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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리즘의 歷史性과 現實性
廉武雄
① 문학적 견해를 서로 달리하는 사람들의 리얼리즘에 대한 여러 논의(論議) 중에 다만 한 가지 일치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리얼리즘이라는 말이 일반적으로 대단히 다양하고 복잡하며 때로는 지극히 애매한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시대에 따라서, 그리고 문학적 입장에 따라서 이 말은 긍정적인 뉘앙스를 띠기도 하고 부정적 뉘앙스를 띠기도 하였으며 혹은 단순히 중성적(中性的)인 분석개념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마치 민주주의라는 말이 그러하듯이, 그리고 그 말 위에 여러 가지 에피세트가 붙여져서 「자유 민주주의」「사회 민주주의」「교도적(敎導的) 민주주의」「민족적 민주주의」등의 용어가 생겨났듯이, 또한 그 말이 어떤 귀족주의자들에 있어서 중우정치(衆愚政治)라는 조소적(嘲笑的) 개념으로 격하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리얼리즘은 이 말을 사용하는 사람의 사회적 입장과 문학적 경향에 따라, 그리고 그 말이 적용되는 분야에 따라 「부르조아 리얼리즘」「사회주의적 리얼리즘」「내적(內的) 리얼리즘」혹은「낭만적 리얼리즘」「민족적 리얼리즘」「비판적 리얼리즘」「도식적(圖式的) 리얼리즘」등의 복합적 어휘로 재생산되었으며, 리얼리즘에 반대하는 일부 인사들에 있어서는 작가의 상상력의 자유를 의적 사물의 전사기능(轉寫機能) 밑에 구속하려는 반(反)예술적 내지 비(非)예술적 시도로 설명되기도 했던 것이다. 리얼리즘에 관하여 우리가 최초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말이 이처럼 다양하게 해석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그것이 「일정한 정체를 밝혀내어 고정시키고 점유해 버릴 수 있는 물체가 아니라」(Raymond Williams, <리얼리즘과 현대소설(現代小說)>)는 점을 승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물론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이 리얼리즘이라는 말이 오늘의 우리 문학적 현실에 관련지어 옳게 사용될 가능성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도리어 우리에게는 이러저러한 곡해와 오용으로부터 이 말을 지켜야 될 필요성과 더불어 이 말에 의해서 우리 문학의 넓은 지평(地平)을 개척해 나가야 할 사명감이 강력하게 제출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리얼리즘에 대해서 일의적(一義的)이고 고정적(固定的)인 해석을 고집해서 안되며 또 고집할 수도 없다는 것은 그것이 사회적 현실과 그 제조건(諸條件)의 각단계에 따라 시대적으로 발전해 온 하나의 역사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점이 리얼리즘으로 하여금 의미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닌 어휘로 만들었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리얼리즘이란 말을 그때 그때의 편의에 따라 아무렇게나 사용할 수도 없으며, 또한 「리얼리즘이라는 것을 한 시대의 핵을 파악하는 능력으로 파악한다면, 그것을 리얼리즘이라고 구태여 부를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김현-<한국소설(韓國小說)의 가능성(可能性)>)는 어휘기피증(語彙忌避症)에 사로잡혀서도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리얼리즘은 다양하고 복잡한 의미를 갖는 개념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 의미의 다양성과 복잡성은 리얼리즘이란 어휘자체에서 유래하는 것이라기보다 그 어휘가 거쳐온 각 시대의 사회적·역사적 현실의 다양성과 복잡성에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얼리즘은 세계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 그리고 대상(對象)(인생 자연 등)을 표현하는 예술적 방법에 있어서 제종(諸種)의 아이디얼리즘과 확연히 구별되는 미학적 일관성을 보여 왔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리얼리즘의 두 가지 측면, 즉 모든 시대의 문학과 예술에 공통되게 나타나는 일반적·원리적 측면과 각 시대의 구체적 사회현실과 각 종류의 예술장르에 고유하게 강조되어 나타나는 특수한 측면을 적어도 논리적으로는 올바르게 구별해서 볼 줄 알아야 한다. 「유럽의 낭만주의 문학은 그 최선의 경향에 있어서 강한 변증법적 리얼리즘적 특성들을 가지고 있었다」(Leo Kofler- Zur Theorie der modernen Literatur, p155)고 말해졌을 때, 또 스땅달에 관하여 「엘베티우스(18세기의 계몽철학자-필자)처럼 생각하지만 루소처럼 느낀다」(M.Bardeche Hauser의 《예술사회사(藝術社會史)》에서)고 언급되었을 때 그것은 리얼리즘의 개념의 이러한 동력학(動力學)을 옳게 지적한 것이다. 즉, 우리는 리얼리즘의 개념을 그것에 대한 어떠한 미화(美化)나 추화(醜化)의 유혹에 빠짐이 없이, 그야말로 리얼리스틱한 관점에서 파악하지 않으면 안된다.
② 리얼리즘의 개념이 소박한 독자들에게 오해를 불러 일으킨 이유 중의 하나는 그것이 문학과 예술에서뿐 아니라 철학·신학·정치학 기타의 여러 분야에서도 그 나름으로 사용되어 왔다는 사실에서 발생한다. 역사적으로 철학상의 리얼리즘은 서양의 중세에 있어 노미날리즘(유명론(唯名論)·명목론(名目論))의 대립개념으로서, 그리고 보다 일반적으로는 인간의 관념이나 사유 및 인간의 감각을 초월하여 어떤 객관적 실재가 있음을 인정하는 실재론(實在論)으로서 인실론(認識論)의 한 입장을 가리킨다. (리얼리즘과 노미날리즘의 대립에 관해서는 김병걸(金炳傑)의 <르네상스기(期)의 리얼리즘>에 명석하게 설명되고 있다.) 한편 정치적 리얼리즘이라고 하면 의리나 체면따위에 얽매이지 않고 철저히 현실적 이해관계를 추구해 나가는 냉혹한 현실주의(現實主義)를 뜻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의심할 바 없이 문학비평은 처음 철학에서 이 용어를 빌어왔고 곧이어서 그 사용은 부정확하게 되었다.」(H.Read, The Meaning of Art) 그러나 여기서 용어의 사용법이 부정확하게 되었다는 것은 허버트·리드의 제한된 관점을 드러내는 것일 뿐이며, 도리어 이 말은 문학비평과 미학(美學)의 분야에 사용됨으로써 인간과 예술의 이해에 있어 그 말의 개념사상(槪念史上) 가장 종합적이고 가장 심화된 원리와 방법론을 대변하게 되었다. 사실상 리드 자신이 다른 저서에서는 예술가가 대상을 작품화하는 데에, 즉 예술가와 대상 사이의 관계에 기본적으로 리얼리즘, 아이디얼리즘, 엑스프레셔니즘(표현주의(表現主義))의 세 가지 양식(樣式)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H.Read, Art and Society참조)
어쨌든 우리 문학사에 단어로서의 리얼리즘이 등장한 것은 1820년대 이후의 일이요, 서구에서도 그것이 뚜렷한 문예용어로 자각되어 나타난 것은 겨우 19세기의 중엽에 이르러서였지만, 그것이 예술창작의 기본적 관점으로 작용한 역사는 예술 그 자체의 역사와 동시에 시작되었다. 미술사가(美術史家)들의 연구에 의하면 인류가 남겨 놓은 가장 오랜 예술적 표현들은 대상(주로 동물(動物))을 실제의 모습 그대로 재현(再現)시키려는 노력으로 나타났다. 구석기시대의 화가들은 현대인이 복잡한 과학적 도구를 사용해서야 비로소 발견할 수 있는 미묘한 음영(陰影)을 내안(內眼)으로 이미 볼 수 있었다는 것이며, 그러한 사실주의적 양식(樣式)은 신석기시대의 시작과 함께 인류의 예술사상 최초의 의식적(儀式的)변화가 일어날 때까지 수천년 동안 지배적이었다고 한다. (A. Hauser Sozialgeschichte der Kunst und Literatur, 제 1장 참조) 어린 아이들이나 오늘날 원시민족들의 그림은 감각적이 아니라 합리주의적이다. 즉, 그들은 「실제로 본 것」이 아니라 「알고 있는 것」을 그리며, 대상의 시각적(視覺的) 모습이 아닌 이론적 종합을 제시한다. 대상에 관해서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들은 대상의 전면(前面)과 측면(側面)을, 예컨대 인물의 앞얼굴과 옆얼굴을 동시에 그려 넣는다. 그런데 구석기(舊石器)시대의 그림들은 이와 달리 일체의 지적(知的) 손질이 배제된 대상의 직접적 인상을 재현하며, 드가(Degas)나 툴루스·로트렉(Toulouse-Lautrcc)의 회화에 와서야 비로소 다시 발견하게 되는 동작(動作)의 순간성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현재 접할 수 있는 한에서 인류 최고(最古)의 예술인 구석기시대의 그림에 있어서 왜 그러한 리얼리즘의 양식(樣式)(하우저는 자연주의라고 불렀다)이 발생하게 되었는가? 아무도 결정적인 해답을 내놓지는 못하고 있으나 가능한 설명을 빌어 올 수는 있다. 즉, 구석기시대의 생활수단은 수렵(狩獵)이었으며 따라서 수렵자들은 자연(여기서는 짐승)을 예리하게 관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짐승을 잡아 먹으려면 그 짐승들의 동작, 습관성, 교활성을 연구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또한 그러한 야수(野獸)들과 직접 대결하는 마당에 있어서는 어떠한 관념적 환상도 허용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생활의 이러한 경험이 구석기시대의 사람들로 하여금 세계에 관한 그들의 개념을 리얼리즘적인 것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리얼리즘의 특질을 가진 원시조형예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생존경쟁에 의하여 원시수렵자(原始狩獵者)들 가운데 발달되고 날카로와진 두 가지의 능력(비상한 관찰력과 확고한 기술-필자)을 예술적으로 적용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Ernst Grosse, Die Anfänge der Kunst) 구석기시대에서 신석기시대로, 즉 인류의 경제생활이 수렵에 의존하던 단계에서 농업(農業)과 목축(牧畜)을 주로하는 단계로 발전함에 따라 인간의 감각적 능력들은 후퇴하고 헙리적 사고(思考)와 추상의 재능이 성장하게 되며, 그리하여 인간들은 미래를 위해서 물질적 행복의 보존을 배려하게 되었다. 또한 이와 더불어 예술에 있어서는 외계의 사물을 전달하는 리얼리즘적 양식으로부터 사물에 대한 관념을 전달하는 상징적·기하학적·형식주의적 양식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예술은 이미 「자연의 모방자(模倣者)가 아니라 자연의 적대자(敵對者)」(Hauser)가 되었으며 모든 사고(思考)의 체계에 있어서 관념과 현실, 영혼과 육체, 정신과 형태의 대립이라는 이원론(二元論)이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외적 사상(外的 事象)을 그 사실적(事實的) 비례관계 그대로 재현하려는 리얼리즘적 욕구와 사상(事象)을 추상화·도식화·상징화해서 표현하려는 비(非)리얼리즘적 욕구, 이른바 물리조형적(物理造型的) 양식과 관념조형적(觀念造型的) 양식이 예술사의 모든 시기에 있어 항상 반복되고 배합되면서 거듭 새롭게 나타났다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 어느쪽이 타당하다 아니다를 성급하게 단정지으려고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당위(當爲)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의 문제이기 때문이며, 따라서 우리는 먼저 어떤 일정한 사회적 조건과 그 발전단계에서 어떤 일정한 예술양식이 지배적으로 되었는가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세계에 대한 근본적인 예술태도를 일찍이 아이디얼리즘과 리얼리즘의 두 가지로 보았던 볼라디미르·프리체에 의하면, 신석기시대 이후 지배적인 것으로 된 아이디얼리즘의 양식으로부터 리얼리즘 양식에로의 추이(推移)는 서구(서구)의 예술사에 있어서 네가지 중요한 실례(實例)를 보여준다고 한다. (프리체, 《예술사회학(藝術社會學)》제 10장) 그것이 곧 ①기원전 4, 5세기 경의 희탑 ②15세기의 이태리, ③17세기의 네덜란드 그리고 ④19세기 후반의 전(全)유럽의 예술에서였다. 그에 의하면 이 각 세기들에 있어서 특징적인 것은 농업문화로부터 상업자본주의적 문화에로의 전환이 일어나고 따라서 사회의 주도권이 지주적(地主的) 귀족에게서 상업적(商業的) 부르조아지에게로 넘어가며, 봉건 공동체의 내부적 결합이 붕괴하는 반면에 도시적(都市的) 자본주의의 발전이 진행되며, 경건하고 신비적인 종교심(宗敎心)을 합리적·과학주의적인 탐구욕(探究慾)이 대신하게 되는 점들이다. 요컨대 모든 천상적(天上的)·초월적인 것, 플라톤이 의미했던 바 이데아의 세계에 대한 신앙이 사라지고 지상적(地上的)·가시적(可視的)·현세적(現世的)인 것에의 강한 집착이 지배적으로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현실의 변화 빛 세계관의 변화에 발맞추어 예술에는 아이디얼리즘적 양식(樣式)으로부터 리얼리즘적 양식에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프리체가 지적했던 마지막 실례, 즉 19세기에 있어서의 리얼리즘은 그 운동의 주동자들이 역사상 처음으로 리얼리즘이란 말을 의식적이로 자기들의 예술 프로그램으로 들고 나왔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 문단(文壇)에서의 리얼리즘 논의가 바로 그것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보다 자상한 고찰이 있어야 할 것 같다.
③ 잘 알려진 바와 마찬가지로 19세기 서구(西歐)에 있어 문예운동으로서의 리얼리즘은 하루저가 자연주의자들이라고 불렀던 샹플뢰리아 뒤랑띠 등에 의해서 정열적으로 출발하였다. 문예사조적(文藝思潮的)으로 그것은 앞 단계의 낭만주의를 한편으로 계승하고 다른 한편 비판하면서 나타났다가 다음 단계의 자연주의에 바톤을 넘겨준 문학운동으로 되어 있다. 운동으로서의 이 리얼리즘에 관련된 우리 문단의 논란(論難)의 초점은 그것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묘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데에, 그리고 그러한 이른바 모사론(模寫論)과 작품이 교훈적일 것을 요구하는 공리주의와를 어거지로 결합시키고자 했다는 데에 집중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오늘날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리얼리즘이 결코 외적(外的) 현실의 기계적·평면적인 복사(複寫)를 뜻하는 데 그칠 수 없다. 또한 외적 현실을 문자 그대로의 뜻에서 정확하게 복사해 내는 일이 가능한 것도 아니다. 이것은 더 설명할 필요도 없이 너무나 자명(自明)한 노릇이다. 가령, 작가가 나뭇잎이 떨어지는 광경이나 소녀가 뛰어가는 모습 한 가지만을 실제 그대로 묘사하려고 한다 하더라도 그는 수 없이 많은 어휘를 소비해야 할 것이며 그렇게 해도 결국 순간순간의 움직임의 전 과정이 남김없이 재생되지는 않을 것이다. 졸라의 독일인 제자였던 홀츠(Arno Holz)가 그와 비슷한 파격적인 실험을 해본 일이 있었지만, 그 작품(Papa Hamlet)은 보통의 다른 소설에 비하여, 말할 나위없이 세밀하고 번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의 사실 그 자체에 비한다면 여전히 인정한 수준의 추상(抽象)을 벗어난 것일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문학이 자기의 매체로 사용하는 말(言語)이라고 하는 것이 벌써 구체적 사물로부터의 일정한 추상(抽象)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들은 아트노·홀츠의 작품에서 그가 그토록 객관적 사상(事象)의 치밀하고 자세한 전사(轉寫)를 의도했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실제와는 매우 다르고 이상하다는 소격감(疏隔感)을 느꼈던 것이다.
그러면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예술론에 쉴새없이 출몰하는 모방설 내지 모사론의 참된 뜻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예술작품이 독자 또는 관객에게 객관적 사물의 실재(實在) 자체를 주는 것이 아니라 사물과 똑같다는 느낌 즉 사물에 대한 환영(幻影)(Illusion)을 주려는 의도를 가리킨다. 그러면 사물과 흡사하다는 느낌은 영구불변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기 때문에 「반달 같은 눈썹」이란 묘사는 「비수(匕首) 같은 눈썹」으로 거듭거듭 대체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의미에서 작가는 사들의 기성화(旣成靴)된 이미지를, 즉 사고(思考)의 상투형(常套型)을 부단히 파괴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작가가 사물이 서 있는 새로운 자리, 새로운 사회적 현실을 발견했기 때문이지 사물을 보지않고 자기의 주관적 내면(內面)으로 숨어 버렸기 때문인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작가의 임무는 객관적 현실의 보다 진정한 의미를 거듭 새롭게 찾아내는 것이지 현실로부터 허공(虛空)속으로 해방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작가가 사실과 현실을 정직하게 객관화시킬 때 그것은 작가가 주관적으로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일상(日常)의 기성화된 관념에 길들은 범인(凡人)들에게 계몽적·해방적인 작용을 하게 되는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문학과 예술이 인간의 소외(疏外)를 극복하고 인간의 삶을 풍부하게 하는 데 기여하는 탁월한 기능인 것이다. 이것을 굳이 모사론과 공리주의의 모순된 결합이라고 보려는 것은 ―설사 그렇게 보는 것이 순전히 논리적인 차원에서는 가능하다 치더라도, 그리고 운동으로서의 리얼리즘을 대변했던 어느 인물이 그러한 단순한 결합을 의도했다 치더라도― 문학의 본태적 기능에 대한 지극히 피상적 관찰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外的(외적) 사물의 정확한 再生(재생)을 목표로 삼았던 운동으로서의 리얼리즘은 前(전)단계의 현실도피적 낭만주의를 청산한다는 역사적 사명을 다함과 더불어 극복되었다. 다시 말하여 소박한 모사론은 역사적으로 부정(leugnen)된 것이 아니라 극복(üferwültigen)된 것이다. 否定(부정)으로 보려는 사람은 이것을 外的(외적) 현실에 대한 작가의 포기나 그것으로부터의 예술가의 도피를 정당화하려는 논리로 轉化(전화)시키는 것이며, 극복으로 보려는 사람은 리얼리즘의 새로운 심화에 참여하는 것이다.
19세기에 있어 리얼리즘의 이러한 深化(심화)를 문화적으로 실현한 것은 운동으로서의 리얼리즘에 직접 가담하지 않았거나 그 리얼리즘의 俗化(속화)에 반대했던 작가들이었다. 그들이 바로 스땅달, 발자크, 플로베르, 디킨즈,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토마스 만 들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발자크는 19세기의 西歐(서구) 역사벌전 단계에 있어서 가장 탁월하게 리얼리즘을 대변하는 인물이요 (서구의 근대적 자본주의는 19세기의 30년대에 유럽 全城(전성)을 지배하게 되며 50년대에 이르러 全(전)세계를 자기의 市場輪廓(시장윤곽)으로 완성한다. 그런데 발자크의 중요한 작품들이 발표되는 것은 1829년부터 1848년 사이의 기간이다.) 또한 우리 나라에서도 흔히 리얼리즘과 결부되어 여러모로 논의되는 인물이므로, 발자크에 있어 의미되는 리얼리즘이 과연 무엇인지 따지고 넘어갈 필요가 있을 듯하다. 그에 괸하여 가장 빈번하게 인용되는 문장은 다음의 두 가지이다. 「발자크는 반동적 세계관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더욱 진보적인 예술가로서, 그는 부르조아 사회의 구조를 (스땅달보다-필자) 훨씬 예리하게 보고 그 움직임의 경향을 보다 객관적으로 묘사한다.」(Arnold Hauser) 「지금 내가 얘기하는 리얼리즘은 작가의 관점에 구애받지 않고 나타나는 것입니다...... 확실히 발자크는 정치적으로 정통파였습니다. 그의 위대한 작품은 善(선)한 사회의 불가피한 몰락에 보내는 하나의 줄기찬 悲歌(비가)이며, 그의 모든 同情(동정)은 사멸하도록 운명지어진 계급에게로 갑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가장 깊이 동정한 남녀들, 즉 바로 귀족들을 서술할 때보다 그의 풍자가 더 예리해지고 아이로니가 더 신랄해지는 적은 없습니다......이처럼 발자크가 자신의 계급적 共感(공감) 및 정치적 편견과는 반대되는 작품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 그가 좋아하는 귀족들의 필연적인 멸망을 보고 그들을 결코 더 좋지 못한 운명의 감수자로서 묘사했다는 것, 그리고 그가 미래의 참다운 인간들을 그들이 당시엔 고독하게 서 있던 곳에서 보았다는 것 ― 이것을 나는 리얼리즘의 가장 위대한 승리의 하나로, 그리고 발자크의 가장 웅대한 특징들 중의 하나로 여기는 바입니다.」(Friedrich Engele) 위의 引用(인용)들을 요약하면 발자크는 정치적으로 王黨派(왕당파)요 보수적이며 카톨릭 지지자, 즉 반동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당대 사회의 움직임과 그 발전의 경향들을 착오의 여지 없이 정확하게 묘사했다는 것이다. 즉, 작가의 정치적 입장과 예술적 창작 사이에는 모순이 있을 수 있으며, 예술적 진보성과 정치적 보수주의는 한 작가의 내부에 있어서도 완전히 兩立(양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발자크에 관련되어 제기된 이 命題(명제)는 藝術社會學(예술사회학)의 가장 중요한 문제로 되어 있다. 과연 우리는 이 현상을 어떻게 해명해야 할 것인가. 요컨대 이것은 작가의 세계관과 그의 창작적 成果(성과) 사이의 관계의 문제이다. 작가의 상상력과 객관적 현실 사이의 문제로 행각해도 좋을 것이다. 필자가 아는 한에서 이 문제는 아직 결정적으로 해명되어 있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적어도 이에 대한 몇 가지 誤解(오해)를 피하고 理解(이해)를 깊이할 수는 있을 것이다. 가장 소박한 오해는 발자크가 바로 그의 반동적 세계관 때문에 위대한 리얼리즘의 소설을 썼다는 것, 그러니까 원래 「예술가로서의 리얼리스트란-자신의 의사의 反(반)하는 사람-(김현「4.19와 韓國文學(한국문학)」 座談(좌담))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발자크가 리얼리스트가 된 것은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했기 때문이 아니라 「망할 놈의 현실」하는 식으로 嘲笑的(조소적)인 시선을 보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논리적으로 더욱 극단화시키면 예술가란 반동적인 세계관을 가지면 가질수록, 자신의 의사에 反(반)하면 反(반)할수록,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더욱 훌륭한 리얼리스트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거의 무슨 농담과 같은 억설이므로 더 얘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따위 상식을 벗어난 억설들이 우리문단에서 공공연히 발음되고 있다는 것은 실로 개탄할 만한 현상이다. 예컨대 자유가 없을수록 문학의 創意性(창의성)이 더욱 꽃필 수 있다느니, 작가란 이웃 사람의 굶주림이나 정치의 폭력에 오만스럽게 무관심할 필요가 있다느니 하는 등속의 해피한 言說(언설)들이 그것이다.)
그러면 발자크에 있어서 정치적 반등성과 예술적 진보성 사이의 모순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할까? 그가 보수적ㆍ반동적 세계관 때문에 위대한 리얼리스트가 된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세계관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리얼리스트가 된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구태여 보수적인 세계관을 가질 필요는 없다. 하더라도 또한 마찬가지로 구태여 진보적인 세계관을 가질 필요도 없다는 말인가? 여기서 우리는 이른바 세계관 (다른 말로 意識(의식) 또는 상상력)이란 것이 어떤 고정불변의 實體(실체)가 아님을 상기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작가의 세계관은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즉 그의 사회적 실천 속에서 부단히 변화하면서 발전해 나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발자크에 있어서의 세계관과 예술적 결과 사이의 모순은 세계관과 예술 사이의 「직접적」모순이 아니다. 모순의 참된 所在(소재)는 발자크가 처해 있던 당대의 사회적 현실 그것이며, 발자크 문학의 모순은 이러한 현실 모순의 예술적 반영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발자크의 소설에 관하여 그 개인의 주관적 편견과 정치적 반동성에 대한 리얼리즘의 「승리」를 말할 수 가 있는 것이다.
④ 리얼리즘에 대한 비난 중에는 그것이 작가의 자유로운 상상력을 구속한다는 것이다. 현대작가는 外的(외적) 사실의 그럴듯한 再現(재현)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상상력의 자유로운 飛翔(비상)에 의해서 인간의 內面(내면), 꿈, 無意識(무의식), 기타 모든 外的(외적) 內的(내적) 현상을 그 순간성과 우연성 속에서 포착하는 것을 목표를 삼는데, 리얼리즘은 여기에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1958년 루카치의 <誤解(오해)된 리얼리즘>(Wider den mißverstandenen Realismus)이 발표되었을 때, 이에 대한 시인 홀투센(Hans Egon Holthusen)의 反論(반론)이 바로 그런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때의 상상력이란 대관절 무엇인가? 적어도 우리가 이해하는 한에서 상상력은 예술가가 현실을 관찰하고 분석하여 그것을 形象的(형상적)으로 재구성하는 감성적 능력을 가리킨다. 그것은 창작의 과정에서 예술가가 고유하게 「사용」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예술가만이 독점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상력은 결코 現實超越的(현실초월적)인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現實規定的(현실규정적)인 것이며 현실과의 상호관계 속에서 형성되어 가는 것이다. 이런 뜻에서 「상상력은 시대와의 계속적인 긴장관계를 통해 그 시대에 알맞은 구조를 획득한다. 그 구조는 無(무)이다. 그러나 그 無(무)는 현실을 조명하면서 그 무엇이 되어 간다.」(김현ㆍ<韓國小說(한국소설)의 可能性(가능성)>)는 말은 상상력을 시대적 현실과의 긴장관계 속에서 파악하려고 한 점에서 옳다. 그러나 시대적 현실에 의해 규정되는 상상력의 구조가 단순히 無(무)라고 보는 것은 바로 그 상상력이나 시대적 현실이 경험과 문화의 오랜 蓄積(축적)이라는 사실을 도외시하는 것이며, 마치 작가의 상상력이 幼兒的(유아적) 白紙狀能(백지장능)에서 현실을 조명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논리적 誤謬(오류)를 가정하는 것이다. 참된 리얼리즘은 이처럼 작가의 세계관이 현실 속에서, 즉 그의 모든 사회적 실천 속에서 부단히 변화되는 것을 인정하며, 작가의 상상력이 객관적 현실과의 긴장 속에서 旣成化(기성화)된 상투형들을 부단히 파괴할 것을 요청한다. 「도식적 리얼리즘」이란 말을 쓴 사람이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리얼리즘이 이처럼 본질적으로 反圖式的(반도식적)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잘못된 先入見(선입견)의 소산이다. 그러나 리얼리즘은 작가의 상상력이 단순한 관념의 유희에 빠지거나, 현실과 동떨어진 환상 속으로 비약하는 것, 또는 객관적 현실을 개인적ㆍ주관적인 自己滿足(자기만족)과 自己欺滿(자기기만)을 위해 이용하는 것을 단호히 배격한다.
⑤ 리얼리즘이라고 하면 곧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을 연상한다든지 또는 덮어놓고 리얼리즘과 혁명을 결부시키려는 사람들이 있다. 리얼리즘을 긍정하는 입장이든 반대하는 입장이든 이것은 온당한 일이 아니다. 리얼리즘이란 말 앞에 여러 가지 에피세트가 붙여질 수 있다는 것은 앞서 지적한 바 있거니와, 그러면 우리의 문학적 현실에서 소위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무엇보다도 우리는 그것을 편견이나 선입관없이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을 단순히 圖式的(도식적)ㆍ敎條的(교조적) 문학이론으로 보는 것은 대단히 순진하고 피상적이다. 1930년대 초기에 그것이 소련의 공식적인 슬로간으로 채택되어 모든 문예창작의 분야에 기본테제로 제시된 것은 다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그 나름으로 혁명 초기의 공식주의를 청산하는 과정에서 태어났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의 초기 이론적 대변자들은 라프(RAPF)派(파)의 이른바 學校主義(학교주의)(작가들의 세계관을 프롤레타리아적, 혁명적인 것으로 개조하기 위해서는 학교에서 가르치듯이 유물론적 변증법으로 작가들을 재교육해야 한다는 주장)와 그 圖式性(도식성)을 맹렬히 비판하고 예술의 최소한의 고유성을 인정했던 것이다. 어쨌든 이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이란 사회주의적 세계관과 리얼리즘적 방법론의 변증법적 통일을 추구하는,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해서 투쟁하는 단계의 리얼리즘이라고 보통 이해되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와는 사정이 다르고 잘 알지도 못하는 남의 나라 이야기이며, 그것을 가지고 우리가 이렇다 저렇다 논란을 벌이는 것은 심심해서 못견디는 사람들에게나 맡겨두면 그만일 것이다. 다만 필자는 여기서 마르크시즘을 신봉한다고 자처하는 일급 문예이론가조차도 공식적 슬로간으로서의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에 대해서 그것이 이미 오늘의 사회현실을 창조적으로 재현하는 데 무력한 이론이 되었다고 비판했던 것을 상기시키고 싶다. (Ernst Fischer, <오늘의 藝術的(예술적) 狀況(장황)> 참조)
⑥ 이상에서 전개된 필자의 이야기는 문학과 예술의 모든 분야를 논의의 토대로 가정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하게 남는 문제는 우리나라의 문학과 예술의 역사에서 리얼리즘이 어떻게 나타났는가, 어떻게 성숙해 왔는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한 두 마디로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것이 무리한 노릇이지만 단적으로 말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필자가 보기에 18세기와 19세기의 전반기에 문학ㆍ예술에 일어난 모든 변화는 리얼리즘의 방향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20세기의 20년대와 30년대에 있어 이룩된 문학적 상과를 우리는 리얼리즘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즉, 金東仁(김동인)ㆍ廉想涉(염상섭)ㆍ玄鎭健(현진건)ㆍ羅彬(나빈)ㆍ蔡萬植(채만식)ㆍ李箕永(이기영)ㆍ金裕貞(김유정)ㆍ金東里(김동리)등의 소설(물론 그렇지 않은 많은 작품을 동시에 쓰기도 했지만)을 그렇게 볼 수 있다. 이때 가령 廉想涉(염상섭)의 문학을 「리얼리즘 문학」으로 보느냐 「리얼리즘적 요소를 지닌 자연주의 단계의 문학」으로 보느냐 하는 것은 거의 무의미한 문제제기이다. 그것은 낭만주의 다음에 사실주의, 사실주의 다음에 자연주의......하는 식의 思潮史的(사조사적) 관점에서 논의될 성질의 것인데, 주지하는 바와 같이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스땅달이 「리얼리즘 작가」이냐 혹은 「낭만주의적 요소를 지닌 리얼리즘 작가」이냐를 논의하는 것보다 훨씬 무의미하다. 중요한 것은 廉想涉(염상섭)의 구체적인 작품을 앞에 놓고 리얼리즘이 달성된 측면과 廉想涉的(염상섭적) 리얼리즘의 한계로 지적될 측면을 분석ㆍ비판하는 일이다.
⑦ 마지막으로 필자는 오늘의 한국 문학이 나아갈 올바른 길은 리얼리즘이라고 생각한다. 이 말은 리얼리즘 이와의 모든 다른 방법론을 버려야 되겠다는 것과는 매우 다르다. 왜냐하면 리얼리즘은 작가의 건강한 창조적 능력이 사회적 현실과의 투쟁을 통해 철저히 개발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것이며, 예술을 창작하는 과정에서의 예술가의 방법론이라고 하는 것은 그 예술가의 恣意(자의)에 따라 마음대로 버리거나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全(전)예술의 내용에 의해 불가피하게 제약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낙후한 농촌사람들이나 따분한 가난뱅이들만 소재로 삼아서야 어찌 발랄한 문학이 나올 수 있겠느냐고 우려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작가는 자기가 잘 아는 소개, 즉 자기의 경험을 토대로 작품을 쓴다. 그러나 리얼리즘의 승리는 작가의 주관적 偏見(편견)에 대한 승리일 뿐만 아니라 그의 素材(소재)에 대한 승리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도시의 소시민적 생활순환을 작가가 소재로 삼을 수 있는 자유는 (그 밖의 다른 모든 종류의 자유와 더불어) 철저히 보호되어야 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렇게 선택된 소재는 작가에게 小知識人的(소지식인적) 자기만족의 근거로 되는 것이 아니라 탁월하게 비판적인 작가의식을 통해 극복되어져야 하는 것이며, 이와 마찬가지로 농촌과 농민을 소재로 택할 경우에도 그것이 작가에게 다만 도시와 출세에서의 패배를 보상하는 심리적 排水路(배수로)의 기능을 할 것이 아니라 全(전)현실의 구조적 불합리와 모순을 집중적으로 드러내는 기본장소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작가가 어떠한 소재를 택하든, 그리고 어떤 주관적 편견을 가지든 그를 위대한 리얼리스트로 만드는 길이다. 60년대 이후의 우리 문학에 관해서 말한다면 그것은 河瑾燦(하근찬)ㆍ吳有權(오유권)ㆍ李浩哲(이호철)ㆍ朴敬洙(박경수)ㆍ徐基源(서기원)ㆍ南廷賢(남정현)ㆍ崔仁勳(최인훈)ㆍ徐廷仁(서정인)ㆍ金承鈺(김승옥)들에게서 부분적인 성과를 거둔 바 있으며 특히 金廷漢(김정한)에게서 차원 높은 집약을 달성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우리가 견딜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체제의 불합리 바로 그속에 안주하여 문학을 다른 모든 삶의 文脈(문맥)으로부터 절단시킨 채 무슨 대단치도 않은 왜소한 관념의 유희, 着想(착상)의 기교를 희통하고 그것에 스스로 만족하며 서로 만족시켜 주는 사람들의 비문학적 行態(행태)일 뿐이다.
(『문학사상』, 197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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