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울과 다윗 ⅩⅢ (삼상 27:1-28:2)
영적적용 : 안일위험론
요약
신앙의 안일함에 빠질 때 사단이 포로가 되고 나아가서는 사단이 도구가 된다.
신앙의 사람인 그가 실수를 하게 된 동기는 사울의 빈번한 변덕스러움에 질식함이었다. 그러므로 내일을 염려하지 말고 오늘 밖에는 나에게 없다는 생각으로 살아갈 때 육신의 안일함에서 벗어나게 된다.
설명
다윗이 사울을 피해 블레셋으로 간 내용으로 안일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 안일의 원인
1. 인간의 생각 침투
1절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롬8:6)
2. 육신의 집요한 세력에 지침
1절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망하리니"
☞ "내일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마6:34)
☆ 안일의 모습
1. 믿음을 떠남과도 같다.
1절 "이스라엘 온 경내에서 나를 수색하다가"
☞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으로 믿음을 예표한다.
2. 최선이 낙심으로 변함이다.
2절 "일어나 함께 육백 인으로 더불어"
☞ 최선의 상징인 육백인의 망명은 낙심을 상징한다.
3. 사랑과 기쁨과 지혜도 육신적인 방향으로 바뀐다.
3절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각기 가족을 거느리고 ‥ 그 두 아내 이스르엘 여자 아히노암과 나발의 아내 되었던 갈멜 여자 아비가일과 함께 하였더니"
☞ 가족과 같이 안일이란 육신의 편함을 기본으로 한다.
4. 강한 안일성을 쌓게 된다.
6절 "아기스가 그 날에 시글락을 그에게 주었으므로"
☞ 안식과 안일은 다르다.
☆ 안일의 결과
1. 원수의 포로와 도구가 된다.
12절 "그는 영영히 내 사역자가 되리라 하니라"
☞ 사단의 시험이 틈타는 원인은 신앙적인 안일 때문이다.
2. 복을 빼앗긴다.
30:1 "아말렉 사람들이 이미 남방과 시글락을 침노하였는데"
☞ 가족과 재물 등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의 상징이다.
강해
본문은 다윗이 사울을 피해 블레셋으로 간 내용입니다. 앞 장에서 다윗이 사울을 또 다시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창과 물병만 가지고 와서 선으로 악을 갚은 아름다운 믿음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좀 내용이 다릅니다. 다윗이 인간의 생각으로 시험에 빠지는 내용입니다.
그는 사울이 다시는 죽이지 않겠노라는 축복까지 받았지만 또 다시 피신길에 오릅니다. 그것은 아무리 사울이 회개했어도 또 다시 변신할 줄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 사울이 변개하기를 몇 번이었습니까? 그 동안 다윗을 죽이지 않겠다고 요나단에게 몇 번이나 맹세했고, 다윗에게 직접 맹세하기를 과연 몇 번이었습니까?
그러나 또 다시 변심하고 변심하고 변심하니 아무리 좋은 마음을 동원하여 사울을 믿을래야 믿어지지도 않을 뿐더러 이제는 다윗도 지칠대로 지쳤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장 안전한 길을 선택합니다.
그것은 전에 한 번 간 적이 있었던 블레셋의 가드왕 아기스에게 망명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블레셋 왕은 그를 대 환영합니다. 왜냐하면 전에는 사울의 충실한 신복으로 알았기에 의심했지만 이제는 사울에게 쫓기고 쫓기는 원수관계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도 비록 거짓이지만 그 점을 부각시켜 아기스에게 신임을 얻으려고 자기 모국인 유다를 치러가는 것처럼 꾸밉니다. 그러나 실제는 유다가 아니라 아말렉이었습니다. 그러자 아기스 왕의 신임은 더욱 두터워지고 완전한 자기의 신하로 삼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치려고 군사를 모집하고 다윗에게 그 전쟁에 동참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정말 문제가 커졌습니다. 그 동안은 거짓이었지만 이제는 앞장 서서 자기 동족과 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순간에 하나님께서 도우셨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으셨더라면 그는 꼼짝없이 원수의 포로가 되고 원수의 도구가 되어 자기 백성을 죽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잠시 사울을 피해 보겠다고 고안한 생각이 이처럼 큰 문제까지 올 줄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영적 교훈은 무엇일까요?
이 말씀은 육신이 편하기 위해서 육신의 안일을 구하다가는 나중에는 완전히 사단의 포로가 되고 나아가 사단의 무서운 도구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인들 끼리 원수가 되고, 주의 종들끼리 원수가 되고,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상처 주고, 서로가 서로를 물고 뜯고, 서로가 서로를 죽이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교회를 흩어버리고 파괴하는 상상치 못하는 일을 저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육신의 알일이 무서운 것입니다.
나는 그렇지 않으리라! 고마운 말이긴 하나 사단의 시험이 들어오면 달라지는 것입니다. 사단이 누구로 하여금 용서가 어려운 또 어떤 실수를 저지르게 해서 사람을 갈라놓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또 아무리 착한 심성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사탄의 시험 앞에서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오직 길은 깨여 기도하므로 사단의 시험을 방지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이 아기스의 충실하고 충실한 부하가 될 뻔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어떤 일이든지 말씀으로 상황을 판단하고 기도운동을 통하여 시험을 이겨낼지 언정 사단의 충실한 신복은 되지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하나님의 은혜로 거기까지는 가지 않았고 전쟁을 했어도 자기 동족을 치지 않았고 아말렉이나 기타 원수들을 쳤음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보고된 바로는 이스라엘을 쳤으니까 의미상으로는 분명히 동족을 친 것입니다.
10절에 "아기스가 가로되 너희가 오늘은 누구를 침노하였느냐 다윗이 가로되 유다 남방과 여라무엘 사람의 남방과 겐 사람의 남방이니이다" 했습니다. 의미상으로란 이것이 주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럼 유다가 누구입니까? 이스라엘의 영적 선두지파가 아닙니까? 또 여라무엘이 누굽니까? 유다가 다말에게서 낳은 헤스론의 후손으로 메시야 계통에 속하는 특별한 자손입니다.
그러니까 쳐도 보통 대상들이 아닙니다. 그리고 겐 족속도 그래요. 겐족속은 선조 아나답의 유언을 따라 300년 동안 술 한방울 마시지 않고 우상 숭배하지 않고 여호와만 섬기는 특별한 신앙의 족속입니다.
여기서 보여주는 것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육신의 안일을 따르다가는 내 영혼을 죽이는 엄청난 일을 저지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몸은 편하고 편리한 것을 좋아합니다. 칼빈 선생은 교회를 천국생활의 훈련장이라고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생활이란 너무 심해서는 안되지만 어느 정도 참고 애쓰고 힘이 들게 되어 있습니다.
개인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신앙을 올림픽의 마라톤에 비유했습니다. 마라토너들의 말을 들어 보면 자기와의 싸움이랍니다. 이런 경주자의 분투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싫어서 간편 위주로만 나가버리면 영적으로 큰 시험에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몸은 좋다고 합니다. 아 참 그것 간편해서 좋다. 그러나 영혼은 병들고 썩어가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단의 시험이 찾아옵니다. 어려움이 생겨납니다. 오해하는 일들이 생겨납니다. 일군들이 사라집니다. 이 문제 해결하고 나면 저 문제가 생기고 저 문제 해결하고 나면 또 다른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므로 가장 무서운 것이 육신의 안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55장에 어찌하여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고 했는데 기도 없는 수고들은 헛수고라는 사실입니다. 또 성경은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편한 것이 편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에 그친다면 다행이고 더 육신의 안일이 계속되면 블레셋이 이제 이스라엘을 침공할 군대를 모집하듯 주의 백성들끼리 미워하고 상하고 치고 죽이는 비극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이렇게 육신의 안일을 갖게 되는 더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일까요?
다윗이 블레셋에 안주한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사울의 반복되는 상황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은 아무리 신앙의 사람이었지만 사울의 반복되는 상황 앞에서 그만 기가 질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 상황이란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반복이란 사람에게 묘한 심리를 가져다가 줍니다.
예를 들면 무엇이 한 번 뿐이라면 밤을 새워도 좋습니다. 바울이 자기 생애의 마지막 순간 빌립보를 떠나면서 철야 강론을 할 때 밤을 새워 강론했어도 사람들은 온 밤을 새워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항상 이렇게 할 것이라 한다면 상황은 달라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반복에서 오는 피곤한 심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피곤하지 않기 위해서는 반복심리를 단순심리로 바꾸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마 6:34에서 오늘만 생각하라는 말씀이 바로 단순심리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언제나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종말론적인 심정으로 살아야 합니다.
불효자가 죽기 전에 부모 앞에 가서 맛있는 음식을 대접해 드리고 절을 올리는데 얼마나 절을 잘하는지 세상에서 그 만한 효자가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처럼 나에게 오늘밖에 없다는 심정으로 살면 모든 일에 성공적이고 피곤하지 않게 됩니다.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가족을 대해 보십시오. 그 만큼 아름다운 가정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또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기도해 보십시오. 어쩌면 기도가 그렇게 또렷 또렸 잘 되고 시간 가는지 모르고 마음으로 그려지는지 자신도 놀랄 것입니다. 그 심정으로 하루 하루를 살 때 어찌 충실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 심정으로 이웃을 대해 보고 그 심정으로 사업을 해 보십시오. 다 성공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심정으로 신앙생활을 할 때 신앙생활도 성공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날마다 할 것이라는 반복심리가 작용하는 순간 우리는 모든 것을 피곤해 하고 역겨워 하며 힘을 잃고 말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은 사울의 반복 앞에 지치고 말았습니다.
<결론>
성도 여러분! 다윗처럼 지치지 않도록 오늘 하루만 생각하고 삽시다.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합시다. 하나님의 날은 언제나 오늘입니다.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 결코 육신의 안일에 빳지 않게 될 것이고, 나아가 사단의 시험에 들지 않을 것이며, 더 나아가 사단의 도구는 절대로 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사단의 충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충신이 되는 귀한 성도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