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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지산(花枝山)의 남쪽 기슭에 위치한 마을이다. 앞으로는 넓은 들을 바라볼 수 있는 마을이다. 옛날에는 동천(東川)이 마을 앞으로 흘러서 화동(華洞) 앞에서 북천수(北川水)와 만나 응천강(凝川江)으로 흘러 갔다. 오늘날은 동천(東川)이 멀리 들판 넘어로 옮겨 갔다. 또 마을 앞으로 국도 24호선이 통과하고 있어서 교통도 편리한 곳이다. 이 마을이 언제부터 형성되었는 지는 알 수가 없다. 마을 앞들에 있는 만월동 일대에서 나온 지석묘군과 삼국 시대 고분군이 분포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일찍부터 형성되어 왔던 것 같으나, 문헌기록으로는 확인할 수가 없다. 옛 이름은 와야(瓦野)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에 신기(新基), 연지(蓮池), 왜우, 화동(華洞)을 병합하여 금천리(琴川里)라는 법정리를 이루었는데, 행정리동명은 금천리(琴川里)이다. 자연 부락은 대촌(大村), 만월동, 신기, 화동, 연지동 등 5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동쪽으로는 茶竹里, 서쪽으로는 남기리(南沂里), 북쪽으로는 엄광리(嚴光里)와 연접해 있고, 남쪽으로는 단장천을 사이에 두고 밀양시(密陽市)와 경계를 이룬다. 유적으로는 만월동의 지석묘군과 고분군이 있다. 산외국민학교가 자리잡고 있다.
(1) 대촌(大村, 와야동(瓦野洞), 와우동(臥牛洞), 왜우)
화지산(花枝山)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이다. 금천리(琴川里)의 본동으로 만월동과 합쳐 대촌(大村)이라고 한다. 옛 지명은 와야동(瓦野洞)이라고 하는데, 마을 앞들의 토질이 기와를 굽는데 적합하여 옛날부터 기와굴이 있었다고 하여 와야(瓦野), 즉 기와들(개와들)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와우동(臥牛洞), 왜우라고도 한다. 왜우는 와우동의 변음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조 후기에 합천이씨(陜川李氏) 일파(一派)가 입촌(入村)하여 세거했다고 하며, 후에 여주이씨(驪州李氏) 일파(一派)도 입촌(入村)하여 세거해 왔다고 한다. 오늘날은 여러 성씨(姓氏)가 모여 함께 살고 있다. 재사(齋舍)로는 손씨재실(孫氏齋室)인 태을재(太乙齋)가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고 한다.
■ 만월동(滿月洞)
대촌(大村) 앞들 가운데에 있는 마을이다. 이 곳에 마느릿등이 있었는데, 이 등의 아래쪽에 있다고 해서 마느릿동인데, 이것이 한자로 표기하면서 만월동이 되었다고 한다. 이 곳은 옛날에 활성리(活城里)에 있었던 형원사(螢原寺)가 번창할 때 절에서 마늘을 심었던 곳이라고 한다. 또한 이곳에는 지석묘군과 삼국시대의 고분군이 밀집 분포되어 있는데, 1970년대 초의 경지 정리시에 다 파손되었다고 한다.
■ 마느릿들
만월동의 앞들로 마느릿등의 아래쪽에 있는 들이라고 해서 붙인 지명이다. 지금은 다원들에 속해 있다.
■ 화지산(花枝山), 와우산(臥牛山))
대촌(大村) 마을 뒷산이다. 화지산(花枝山)이라고 한 것은 이 산의 서쪽에 있는 회말리에 옛날 화짓대가 서 있었다고 하여 붙인 지명이라고 한다. 와우산(臥牛山)이라고 한 것은 화지산의 산세가 마치 소가 왼쪽으로 누워 있는 모습이라고 하여 생긴 지명인데, 왜우산이라고 한다.
■ 거문고들(금교(琴郊))
대촌 마을 앞에 있는 넓은 들이다. 그 유래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거문갯보에서 물을 댄다.
■ 거문갯보
보(洑)는 산외면(山外面) 제방(堤防)의 아래 부분에 있고, 보머리는 하짓들에 있다. 하짓들의 아래 부분에 늪이 있는데, 이곳에서 찬물이 나온다고 한다. 이 물을 가지고 거문고들에 물을 댄다.
■ 범머리나루터(호탄진(虎灘津))
금천리(琴川里)의 거문고들 끝 단장천 가에 있었던 나루터였다. 이 곳은 밀양시(密陽市)와 경계 지점인데, 나루터의 건너편에 있는 산세가 범의 머리를 닮았다고 하여 범머리산이라고 하고, 그 앞에 흐르는 내를 범머리여울(호분탄(虎噴灘))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 곳에 있었던 나루터라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옛날에 단장.산내.산외면 사람들이 밀양으로 가기 위해서 주로 많이 이용하였다고 한다.
■ 고래바지
산외국민학교의 위쪽에서 화동(華洞) 앞까지 도로 가에 있는 논이다. 옛날에 동천(東川)이 흘렀던 부근이어서 늘 물이 괴어 있는 습지(濕地)였다. 그래서 붙여진 지명이다.
■ 흰다물들
만월동의 서쪽에 있는 들이다. 이 곳에는 논을 치고 난 뒤에 모아 둔 흰돌덤불이 많이 있었다고 하여 생긴 지명이다. 흰다물보에서 물을 댄다.
■ 흰다물보
신기 마을 밑에서 보가 시작된다. 이 곳에서는 찬물이 나오는데, 이 물을 이용하여 신기 밑들에서 흰다물들까지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주로 흰다물들에 물을 댄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2) 신기(新基, 새터)
대촌(大村) 앞들 가운데에 있는 마을이다. 일제 시대에 들을 계발할 때 농막(農幕)을 짓고 농감(農監)을 하던 곳인데, 점차 사람들이 모여 들면서부터 마을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로 인해 생긴 마을이라고 하여 새터라고 한다. 이곳이 한자로 표기되면서 신기(新基)가 되었다.
■ 하짓들
산외제방 넘어에 있는 들로 다원들과 연결되어 있다. 들의 일부는 신기(新基)에 속해 있고, 나머지는 다원들에 속해 있다.
■ 용말도랑
괘법보에서 내려오는 물이 다원들을 지나 농로(農路)를 따라 신기 마을까지 내려오는데 있었던 봇도랑이다.
(3) 화동(華洞)
大村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옛 이름은 화계(華溪)로서 원래는 남기리(南沂里)에 속하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금천리(琴川里)에 편입되었다. 화동(華洞)이라고 한 것은 마을이 넓은 들 가운데에 위치하여 앞으로 마을이 빛나리라는 염원에서 지명을 붙였다고 한다. 또 다른 일설에는 옛날에 동천수(東川水)와 북천수(北川水)가 합류(合流)되는 화려한 계류(溪流)라는 뜻에서 지명을 붙였다고 한다. 이 마을에는 옛날부터 부자(富者)가 많이 있었다고 하는데 오래 지속되지 못한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처음에 손씨(孫氏), 안씨(安氏)가 부자(富者)로 살았으나 곧 떠나갔고, 그 후 김씨(金氏), 오씨(吳氏), 변씨(卞氏) 등이 거주했으나 오래되지 않아 다 떠났다고 한다.
■ 밤밭
산외국민학교 건너편 단장천 가에서부터 북천수(北川水)와 마주치는 곳까지 있었던 밤밭이다.주인이 화동 사람이라고 해서 화동밤밭이라고도 한다.
■ 섬들
거문고들의 아래쪽에 있는 들이다. 옛날 이 들의 양쪽으로 동천수(東川水)가 흘러 들어 섬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인 지명이다.
(4) 연지동(蓮池洞)
대촌(大村) 마을의 동쪽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로서 연주봉의 아래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또한 이 곳에 연(蓮)을 재배하는 연못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라는 일설도 있다. 지금도 수호(數戶)의 민가(民家)가 살고 있으며, 행정상으로는 신기동에 예속되어 있다.
■ 연주봉(蓮珠峰)
연지동의 동쪽 다원동산에 있는 봉우리로서 다죽리와 경계 지점이 된다. 이곳에는 산봉우리 3개가 있는데, 산세가 마치 구슬을 이어 놓은 것 같다고 하여 연주산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일명 다원동산이라고도 한다. 연지봉 아래쪽에 있는 골짜기에서는 신라 때 창건한 절이 있었다고 전하며, 고분도 많이 분포되어 있다고 한다.
■ 갓골짝
연지 마을 뒤 연지봉의 아래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금천리에서 제일 가쪽에 있다고 해서 붙은 지명이다. 이 곳에 옹달샘이 있는데 물맛이 좋다고 한다.
■ 돌땡이만댕이
갓골짝의 동쪽 연지봉의 제일 윗봉우리에 있는 바위이다. 다원동산과 경계 지점에 있는데, 이곳에는 뾰족하게 생긴 바위가 많이 있다고 하여 붙인 지명이다.
■ 연짓도랑
죽남 마을 앞에 있는 탑골보에서 받은 물이 죽남, 다원을 거쳐 대촌까지 도로를 따라 내려오는 도랑을 말한다. 연지동 앞을 통과한다고 해서 붙은 지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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