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9. 마침내 출가하는 태자
부처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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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문석굴 봉선사동> |
사진설명: 평성(현 대동)에서 낙양으로 천도한 북위는 선무제 즉위와 더불어 강력한 불교후원정책을 실시했다. 용문석굴도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조영됐다. 사진은 당나라때 조성된, 용문석굴의 중심인 봉선사동. 가운데 노사나불의 얼굴은 측천무후를 모델로 조각한 것이라 한다. |
“해동에서 당나라로 유학 간 입당구법승과 혜초스님, 신라 선종의 원류에 관한 사적을 정리하다보니 이야기가 길어졌다. 고도 장안(서안)과 낙양엔 우리나라 불교와 관련된 일화가 그만큼 많다는 뜻이리라. 당나라 시절 중국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고, 심지어 천축(인도)에까지 가 불교를 연구한 뒤 귀국한 유학승들 덕분에 오늘날의 한국불교가 존재하는 것이기에, 그분들을 추모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낙양 시내에 있는 신우의(新友誼)호텔 609호에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2002년 10월8일 화요일 새벽 시간을 보냈다. 오늘은 중국을 대표하는 석굴 중 한 곳인 용문(龍門)석굴, 중국 최초의 사찰 백마사 등을 둘러보는 날. 가슴이 설랬다. 사진에서만 보던 용문석굴과 백마사이기 때문이다.
상념을 접고, 조반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차를 탔다. 낙수(洛水)를 - 낙양은 낙수 북쪽에 있다고 낙양(洛陽)이라 한다. 풍수지리학적으로 ‘강(낙수) 북쪽, 산(북망산) 남쪽’(水之北 山之南)은 ‘양(陽)’에 해당된다 - 건너 이수(伊水)가에 있는 용문석굴로 달려갔다. 낙수를 건너며 사마천의 〈사기〉에서 읽었던 삼황오제 시절의 역사를 생각했다. 그러다 낙양을 가장 번성하게 만들었던, 선비족이 세운 왕조 ‘북위(北魏. 386~543)’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일단 생각의 기점을 서기 316년으로 되돌렸다. 〈삼국지〉에 나오는 사마의 중달(仲達)의 손자인 사마염이 세운 서진(西晉. 265~316)이 316년 망하고, 회수 이북 화북지방은 한족 이외 다섯 민족(갈.강.선비.흉노.저)이 패권을 다투는, 소위 5호16국 시대가 시작됐다. 다섯 민족의 쟁투는 결국 439년 북위 태무제에 의한 화북지방의 통일(이후 남북조시대)로 귀결되는데, 북위는 선비족 탁발규가 386년 자립하여 세운 왕조. 북위의 정치와 군사는 건국 초부터 선비족에 의해 주도됐으나, 평성(현 대동)에서 - 운강(雲岡)석굴을 조명할 때 ‘북위 불교’와 ‘무제 법난’(446~454)을 조명하고자 한다 - 낙양으로 천도한 493년(효문제 시절) 이후엔 강력한 ‘한화(漢化)정책’이 실시됐다. 정치적으론 종래 유목민을 농경화해 부족장 세력을 약화시키고, 경제적으론 균전제(均田制)를 통해 모든 토지를 국유화한 뒤, 농민에게 토지를 지급하고 조세를 징수해 통치기반을 다지고자 했다.
천도에 따라 평성에 있던 불교의 중심도 자연스레 낙양으로 옮겨졌다. 최초의 사찰 백마사가 낙양에 있는데서 알 수 있듯, 불교는 낙양과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다. 천도 후 효문제는 낙양에 ‘하나의 비구 사원과 비구니 사원만 건립’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옛 수도 평성에 남아있는 운강석굴에 대한 민중들의 향수가 깊어가는 등 대중들의 사원건립 요구가 점증했다. 결국 계획은 변경됐지만 효문제는 기본적으로 유교적 틀에 의해 나라를 다스리고 싶어 했다. 뒤 이어 제위에 오른 선무제는 달랐다. 불교를 선호했던 선무제는 〈유마경〉을 특히 좋아했는데, 선무제 재위 시절 조성된 용문석굴에 유마상이 많이 남아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499년 선무제 등극 후 많은 사찰 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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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북위시대 낙양불교를 대표하는 영녕사의 9층 목탑터. |
이것만이 아니다. 선무제 재위 시절 낙양엔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원들이 건립됐다. 영명사.경명사.요광사 등이 그들. 3,000개의 방을 가진 경명사는 소나무와 대나무 숲, 언덕과 연못들 사이에 궁전처럼 건립됐다. “경명사 밖에는 사계절이 있으나, 안에는 여름과 겨울이 없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반면 영명사는 낙양에 온 외국 스님들이 머무는 장소로 사용됐는데, 한 때 100여 국에서 온 3,000명이 넘는 스님들이 머물렀다고 한다. 동시대를 살았던 모든 나라의 불교도들에게 널리 알려진 도시가 바로 낙양이었다. 요광사는 황실과 귀족 가문 여성들이 출가해 머물던 비구니 전용 사찰이었다.
물론 북위 불교가 정점에 달한 시기는 영태후(靈太后) 호(胡)씨가 수렴청정 하던 효명제(재위 515~528) 때였다. 515년 선무제가 33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6살의 효명제가 등극했고, 정치는 자연스레 선무제의 황비인 영태후를 중심으로 전개됐다. 당나라의 측천무후에 비길 만한 여인이었다. 이 영태후가 이룩한 가장 두드러진 불교활동은 낙양에 영녕사(永寧寺)를 건립(516년)한 것이었다. 영태후가 한창 활동하던 시기의 낙양불교는 양현지가 남긴 〈낙양가람기〉 - 북위가 ‘평성’에서 ‘낙양’으로 수도를 옮긴 493년부터 도읍을 다시 ‘업’으로 이전한 534년까지의 40여 년 동안을 다루고 있다 - 에 잘 정리돼 있는데, 〈낙양가람기〉에 의하면 북위 불교가 한창 빛날 무렵 1,367개의 사찰이 낙양에 건립됐다. 당시 낙양의 인구는 50~60만, 약10만9,000호의 집이 있었다.
수많은 사찰 중에서도 영녕사는 단연 돋보이는 사찰이었다. 영녕사 9층탑은 높이가 90장에 이를 정도였다. 〈낙양가람기〉엔 이렇게 적혀있다. “탑 위에는 십 장 정도의 금찰(金刹)이 있어 백리나 떨어진 곳에서도 보였다.” 그 때 마침 중국에 들어온 보리달마스님도 이 탑을 보았다. “당시 서역에서 온 보리달마스님이 있었는데, 그는 파사국 사람이었다. 멀리 변방 지역에서 태어나 우리나라를 유람하다가 탑의 금반에 해가 비쳐 광채가 구름 위에까지 퍼지는 것을 보고, 바람에 보탁(寶鐸)이 흔들려 하늘 밖까지 울리는 것을 들었다. 보리달마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150살이 되도록 여러 나라를 두루 다니며 가보지 않는 곳이 없다. 그 중에서도 이 사찰은 매우 정치하고 아름다우니 염부(閻浮. 인도)에도 없을 것이며, 부처님 세계에도 없을 것이다.’ 입으로 연신 나무(南無)를 읊조리고 합장했다.”
성(盛)이 다하면 쇠락한다고 했던가. 영희 3년(534) 2월. 영녕사에 불이 났다. 〈낙양가람기〉엔 그 때 상황도 나온다. “효무제가 능운대에 올라 불이 난 곳을 바라보며 남양왕 보거와 녹상서사 장손치에게 우림군 1,000명을 이끌고 불을 끄게 하고는 매우 슬피 울었다. 처음 동이 틀 무렵 탑의 8층에서 불이 크게 났지만, 그 때는 번개가 치고 비가 내려 매우 어두웠고, 싸라기눈도 섞여 내렸다. 슬퍼하는 소리가 낙양에 진동했다. 불은 3월이 되어도 꺼지지 않았다. 땅 속으로 들어가 기둥을 다 태우고 한 해가 지나도록 연기가 났다.” 업으로 천도한 지 몇 년 뒤인 547년 양현지가 다시 낙양을 방문하니 “폐허와 잿더미들, 여우굴과 소들이 풀을 뜯는 목초지만 남아있었다.” 낙양의 역사가 후세에 제대로 전해지지 않을까 두려워 양현지는 〈낙양가람기〉를 남겼고, 이 책은 지금 북위 시대 낙양의 역사를 알려주는 소중한 책으로 남아있다. 결국 남아 전하는 것은 ‘기록’이리라.
불교에 대한 신심이 강했던 북위 사람들은 영녕사 이외에도 석굴을 조성, 부처님에 대한 ‘영원한 헌신’을 상징적으로 남겼다. 낙양의 용문석굴과 대동의 운강석굴은 당시 사람들의 창조적 정신의 장엄한 기념비로, 오늘날 우리 앞에 서 있는데, 용문.운강석굴의 장대한 파노라마를 보노라면 절로 감동되고 만다. 이어지는 생각에 잡혀있는 동안 차는 어느 새 용문석굴에 도착했다. “내려라”는 안내인 방호(方虎. 한족으로는 드물게 한국어를 전공함)씨의 소리에 깨, 입장권을 구입해 들어갔다. 마침 이수(伊水) 위엔 물안개가 자욱했다. 아침 햇살이 물안개 위로 스며들듯 비치는데, 선경(仙境)에 온 것 같았다. 고대하던 용문석굴에 드디어 도착한 것이다.
영태후 516년 영녕사 건축, 보리달마스님도 감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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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용문석굴에 있는 다양한 표정의 불상(위.아래 사진). |
용문석굴! 낙양에서 25리 정도 떨어진 이수 가에 위치한 석굴은 선무제(499~515) 즉위와 더불어 본격적으로 조영되기 시작했다. 황제와 관리, 스님과 신도들 모두가 단단한 바위를 쪼아 부처님 세계를 만들었다. 북위 멸망과 더불어 석굴조성 작업은 일시 중단됐으나, 수.당의 성립과 함께 다시 방대한 규모로 재개됐다. 송나라 때까지 불사가 이어졌지만, 당 현종(713~755)대 대체적으로 끝맺은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북위.수.당.송나라까지의 중국불교를 보여주는 기념비가 바로 용문석굴”이라 할 수 있다.
용문석굴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수의 불상이 있을까. 불상 수를 조사하려는 많은 시도가 있었는데, 1915~1916년 조사에서 불상의 수가 ‘97,306’위로 알려졌으나, 후일 다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작은 부처님을 포함해 모두 ‘142,289’위가 있다고 한다. 불상 수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불상을 조성하게 된 동기를 적은’ 조상기(彫像記)인데, 495년에 만들어진 조상기가 용문석굴에 있는 조상기 중 가장 빠른 것이다. 일본학자 쓰카모토 젠류의 조사에 의하면 ‘500~530년’, ‘650~710년’ 사이에 조상(彫像)이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도표참조〉.
앞의 시기는 낙양으로 천도한 북위가 번영을 누리던 시기였고, 뒤의 기간은 당나라 측천무후가 불교에 온갖 지원을 아끼지 않던 시기였다. 650~710년 시기는, 유명한 천축구법승 현장스님과 의정스님이 방대한 역경사업을 진행하던 때였으며, 계율의 도선스님과 화엄의 법장스님 그리고 정토의 선도스님이 각각 자신들의 교의를 펼치던 시절이었다. 중국불교가 사상적 교리적으로 번성을 누리던 때였다. 이 시기에 불상도 많이 조성됐다.
물론 조상기는 불상에 대한 자료만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작업의 후원자가 누구였는지’도 알려준다. 조상기에 따르면 용문석굴의 후원자는 왕족.관리.사대부(지배계급), 스님 등 종교단체, 서민대중으로 대별(大別)된다. 지배계급이 남긴 명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북위의 장군 양대안(楊大眼)이 남긴 것. 남조 양(梁)나라를 정벌하고 돌아오던 그는 용문석굴 곁을 지나다 “밤새워 선왕들과 위대한 성인들의 빛나고 아름다운 자취를 생각했을 때, 눈물이 마구 흘러내렸다”며 “이러한 감동 끝에 효문제를 위한 상을 세우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다음 호에 계속).
중국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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