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 리 글
2008-03
3 월
박병민목사(새터공동체)
지난겨울은 그렇게 춥지 않았다. 그런데도 한유(閑遊)한 나에게는 오히려 겨울이 길다. 봄은 한해의 시작과 함께 라서 그런지 사람들은 그 봄이 새로운가 보다. 그래서 새봄이라는 말들을 한다. 그 봄이 우리를 서성이게 한다. 봄은 불어대는 바람결을 타고 우리들 곁을 찾아든다. 찾아온 봄을 맞이하기 위해서 나들이삼아 오늘은 내가 그 가운데로 들어가야 하겠다. 먼 마을길을 걷다보니 오랫동안 메마르고 건조한 날씨 가운데도, 좁아진 여울목으로 흐르는 물의 유속이 세찬 곳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그 소리가 귀에 들려진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그 물 흐름은 유유하지 않고, 급속한 것이 마치도 세파(世波)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기세가 나에게는 못마땅해 보인다. 나는 본디 물 흐르는 데로, 또는 깊은 물은 조용히 흐른다는, 뭐 그런 것을 좋아한다. 아니 나에게는 그 순리(順理)라는 것을 역리(逆理) 내지, 역행(逆行)할 엄두를 지니고 있지 못하다. 그저 그날그날을 자연스러운 것에 순응하면서 살아가는 유순한 사람이라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 물가 기슭에는 버들가지가 새움을 한창 트이고 있다. 그 버들강아지의 보송보송하면서 옅은 녹색에 희 부연한 모습이 나의 눈과 온몸을 그곳으로 끌어당긴다. 버들강아지가 한들한들 하다는 동요가 저절로 불려진다. 그러면서 여자 이이들이 고무줄놀이를 하면서 부른 것으로 기억이 되는 봄맞이 가자라는 내용의 다른 노래도 흘러나온다 “동무들아 오너라 봄맞이 가자. 너도 나도 바구니 옆에 끼고서. 달래 냉이 씀바귀 나물 캐오자. 종달이도 높이 떠 노래 부르네. 동무들아 오너라 봄맞이 가자. 시냇가에 앉아서 다리도 쉬고. 버들가지 만들어 불면서 가자. 꾀꼬리도 산에서 노래 부르네”
인디언들은 달력을 만들 때에, 그들은 주위에서 보여 지는 풍경의 변화나 마음의 움직임을 주제로 하여 그들의 달력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3월을 다음과 같은 말들을 써서 표현하였다고 전해온다.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달, 개구리의 달, 강풍에 죽은 나뭇가지 쓸어가 새순을 돋게 하는 달”등으로 불렀다고 한다. 봄은 보옴에서 연유된 말이다. 봄을 말하는 스프링(spring)은 뛰다. 튀기다. 싹이 트다라는 의미다. 봄기운으로 인해 만물이 움트고, 솟아오르고 있다. 젊은이들을 말하는 청춘(靑春)은 새싹이 파랗게 돋아나는 봄철을 의미한다. 예레미야는 여호와를 의지하는 사람은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고 말하였다.(예레미야 17:8). 물가에 깊이 드리워져있는 버들가지가 연상 된다(이사야 44:4). 봄이 되면 저변(底邊)의 동식물은 하늘을 향하여 땅을 박차고 비상한다. 어느 사람은 성가신 일상을 이렇게 말했다. 십대 아이가 반항을 하는 것은, 그 아이가 가출하지 않고 집에 잘 있다는 것이고, 고쳐야 될 하수구가 있고, 닦아야할 유리창이 있다면 그것은 집이 있다는 뜻이고, 지불해야할 세금이 많다는 것은 수입이 있다는 뜻이고, 살이 쪄서 옷이 안 들어간다면 그것은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는 뜻이고, 옷이 산더미처럼 빨래할 것이 쌓여있는 것은 그만큼 입을 옷이 많다는 뜻이다.
3월의 봄은 잊혀지지 않고 눈앞에 선뜻 보는 것 같이 또렷한 삼삼하기 시작하는 철이다.
공동체 이야기
종횡무진(縱橫無盡)
오늘은 2002년 11월에서 2004년 11월까지 2년여를 함께 생활하시다 대전으로 가신 지 선생님께서 우리들에게 들르러 오셨다. 우리들은 요즘 들어 밤마다 갖는 기도회시간에 예전에 우리들과 함께 생활하시다가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겨가신 분들을 마음에 담고 그분들을 위하여 기도의 시간을 갖는다. 그런데 마치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듯이 반가운 그분이 오셨다. 선생님이 자장면을 사주셔서, 식구들이 함께 맛있게 먹었다. 논어(論語) 첫 머리에는 그런 말이 있다. 學而時習之 不亦說乎(학이시습지 불역열호).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유붕자원방래 불역낙호).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 즉, 배우고 늘 익히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먼 길 마다않고 찾아주는 친구가 있으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는다면, 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우리네는 수중에 지닌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집을 사려고 한다. 요사이는 집은 없어도 좋으니 자동차만 있으면 된다는 식으로, 젊은 사람들은 집보다는 자동차를 더욱더 선호한단다. 우리는 자동차가 없으니, 아니 있어도 기술이 없어 그것을 부리지 못하는 처지니, 요즈음시대에 두문불출(杜門不出)이 제격에 맞는 말이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의 종횡무진(縱橫無盡)을 뒤따르지 못한다. 즉 행동이 마음 내키는 대로 자유자재이지가 못하다. 어느 사람은 역마살이라도 낀 듯 매사에 야생마(野生馬)처럼 종행무진으로 날뛰는가하면, 반면에 유유자적(悠悠自適)하는 이들이 있다.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종적(縱的)으로 삶을 살아가려고 한다. 그래서 앞만 보고 내어달린다. 그런 사람들은 성취 지향적이다. 신앙의 입장에서 보면 자가당착(自家撞着)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층 고차원적인 삶은 배려가 동반되는 횡적(橫的)인 삶이다. 이곳에 어머니와 형제들이 뵙고자 찾아왔다는 사람들의 말에, 예수님은 다음의 말씀을 하셨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마가복음 3:35). 바로 범우주적인 수용적(受容的)이고 관용적(寬容的)인 말씀을 하신 것이다.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유붕자원방래 불역낙호). 먼 길 마다않고 찾아주는 친구가 있으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그런 우스갯소리를 한다. 오라는 곳은 없어도, 갈 곳은 많다고들 한다. 교회 교역자들은 가정을 방문하는 심방(尋訪)이라는 것을 한다.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그런 얘기를 하신 때가 있었다.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마태복음 10:12-13). 물론 유숙(留宿)의 값으로, 혹 머무르게 될 집의 평안을 빌라는 말이다. 로마서 12:15에서는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우리는 하늘을 우러러 종적(縱的)여야하고, 이웃을 향하여 횡적(橫的)이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천방지축(天方地軸)이 아닌, 종횡무진(縱橫無盡)의 삶이다.
공 동 체 소 식
. ”
☻ 새터 공동체 가족
채경일 주송례 진영택 김정화
박소웅 박정임 라홍채 최성재
최영애 정무래 박종만 박병민
진선미 박한솔 박진솔
* 여러 가지의 육신과 정신적 아픔 중에 있는 새터공동체 식구들의 건강한 몸이 되기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세요.
* 2008년 3월 23일 부활절에 학산교회(김영윤 목사님) 중고등부와 집사님들이 새터공동체를 방문하여 달걀. 떡. 과자. 청소. 워싶덴스 등으로 함께하여 주셨습니다.
☻ 기도하며 함께 하신 분들
이원교회.충전교회.신평교회.김기홍.양오석.최선희.전응림(박대승).정무래.최영애.라홍채.박종만.진영택.최성재.대전성남교회중등부(김영균외7인).진주문교회여전도회(4인).유상현외2인.채윤기(박현실).대전충남지방통계청(임명선).추부제일교회.수영교회.대전성남교회.튼튼영어대전동구(연월순외4인).진명구.세광교회.금성교회.살림교회(박상용외7인).대전성남교회중등부(김영균외19인).신건태.대덕교회.금산군청.장진성.진주문교회여전도회(유운걸외9인).동춘교회6여전도회.김현숙외3인.어려운사람들을사랑하는청춘같은모임(노흥방.김인환.이영국외8인).주식회사EG(이광형).대덕교회.모란회(7인).대전노회.포도원교회(김춘근.임광옥).지명수
(호칭은 생략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