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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8월 말경 종루봉 정자에 대한 기사를 e수원에 기고한(하단에 기사 내용) 그는 시민기자이면서 수원문인협회 시인 이대규 선생이시다. 얼마전 같은 문학 활동을 하는 이대규 시인로 부터 종루봉 정자에 걸린 나의 서각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2003년 학교를 정년후 내가 지역사회에 봉사할 일을 찾다가 2004년 광교산과 그 주변 정자 여러 곳에 서각작품 몇 점을 걸었다.
그런데 종루봉 정자에 정자 이름이 없어 현판하나 제작 기증해 주면 좋겠다고 하여 쾌히 승낙했다. 望海亭이라는 현판 이름을 받고 30여일 넘게 작업 하여 작품을 완성했다. 글씨는 각 대학에서 서예 강의를 하고 국전 심사위원인 塗 丁 權 相 浩 선생이 썼다. 추석 지나 광교산 종루봉에서 현판식을 할 에정이다.
2017. 9. 29.
霧峰 金 都 星
망해정(望海亭)
다시 산에 오른 나무
김도성
살을 에는 찬바람 속에 나이테를 굳히며 우뚝 서서 바늘 침 푸른 잎으로 위용을 자랑하던 *알마시카
낮에는 빙산 사이로 멀리 태양과 마주했고 밤에는 영롱한 별들과 수많은 사랑을 속삭이던 너
벌목 차에 허리가 잘리고 목이 꺾이고 팔이 부러져 북극지방 짠물에 뗏목으로 수개월 떠돌다가
화물선에 올라 지구 반 바퀴 바다를 돌아 인천항에 도착 원목 목재소에서 몸을 쪼개고 살점 일부가 서각작가의 손에
살아서 수백 년 죽어서 천년 광교산 종루봉 정자의 명패로 바람 눈 비속에 고향 알라스카를 바라보며 새로 사는 望海亭
2017. 10. 1.
* 알라스카 産 소나무
‘수원시민이 세계적 문호, 고은시인 품어야!’라는 e수원뉴스 기사를 보며 마음이 무거웠던 탓일까. 전과 달리 13번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가기로 했다. 평일이다 보니 상광교동까지 들어가는 길은 한가로웠다. 종점에 내렸을 때도 인근 식당에서는 왁자지껄한 가운데 많은 손님들이 북적거렸지만 등산객들은 별로 없었다.
밖에서 우려하던 것과는 다르게 고은 시인에 대한 이곳 주민들의 어떤 불만이나 불안을 느낄 만한 것은 볼 수가 없었다. 다행을 느끼며 토끼재를 향해 오르는 길이다, 간간히 하산하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지만 오르는 것은 나 혼자뿐이다. 혼자서 가는 길은 누구와 걸음을 맞추지 않는다는 편안함이 있어 좋다. 그런데 그때 뒤에서 덜그덕거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내 뒤를 따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침내 그의 숨소리가 내 귓가에 들려오며, 젊은 아가씨가 스틱 두 개를 짚으며 앞서가기 시작한다. 고요를 깨운 것이다. 내 페이스를 지키며 두어 걸음을 앞세워 놓고 뒤를 따랐다.
‘그러면 꽤나 신경이 쓰이겠지?’ 나는 쫓기는 입장에서 쫓는 쪽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토끼재를 오르고 나면 땀이 흥건한 가운데 고개 위 벤치에 가서 누구나 털썩 주저앉기 마련이다. 그 아가씨가 먼저 가서 앉기에 나도 가서 따라 앉았다. 말을 걸어보니 산을 좋아한다며, 용인에 있는 회사에서 동료들과 왔는데 일등을 한 것이라고 했다. 나는 평일인데도 회사에서 산행 온 것을 보니 좋은 회사인 것 같다고 말하며, 그는 사장님이 잘해주신다고 한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그 동료들이 한 패 올라오고 있었다.
종루봉으로 향했다. 평소에는 곧장 형제봉으로 갔지만 오늘은 종루봉의 현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곳으로 오르는데 어디선가 담배연기 냄새가 꽤나 거북스럽다. 산에서 금연은 상식이고 철칙이지만 잘 지켜지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정말 안타깝다. 산불은 대개가 담뱃불로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때 오르는 길 한쪽 바위에 나이 들어 보이는 한 남자가 올라 앉아 있다. 모른 척 하려다가 “여보시오. 산에서 담배피시면 어떤지 아세요?”하고 한판 해볼 요량으로 소리를 쳤더니 “죄송합니다!”하며 뜻밖에도 저자세를 보인다. 내심 큰소리치며 담배 피는 걸 봤느냐고 따지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는데, 케이오승이다.
그런 승리의 기쁨으로 종루봉 팔각정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는 운치도 그만이다. 요즘 같은 여름에는 시원한 바람과 함께 그곳에 걸려있는 현판 시를 읽는 맛도 좋다. 내가 이것을 처음 본 것은 2005년으로 기억된다. 처음 광교산을 찾았을 때 팔각정자와 함께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이런 나옹선사의 시가 이곳 풍광과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와 함께 마주하고 있는 시는 ’山中好友林間鳥 世外淸音石上泉‘산중에 좋은 벗은 숲속의 새요, 세상에서 가장 맑은 소리는 돌 위에 흐르는 샘물소리’라는 것이다. 이 두 편의 시를 보노라면 신선의 경지가 어떤 것인지를 가히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그때 나는 현판에 새겨진 ‘무봉’이라는 조각가에 대해 생각해보기도 했었다. 누군가 광교산을 찾는 등산객들을 위해 참 좋은 일을 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런 분은 어떤 분일까도 싶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13년이 흐른 지금 그분을 알게 되었다. ‘수원문학인의 집’에서 만난 그분은 우연한 기회에 손수 제작한 ‘서각’이라는 것을 말해, 직접 들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수원의 인구가 130만 명이라고 하지만 참 좁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며, 반가운 가운데 그동안 궁금했던 사항을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호가 ‘무봉’인 그는 김도성 선생이다. 올해 78세지만 테니스로 건강을 유지하며 수원의 모 중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직했다고 한다. 학교에서부터 서각을 해 전국 서각전에 나가 큰상도 받았으며 복도에 한글로 된 만자가 넘는 천자문을 새겨 걸어놓고 학생들에게 오며 가며 배우게 했다고도 한다. 퇴직 후 뭔가 좋은 일을 하고 싶었다며, 수원시청 광교산을 담당하는 부서에 찾아가 협의하여 그곳에 시판을 걸게 되었다고 한다. 그곳에 새겨진 연도가 갑신년 2004년으로 13년이 되었다. 그곳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곳에도 걸어 놓았다며, 앞으로도 더 만들어 필요한 곳에 걸 계획이라고 한다.
광교산 종루봉에 걸린 시판을 보면 생각나는 것이 또 있다. 지금의 종루봉이라 부르는 것은 신라 때 대학자 최치원 선생이 이곳을 찾았을 때 종과 종루를 보고 ‘종대봉’이라 한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런 최치원 선생은 12살 때 당나라에 유학을 가서 많은 공부를 하고 돌아왔지만 신라에서는 말단 6두품밖에 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을 은거하던 중 광교산 종루봉에 오르니 종은 있지만 울릴 사람이 없고, 종과 자신의 신세가 같다며 한탄했다고 한다. 그때 종루봉에 올라 서해를 바라보며 다시 당나라로 갈까 생각했지만 조국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나라를 깨우는 것이 선비의 길을 택했다고 한다.
이런 종루봉을 알고 나면 아는 만큼 더 신비롭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종루봉 서쪽 아래는 옛 창성사지가 있고, 뒤돌아 동쪽 아래는 서봉사지가 있다. 그러니 바람처럼 떠돌던 선비들은 자신도 모르게 이곳을 밟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발굴조사와 함께 학계의 많은 관심을 모으고 있는데, 두 곳 모두 진각국사와 현오국사를 배출한 대사찰이었던 곳이다. 그러니 종루봉은 그 중심 꼭대기에 서 있으며, 올라보면 그 기운이 전해올 것만 같다. 이곳에 새겨진 음각과 양각의 시판 한 쌍은 그야말로 찾는 이의 마음을 산처럼, 물처럼 하라며 다독여주고 있다. 세파의 마음을 이곳에 올라 씻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안내문이 있어 종루봉에 대한 역사를 더 많이 알려야 하지 않을까? 무봉(霧峰)선생을 직접 만나 알고 나니, 그 마음과 함께 이제는 나옹선사의 시가 더 가슴에 바람을 몰고 온다. / 글 시민기자 이대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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