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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장 우리의 사랑할 권리
여성의 삶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나는 자기애를 사랑하고 사랑받고자 하는 욕구에 반하는 것이라 충고하는 자기계발서들의 조언에 대한 응수로 감히 이렇게 선언한다. 진실로 어떤 여성도 자기 자신을 먼저 사랑하지 않고서는 온전히 사랑받을 수 없다! 남성 중심적이고 여성 혐오적인 문화를 옹호하는 이들은 여성에게 자신을 부정하고 자신의 발전보다 남을 즐겁게 하는 데 힘쓰라고 말한다. 여성이 자기 안녕을 추구하다 보면 극단으로 치우친다는 것이다. 자신을 사랑하려는 여성의 권리와 욕구를 주장하다 보면 그것이 곧 모두가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있는 길인 듯 현혹될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의 꿈과 파트너십을 갈망하느라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는 메시지다.
사랑은 어떻게 하는지(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자신을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어릴 때 배우지 못해 나중에서야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운 여성은 나이에 상관없이 중대한 어려움에 처하는데, 이는 우리 사회가 아직 여성의 행복을 지지하고 유지하는 쪽으로 바뀌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약 사회가 그렇게 바뀐다면 우리에게 자기애와 자기존중이 부족한 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성인 여성이 자기를 사랑하려면 많은 희생이 필요하다. 자기를 깎아내리거나 지배하는 데 익숙한 경우 특히 그렇다. 이런 사실을 고려하면 자신을 사랑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많은 여성들이 왜 본능적으로 두려움에 사로잡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의미 있는 변화를 얻어내려면 상실을 마주해야 한다. 아무리 그래야만 하는 것이더라도 뭔가를 포기할 때에는 언제나 위험부담이 있다. 그럴 때 보통 우울증을 앓곤 한다. 베스 베나토비치가 인터뷰한 여성들은 모두 변화를 끌어안기 위해 거쳐야 했던 두려움과의 사투에 대해 이야기한다. 인터뷰에서 일본계 미국인 작가 재니스 미리키타니는 이렇게 말한다. "변화는 많은 사람에게 쉽지 않다. 사람들은 종종 나쁜 현실을 변화보다 선호한다. 즉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긍정적인 힘보다 이미 알고 있는 사악함을 감수하려고 한다." 많은 여성이 그런 상황에 정체되어 있기를 선택한다는 사실은 왜 그들이 사회와 마찬가지로 완전한 자아실현을 이뤄 자신과 타인을 사랑하는 여성들을 의심쩍어하며 공격하는지 설명해준다.
성공과 자기애가 반드시 동의어인 것은 아니다.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베스트셀러 『내면으로부터의 혁명』은 자존감이 부족해 성취감을 느끼지 못하는 성공한 여성들을 다룬다. 무언가 성취하려 할수록 여성에게는 긍정적인 자기존중과 자기애가 필요하다. “성인이 되어서도 내적 자존감이 낮으면 업무에서의 성취나 인정이 아무리 커도 보상받지 못한다." 긍정적인 토대가 없는 상황에서 낮은 자존감은 어느 시점에 우리의 힘을 약화시킬 것이다. (이것이 저자의 주요 주장이었다.) 일부 성공한 여성도 이 문제에는 취약했는데, 성취를 선택하는 여성이 '여성'이지 못하다고 여겨지는 사회에서 자신이 욕망의 대상에서 배제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이런 감정은 심지어 여성이 의미 있는 관계를 맺고 있거나 결혼한 상태에서도 지속된다. 대학교수로 지내는 동안 나는 사랑받지 못하게 될까 봐 날개를 펴지 않는 영리한 여학생들이 많다는 사실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열아홉 살에 한 남자와 연애를 시작하면서 나는 남자를 만날 수 있음을 일단 증명했으니 이제는 내 지적·예술적 능력을 높이는 데 관심을 돌릴 수 있다는 생각에 매우 행복했고 엄청나게 안도했다. 어깨에 걸린 큰 짐을 벗어 던진 듯한 느낌이었다. 성장기에 나는 부모와 선생님들에게 남자는 똑똑한 여자를 좋아하지 않으며, 고등교육을 받는 것은 나 자신을 더 매력 없는 존재로 만드는 지름길이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그래서 내 지성을 인정하는 남자 동료를 만나자마자 그와 사귀기 시작했다. 한때 남자 연애 상대가 있었다는 사실로 나 자신이 사랑받을 가치가 있음을, 실패자가 아님을 증명했기 때문에 욕망과 파트너십의 문제에서 벗어난 나는 다른 열망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내면에서는 끔찍한 불안을 느꼈다. 불안은 내가 스스로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전까지 나를 떠나지 않았다. 거듭 말하지만 자기애는 자아수용에서 시작된다.
나 자신을 완전히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학대로 인한 유년기의 상처를 치유해야 했다. 이때 진보적인 심리치료와 페미니즘 의식화 모임은 내가 과거에서 벗어나 더 긍정적인 미래를 만드는 법을 배울 수 있게 해주었다. 파트너와의 오랜 관계는 내가 박사학위를 마치고 아이비리그의 명문 대학에서 강의를 맡게 되며 끝났다. 관계를 끝내기로 선택한 건 나였지만, 그 선택은 파트너가 내 성취를 진심으로 지지하고 인정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직장을 얻게 되면 관계가 끝날 거라고 했던 친구의 말이 학위 과정 내내 나를 따라다녔다. 그 친구 말은 파트너가 내 지성을 인정한다고 한 건 내 지적 열망이 단지 열망에 불과했기 때문이라는 거였다. 대학원 생활은 힘들었다. 나는 학위 과정이 모욕과 수치를 반복해서 느끼게 하는 가부장적 가정의 역기능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학위를 받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시간 동안 내 남자 파트너는 누구보다 나를 지원하고 응원해주었다. 그러다 내가 대학에 자리 잡으며 성공한 시점에 그가 지원을 거둬들이자 나는 놀랐고 실망했다. 결국 남자는 똑똑한 여자를 정말로 좋아하지는 않는다는 부모님과 선생님들의 가부장적 예언이 실로 눈앞에 펼쳐진 것만 같았다. 성공을 갈망하는 많은 여성이 이런 감정을 경험했을 것이다. 여성들은 내게 반복해서 경고했다. 내 남자 파트너는 내가 자신의 섹시하고 반항적인 후배인 한, 그리고 자기가 우월한 멘토가 될 수 있는 한내 지성에 신경 쓰지 않지만, 내가 그를 능가하고 추월하면 달라질 것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그가 정말로 지지를 거둬들였고, 나는 내가 뭔가를 잘못했다고 느끼는 등 비이성적인 생각에 사로잡혔다.
특히 성차별적 성역할을 따르다가 자유로운 행동 쪽으로 방향을 튼 여성들이 이와 같은 경험을 했다. 중국에서 태어난 한국인 한의사인 이애자 씨는 약대에서 만난 동료와 결혼했다. 처음에 남편은 그녀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았지만 자신보다 아내가 치료사로서 더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자 자신감을 잃은 듯했다. 그는 난폭하게 굴며 그녀를 배신했다. 뉴욕으로 이주한 후 애자 씨는 한 번에 약사 시험에 합격했지만 자신은 통과하지 못하자 그는 이혼을 요구했다. "나는 그가 나쁜 사람이었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그저 자기 아내보다 열등하다는 생각에 놀라고 자존심이 상한 거예요. (・・・) 그는 자동차와 가구를 가지고 떠났어요. 나에게는 3달러와 아이 셋이 남았고요. 이런 식으로 남겨진게 너무나 부끄러웠어요. (・・) 진지하게 자살을 생각했지요."파트너에게 정서적으로 버림받은 여성은 대부분 관계가 끝날 때까지 파트너의 성차별주의보다 성공하려던 자신의 욕망이 문제였다는 듯이 자신을 비난하는 익숙한 소리에 사로잡힌다. 관계가 실패한 원인을 자신에게 돌리다 보면 일에 서의 성취에 대해 느껴야 할 기쁨과 자신감마저 고갈된다.
여성들이 일터에서 남성과 동등함을 증명하자 이런 성공을 약화시키는 전략 또한 심해졌다. 성공을 갈망하는 여성이 남성 혐오적이고 여성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건 성차별주의자 남성만이 아니다. 그런 여성들은 남녀 모두에게괴물이나 악마 혹은 무자비한 포식자로 여겨지며, 그들의성취 또한 '쌍년의 성공bitch goddesses'으로 간주된다. 페미니즘 사상가들은 여성을 사랑하는 정신을 지키고자 강한 여성에대한 이런 식의 전형화를 비난하며 그런 반동적 전략이 더높은 성취를 갈망하는 여성들의 의욕을 꺾는다고 지적했다. 그들은 여성들이 동료 남성들과 같은 기술과 전략을 사용해 일을 해내더라도 '까탈스러운' 방식으로 여겨진다는 점을 지적했다. 무뚝뚝하고 철저하고 직설적인 남성은 단호하고 유능하다고 여겨지지만, 동일하게 행동하는 여성은 싸가지 없고 공격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마찬가지로, 강력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여성이 주목을 끌면 종종 들어서는 곳마다 공기를 전부 혼자 빨아 마시는 과시적 행위'로 묘사됐다. 주목을 끄는 여성에 대한 이런 표현은 여성 동료들의 입에서 처음 등장했다. 이후 이 표현은 말 많고 센 여성을 묘사하는 데 종종 쓰였다.
강한 여성이 공기를 모두 빨아들여 다른 사람을 숨 막히게 한다는 묘사는 굉장히 폭력적인 표현이다. '생명을 주는 자'라는 관습적인 여성의 이미지와 대조적인 이 이미지는 왜곡된 여성상을 환기한다. 이때 강한 여성은 단지 양육자가 아니기를 선택한 데 그치지 않고 남의 생명을 빼앗는데 즐거움을 느끼는 포식자가 된다. 여성이 다른 여성을 깎아내릴 때 사용되는 이런 표현이 나는 매번 불편했다. 강한 여성에 대한 여러 가지 부정적 묘사들과 마찬가지로, 이 이미지의 근원에는 권력과 성공을 지향하는 여성은 사랑스럽거나 삶에 긍정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관념이 있다. 강해지기를 선택함으로써 그들은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여성으로서의 기반 바깥으로 곧장 밀려난다.
많은 것을 성취한 강한 여성에 대한 부정적이고 전형적인 성차별적 이미지에 페미니즘이 열심히 도전하고 있지만, 이런 이미지는 여전히 우세하다. 이런 전형적 이미지가 대중문화의 상상력을 강력하게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독립적이고 강하며 성공을 원하는 여성이 '쌍년'이라는 생각은 쉽게 받아들여진다. 성공한 여성에 대한 성차별적 전형을 굳히는 이런 이미지를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문제다. 한편 젊은 여성들은 자아실현과 성공을 택할 때 당할 처벌과 고통을 굳이 대면하지 않을 방편으로 '쌍년' 이미지를 받아들이려고 한다. 물론 '착한 여자'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뛰어넘으려는 여성들에게는 대담함이 요구되지만, 이런 이미지가 바깥에서의 전통적 성차별적 개념을 대체하지는 못한다. 전통적 성차별적 개념은 여성을 성녀 혹은 창녀, 성스러운 양육자 혹은 이기적인 쌍년으로 나눈다. 쌍년이 되기를 택하는 것 역시 실질적으로 성차별주의가 규정한 경계 안에머물기를 택하는 것이다. 이때 그녀는 반군도 혁명가도 아니다. 단지 강해지려면 쌍년이 되기를 감수해야 한다고 여기며 성차별적 개념에 굴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엘리자베스 워첼의 비치는 성공한 젊은 여성이 공적영역에서 쌍년 페르소나를 받아들이는 예를 보여준다. '매'혹을 만들어내기'라는 제목의 서문에서 그녀는 이렇게 선언한다. "여성이 페르소나를 만들어내는 공적 영역에서 소녀가 자신의 힘과 확고함, 자주성-자신을 자신으로 만드을 선언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말이란 분명히 그녀의 부모를 울게 할 만한 나쁜 것이다" 워첼의 선언과 대조적으로내면 깊이 자기표현을 원하는 대부분의 소녀와 여성은 나쁘게 보이고 싶어 하든 그렇지 않든 지배 문화와 맞서야 한다. 그리고 그 문화에는 물론 그들의 부모도 포함된다.
나는 단지 너무 멀다는 이유로 스탠퍼드 대학에 가지말라는 부모에게 반항했지만, 맞서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내가 원한 건 그들의 지지였다. 그들의 소망에 맞서는 건 두렵고 심리적으로 위축되는 일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모든 여성이 저항하지 않고도 따라서 자신을 고립시키고 불안하게 만들지 않고도 정신적·지적으로 성장할 수있는 세상에 살기를 원한다. 나는 모든 여성의 자기애와 확신 어린 태도를 쌍년의 이기심으로 만들려고 혈안이 되어있는 세상에서 성장해야 한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워첼은"쌍년이 역할모델이자 중요한 아이콘이 되는 시대 분위기를 감지했다. 쌍년 페르소나를 수행하는 것은 잠시 동안 즐거울 수 있겠지만, 곧 그것이 자신의 위치를 표시할 뿐 아니라 그 자리에 구속시킨다는 사실을 재확인하게 된다. 그리고아직 자신을 온전히 발산하지 못한 젊고 섹시한 여성의 쌍년됨은 비난받고 처벌받고 미움받기 일쑤인 성숙한 성인 쌍년보다 더 용인된다. 자신을 사랑하는 여성이라면 결코 쌍년이 되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여자를 쌍년이라고 여긴다면 현 상황을 벗어나려는 여성의 노력을 병적풍조의 유행으로 보는 성차별적 관념을 유지할 뿐이다. 쌍년 페르소나를 받아들인다면 강한 여성도 사랑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셈이다. 쌍년으로 불리는 게 근사하다고 생각한다면 사랑에 대한 경멸을 훈장처럼 여기는 것과 같다. 정서적 성장과 보살핌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가부장적 남자를 따라 하며 그들은 '센' 페르소나를 즐긴다. 나이가 젊든 더 들었든, 쌍년 카테고리에 안주하는 여성들은 여전히 성차별주의적 여성 혐오를 버리지 못했다. 모든 여성이 용기와 기품을 가지고 자신의 권리를 요구할 수 있는 길을 만드는 대신, 그들은 온전히 자아실현의 길을 택한 여자를 쌍년으로 만드는 성차별적 관념을 지지하며 가부장제를 돕고 있다.
스스로를 사랑하는 여성은 결코 부정적 카테고리를 힘의 상징으로 포용하지 않는다. 때로 적극적인 행동 때문에 다른 이들에게 쌍년으로 비치는 상황이 오더라도, 해방된 여성은 발전적인 대응과 무례한 행동 사이의 차이를 안다. 그런데 실로 누구도 성공한 쌍년이 사랑을 하는 사람이리라 예상하지 않는다. 자기표현을 중시하고 권력과 성공을 원하는 여성들은 사랑에 대한 지식이나 욕망이 부족하다는 추정 때문이다.
대중문화는 성공한 커리어우먼이 사랑에서는 실패하리라는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전한다. 일하는 여성을 주눅 들게 하는 가장 강력한 힘은 '페미니스트' 커리어우먼을 이기적이고 사악한 나르시시스트로 재현하는 미디어다. 사람을 죽일 듯 사악한 커리어우먼 인물형은 영화 <위험한 정사 Fatal Attraction>에서 처음 만들어진 후 <어느 멋진 날>과 같은 가족영화 속 이혼한 워킹맘이나 <왓 위민 원트>의 광고회사 간부가 형상화하는 보다 유순한 이미지로 계승되며, 사회적으로 많이 성취한 여성에게는 심리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메시지를 설파한다. 그리고 사랑을 하든 사랑을 받든 간에 우리는 자신이 가치 있고 욕망할 만하며 따라서 여성적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영화 <위험한 정사>는 영향력 있는 싱글 전문직 여성은 남자가 되려고 한다는 편견을 강화시킬 뿐 아니라(그녀는 알렉스라 불린다), '여성적 특성을 가지고 있는 그녀는 결국 건강한 방식으로 사랑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알렉스가 성차별적 관점에서 '완벽한 여성성을 체현한 좋은 아내이자 엄마 역할의 여성에게 살해되는 전개는 성차별적 관념을 거부한 데 대한 응징이다. 말하자면 사랑을 찾는 그녀의 탐색이 광기로 그려진 것이다. 영화는 알렉스가 그저 성차별주의가 규정하는 여성성에 머물렀다면 사랑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가부장적 메시지를 전하면서 관객으로 하여금 그녀가 처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도록 부추긴다. 마샤 밀먼은 '사랑에 관한 일곱 가지 이야기』에서, 영화 속 글렌 클로스가 연기한 알렉스가 살해당하는 장면에서 관객들이 보인 반응을 곱씹는다. “영화에서 마이클 더글러스의 아내가 남편을 칼로 찌르기 전에 글렌 클로스를 먼저 죽이자 극장에 있던 많은 사람이 환호했다. 괴물로 변한 클로스의 캐릭터에 동정을 표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괴물 같은 행동을 할 수 있는지를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알렉스는 미국 영화사에서 가장 미움받는 여성 캐릭터 중 하나로 기억될 것이다. <왓 위민 원트>에 나오는 광고회사 여성 간부는 자신이 처한 운명에 저항하거나 항의하지 않고, 마초인 동료 남성 포식자가 페미니스트로 변해 그녀를 인정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자신이 원하는 건 똑똑한 동시에 사랑스러운 존재로서 자신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라고 온순하게 말한다. 그녀는 쌍년으로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여성이 할 수 있는 것은 나쁜 년, 쌍년의 정체성을 포용할 뿐이라는 생각과 성공한 여성이 정서적 요구를 표현하면 여성의 영향력이 약화되리라는 페미니즘의 억측이 만날 때, 사랑을 향한 여성의 탐색은 병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사랑을 향한 탐색은 실패 혹은 나약함의 신호로 여겨졌다. 실제로는 여성이 사랑보다 성공을 택해야 한다는 생각을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심리적으로 온전하다는 증거다. 힘 있고 스스로를 사랑하는 여성은 자신의 정서적 필요를 돌보는 일이 필수이지만, 그것이 동료애나 파트너십의 자리를 대체하는 것은 아님을 알고 있다. 성공한 중년의 싱글 여성 다수는 절박해 보이지 않고서는, 즉 동정을 받지 않고서는 애인을 가지고 싶다는 욕망을 공공연히 이야기할 장소가 거의 없다고 느낀다. 나 역시 내 삶에서 사랑을 주고받는 일의 중요성을 공적으로 이야기했을 파트너를 원하는 욕망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그 감정이 조롱당하거나 한심하게 여겨지는 느낌을 받았다. 놀랍게도 동료와 친구들은 종종 사랑이나 파트너십의 중요성에 관한 내 말을 농담으로 여겼다. 일에 많은 에너지를 쓰기로 한 여성은 그 선택을 사랑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리라 생각하는 것이다. 그들은 여성이 사랑과 일 양쪽에 열정적으로 헌신할 수 있다는 생각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두 가지 열정이 서로를 진작시키고 발전시킨 경우를 보지 못한 그들은 사랑에 대한 내 권리를 부정하고 싶어 했다. 세간의 인식과 달리 일에 대한 열정적 헌신은 언제나 사랑의 중요성에 대한 내 인식을 강화시켰다. 내 책상에는 일과 사랑 사이의 연대에 대한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지혜로운 글귀가 적힌 카드가 놓여 있다. “다른 많은 것에 대해서도 그러하듯이 사람들은 인생에서 사랑이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 오해한다. 사람들은 오락과 재미를 일보다 더 행복한 것으로 여겨 사랑을 오락과 재미로 만들었다. 그러나 일만큼 행복한 것은 없으며, 지극한 행복인 사랑 역시 일과 다름없다." 의미심장하게도, 성공한 여성이 삶에서 사랑과 성공의 중요성을 주장할 때면, 일을 택한 것에 대한 대가로사랑을 부정하라는 성차별적 사고를 마주하게 된다. 내가 일보다 사랑을 우선시하는 이유는, 건강한 자기애가 없다면나의 가치를 비롯해 일을 통해 성취한 모든 가치가 저평가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자기애는 나를 지탱하는 힘이지만 공동체 내에서 잘살아가기 위해서는 타인의 사랑 또한 필요하다. 통념과 달리 권력이 있고 성취욕이 있는 여성들도 다른 이들만큼 사랑을 원한다. 우리 모두 사랑이 모든 영역, 특히 직업적 삶 또한 진작시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연인을 갈망한다. 잘못된 파트너를 선택하면 자존감이 약화되듯, 우리를 사랑하는 파트너를 고르면 끝없는 공격을 받더라도 자존감을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중년에 이른 여성은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내면으로부터의 혁명』 초판 출간 1년 후 개정판에 후기를 첨부해, 그녀의 글을 '약함'의 신호로 간주하며 책의 상징성을 약화시키려는 미디어의 공격에 대해 밝혔다. 초판에 대한 독자들의 긍정적 반응이 아니었다면 그런 미디어의 격렬한 공격은 성공했을 것이다.
내가 사랑에 대해 쓰려고 할 때, 나를 인터뷰한 기자들은 하나같이 내가 '유해진' 거냐고 물었다. 남자 작가가 사랑에 대한 책을 내도 이런 질문을 할까? 그 누구도 존 그레이나 존 웰우드, 존 브래드쇼 혹은 토머스 무어가 사랑에 대해 글을 썼다고 해서 부드러워졌냐고 묻지 않는다. 그들은 부드러워질 여지가 있을 만큼 경직돼 있다고 애초에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향력 있는 여성, 특히 지적인 여성들은 언제나 정서적으로 결핍되어 있다는 정형화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여성들의 비평적 위트와 지혜는 종종 날카로운 지적 영리함이나 다른 문화에 대한 정서적 이해에서 나온 통찰 대신 내면의 비정함, 타인에 대한 공감 부족의 증거로 여겨진다. 독자들은 사랑에 관한 내 글을 지적 성장에 대한 증거 혹은 예지력 있는 통찰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성차별적 사고는 그 경험을 비하하고 사랑에 대한 비평적 사고를 유약함이나 일탈적 행위로 여기게 만든다.
강력한 공격과 배신은 자기애가 강한 여성의 자존감에 타격을 줄 수 있다. 인종과 계급을 막론하고 영향력 있는 여성은 언제나 공격당한다. 자기를 사랑하며 사회적 성취감도 맛본 여성은 잔인한 공격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들의 보살핌에 의지한다. 우리는 사랑의 중요성을 말하는 데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아야 한다. 나는 사랑하는 이들에게 종종 모든 테러리스트의 제1원칙이 사람을 고립시켜 정신을 파괴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많은 여성은 사랑받지 못한 채 혼자 남겨질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여성의 자아실현이라는 페미니즘적 과제를 외면했다. 물론 여성성에 대한 가부장적 평가절하가 훨씬 더 많은 여성을 사랑받지 못하고 홀로 남게 한다는 사실은 아이러니다.
영향력 있는, 자아실현을 이룬 여성들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유대에 의지한다는 사실을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내가 이루어놓은 성취들에 기뻐하고, 나의 존재와 생활 방식에 만족한 채로 평온한 삶을 맞이했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다. 그리고 동반자가 없다고 해서 내 삶의 즐거움이 감소되지는 않지만, 만약 사랑하는 파트너와 함께라면 즐거움은 커질 것이다. 사랑하는 상대와 관계 맺고 있는 내 주변 여성은 모두 그 관계가 가부장제의 공격에 계속해서 저항하고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게 도와준다는 데 동의한다. 수많은 페미니즘 사상가와 운동가, 예술가와 작가들은 가부장적 표준에 저항하고자 하는 여성이 고통받기를 바라는 무심한 대중에게 공격받아 고립되어본 적이 있다. 연대할 수 없는 여성들은 아프고 외로웠으며 고통받았다. 온전한 자아실현을 이루고 사랑을 알고자 하는 권리는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결코 사랑을 알 수 없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많은 여성으로 하여금 가능한 모든 노력을 해보지 못하게 만든다. 그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그들은 가능성을 확인하고 진정한 만족을 위해 꼭 필요한 자기애의 토대를 만들어 사랑을 끌어올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여성이 선택에서 두려움의 영향을 받는다. 그들은 남자를 만나는 데 방해가 될까 봐 자아를 위한 작업을 거부하며, 심지어 그 모든 희생 뒤에 홀로 남은 자신을 발견한다. 그런 발견은 각성의 순간이 될 수 있다. 몇몇은 고통스러운 과거로 돌아가지만, 대부분은 한 번도 실현되지 않았거나 잃어버렸던 자기 자신을 회복한다. 종종 여성들은 사랑을 원할 경우 불가피하게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랑을 포기한다. 안된 일이다. 그들을 헤매게 한 것은 사랑이 아니다. 자기애가 없이는 사랑할 준비가 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은 온전히 자아실현을 이루어낸 여성,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여성 곁에 더 가까이 존재한다. 이는 자기를 사랑하며 영향력 있는 여성들이 모두 가졌다'고 떠벌리지 않으려고 소중한 보물처럼 간직해둔 좋은 소식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것을 가질 수는 있지만 그걸 한번에, 혹은 우리가 원하는 순서대로 가지기는 어렵다. 이것이 바로 우리 삶의 마법이자 비밀스러운 부분이다. 모든 여성은 자신을 사랑으로부터 차단하는 대신 사랑의 찬가를 불러야 한다. 사랑은 우리가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도록 자유롭게 해주고 부끄러움이나 가식 없이 다른 사람들에게 열려 있게 만든다. 연인은 없지만 사랑하는 사람들로 둘러싸여 죽음을 맞이한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는 자서전 『생의 수레바퀴에서 이 메시지를 세상에 전하고자 했다. "사랑이 있다면 모든 것은 견딜 만하다. 나는 당신이 더 많은 사람에게 더 많은 사랑을 주기를 소망한다. 유일하게 영원한 것이 있다면 바로 사랑이다." 사랑을 향한 여성의 탐구는 이렇듯 인생에 관한 모든 것이다.
사랑은 꿈의 집을 짓기 위한 가장 근본적인 토대다. 그 집에는 방이 여럿 있다. 관계는 집의 일부지만 모든 것은 아니며 모든 것이 될 수도 없다. 관건은 균형 잡기다. 균형 잡힌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떤 여성도 사랑의 중요성을 강제로 부정당해서는 안 된다. 영향력 있고 성공한 여성 중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삶에 진실된 사랑이 풍부하다는 사실을 안다. 세상에 우리의 사랑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으면, 우리가 사랑을 원하지 않으며 사랑할 수 없다는 근거 없는 믿음은 계속될 것이고, 이는 다른 여성들을 자기 검열하게 만들며 진실된 사랑이 언제나 우리를 진정한 자신으로 이끈다는 사실로부터 멀어지게 할 것이다. 사랑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면 우리를 찾아낼 것이고, 우리 또한 그들을 찾아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