 하늘은 푸르고 물은 흘러간다.
넷째 사람 : 악!(고함 소리)
다섯째 사람 : 휙-(방망이 휘두르는 소리)
여섯째 사람 : ............(침묵)
자, 독자 여러분! 이 여섯 사람이 서로 같습니까 다릅니까? 같다고 해도 저의 뜻과 계합치 못할 것이며, 다르다고 해도 저의 뜻과 계합치 못할 것입니다. 견처(見處)의 깊이는 여섯이 제각기 다르나 그 작용은 모두 같다고 말하지도 마시고, 침묵을 지키고 있지도 마시고, 남의 흉내를 내어서도 안됩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저의 뜻과 계합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 자신에게나 남에게나 속지 않는 것이 귀한 사람입니다.
김태완/ 부산대 강사.철학
[출처 : 부다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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