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 信仰難 太卄二章十四節-
人不可易信. 物亦不可信, 勢位亦不可信, 政治宗敎 皆不可信. 金銀銅鐵亦不可信, 保羅曰 見者暫 而不見者永遠(고後四章十八節).
桑田碧海 更須改 不可愛着. 人不完 故無眞知 亦無眞信. 今日所知者 到明日爲非, 今日所信者 已明日爲虛. 是不完之證也. 故信仰云者 不可置于憾情之上, 亦不可置于交際之上, 亦不可置 于經濟之上, 而獨持者也. 故信仰甚稀 彼通衢之上來往者 日數百万 而其中信者果幾人? 彼劇場及料亭 日常滿員 而敎會則空虛, 信之難如之也. 一尾之鱈産卵 四百万個, 其中完全生育者 不過三四個. 十六億人口 信而得救者 可幾人?
敎人亦然, 慕主之聖 而來者多 參主之苦者少. 主乎主乎者多 入國者少云. 人之思想与主之理想 不同, 如神偶不同矣. 彼物有自然淘汰, 信亦有自然淘汰. 勉者進 不勉者退. 五兩爲十兩者 勉也, 一兩爲一兩 不勉也. 主曰有益有 無益無(太十三章十二節).
人當自勉 勿入於淘汰之中, 信得救也, 無救之信 非眞信. 不入堂者 非不信者也, 雖信 有不信者. 不信者 誰證己者 信者? 誰讓人者 順己者 不能順神, 憎人者 不能愛人, 信不可此分矣. 信之行 如是之難矣. 況神無形 手不可扣耳, 不得聞 人不可易信. 世人皆不可信 而我獨信者 何也? 得眞宝也.
朝鮮人不知者多 凡事落後. 所知者陰陽除厄 供佛拜偶 是所福之便, 不知物理, 不知化學, 不知勤勉, 不知忍耐, 況得福之原乎? 牛腹洞十勝地 皆擊空也. 不知眞福在神, 萬福之原 여호와也.
故信難到 信者有何難? 欲進有障碍, 有誹謗, 有猜忌. 善走者 實破障碍者 爲善走. 善走則 人皆拍手, 信之等善走則 如定看證者 皆揚手歡迎. 僉不知得金之難乎? 掘地鑿石而後 得金, 得金之難可如是, 得救之難 阻碍多. 如太行之難. 願僉位 勿休息, 勿躊躇, 勇往直步可矣.
219. 신앙의 어려움 / 마태복음 22:14-
사람이 쉽게 믿을 수는 없습니다. 만물 역시 믿을 수가 없고, 세력과 지위도 역시 믿을 수가 없으며, 정치, 종교도 다 믿을 수가 없습니다. 금과 은, 구리와 쇠 역시 믿을 수가 없습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고 했습니다(고후4:28).
상전벽해(桑田碧海)는 모름지기 다시 변하니 애착(愛着)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참으로 다 알 수가 없고 역시 참으로 믿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에 알았던 것도 내일이 되어서는 그렇지 않고, 오늘 믿었던 것이 내일이면 이미 헛되기도 합니다. 이것은 불완전의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감정(憾情) 위에다가 세울 수가 없고, 서로 사귀는 교제(交際) 위에다가도 세울 수가 없으며, 역시 경제(經濟) 위에다가도 세울 수가 없으니 홀로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 신앙은 참 드뭅니다. 저 복잡한 네거리에 오고가는 자들이 날마다 수백만이지만 그중에 신자(信者)는 가히 몇 사람이겠습니까? 저 극장과 요정(料亭)에는 매일 만원(滿員)이지만 교회는 비어있으니, 신앙은 이와 같이 어렵습니다. 한 마리의 대구[鱈]는 4백만 개의 알을 낳는데 그중에 완전히 살아서 자라는 것은 불과 서너 개뿐입니다. 16억 인구에 믿고 구원 얻을 자는 몇 사람이 되겠습니까?
교인도 역시 그러합니다. 예수님의 어짊을 사모하여 오는 사람은 많아도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자는 적습니다. 주여, 주여 하며 부르는 자는 많아도 천국에 들어가는 자는 적다고 했습니다.인간의 사상과 주님의 이상(理想)은 같지 않으니, 하나님과 우상이 같지 아니함과 같습니다. 저 만물은 저절로 도태(淘汰)함이 있으니 믿음도 역시 자연히 도태함이 있습니다. 힘쓰는 자는 전진하고 힘쓰지 않는 자는 퇴보합니다. 다섯 달란트가 열 달란트가 된 것은 힘쓴 것이고, 한 달란트가 한 달란트뿐인 것은 힘쓰지 않은 것입니다.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있는 자는 더욱 가지고 없는 자는 더욱 없을 것이라(마13:12).”
사람이 마땅히 스스로 힘써야 하고 도태하는 속으로 흘러들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은 구원을 얻게 함이니, 구원이 없는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천당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는 불신자가 아니라, 비록 믿는다고 말하나 믿지 못하는 자입니다. 불신자는 누가 자기를 신자라고 증거 합니까? 누가 남에게 양보하고 스스로 순종하며, 하나님께 순종할 수가 없고, 사람을 미워하는 자는 남을 사랑할 수가 없으니, 신앙은 이를 나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행함은 이토록 어렵습니다. 황차 하나님은 형체가 없으신데 손으로 만질 수도 없으며, 들을 수도 없으니 가히 쉽게 믿을 수가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가히 믿지 못하는데 나 홀로 믿는 것은 왜입니까? 참 보배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조선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이 많으니 범사(凡事)에 문화와 기술수준이 뒤떨어졌습니다. 아는 것이란 음양(陰陽), 푸닥거리, 부처나 우상에게 바쳐서 복 받는 방편으로 삼을 뿐, 물리(物理)를 모르고, 화학(化學)과 같은 과학은 모릅니다. 근면(勤勉)을 모르고 인내(忍耐)를 모른다면 더구나 복 받는 근원을 알겠습니까? 우복동십승지((牛腹洞十勝地)는 모두가 허공을 칠뿐입니다. 참된 축복은 하나님께 있음을 알지 못합니다, 만복(萬福)의 근원은 여호와입니다.
신앙에 이르기가 어려운 때문에 신자에게 무슨 어려움이 있습니까? 전진하고자 하면 장애가 있어, 비방이 있고, 시기가 있습니다. 잘 달려가는 선수는 진실로 장애물을 부수며 잘 달립니다. 잘 달리면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신앙의 우승자가 되면 우승자로 확증하고 사람들은 손을 들어 환영합니다. 여러분은 금을 얻기가 어렵다는 것을 모릅니까? 땅을 파고 돌을 뚫고서야 금을 얻어냅니다. 금을 얻는 데에도 이와 같이 어렵 듯 구원을 얻음에도 험한 어려움이 많으니 태행로(太行路)의 어려움과 같습니다. 여러분에게 원합니다, 쉬지 말고, 주저하지도 말고, 용감하게 똑바로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메모)
繩繫犧牲于祭壇. 詩百十八篇卄七節 줄이 희생제물을 제단까지 연결 하도다. 시118: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