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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여호와 앞에 완전하라 / 신18:1-14
우리는 아프리카 밀림 속에서 과학과 문명 문화와 전혀 동떨어진 채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고 '미개인'이라고 부릅니다.
신발도 신지 않고 옷도 입지 않고 자동차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비행기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큰 나무 잎으로 대강 엮어서 만든 천막 같은 집에서 발전도 없이 다만 하루 먹고살기 위해서 짐승이나 사냥하며 살아가는 그들을 보고 소위 문명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야만인, 미개인이라고 하면서 무시하고 비웃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에덴동산에서의 아담과 하와는 극도의 원시인, 또는 미개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담과 오늘날의 인간을 비교해 볼 때 다른 점이 과연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미개인의 모습과 문명인의 모습에서는 어떤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까? 차이점이라고 해봐야 신발을 신고 옷을 입고 다니며 자동차를 운전할 줄 알고 지하철을 이용할 줄 아는 등의 과학의 차이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과학의 혜택을 입고 있을 뿐이지 과학을 만들어낸 사람들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자동차를 운전하는 법을 배워서 이용하는 것이지, 실제로 자동차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다는 것입니다.
자동차가 어떤 원리로 어떤 부품들이 서로 연결되어서 움직이는지 그 원리도 모르면서 다만 자동차가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운전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문명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자동차를 운전할 줄 모르면 미개인이 되는 것입니까? 인간을 문명인과 미개인으로 구분할 수는 없습니다. 도대체 어느 정도의 과학을 기준으로 해서 문명인과 미개인으로 구분해야 하는 것입니까?
과학이 발달한 미국의 입장에서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한국을 볼 때 한국은 미개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문명과 야만이라는 것은 인간의 자기 우월에서 등장한 낱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은 문명과 야만을 과학과 문화를 가지고 구분하려고 하지만, 사실 인간을 놓고 그 행동을 비교해 본다면 문명과 야만의 구분이 사라져 버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문제가 되어온 일이지만 한국 사람이 보신탕을 즐기는 것 때문에 유럽 쪽의 나라들로부터 야만인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를 한 식구처럼 여기는 그들의 문화적 시각에서 나온 판단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유럽 쪽에서도 얼마든지 우리가 혐오하는 것들을 식용으로 삼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회적인 환경과 문화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자기들의 문화가 기준이 되어서 야만이라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과연 소위 문명인과 야만인이 차이가 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에게 있어서 과연 본질적인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까?
옛날 에덴동산에서 죄를 짓고 쫓겨난 그 인간과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문화를 배우고 도덕과 윤리를 배우고 인격을 배워왔던 오늘날의 인간과 차이가 있는 것입니까? 말씀드린 대로 과학과 문화를 가지고 그 차이를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얼마든지 배우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학과 문화란 시대적인 산물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발전하고 진화되어 갑니다. 따라서 오늘의 문명이 내일에는 야만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제가 컴퓨터를 처음 구입할 때는 소위 386이라고 불리는 기종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386 컴퓨터를 이용하는 사람은 문명의 첨단을 달리고 있는 사람으로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몇 년이 지나지 않았는데도 386 컴퓨터를 쓰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지금 386은 아예 사용할 수 없는 기종으로 쓰레기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386만이 아니라 486, 586(펜티엄)도 퇴보하고 지금은 아이세븐이나 코드코어를 사용합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발달하는 과학은 어제의 문명을 오늘에는 야만으로 전락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과학과 문화를 기준으로 문명과 야만을 구분한다면 결국 영원한 문명도 야만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문명과 야만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진화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볼 때 발견할 수 있는 놀라운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과 같은 과학과 문화가 전혀 없었던 몇 천 년 전의 인간이라 할지라도 우주선을 타고 우주를 날아다니는 오늘의 인간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문명은 쉬지 않고 발전하고 진화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전혀 진화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진화된 것은 문명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전혀 진화되지 않은 채 에덴동산에서의 죄의 모습이 그대로 오늘의 인간들에게서도 그대로 보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한 후로 인간 세계에서는 많은 윤리학자들과 도덕군자들이 등장했습니다. 공자 맹자 장자 등 수많은 학자들이 등장해서 인간으로서의 도리와 윤리를 가르쳤습니다. 지금도 많은 학자들이 윤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전혀 변화하거나 진화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는 성경에 등장하는 최초 인간의 죄의 모습과 오늘 우리들의 죄의 모습에서 전혀 차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죄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까? 과학의 혜택 속에서 문명인으로 산다고 해서 소위 미개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과 죄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인간의 죄는 동일합니다. 모두가 아담 안에서 태어난 육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바로 나 자신의 죄를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레위 사람 제사장과 모든 레위 지파 사람에 대한 말씀과(1-8), 이방인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9-14). 1절 ‘레위 사람 제사장과 레위의 온 지파는 이스라엘 중에 분깃도 없고 기업도 없을지니 그들은 여호와의 화제물과 그 기업을 먹을 것이라.’ 이스라엘에는 레위인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말은 레위인이란 그 자체가 다른 이스라엘 사람들보다 더 우월한 지위를 갖고 있었다거나 더 많은 특권을 누렸기 때문에 특별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인간적으로 볼 때 다른 사람들에 비해 혜택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다른 이스라엘 백성들은 저마다 자기 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레위인들만은 그들 소유의 땅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하늘만 바라보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에 있는 것을 힘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생명으로 삼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자기들이 일한 것으로 먹고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린 헌물을 먹고 살아갔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기업을 받아 자기 땅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레위 사람들은 땅이 없으니 그저 하늘만 바라보고 살아가야 했습니다.
기업으로 주어진 땅은 사람이 사는 기본 터전입니다. 그런데 이것마저 없을 때 레위인은 미래가 한없이 불안하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오늘날도 현금도 없고, 예금 통장도 바닥이 나고, 물려받을 재산도 없고, 집도 땅도 없는 사람의 미래는 불안하기만 할 것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레위인이었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그들은 오직 하나님을 기업으로 삼고 살아가야 했습니다 곧 하나님만을 그들의 삶의 터전이요 희망으로 삼고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런 레위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는 여러 곳에 흩어져 살았습니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을 기업으로 삼고 살아가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힘과 생명으로 삼고 살아가야 했습니다.
이렇게 레위인들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희생을 보여주도록 뽑혀 나온 자들로서 일종의 실물 교육을 위한 도구였습니다. 오늘날 모든 성도 역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보여주는 도구란 사실을 잊어선 안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레위인들로 하여금 온 이스라엘에 흩어져서 이런 삶을 살게 하신 것은 비단 레위인들만 그렇게 살도록 하시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이스라엘로 하여금 레위인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살도록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스라엘은 레위인들을 보면서 그들의 삶 역시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기업으로 인하여 살고 있음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향한 바른 신앙에서 살아가고 있다면 레위인은 이스라엘의 관심 속에서 먹고사는데 지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신앙이 잘못되어 있다면 자연히 레위인도 그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되고 삶도 어려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레위인은 이스라엘의 신앙이 어떤가를 보여주는 도구로 존재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아가야만 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안에 레위인들을 세워놓으심을 통하여 이스라엘은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살아야 할 것임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에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살게 될 때 그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레위인의 삶을 통해서 비단 레위인 뿐만이 아니라 온 이스라엘이 모두 하나님만 바라보는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가야 할 그들이 탐심으로 우상을 섬긴다는 것은 결국 '자기를 위한 삶'을 살아감을 의미했습니다. 우상이란 결국 무엇을 의미합니까? (출 20: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왕상 14:9) ‘네 이전 사람들보다도 더 악을 행하고 가서 너를 위하여 다른 신을 만들며 우상을 부어 만들어 나를 노엽게 하고 나를 네 등 뒤에 버렸도다.’ (겔 16:17) ‘네가 또 내가 준 금, 은 장식품으로 너를 위하여 남자 우상을 만들어 행음하며’ 우상이란 결국 자기를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상을 섬기는 것, 곧 '하나님 중심'에서 벗어나 '자기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경계하신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이스라엘은 오직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삶을 살아가야 했으며, 자기를 중심으로 한 삶을 멀리 해야만 하는 족속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역시 그러합니다. 교회로 부름을 받은 우리는 '내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야 할 것입니다. 9-12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 그의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점쟁이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가운데에 용납하지 말라. 이런 일을 행하는 모든 자를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느니라.’ 이 말씀을 보면 점쟁이, 길흉을 말하는 자, 요술을 하는 자, 무당, 진언자, 신접자, 박수, 초혼자 등을 용납하지 말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에 이방인들의 더러운 습관을 본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그들을 가까이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까? 사실 오늘날 첨단 과학 시대를 사는 우리들은 이런 식의 우상을 섬기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기독교인들로서 이런 식의 미신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은 과학이 뒤떨어진 아프리카나 미개인 등이나 하는 것이지 과학이 줄기세포를 연구하고 있는 오늘날의 사회에서는 더 이상 관계가 없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끔 아프리카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는 TV 프로그램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렇듯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 사람들을 '미개인'이라고 부릅니다. 그런 '미개인'들이 태양신을 섬기거나 비가 오기를 바라는 제사 의식을 행하는 것 등을 볼 때, 우리는 너무나도 어리석게 보이는 그런 행위에 대하여 코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학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는 우리로서는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도 모른 채 우상을 섬기고 있으므로 그들의 행위가 너무나도 어리석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인간을 '문명인'과 '미개인'으로 구분할 수는 없다. 미개인과 문명인을 과학의 발달을 근거로 판단한다고 할 때 그 기준은 어디까지입니까? 우리는 아프리카나 남미, 동남아 사람들을 미개인이라고 말하며 무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보다 월등히 과학이 앞선 미국이나 유럽 사람들 입장에서 볼 때 우리나라 사람들이 역시 그런 미개인에 불과하지 않겠습니까?
세상은 문명과 야만을 과학과 문화를 가지고 구분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인간을 놓고 그 행동을 비교해 본다면 문명과 야만의 구분이 사라져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과연 본질적인 차이점이란 없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과학과 문화라는 것은 시대적인 산물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발전하고 변화되어 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의 문명이 내일에는 야만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14절의 '용납하지 아니하시느니라'는 말씀을 볼 때 단지 '미개한 이방인들'이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용납하지 말아야 한다는 식으로 편하게 이해해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런 말씀 앞에서 '나는 우상을 섬기지 않는다'라고 생각하며 떳떳한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TV를 보면서 원시적인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은 미개인이며 자신은 문명인이라고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근본으로 들어가 보면 결코 그럴 수만은 없는 일입니다. 10절에는 '그의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가 나옵니다. 우리나라에도 에밀레종을 만들 때 자기 아들을 끓는 쇳물에 던져 넣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심청전에 나오는 것처럼 용왕신을 달래기 위하여는 처녀를 제물로 바치는 내용도 있습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자녀들을 죽이는 엽기적인 행위들이 나타나게 되었습니까?
그 근저에 있는 생각은 신의 환심을 사려고 하는 것입니다. 당시 이방 나라에서는 이런 일이 성행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소위 문명세계에서는 이런 일이란 있을 수 없는 엽기적인 일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소위 문명 세계에 사는 우리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신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자식을 바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식을 대신할 것들을 수없이 만들어 놓았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들은 신을 감동시키기 위한 여러 가지 행동을 합니다. 이런 행위들은 절이나 갯바위 등에 가서 치성을 바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생각들이 교회에도 들어와 억지를 부리면 안 될 일도 하나님이 해결하시거나 허락해 주실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구하기 전에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다 아시는 분이시다. 그렇다면 억지를 부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에 확실히 나타난 것들을 지킬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열심히 예배에 참석하면 복을 받는다거나, 열심히 봉사하면 복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이 아니라 더 적극적인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 생각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이 어련히 다 잘되게 하실 것이 아닌가? 그래서 교회로 모이라고 하셨으니 열심히 모이면 될 것이고, 서로를 섬기라고 하셨으니 섬기도록 해야지!"라고 나와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를 못된 곳으로 몰아넣으시기 위한 것이라면 모르거니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이라면 열심히 말씀에 따라 살아가면 됩니다. 그런 삶 자체가 바로 복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배 참여가 자식 역할을 하고, 봉사가 자식 역할을 대신하여 신의 환심을 사려고 하는 그런 모습에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는다면 자식 역할을 하는 행위들을 통하여 누가 누가 더 많이 얻게 되었는가를 비교하고 자랑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의 행위는 아버지의 자녀로서의 행위가 되어야 하는 것이지, 신의 환심을 사기 위한 행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점쟁이'란 점을 쳐서 인간의 복을 예언해 주는 사람을 말한다. 곧 복을 받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며, 화를 피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하지 말라는 식으로 인간을 화를 복으로 유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오늘날 이렇게 하면 세상적인 복을 받고 저렇게 하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다고 가르치는 모습은 점쟁이의 역할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성도들이라면 점쟁이를 찾아가는 똑같은 마음으로 목사를 찾아와서 묻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길흉을 말하는 자'란 날짜와 시간을 따져 미래의 길흉을 미리 말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소위 이사할 때 손 없는 날을 택하거나 결혼 날짜를 따지는 것 등을 말합니다.
'요술하는 자'는 어떤 특별한 능력을 보여주며 사람들을 미혹하는 사람을 뜻하고, '무당' 역시 신으로부터 특별한 능력을 받아서 그 능력으로 화를 물리치고 복을 불러오는 일을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진언자'란 신으로부터 특별한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서 그 계시를 통해서 인간의 문제를 해결해준다고 하는 사람을 말한다. 흔히 요즘 무슨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서 사람들을 미혹하여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신접자'란 신과 접촉할 수 있는 능력을 받았다는 사람을 말합니다. 귀신을 불러내어서 귀신으로부터 미래의 길흉을 미리 듣고 그것은 말해주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박수'는 남자 무당을 가리키며, '초혼자'란 죽은 귀신의 영을 마음대로 초청할 수 있다고 하는 사람입니다. 죽은 영을 불러내어 그 힘으로 앞으로의 일을 미리 예언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용납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미 앞서 언급했듯이, 오늘날 이런 행위를 하는 사람들을 미개인으로 취급합니다.
그 결과 우리는 그런 과학도 모르고 문명도 가지지 못한 미개인이나 하는 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생각한 나머지 스스로 떳떳한 인간이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자들을 용납하고 있지 않은지를 심도 깊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자들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그들의 역할은 모두 인간의 복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화는 피하고 복은 끌어들이자는 생각에서 이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찾고 불러들인 것이었습니다. 곧 화와 복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손으로 해결해 보겠다는 발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복을 원하는 것은 세상에 대한 탐심 때문입니다. 세상에 모든 기대를 걸고 세상에서 실패하지 않는 인생을 살려고 발버둥치기 때문에 일이 잘 안될 때는 점치는 자를 찾아서 화에서 벗어나 복으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입니다. 골 3:5절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사람들이 세상의 복을 원하는 것은 탐심 때문입니다. 세상에 기대를 걸고 있기 때문에 '성공'이라는 말을 곧 돈과 명예와 권력을 가지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것을 가지고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일부러 돈을 벌지 말고 진급을 하지 않으려고 애써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그러한 것들을 기준으로 신앙의 우열이 평가되거나 서열이 매겨져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교회란 인간의 욕망을 추구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은혜로 사는 성도에게는 세상적인 화복의 구별이 없습니다.
때로 하나님은 사람들이 화라고 생각하는 일들을 통해 가르치시고 깨닫게도 하셔서 당신의 백성을 천국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잘되면 복이고 못되면 저주라는 단순한 개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성도의 할 일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께 붙들린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 인생이 되었다는 것 자체가 바로 복입니다.
이런 복에 참여하고 있는 성도라면 무당이나 점쟁이를 찾거나 신의 환심을 사기 위한 행동들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로지 말씀을 따라 살아갈 뿐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부와 명예와 권력 그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우리는 일부러 수도사들처럼 가난하게 살려고 애쓸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성도들은 자기가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최선을 다해 살아가면 됩니다.
하나님을 등에 업고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복의 효과를 누리려 하지 마십시오. 또 부유하거나 가난한 것이 신앙의 평가 기준으로 삼지도 마십시오. 그와는 반대로 하나님께 업혀 가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벧전 2;11)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히 11: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나그네의 삶을 보여주는 자들이 레위인들이었고, 그들과 함께 사는 이스라엘 역시 그런 정신으로 살아가야만 했습니다.
13절의 '완전하라'는 말씀은 우리가 완전해지라는 요구가 아니라 완전한 곳으로 가라는 의미입니다. 불완전한 인간인 우리는 결코 완전해질 수 없습니다. 그러니 완전한 곳으로 가야 합니다.
그러면 완전한 곳은 어디인가? 이 세상에 그런 곳이란 없습니다. 그곳은 하나님 안에 사는 것입니다. 레위인들의 삶이 '하나님 중심의 삶'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방인들의 사고방식 즉 '자기중심의 삶'에서 벗어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안에서 삽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들입니다. 우리의 신분이 변화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신분에 걸맞은 삶을 살아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완전한 삶입니다.
오늘날의 레위인은 예수님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이 신앙으로 바로 산다면 레위인 되신 예수님께 관심을 가지면서 세상에서 어떻게 살든 예수님의 삶을 따라가려고 애를 쓰게 될 것이고, 신앙으로 바로 살지 못한다면 자연히 예수님께도 관심이 없어질 것이고 예수님의 삶에 대해서도 무감각해지는 것이 당연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추구하는 것은 복이기 때문에 교회는 십자가 없이 복만을 추구하며 하나님을 찾는 무당 집단이 되고 말 것이 자명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교회의 현실이 아니겠습니까? 세상은 헛됩니다. 헛된 세상에서 헛된 것을 붙들기 위해서 인생을 낭비하지 마시고 헛되지 않은 예수님만 생명으로 삼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을 알 때 헛되지 않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