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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국조직신학논총 제 54 집 / KCI등재 2019. 04
칼빈의 사도신경에 대한 이해와 사용 *
정홍열 (아세아 연합신학 대학교, 교수)
I. 서론
우리는 이미 초대교회로부터 다양한 대표적인 신앙고백문들 을 발전시켜 왔고 그 가운데 에큐메니칼 신조로서 니케아 신조와 함께 서방교회가 가장 중요하게 계승해 온 신조로서 사도신경을 인정하고 있다 . 사도신경은 교리적 논쟁에 답변을 주기 위해 교회 가 정한 니케아신조와 달리 세례자들을 교육하기 위한 자료로서 발전되어 왔다 . 따라서 그 내용은 성경의 중요 내용들을 내러티브 형태로 삼위일체적 형식에 따라 알기 쉽게 정리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 지나치게 신학적이거나 논쟁적인 용어나 주제보다는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성경의 중심내용들을 설명해 주는 형태이다 . 따라서 세례를 받고자 하는 예비신자들이 사도신경을 통해 자신이 무엇을 믿고 누구를 향해 신앙을 고백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목적을 지니고 있다 . 그런 이유로 사도신경 은 세례자들을 교육하기 위한 신앙교육자료로서 교리문답이 등 장하기 이전은 물론 그 후에도 가장 핵심적 신앙교육의 자료의 지 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 교리문답교육이 십계명과 사도신경 , 주기 도문 그리고 세례와 성만찬에 관한 주제들을 소개해 주고 있다는 사실에서 사도신경은 복음의 중심내용을 담당해 주는 기능을 수 행해 왔다 . 따라서 사도신경은 단지 사도신경 자신의 형식만이 아 니라 교리문답과 기독교 교리 안내서 및 신앙고백서 등에 그 내용 과 형식이 다양하게 반영되는 특징을 가지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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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논문은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연구지원비에 의해 작성된 논문임을 밝힙니다 .
그러나 초대교회부터 세례자 예비교육자료로 사용되어 오던 교리문답교육이 중세에 접어들면서 점차 무관심하게 되었다 . 여 기에는 무엇보다도 성직자들의 태만과 무지로 인한 책임이 지대 했다 . 그러나 다행히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교리문답교육이 강조 되면서 더불어서 사도신경의 가치는 다시금 중요해졌다 . 이미 종 교개혁 이전부터 교회의 개혁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선구자들에 의해 어린이들을 위한 교리교육서에 대한 필요성과 제안이 활발 하게 이루어졌었다 . 종교개혁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발도 (Pierre Valdo) 와 14 세기 파리대학의 학장이었던 장 게르손 (Jean Gerson), 옥스포드대학 교수였던 위클리프 (John Wycliffe) 그리고 보헤미 아의 종교개혁자 얀 후스 (Jan Hus) 등이 모두 어린이를 위한 종교 교육문서를 작성하였다 . 1) 이런 흐름 하에서 종교개혁자들이 어린이들을 위한 교리문답서에 대한 관심을 갖는 것은 지극히 당연 한 일이었다 . 종교개혁이 성공적으로 수행되기 위해서는 교리문 답교육을 통한 신앙의 계승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필연적인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
이제 우리가 칼빈의 사도신경에 대한 이해와 활용을 살펴 볼 때에도 마찬가지의 과정을 밟아 나갈 것이다 . 우선 칼빈이 사도신 경 자체에 대해서 어떻게 언급했는지를 살펴 볼 것이고 이어서 교 리문답서나 신앙고백서와 같은 그의 신학 저술들 안에서 사도신 경을 얼마만큼 적용하고 사용했는지를 살펴 볼 것이다 . 마지막으 로 그의 다른 관심 부분들 , 즉 공예배 가운데 사도신경을 어떻게 활용했는지 알아보는 것도 그의 사도신경에 대한 이해에 유익한 평가가 될 것으로 판단한다 . 그리고 칼빈의 사도신경 이해를 통해 서 오늘 우리 한국의 장로교회들이 혹은 나아가서 개신교도들이 놓치고 있거나 무지한 사항들이 있는지 확인해 보고 , 반면에 또한 무엇을 배워야 할 것인지 제안해 볼 것이다 .
II. 서방 교회에서의 사도신경의 위치
니케아 신조 및 니케아 콘스탄티노플신조가 에큐메니칼신조 로 교회에 의해 받아들여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동방교회를 중심으로 전수되어 왔다 . 반면에 서방교회가 니케아신조를 부정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서방교회는 사도신경을 가장 대표적 신조로 인정하고 계승해 왔다 . 그런 점에서 이 장에서는 서방교회 의 대표적 신학자들 중 특히 칼빈에게 많은 영향을 준 아우구스티 누스와 루터가 사도신경을 어떻게 인정하고 사용해왔는지를 살 펴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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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인수 , 깔뱅의 요리문답 , ( 서울 : 도서출판 경건 , 1995). 역자 서문 중 .
사도신경은 처음부터 사도신경이란 자신의 이름으로 등장하 지 않고 로마신조 (old roman creed) 나 신앙의 규범 ( regula fidei ) 이 란 이름으로 출발했다 . 이들이 오늘날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 과 완벽하게 일치하지는 않지만 거의 모든 부분에서 내용상 일치 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사도신경의 원형으로 인정받는다 . 특히 로마신조는 기원 후 2~3 세기경에 예배 시 거행되었던 세례예식과 관련되어 형성되었다 . 주님의 명령 ( 마 28:19) 에 따라 세례예식의 문답형식으로 구성된 이 원형의 신앙고백은 4 세기에 접어들면서 점차 문답형식에서 통일된 문장의 형식으로 변천하 여 정착되었다 . 이때부터 교부들 사이에서 본격적으로 로마신조 내지는 신앙의 규범의 본문들이 소개되기 시작했다 . 그러나 9 세 기에 접어들어 칼 대제가 서방 전체교회의 예배의식의 통일과 정 착화를 추진하는 과정에 오늘날의 사도신경으로 최종형태를 지 니게 되었다 . 2) 그 후 토마스 아퀴나스는 11 세기에 사도신경이란 명칭을 사용하면서 이를 해설하는 여러 편의 글을 남김으로 사도 신경의 공적 권위가 교회에 의해 인정되었음을 확인해 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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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정홍열 , 사도신경연구 , ( 서울 : 대한기독교서회 , 2005), 38-40.
2. 아우구스티누스
아우구스티누스는 라우렌티우스에게서 기독교의 교리전반 에 관한 안내를 부탁받았을 때 , 이에 답변을 주기 위해 간단한 소 책자 ( Enchiridion ) 를 작성하게 된다 . 아우구스티누스는 특히 믿음 소망 사랑의 관점에서 기독교의 중심 메시지를 소개해 나가는데 그중에서 특히 첫 부분인 믿음에 해당되는 부분을 설명해 나갈 때 (9-113 절 ) 신조 ( 사도신경 ) 에 근거하여 풀어 나간다 . 소망부분에서 는 주기도문을 그리고 사랑 부분에서는 율법을 중심으로 다루어 나간다 . 이는 후에 교리문답이 등장하게 되는 경우를 고려해 볼 때 , 이미 교리문답의 기본형태가 아우구스티누스를 통해서 시작 되었다는 것을 예측할 수 있다 . 아우구스티누스는 믿음을 설명하 는 대목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그러나 그대 ( 라우렌티우스 ) 가 요구한 것은 손에 쥘 수 있는 소책 자였고 , 한 책장에 가득할 만한 저술은 아니었습니다 . 그러면 하 나님을 바르게 경배하기 위한 세 가지 일 - 믿음과 소망과 사랑 - 으 로 돌아갑시다 . …
우리에게 신경과 주기도가 있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 이보다 더 단 시간에 듣거나 읽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며 , 더 쉽게 기억할 수 있 는 것은 무엇입니까 ? 죄를 지은 결과로 인류가 심히 가련하게 되며 하나님의 자비를 받을 필요가 절실했을 때에 , 하나님의 은총의 때를 예고해서 선지자는 ‘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 고 했습니다 ( 욜 2:32). 그래서 주기도가 있는 것 입니다 . 그러나 사도는 바로 이 은혜를 찬양하기 위해서 저 선지 자의 말씀을 인용한 직후에 다시 ‘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 롬 10:14) 라고 첨부했습니다 . 그래서 신경이 있습니다 . 위에서 말한 세 가지 일이 이 두 가지에 대표되어 있습 니다 . 즉 믿음은 믿으며 , 소망과 사랑은 기도합니다 . 그러나 믿음 이 없으면 다른 둘도 있을 수 없습니다 . 따라서 믿음도 기도한다 고 하겠습니다 . 그렇기 때문에 ‘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 라고 기록된 것입니다 . 3)
우리는 여기에서 이미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사도신경과 주 기도문 그리고 십계명이 기독교 신앙의 중심내용으로 구성되어 소개되기 시작했음을 확인할 수 있고 그 가운데에 사도신경이 믿 음의 핵심부분에 해당됨을 확인할 수 있다 .
3. 루터
루터에게 있어서 1520 년은 종교개혁의지가 한창 무르익기 시작하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 1517 년 시작된 그의 종교개혁이 1520 년에 이르러 그의 종교개혁적 사상을 담은 대표작들인 독일민족 귀족에게 고함 , 교회의 바벨론 포로기에 관하여 , 그리스 도인의 자유에 관하여 등이 출판되었다 . 이 시기에 이르러 루터 는 그의 기독교신학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가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 “ 누구든지 구원받기를 원한다면 세 가지를 알 아야만 한다 . 율법은 인간의 질병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 신조는 어디서 약을 구할 수 있는지 알려준다 . 주기도문은 그것을 어떻게 찾아 사용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준다 .” 4) 이런 그의 신학적 이해 가 다시 한 번 결실을 맺게 된 곳이 바로 1529 년에 차례로 출간한 그의 소요리문답서와 대요리문답서였다 . 루터는 요리문답서에서 자신이 말한 이 순서를 따라 서술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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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어거스틴 , “ 믿음과 소망과 사랑에 관하여 ”, 김종흡 옮김 , 은혜론과 신앙론 ,( 서울 : 생명의 말씀사 , 1990), Enchiridion, 6.7.
루터는 자신의 글들이 모두 불에 타 없어지게 된다 하더라도 소요리문답과 대요리문답 그리고 에라스무스와의 논쟁서인 노예 의지론만은 남기고 싶은 작품으로 여길 만큼 이들을 소중하게 여 겼다 . 이 중 소요리문답은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리교육프 로그램이었고 대요리문답은 소요리문답을 가르칠 목회자들을 대 상으로 하는 , 요즘 용어로 빌자면 평신도용이 아닌 목회자 인도용 교재라고 할 수 있겠다 .
그런데 루터가 요리문답서를 작성하고자 결심하게 된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 루터는 1528 년 작센지방의 교회들을 직접 방문하여 돌아보면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심지어 목회자들 까지도 복음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무지 가운데 있는 것을 목격한 후 이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쉽고 분명하게 가르칠 필요를 절감하고 교리문답서를 준비하였다 . “ 최근에 내가 여러 지역을 방문하면서 목격한 비참한 상황으로 인해 나는 간결 하면서도 쉬운 교리문답 , 즉 그리스도교 가르침에 대한 진술을 준비하게 되었다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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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박경수 , “16 세기 프로테스탄트 교리문답에 대한 비교연구 : 루터 , 후프마이어 , 칼뱅의 교리문답을 중심으로 ”, 「 칼빈연구 , 제 13 집 」 ( 서울 : 칼빈학회 , 2016),197.
루터의 소교리문답은 자신의 교구 안에 있는 어린이들을 가 르치려는 목회적 노력의 결과였다 . 그는 이 절망적 상태가 개선되 려면 변화가 어린이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 목회자와 설교자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의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 무 지한 상태에 있는 백성들을 긍휼히 여겨야만 한다 . 루터는 어린이 가 가정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올바른 신앙교육을 받지 못한다면 종교개혁 정신은 대를 이어 연결될 수도 없고 결국 하나의 일회적 사건으로 끝나 버리고 말 것이라고 생각했다 . 6) 그런 까닭에 루터 의 종교개혁운동에서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교리교육은 매우 중요한 사항이었음을 알 수 있고 이러한 확신은 칼빈에게서도 어 김없이 발견된다 .
루터는 소교리문답에서 율법의 핵심인 십계명을 다룬 다음 사도신조를 다룬다 . “ 사도신조는 세 개의 질문으로 구성되어 있 다 . 하나님의 창조 (creation),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redemption), 성령의 성화 (sanctification) 에 대한 질문이 주어진다 . 세 질문에 대한 대답의 마지막은 항상 ‘ 이것이 진실로 진리입니다 ’ 로 끝맺는 다 .”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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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Ibid ., 196. 6) Ibid ., 201.
III. 칼빈이 인정한 사도신경의 권위
1. 저작성
칼빈은 기독교강요 II 권 16 장에서 사도신경의 내용들을 차례 대로 설명한 후에 사도신경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정 리해서 밝힌다 . 이 진술에는 사도신경의 특징과 권위 그리고 저작 성에 대한 논란을 일축하는 그의 명쾌한 주장이 담겨 있다 .
지금까지 나는 사도신경의 순서를 그대로 따랐는데 , 이는 그것이 우리의 구속의 중요한 점들을 몇 마디 말로 정리해주며 , 그리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들을 하나씩 명확하게 보 도록 해 주는 일종의 도표와도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 내가 이를 사도신경이라 부르지만 , 그것이 실제로 사도들의 저작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나는 조금도 관심이 없다 . 고대의 저술가들은 그것을 사도들의 저술로 보는 데에 상당히 견해가 일치하고 있 다 . 사도들이 공동으로 써서 반포했다고 보기도 하고 , 그들의 손으로 전달된 가르침을 요약한 것으로서 건전한 신앙 가운데서 모 아진 것이며 , 따라서 그런 이름으로 부르기에 합당하다는 것이다 . 이 신경의 출처가 어디든 간에 , 교회가 처음으로 시작되던 사도시대에 그것이 모든 사람들의 동의로 공적인 고백으로 받아들여 졌다는 것에 대해 나는 의심치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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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Ibid ., 198.
어느 한 사람이 사사로이 쓴 것은 아닌 듯하다 . 왜냐하면 사람들이 기억할 수 있는 만큼 오랜 옛날부터 모든 경건한 자들 사이에서 그것이 신성한 권위를 가졌던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 우리는 다 음과 같은 한 가지 사실에 관심을 두어야 하는데 , 이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고 본다 . 그것은 곧 우리의 믿음의 전 역사가 그 속에 간결하고도 명확한 순서로 정리되어 있으며 , 또한 성경의 순전한 증거들로 보증되지 않는 것은 하나도 거기에 들어 있지 않 다는 것이다 . 이 사실을 이해한다면 , 사도신경의 저자 문제를 놓고 홀로 고민하거나 혹은 다른 사람과 논쟁을 벌이는 따위의 일은 정말 무의미한 것이다 . 혹시 성령의 특정한 진리를 지니고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 동시에 그것이 누가 이야기한 것이고 , 누구의 손으로 기록되었는지를 알아야만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면 말이다 . 8)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칼빈은 사도신경의 권위가 성령의 특별한 증거로 사도들의 전수를 통해 교회에 전달된 성경의 표준 적 안내자로서의 지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확신하 고 주장한다 . 칼빈은 사도신경의 저자에 관한 논쟁은 불필요할 정 도로 분명한 신적 사도적 근거를 지닌 것으로 이해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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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John Calvin, Inst. II.16.18.
2. 사도신경에 대한 논란
칼빈은 그리스도교의 전통적 신조인 사도신경 , 니케아신조 , 아타나시우스신조 등에 대한 지지를 표명해 달라는 요청을 거부 했던 까닭에 잠시 동안 그의 신학의 정통성에 의심을 받은 적이 있었다 . 그의 평생의 대적자로 행세하면서 신뢰감을 주지 못했던 피에르 캐롤리 (Pierre Caroli) 는 1537 년 베른에서 있었던 토론회에 서 파렐과 칼빈을 삼위일체론을 부인하는 아리안주의자라고 고 발했던 일이 있었다 .
이에 대해 칼빈은 다음과 같이 답변했는데 , ① 나는 이미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분명히 했고 , ② 캐롤리는 자신 에게 지지를 표명해 보라는 요구를 할 권한이 없으며 , ③ 아타나 시우스신조의 진정성에 대해 의심이 가는 바는 사실인데 그 이유 는 교회가 한 번도 공의회를 통해 공식적으로 인정한 바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 9) 또한 자신의 글에서도 사도신경의 저자에 대 해서 논란이 있음을 밝힌 바 있다 : “ 내가 이를 사도신경이라 부르 지만 , 그것이 실제로 사도들의 저작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나 는 조금도 관심이 없다 . 고대의 저술가들은 그것을 사도들의 저술 로 보는 데에 상당히 견해가 일치하고 있다 . 사도들이 공동으로 써서 반포했다고 보기도 하고 , 그들의 손으로 전달된 가르침을 요 약한 것으로서 건전한 신앙 가운데서 모아진 것이며 , 따라서 그런 이름으로 부르기에 합당하다는 것이다 . 이 신경의 출처가 어디든간에 , 교회가 처음으로 시작되던 사도 시대에 그것이 모든 사람들 의 동의로 공적인 고백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에 대해 나는 의심 치 않는다 .”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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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John Hesselink, Calvin’s First Catechism , (Loui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7), 110.
칼빈을 비판적으로 보려는 사람들은 여기서 칼빈이 사도신경 의 저자의 문제에 의심을 나타냈기 때문에 사도신경에 대해서 부 정적으로 생각했다고 보려는 것 같다 . 그러나 그가 저자의 문제에 의심을 나타냈다는 말과 그가 사도신경의 진정성과 권위에 부정 적 생각을 지녔었다는 말은 다른 판단이다 . 설령 그가 저자의 문 제에 직접적인 확신이 없었다 하더라도 그 내용과 기원에 대해서 는 사도성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 오히려 그가 사도신경이 성경의 가르침을 적절하고도 충실하게 반영해 주고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사도신경의 중요성에 대한 칼빈의 생각은 그의 후기 기독교 강요에 잘 드러난다 . 1543 년 이전의 그의 첫 요리문답서나 그의 처음 두 기독교강요판에서는 하나의 긴 장 (chapter) 속에서 사도 신경이 다루어졌었다 . 그러다가 세 번째 기독교강요판 ( 라틴어판 으로는 1543 년 , 불어판으로는 1545 년 ) 에서는 사도신경을 4 개의 장으로 나누어서 다루다가 드디어 최종판 (1559 년 ) 기독교강요에 서는 전체 책의 구조의 틀을 4 부로 나누게 되었다 . 다시 말해서 사 도신경의 4 부분 , 성부 , 성자 , 성령 그리고 교회에 상응하는 4 권으 로 재구성하였다 .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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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Inst., II.16.18.
11) John Hesselink, 110-111.
16 세기 종교개혁운동에 있어서 교리교육은 종교개혁의 성패 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내적 필요였다 .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항 해서 자신들이 주장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종교개혁 지지자들에 게 교육시키는 일은 그 어떤 일보다 우선적인 일이었다 . 특히 종 교개혁의 미래를 짊어질 다음 세대를 염두에 둔 어린이들을 대상 으로 하는 교리문답교육은 모든 종교개혁자들이 역점을 둔 사업 이었다 . 그런 까닭에 종교개혁자들은 필연적으로 어린이들을 대 상으로 하는 교리문답서를 작성하게 되었다 . 이중 무엇보다도 가 장 큰 영향을 준 것은 루터의 대소요리문답서 (1529) 였다 . 1529 년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작성된 소요리문답서와 어린이들을 가르치 는 목회자 용으로 작성된 대요리문답서는 종교개혁진영의 이론 적 토대를 제공해 주는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 칼빈이 기독교강요 를 작성할 때 참고한 것으로 보이는 루터의 대요리문답서는 역시 칼빈의 제 1 차 제네바요리문답서에도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 .
1. 제1차 제네바 교리교육서(1537/8)
칼빈이 1536 년 바젤에서 출판한 기독교강요는 그의 기대를 넘는 엄청난 호응을 일으켰다 . 칼빈보다 앞서 제네바에서 종교개 혁운동을 시작했던 기욤 파렐 (Guillaume Farel) 은 칼빈이 잠시 제 네바를 방문했을 때 그를 설득하여 제네바시의 종교개혁을 함께 추진하자고 설득하여 칼빈으로 하여금 제네바에 머물도록 하였다 . 제네바에 정착하게 된 칼빈이 역점을 두어 작성한 문서들 중 하나가 바로 제 1 차 제네바 교리교육서였다 . 더 정확한 명칭은 “ 제 네바교회에서 사용하는 신앙교육 요강 및 신앙고백 ”( Instruction et Confession de Foy don’t on use en L’Eglise de Geneve ) 이다 . 이 신앙고백 서는 제네바시의 승인을 얻어 1537 년 2 월부터 인쇄되어 배포 되 었다 .
이 고백서는 내용적으로 볼 때 칼빈의 기독교강요 초판 (1536) 의 요약에 해당된다 . 이 글을 작성하게 된 주요 목적은 종교 개혁운동의 성공을 위해 옛 사상과 습관에 젖어 있는 신도들을 철 저히 교육하여 종교개혁의 순수한 교리 안에 머물게 하기 위함이 었다 . 더구나 종교개혁진영의 부모들이 자신들의 자녀들에 대한 신앙교육에 태만한 것을 보면서 신앙의 계승을 위한 필요성으로 이 신앙고백서를 작성하게 된 것이다 . 12)
이 책의 형식과 내용은 루터의 대소요리문답서의 형식처럼 율법과 신조 그리고 주기도문과 성례 및 교회와 국가의 순서로 진 행된다 . 가장 앞부분에 서론격인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사람에 대 한 지식이라는 부분이 등장하는 점이 그의 기독교강요에서의 두 지식으로 소개하는 것과 동일한 출발점을 보여 준다 . 특히 제 1 차 교리교육서는 신앙부분에서 신조라는 항으로 사도신경의 전체 내용들을 구절별로 자세하게 소개해 주고 있다 . 칼빈은 신조를 소 개하는 도입부에서 사도신경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 “ 이제는 우리의 신앙이 확고해지기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바라보고 숙고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 귀 기울여보자 . 이것은 이른 바 신조 안에 제시되어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 도께서 어떻게 아버지 ( 하나님 ) 에 의해 우리에게 지혜 , 구원 , 생명 , 의 그리고 거룩함이 되셨는가를 보게 된다 . 이 신앙의 요약이 어 떤 저자 혹은 어떤 저자들에 의해 작성되었느냐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 왜냐하면 이 신조는 그 안에 어떤 인간적 인 가르침도 내포하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 성서의 가장 확실 한 증언들로부터 연유한 표현들이기 때문이다 .” 13) 칼빈은 사도신 경을 우리의 신앙이 확고해 지기 위한 신앙의 요약으로서 하나님 께서 그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모든 구원의 유익들을 성경에 있는 그대로 증언하고 있는 표현들로 간주하고 있다 . 그런 까닭에 칼빈은 이어서 사도신경의 각 항목들을 “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 오며 ” 로부터 “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 아멘 ” 에 이르기까지 자세하게 풀어 설명해 나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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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한인수 , 12-13.
13) Ibid ., 57.
칼빈의 제 1 차 교리교육서 안에 나타난 그의 사도신경에 대한 견해는 사실 그의 기독교 강요 초판부터 최종판에 이르기까지 나타나고 있는 생각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 사도신경에 대한 그 의 평가는 일관되게 그의 작품들 속에 반영되어 나타난다 .
2. 제2차 제네바요리문답(1542/5)
제네바시의회와의 마찰로 칼빈은 1538 년 4 월 제네바를 떠난다 . 그가 정착한 곳은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크였고 거기에는 또 다른 종교개혁자 마틴 부처 (Martin Bucer,1491~1551) 가 있었다 . 부처의 도움으로 칼빈은 1538 년 9 월부터 1541 년 9 월 제네바시의 회의 요청을 받아들여서 다시 제네바로 복귀하기까지 만 3 년을 스트라스부르크에서 목회했다 . 칼빈 자신에게 있어서 그의 생애 중 가장 행복했던 사역기간이었다 .
스트라스부르크에서의 목회경험을 통해 칼빈은 자신의 제 1 차 제네바교리교육서가 어린이들에게는 지나치게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효과적인 교리교육을 할 수 있으려면 더 평이하고 쉬운 문답형식의 요리문답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 그래서 칼빈이 제네바시로부터 복귀요 청을 받았을 때 , 그가 제시했던 조건이 바로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요리문답교육을 의무적으로 실시하는 것과 권징행사였다 . 그 결 과 칼빈은 1541 년과 1561 년 제네바 교회헌법 모두에서 어린이들 은 매주일 정오에 교회에서 교리문답을 배우게 하는 규정을 통과 시켰다 . 14) 칼빈에게 있어서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진행되는 교리 문답교육은 이 만큼 중요한 종교개혁운동의 핵심사항이었다 . 칼 빈의 이러한 생각은 제 2 차 제네바 교리문답서의 서문에 “ 독자에게 보내는 서신 ” 부분에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 “ 교회는 언제나 어린아이들을 기독교 신앙교리 안에서 양육하라는 특별한 권면을 받아왔다 . 이를 수행하기 위해 교회는 옛적에 학교들을 운영했을 뿐 만 아니라 신도 개개인에게 각자의 가족을 잘 가르치도록 권고하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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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박경수 , 216.
또한 교회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공통된 주요교리에 대해 어린아이들이 잘 알고 있는지의 여부를 심사할 수 있는 공적 규정도 소유하고 있었다 . 이를 규모 있게 수행하기 위해 교회는 요 리문답이라고 불리는 어떤 특정한 식서 (formulaire) 를 사용하였 다 .” 15) 이어서 칼빈은 그동안 로마 가톨릭 교회가 미신적인 유물 숭배에만 몰두해 오는 반면 정작 중요한 요리문답은 등한시 했다 고 비판하면서 이 요리문답은 “ 옛적부터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준수되어 왔고 , 교회가 완전히 부패했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결코 포기된 적이 없는 관례적인 것 (l’ usage) 이다 ” 16) 고 주장한다 . 칼빈이 제네바로 돌아와 다시 작성한 제 2 차 교리문답서는 전 체 55 장과 373 개의 질문과 대답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 제 1 차 교리교육서와 달리 그 체계에 변화가 일어났다 . 무엇보다도 문답 형식으로 바뀐 것이 가장 큰 변화이고 내용의 순서도 제 1 차 교리 교육서와 달리 사도신경이 첫 순서로 등장하고 이어서 십계명 ( 율 법 ), 주기도 , 성례의 순서로 구성되었다 . 이것은 그 사이 칼빈의 신 학에 있어서 율법이해에 변화가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 종전의 율 법의 신학적 사용에 무게중심이 있었다면 이후에는 율법의 제 3 사용에 대한 이해가 반영된 것이다 .
----------------------------각 주-------------------------
15) 한인수 , 100.
16) Ibid .
제 2 차 제네바교리문답은 신앙의 장에서 참된 신인식으로 시작하면서 곧 바로 15 번째 문답에서부터 사도신경을 다룬다 . 그러 면서 “ 이 인식 ( 사도신경 ) 의 요약된 내용이 무엇인가 ?” 라고 목사 가 어린이에게 질문한다 .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어린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행하는 신앙고백 안 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 우리는 이를 보통 사도신경이라 부릅니다 . 왜냐하면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안에서 한결같이 고백했 던 참신앙의 요약이기 때문이며 또한 이것은 순수한 사도적 가르 침으로부터 추론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 17) 제 1 차 제네바교리교 육서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사도신경에 대한 칼빈의 확고한 신 뢰는 변함이 없고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고백하고 계승해야 할 신앙의 중심내용으로 사도적 권위와 기원을 가진 교회의 전통으 로 소개하고 있다 . 제 2 차 제네바교리문답서에서 사도신경에 대 한 직접적인 설명은 15 번째 문항으로부터 110 번째 문항에 이르 기까지 각 주제별로 자세하게 설명되고 있다 . 제 2 차 제네바 요리 문답서의 전체 구성과 형식을 볼 때 , 이는 칼빈이 신자들 ( 어린이 들 ) 로 하여금 한 주에 한 장씩 교리문답을 배우고 , 익히고 암송하 도록 구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
칼빈은 1536 년 바젤에서 기독교강요 초판을 발행한 이후로 1539 년의 2 차 개정판 그리고 43년의 3 차 개정판 , 50 년의 4 차 개정판에 이어서 59 년의 최종판을 남겼다 . 18) 5 차에 걸친 발행에 따라 기독교강요의 구성은 매번 더 성숙해가면서 발전을 거듭해 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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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Ibid ., 103.
1536 년에 발간된 기독교강요 초판은 전체 6 장으로 구성되었는데 그 중 믿음 부분에서 사도신경의 내용을 다루었다 . 1539 년 의 재판과 1543 년의 재개정판에 이르기까지 전체 기독교강요 내 용 중 사도신경에 대한 비중은 믿음을 다루는 장에서 언급한 것 이외에는 별다른 점이 없었다 . 그러나 1559 년의 최종판에서는 기 독교강요와 사도신경의 연관성이 전에 비해 훨씬 더 깊어졌다 . 먼 저 최종판은 전체 4 권으로 구성되었는데 이 형식은 사도신경의 성부 , 성자 , 성령 그리고 교회로 구성된 형식을 그대로 가져온 것 이다 . 이 점이 칼빈의 사도신경 이해의 독특한 점인데 , 칼빈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알려진 루터의 대요리문답은 소요리문답과 마 찬가지로 그 안에서 사도신경을 성부 ( 창조에 관하여 ), 성자 ( 구속 에 관하여 ), 성령 ( 성화에 관하여 ) 의 세 부분으로 구성된 형식으로 보는데 반해 , 칼빈은 처음부터 사도신경을 성부 , 성자 , 성령 그리 고 교회로 보아왔다는 점이다 . 이렇게 사도신경을 보아온 칼빈은 기독교강요 최종판에 이르러 아예 책의 구성을 전체 4 부로 배정 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 또한 칼빈은 최종판 이전의 기독교강요 가 염두에 두었던 교리문답의 형식을 완전히 탈바꿈시켰지만 여 전히 중심목적은 그리스도인을 상대로 한 교리교육이 중점적 사 항이었다 . 따라서 전체 내용이 기독교 중심교리들을 설명해 나가는 상황에서 사도신경은 가장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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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기독교강요 라틴어판을 기준으로 설명 . 불어판의 경우 1541, 1545, 1551,1560 년에 걸쳐 4 번 출간되었다 .
특히 제 2 권 16 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전사역을 소개하는 부분에서 칼빈은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 “ 이른바 사도신경이 그 리스도의 탄생에서부터 그의 죽으심과 부활에 이르기까지를 — 완전한 구원의 모든 것이 거기에 있다 — 단번에 가장 적절한 순서 대로 다루고 있다고 하겠다 .” 19) 사도신경에 대한 칼빈의 신뢰와 충성도는 이 문장에서 보는 바와 같이 확고한 것으로 판단된다 . 칼빈은 이어서 기독교강요 II.16.5 부터 II.16.17 에 이르기까 지 아예 사도신경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문들을 각 항 에서 내용에 따라 글자 그대로 풀어가면서 설명해 준다 .
II.16.5. 빌라도에게 정죄받으심
II.16.6. 십자가에 못박혀
II.16.7. 죽으시고 장사되어
II.16.8. 지옥에 내려가사
II.16.13.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II.16.14. 하늘에 오르사
II.16.15.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II.16.17.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이렇듯 칼빈의 신학을 가장 대표하는 그의 기독교강요 최 종판에서도 사도신경의 전체 구조와 각항의 내용들이 칼빈에 의해서 밀접하게 수용될 뿐만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충실하게 반영 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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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Inst., II.16.5.
최종판에 드러난 가장 특징적인 변 화는 사도신경에 직접 관련되는 내용보다는 제 2 권 기독론에서의 그리스도의 삼중직이 전체 기독론의 뼈대와 내용을 구성하게 되 었다는 사실이다 . 굳이 사도신경을 적용해 보면 ‘ 우리 주 예수 그 리스도를 믿사오며 ’ 의 고백에서 ‘ 그리스도 ’ 부분을 강화시킨 셈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이를 사도신경의 한 부분과 연결짓기보다는 칼빈의 기독론이 그리스도라는 칭호에 특별한 의미를 더 부여했 다는 사실 정도로 판단하는 것이 더 타당할 듯하다 . 그러나 칼빈 의 기독교 강요와 그 이전의 제네바 신앙고백서와 교리문답 등에 나타난 칼빈의 사도신경 사용에는 그 의미나 비중이 번화하지 않 고 일관되게 가장 중심적인 자료로서의 기능과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었다 .
4. 예배와 성례전
칼빈이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한 일들이 제네바 신앙고백서를 만드는 일과 예배를 강화하는 일이었 고 그 결과로 1537 년 1 월 16 일 “ 제네바의 교회와 예배의 조직에 관한 조항들 ”( Articles Concerning the Organization of the Church and of Worship at Geneva ) 이 등장했다 . 칼빈이 파렐과 함께 제네바시의회 로부터 추방당할 때도 예배와 성례전에 관한 의견 차이였고 그가 1541 년 스트라스부르크로부터 제네바로 돌아와서 처음 시작한 일도 역시 제네바 요리문답 작성 및 예배예식의 개정 및 강화였다 . 그만큼 예배는 칼빈의 신학과 신앙 그리고 목회에서 핵심을 차지하는 사항이었다 . 우리는 그 가운데 사도신경의 위치를 확인 해 보고 그 의미를 평가함으로 칼빈신학 전체에서 사도신경의 의 미를 확인할 수 있게 된다 .
1542 칼빈이 제네바에서 사용한 성만찬 예전 (Anaphora) 형식을 소개하면 그 가운데 사도신경을 노래하는 부분이 등장한다 .
성만찬 예전 20)
구제를 위한 헌금 중보기도
주기도문해설
성물준비 ( 사도신경을 노래함 )
제정의 말씀 권면
성찬기도 ( 성령의 임재를 위한 )
성체분할 ( 분병례 )
분병분잔
성찬참여 ( 시편 혹은 성경말씀봉독 )
성찬 후 기도 아론의 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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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주승중 , 최윤배 , 교회를 섬기는 청지기의 길 I , ( 파주 : 성안당 , 2008),123. 또 한 정홍열 , “ 아나포라의 관점에서 본 칼빈의 성찬론 ” 「 조직신학논총 , 48 집 」 , 2017. 169 쪽 참조 .
방금 위에서 확인한 제네바교회에서의 성만찬 예전의 순서를 더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La Forme des prieres et chantz eccle- siatiques 1542( 제네바 교회의 예배와 예전의 형태 ) 라는 글 중 “ 성 만찬의 지침과 만찬에서의 기도 ” 라는 항목에서 칼빈은 이렇게 지 시한다 : “ 만찬 날에 사람들의 일상적인 기도가 끝난 후 , 사도신경 을 노래하고 , 이 때 목사는 다음과 같은 형식으로 기도한다 .
우리는 신앙을 고백함으로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증하였습니다 .
그러므로 그가 우리의
사랑하는 아버지로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소망 속에서
주 께서 가르치신 기도를
행하기를 원합니다 . 또는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님
의 이름으로 그가
가르친 기도를 드립니다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 ,
나라가 임하시며… 21)
따라서 칼빈의 예전에 있어서 사도신경을 노래하는 행위는 신자들이 자신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행위로 요구되고 인정되는 조건이었음을 알 수 있다 . 자신의 신앙을 사도신경을 통 해 고백하는 자들에게 성찬의 참여가 허락되었다는 점을 확인하 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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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정일웅 , 개혁교회 예배와 예전학 , ( 서울 : 총신대학교출판부 , 2013), 438.
예배에 참여하여 함께 예배드리는 신자들이 찬송을 적극적으 로 부르는 것은 종교개혁 예배의 가장 대표적 특징 가운데 하나였 다 . 루터는 좀 더 적극적으로 독일의 민요들을 포함한 다양한 멜로디를 예배찬송 안으로 가져온 반면 칼빈은 보다 엄격하여 시편 이외에는 노래로 부르는 것이 금지되었다 . 그 가운데 시편 이외의 회중들이 찬송을 부르던 것이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노래하는 것이었다 . 그만큼 사도신경을 노래한다는 행위는 칼빈이 생각하 는 예배에 있어서 신앙을 공동체적으로 고백하는 행위로 이해되 었다 . 그리하여 제네바 콘시스토리움은 한 신자가 주기도문과 사 도신경을 외우는지를 그 신자의 신앙을 판단하는 첫 째 기준으로 삼았다 . 이 조건을 통과하지 못한 사람은 콘시스토리움으로부터 출교의 위험에 처하게 될 정도였다 . 22)
V. 한국교회와 사도신경
1. 교리교육의 회복
16 세기 종교개혁의 현장에서 등장한 교리문답교육의 필요성 에 대해 박경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 프로테스탄트 교리문답 은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이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도록 해주며 , 바로 알고 바로 믿고 바로 살도록 인도하는 나침반의 역할을 하고 , 교회의 구성원들이 동일한 꿈과 비전을 가진 진정한 공동체가 되 도록 결속시켜 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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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John D. Witvliet/Nathan Bierma, “Liturgie”, Calvin Handbuch, 407.
이처럼 교리문답은 그리스도를 위해 군병으 로 소집을 받은 신자들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무장이다 . 교리문답교육은 일종의 적응 (accommodation) 이다 .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의 수준에 맞추어 자신을 적응시키 시듯이 , 교사는 학생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교육해야 한다 . 교리문 답 교육은 신앙의 대잇기이다 . 종교개혁의 신앙이 대를 이어 연결 되기 위해서는 교리문답을 통한 신앙의 전승이 중요하다 . 이것이 잘못되면 교회의 미래가 어두워진다 . 교리문답 교육은 그리스도 인들의 신앙의 일치를 확립하는 수단이다 동일한 공동체의 지체 들이 같은 신앙으로 연결되고 이어지기 위해서 교리문답은 필수 적이다 .” 23) 이런 이유로 칼빈은 제네바로 처음 왔을 때와 다시 스 트라스부르크로부터 돌아왔을 때에도 교리교육을 강화할 목적으 로 제 1 차 교리교육서와 제 2 차 제네바 요리문답서를 제작했던 것 이다 .
그러나 칼빈이 말하는 일치가 단순히 교회 안에서의 구성원 들간의 문제나 세대와 세대를 잇는 문제만은 아니다 . 교회들 사이 에서의 일치에도 관심을 가지고 교리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 한국의 장로교회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분열되어 있다 . 무슨 이유로 그 많은 장로교단들이 존재해야 하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으나 , 칼빈은 교리문답 교육을 통한 교회의 일치와 친교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 그는 교리문답의 목적이 “ 신앙의 일치가 우리 가운데 빛나도록 하기 위함 ” 24) 이라고 언급하면서 이와 같이 혼란하고 분열된 그리스도교계에서 공간적으로는 널리 흩어져 있을지라도 그리스도교 교리에서 일치하는 교회들이 상호 인정할 수 있는 공적 증언을 가지는 것이 유용하다 ” 25) 고 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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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박경수 , 209.
그런 점에서 동일한 교리문답을 사용하는 것이야말로 “ 그리스도교 친교의 엄숙한 상징 ” 26) 이라고 말했다 . 오늘날 크고 작은 이슈들 로 분열을 일삼는 한국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향한 칼빈의 교리 교육의 중요성의 제안이야말로 우리가 귀 기울여 마음에 새겨야 할 광야의 소리인 것이다 .
오늘날 우리나라 프로테스탄트교회들 안에서 교리문답 교육이 얼마나 소홀히 취급되고 있는지는 학습교인 제도가 무의미하게 취급되는 현실 안에서도 드러난다 . 대부분의 교인들은 학습교 인 ( Catechumene ) 이란 말이 무슨 말인지도 알지 못한다 . 대부분의 교인들이 무지한 가운데 교회에 처음 나오면 원입교인이었다가 학습교인이 되고 그 다음에 세례교인이 된다고 생각했으나 학습 교인이 도대체 무엇을 학습하는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보니 학습교인이란 명칭이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 학습교인이란 세례를 받기 위해 요리문답을 학습하는 과정 중의 세례예비자 교육생이다 . 세례를 준비시키는 제대로 된 교육이 부재한 까닭에 학습교인이란 말과 개념이 같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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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Calvin, “The Catechism of the Church of Geneva,” Calvin: Theological trea- tises, J.K.S. Reid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54), 88. 박경수 , 16 세기 프로테스탄트 교리문답에 대한 비교 연구 , 214 에서 재인용 .
25) Ibid ., 89.
26) Ibid ., 90.
사도신경의 유래가 세례자 예비교육자료로 등장했다는 이유를 돌아 볼 때 , 세례예비 자 교육의 부재와 사도신경 교육 및 교리교육의 소홀함은 서로 맞 물려 있는 관계라고 말할 수 있다 . 초대교회의 역사를 살펴보면 , 세례를 받는 행위가 얼마나 중요하고 전체 교회적 관심 속에서 오 랜 기간 동안 준비하면서 진행되어 왔는지 알 수 있다 . 27) 이제 한 국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단지 세례를 주는 행위에만 몰두하지 말 고 세례를 준비시키는 과정과 그에 따른 교리교육의 준비과정에 더욱 관심을 가질 때이다 . 진중세례로 대별되는 선교공세적 대규 모행사도 나름 의미가 있겠으나 그러한 일방적 세례집행 의식 보 다는 개교회에서 정상적으로 이루어지는 내실 있는 신자들의 교 육과 배출에 더 신경을 써야 할 듯하다 .
2. 다음 세대를 위한 신앙교육 강화
칼빈은 제네바교리문답의 서문인 ” 독자들에게 드리는 글 “ 에 서 이 글의 작성동기가 ” 어린이들을 그리스도교 교리로 올바로 키 우는 것 “ 임을 밝히고 있다 . 칼빈은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가정 , 학교 , 교회에서 부지런히 교리문답을 가르쳐야 한다고 말한 다 .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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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이에 관해서는 김정의 초대교회 예배사 ,( 서울 : CLC, 2014),129-170 을 참조할 것 .
28) 박경수 , 213.
칼빈은 1548 년 10 월 22 일 잉글랜드 서머싯 공작인 에드워드 시모어 (Edward Seymour) 에게 보낸 편지에서 종교개혁의 중심과 제는 어린이들 ( 청소년들 ) 에게 적합한 방식으로 복음을 전달하는 것 29) 이라고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 “ 하나님의 교회는 요리문답 없이 결코 지탱할 수 없습니다 . 왜냐하면 그것은 좋은 씨앗이 죽지 않고 세대를 이어가면서 번식하도록 지켜주는 종자와 같기 때문입니다 . … 부디 어린이들이 간결하고 자기들의 이해 의 수준에 맞는 좋은 요리문답서로 교육받도록 관심을 기울여 주 시기 바랍니다 . 바로 거기에 진정한 기독교가 있다는 사실을 명심 해 주시기 바랍니다 30) ” 라고 말하고 있다 . 칼빈은 교리문답이 참 된 교회의 보존과 신앙의 계승을 위한 씨앗과 같다는 사실을 분명 하게 알고 있었다 .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담은 교리문답이 없다면 종교개혁은 그저 일회성 사건으로 끝나 버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 프로테스탄트신앙의 요점이 대를 이어 전해지고 그 신앙에 기초한 참된 교회가 서기 위해서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교리문답을 가르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 그렇기 때문에 칼뱅은 제네바에 처음 도착했을 때나 다시 귀환했을 때 가장 먼저 교리문답을 작성하는 일을 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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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Matthias Freudenberg, “Katechismen”, Calvin Handbuch , (Tuebingen, Mohr Siebeck, 2008), 205.
30) CO 13,72. Mathias Freudenberg, “Katechismus”, Calvin Handbuch , 204-205 에서 재인용 .
VI. 결론
이미 500 년 전 종교개혁자들에 의해서 사도신경을 중심으로 한 다음 세대 기독교 신앙교리교육의 노력과 프로그램들은 오늘 우리에게도 실질적 도전을 준다 . 어린이들을 집중적으로 양육하 는 일은 어떤 선교사역이나 교육사업 보다도 우선시될 가장 중요 한 사역이며 여기에 교회의 미래가 걸려 있다는 인식은 과거나 지 금이나 마찬가지다 . 그런 점에서 우리는 오늘날 다음 세대를 대상 으로 하는 신앙교육에 더욱 큰 관심과 정성을 기울여야 할 것이 다 . 이는 이미 루터와 칼빈이 추진했던 교회교육의 핵심이었다 . 우리의 관심이 다음 세대에 집중해야 함은 당연한 요구이지 만 또한 기존 성인교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리교육의 필요성에도 이전보다 더 많은 관심과 투자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 종교개 혁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프로테스탄트 교인들을 교육시키는 일에 매진하였다 . 우선적으로는 교리교육이었지만 그 외에도 예 배와 찬송 그리고 엄격한 경건한 삶을 강조하는 전체적인 신앙교 육강화 프로그램들이 운영되었다 . 그래서 루터는 수많은 찬송가 들을 통해 교인들을 적극적으로 예배에 참여케 하였을 뿐만 아니 라 찬송가의 가사내용을 통해 신앙교육의 기회로 삼았다 . 그런 흔 적들이 루터의 수많은 코랄의 형태로 자리 잡게 되었다 . 칼빈은 예배와 성례전의 강조를 통한 경건한 삶과 권징의 엄격한 실행을 통해 프로테스탄트 교인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갔다 . 그 가운데에 교리교육이 중심을 이루었고 그 중에서도 특히 사도신경의 위치 가 핵심적이었다 . 그러나 오늘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이런 종교개혁자들의 위대한 신앙의 유산들을 다 상실해 버린 듯하다 . 몰상 식한 이단들의 득세와 안팎으로 들려오는 교계의 불미스러운 소 식들의 가장 큰 원인은 건강한 교리교육과 경건한 삶의 강조 그리 고 다음 세대 교육에 무관심했던 과거의 잘못된 행동들의 당연한 귀결이 아닌지 심각하게 묻게 된다 . 단순히 몸집 불리기에만 힘써 온 결과 안에서부터 부패하고 생명력을 상실하고 양심을 잃어버 린 현재의 한국교회가 다시금 복음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은 칼빈 이 강조했던 것처럼 , 진정한 교리교육 , 참된 경건한 삶의 강조 그 리고 다음 세대에 집중하는 신앙교육을 새롭게 강조하는 방법 외 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확신한다 . 그런 점에서 칼빈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가 배워야 할 교회의 교사임에 틀림없다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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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초록
칼빈의 사도신경에 대한 이해와 사용
사도신경은 서방교회의 대표적 신앙고백문이다 . 사도신경은 초대 교회기간 중 신자들의 세례예비교육 자료로 등장했다 . 그런 점에서 다른 신조들과 달리 사도신경은 대중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
삼위일체적 관점에서 성경의 전체 내용을 정리하면서 사도신경은 보통의 사람들에게 성경의 중심사상을 쉽게 전달해 준다 .
이 논문은 칼빈이 사도신경을 그의 신학과 사역에서 어떻게 다루고 사용하였는지를 연구해서 보여주고자 한다 . 서방교회의 주요한 신학자들을 따라서 칼빈도 사도신경의 권위를 충분히 인정하면서 그 의 신학 활동에서 주요 자료로 사용했다 .
사도신경은 칼빈의 신학과 목회적 사역의 중심을 차지했다 . 그의 대 표작인 기독교강요의 경우 1536 년의 초판부터 1559 년의 최종판에 이르기까지 사도신경의 구조와 내용에 따라 구성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 그의 제네바에서의 종교개혁활동의 공식적 출발을 알리는 첫 작품인 제네바 신조와 1541/2 에 출판한 제네바요리문답은 모두 사도신경을 기초로 구성된 자료이다 . 칼빈이 공에배에서 시편 외에 모두 거부한 교회음악의 경우에도 주기도문과 십계명 그리고 사도 신경을 노래하는 것은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
혹자는 사도신경이 우리의 신학과 목회의 중심적 사항이라는 사실 에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 그렇다면 우리는 칼빈으로부터 사도신 경의 사용에 대해서 배워야 하겠다 . 칼빈은 기독교신앙의 강화를 위 해 요리문답을 중요하게 다루었다 . 그래서 어린이들을 대상으로는 소요리문답교육을 무척 강조했는데 , 이는 종교개혁을 성공으로 이 끌어 가는 중추적 역할에 해당되는 사역이었다 .
오늘날의 교회에 칼빈의 정신을 적용한다면 , 우리는 오늘날 교리교 육과 신앙교육의 필요성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려해야만 한다 . 이 논문은 종교개혁 당시 칼빈의 주요관심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며 우 리로 하여금 이로부터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를 주의 깊게 가르쳐 주 고 있다 .
Abstract
Calvin’s Understanding and Use of the Apostle’s Creed
Chung, Hong-Yul , Dr. theol. Professor
Asia United Theological University, Yangpyeong, Korea.
As the most representative article of faith of the Western Church, The Apostle’s Creed appeared as a didactic material for the baptism of the believers during the early church period. As such, it was constructed in a language and content that was easily understandable to the public in contrast to other contemporary creed.
Through a comprehensive summary of the whole biblical content from a trinitarian perspective, the The Apostle’s Creed introduces the central teachings of the Bible to the common people in a plain manner.
The present paper intends to research on how The Apostle’s Creed was used in work and ministry of Calvin. Following the precedent main theologians of the Western Church, Calvin recognized fully the authority of The Apostle’s Creed and used it as a main source for his theological pursuit. The Apostle’s Creed was at the center of his theological and pastoral ministry. His master piece, The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which was first published in 1536 and last edited in 1559, is structured around the framework and contents of The Apostle’s Creed.
The Geneva Creed, which he made public in the beginning of his reformation movement in Geneva, and the Geneva Catechism published in 1541/2 were both written on the basis of The Apostle’s Creed. Besides the psalms which Calvin has allowed as the hymnal for the worship, the only others were the Lord’s Prayer, The Decalogue and The Apostle’s Creed. So one may argue that The Apostle’s Creed was the center of his theology and liturgy. As such we learn the following lessons from the Calvin’s use of The Apostle’s Creed: Calvin saw the central role of the Catechism in the nurturing of the Christian faith. And considered it, especially the Short Catechism for the children, as the most important ministerial element for the success of the Reformation.
Provided we apply this spirit of Calvin to the present Church, we may learn the need for the didactic Catechism and the importance of the faith education. The present paper shows that the main concern of Calvin at the time of religious reformation is an important lesson for us today with a careful attention.
‖ 주제어 Keywords ‖
칼빈 , 요리문답 , 사도신경 , 신앙고백서 , 어린이 신앙교육 , 교리교육 . Calvin, Catechism, Creeds, Apostle’s creed, Children religious educ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