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입력 : 2016.06.14 03:00 | 수정 : 2016.06.14 09:14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조선 궁중화·민화 걸작']
18세기 초창기 책가도 등 58점… 박물관·사립미술관 소장품 내놔 해외서 '책거리' 인기 많아 9월부터 1년간 美 순회전
표범 가죽이 휘장처럼 길게 드리워진 8폭 병풍. 가운데 장막을 살포시 들추니 선비의 방이 보인다. 펼쳐진 책과 안경이 서안(書案) 위에 놓였고 주변엔 촛대, 향로, 공작 깃털 등 화려한 기물이 널려 있다. 주인은 어디 갔을까. 청동 골동품과 장신구, 우아한 다기(茶器)를 보아 꽤 고상한 취향을 가진 선비인 것 같다. 삼성미술관 리움이 소장한 19세기 책거리 병풍 '호피장막도(虎皮帳幕圖)'다.
한 사람 작품이 아니다. 표범 가죽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호피도' 위에 누군가 일부를 뜯어내고 선비의 서재 풍경을 그려 넣었다. 독서에 열중해 있던 선비가 잠시 자리를 비운 순간을 사진가의 '스냅샷'처럼 절묘하게 포착했다. 장막 뒤엔 뭐가 더 있을까 상상하게 만든다. 이동국 예술의전당 서예부장은 "골동품 등 사치스러운 물건을 통해 신분제가 무너지는 혼돈 속에서 양반의 권위를 세우고 싶은 심정이 반영된 그림"이라고 했다.
책거리 8폭 병풍‘호피장막도’. 128×355㎝.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11일 개막한 '조선 궁중화·민화 걸작-문자도(文字圖)·책거리(冊巨里)' 전시장에 명품이 총출동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삼성미술관 리움, 경기도박물관, 제주대박물관, 서울미술관 등 국공립박물관과 사립미술관, 화랑 등 20여곳이 소장한 책거리와 문자도 58점이 나왔다. 서예박물관과 현대화랑의 공동 기획이다.
전시는 특히 책거리에 주목한다. 책거리는 책을 비롯해 도자기·문방구 등 여러 기물을 그린 그림. 책거리 중 책가(冊架·서가)로만 구성된 그림이 책가도(冊架圖)다. 원조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개인 서재인 스투디올로(studiolo). 정병모 경주대 교수는 "이탈리아→영국·프랑스→청나라를 거쳐 조선에 왔지만 한국적 그림으로 발전했다. 서양식 원근법, 명암법 등을 도입해 입체적이고 사실적으로 그린, 가장 한국적이면서 글로벌한 장르"라고 했다.
이미지 크게보기책거리 8폭 병풍. 서가에 책과 함께 중국산 고급 도자기, 촛대, 향로 등 귀한 기물을 그렸다. 18세기 후반~19세기 전반, 종이에 채색. 112×381㎝, 개인 소장. /예술의전당 제공
책거리 열풍은 조선 제22대 왕 정조(正祖·1752~1800) 때 시작됐다. 그는 창덕궁 어좌 뒤에 있던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를 치우고 책거리 병풍을 세우라고 명한다. 왕이 좋아한 책거리는 시중에 대유행했고 고관대작이 앞다퉈 병풍을 집에 들였다. 19세기 후반에는 민화의 단골 소재가 됐다. 상류층은 책거리에 중국 도자기 등을 진열해 골동 취미를 드러냈고, 서민들은 책거리 민화를 통해 출세와 행복을 빌었다.
큰 벽면마다 그림 딱 한 점씩만 전시했다. 걸작이 뿜어내는 기운이 그만큼 강렬하다. 18세기 정조 때 그려진 초창기 책가도를 비롯해 상당수 작품이 처음 공개됐다. 개인이 갖고 있던 비공개 명품들도 박명자 회장의 설득 끝에 나왔다. 입구에 놓인 초창기 책가도에는 책뿐 아니라 자명종, 중국 도자기 등 외국산 귀한 물건이 가득 진열돼 있다. 박물관은 "오랫동안 세계와 단절됐던 조선 지식인들이 중국과 서양 물품 을 통해 세계를 들여다보려 했던 것"이라고 했다.
8월 28일까지 서울 전시가 끝나면 9월부터 1년간 미국 순회전으로 이어진다. 뉴욕 스토니브룩대학교 찰스왕 센터, 캔자스대 스펜서박물관, 클리블랜드 미술관 등을 돌 예정이다. 정병모 교수는 "해외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르가 바로 책거리"라며 "미국 박물관 측에서 더 적극적이었다"고 했다. (02)580-1300
-'한국의 채색화' 낸 정병모 교수 해외 곳곳 흩어진 873점 총망라… 특히 18~19세기 책거리에 주목
정조, 왕권 강화하기 위해 어좌 뒤 책거리 병풍 세워놓기도
조선 제22대왕 정조(正祖·1752~1800)는 지독한 책벌레였다. 1791년 그는 창덕궁 어좌 뒤에 있던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를 치우고 책거리 병풍을 세우라고 명한다. "서재에 들어가 책을 만지기만 해도 기쁜 마음이 솟는다. 경들은 그렇지 아니한가?"
왕이 좋아한 책거리는 곧 시중에 대유행했다. 고관대작이 앞다퉈 병풍을 집에 들였고, 19세기 후반에는 민화의 단골 소재가 됐다. 책거리는 왕에서부터 서민까지 만인의 사랑을 받았다. "책을 주인공으로 한 그림이 집중적으로 유행한 건 세계 유례가 없습니다. 그만큼 우리가 책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는 거죠. 상류층은 책거리에 중국 도자기 등을 진열해 골동 취미를 드러냈고, 서민들은 책거리 민화를 통해 출세와 행복을 염원했습니다."
해외 곳곳에 흩어진 우리 궁중회화와 민화를 찾아내 최상급 명품 873점의 도판을 싣고 연구 성과를 집대성한 책이 나왔다. 정병모(56·사진) 경주대 교수가 4일 펴낸 '한국의 채색화-궁중회화와 민화의 세계'(전 3권·다할미디어). 국립고궁박물관, 삼성미술관 리움 등 국내 30여개 소장처를 비롯해 프랑스 기메동양박물관, 독일 함부르크민족학박물관, 일본 민예관, 미국 필라델피아박물관 등 해외 20여개 소장처의 작품을 총망라했다. 윤범모 가천대 교수, 이원복 경기도박물관장, 피에르 캄봉 기메동양박물관 수석 큐레이터 등이 편집위원을 맡고, 도판 해설에만 국내외 학자 19명이 참여했다.
정 교수는 "우리 채색화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기 위해 우리 손으로 만든 최고의 명품 도록이 필요했다"고 기획 의도를 밝혔다. 1975년 일본 고단샤에서 출간한 '이조 민화(李朝の民畵)' 이후 이렇다 할 책이 없었다는 것. 책의 방점도 '한국 채색화의 재발견'에 찍혔다. 고급스럽고 화려한 궁중 장식용 병풍 그림(궁중 회화)과 서민화가가 그린 자유롭고 해학적인 그림(민화)을 '채색화'라는 공통분모로 엮었다.
그는 "책에 실린 작품 대부분은 기존 '한국 회화사'에 소개되지 않은 그림"이라며 "원래 우리나라 회화는 고구려 고분벽화, 고려불화 등 채색화 전통이 강했으나 조선시대에 유교 때문에 검박한 수묵화·문인화가 주류를 이루면서 화려한 채색화를 폄훼하기 시작한 것"이라고 했다.
19세기 화가 강달수(姜達秀)가 그린 책거리 10폭 병풍. 청색 바탕의 책거리 중 명품으로 손꼽힌다. 비단에 채색, 143×384㎝. 뉴욕 컬렉터가 소장했던 병풍을 최근 한국으로 들여왔다. /정병모 교수 제공
정 교수는 특히 책거리에 주목했다. 책을 비롯해 도자기·문방구 등 여러 기물을 그린 그림이다. 책거리 중 책가(冊架·서가)로만 구성된 그림이 책가도(冊架圖)다. 원조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개인 서재인 스투디올로(studiolo). 그는 "이탈리아에서 청나라를 거쳐 조선에 왔지만 한국적 그림으로 발전했다"며 "가장 한국적이면서 글로벌한 장르"라고 했다.
최근 국내외에서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는 전통회화도 책거리다. 2008년에는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박물관에서 '미와 학문(Beauty and Learning)'이란 제목으로 책거리 특별전이 열렸다. "정조가 책거리를 어좌 뒤에 설치한 건 학문으로 신하들을 다스리겠다는 선전포고였습니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고 자신도 암살 위협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고문(古文)의 중요성을 강조해 왕권 강화의 방편으로 활용한 거죠. 궁중 책거리가 음영법 등 서양화법으로 그려졌다면 민화의 책거리는 색동저고리처럼 알록달록하죠. 우리가 갖고 있는 색채 본능이 폭발한 겁니다."
산수화·인물화·화조화·문자도 등에 얽힌 스토리도 풍성하다. 책장마다 생생한 디테일의 작품 사진이 실물처럼 펼쳐진다. 제작비만 3억8000만원. 그는 "민화학자와 소장자, 작가들이 갹출해 열정으로 만들어냈다. 애니메이션, 게임 등 콘텐츠로 무궁무진하게 활용될 수 있는 보고(寶庫)"라고 했다.
첫댓글책거리 그림은 시장에 나오는 물건이고, 구입 가능한 것입니다. 가격은 민화 중에서 가장 비싸지만 요즘 화가들이 그린 작품에 비하면 결코 비싸지 않습니다. 가끔 한 쪽만 분리해서 나오는 것도 있는데, 한 쪽당 300~500만원쯤이면 그런대로 괜찮은 것을 구입할 수 있습니다. 요즘 화가들이 그린 그림으로, 이 정도의 화격을 갖춘 거라면 적어도 천만원은 넘게 할 거예요.
첫댓글 책거리 그림은 시장에 나오는 물건이고, 구입 가능한 것입니다. 가격은 민화 중에서 가장 비싸지만 요즘 화가들이 그린 작품에 비하면 결코 비싸지 않습니다. 가끔 한 쪽만 분리해서 나오는 것도 있는데, 한 쪽당 300~500만원쯤이면 그런대로 괜찮은 것을 구입할 수 있습니다. 요즘 화가들이 그린 그림으로, 이 정도의 화격을 갖춘 거라면 적어도 천만원은 넘게 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