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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류열풍 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푸른 소년
re: 단군은 비과학적이고, 예수의 애기는 무조건 진실이다?
kangsu2040 (2005-11-15 07:41 작성)
질문자 평
답변중에 자료가 제일많아 채택합니다. 다른분들의 의견 잘 들었습니다.
아래에 환국으로부터 시작해서 배달국 단군조선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개요를 간략하게 하여 올립니다.
궁금하시거나, 불만사항은 연락주십시오.
단군은 신화가 아닌, 우리의 조상님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제발 단군이 신화라는 말을 더이상 안햇으면 합니다.
우리에게 단군이란 무엇인가?
단군의 자손이 아니라고 말하는 그 사람도 단군의 자손입니다
MBC 심야스페셜 <2004단군이야기> 제2부
몇 해 전, 일부 교회를 중심으로 단군상 철거요구가 거셌다. 갈등의 시작은 한 단체가 각급 학교에 단군상을 건립하면서부터다. 단군상의 목이 잘리고 페인트 범벅을 뒤집어쓰는 등 일부 기독교 측의 행동은 한때 사회적 이슈가 되기도 했다. 신화적인 인물을 역사적인 인물로 단정해 국조로 모시는 것은 우상숭배라는 것이다. 『삼국유사』에도 등장하는 시조 단군. 그러나 단군의 존재를 인정하지 못하는 수난은 꾸준히 계속돼 왔다.
“단군을 그저 무시한다거나 단군이 사실의 인물이 아니다 라고 생각하는 것은 역사적인 잘못, 역사의식의 잘못이라고 할 수 있어요. 단군은 실제로 계셨던 분이고 단군조선이라고 하는 나라가 2000년 동안 계속되었어요. 이와 같은 사실이 여러 기록을 통해서 증명이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단군을 가지고 종교적으로 문제 삼고자 하는 입장은 지양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박성수 교수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그렇다면 보통 사람들에게 단군의 의미는 무엇일까?
“단군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생각하세요?”
(시민들 인터뷰)
“허무한 거죠. 여지까지.”
“우리가 없었겠죠.”
“어디서 왔는지, 떠도는 민족이었는지 그런 것에 대해 의아해 할 것 같은데요.”
“뭐, 그냥 없는 거죠. 지금은 잘 살고 있으면 됐죠.”
“지금은 그럴 걸 사람들이 생각을 할까요? 아예 생각을 안 하죠. 옛날 사람들은 그냥 원숭이였구나 하는 거죠.”
중국의 동북공정 대응은 단군조선사 복원부터
단군이 고대사 속에서 제대로 정리되지 않는다면 또 다른 역사전쟁의 희생물이 될 수 있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이미 중국이 10년 전부터 동북공정을 중심으로 고구려를 자국의 역사로 포함시키기 위해 물밑으로 활발한 움직임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다음은 단군이라는 우려가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지금 우리가 단군의 정신을 잃어버리면 중국 사람들은 동북공정에 이어서 반드시 단군까지 잡아가요. 자기네 시조로 만들고 맙니다.” (김산호 /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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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역사왜곡정책에 말려든 우리 겨레
이러한 위기의식은 어디서 기인한 것일까? 여기에는 일제시대 강력하게 진행된 역사왜곡이 절대적으로 작용했다.
“일제는 총독부 안에 조선사편수회를 설치해서 역사를 왜곡했습니다. 특히 단군을 말살함으로써 한국의 역사를 2000년 역사로 만들었습니다. 단군의 역사는 바로 우리 민족운동의 원동력이었습니다. 그래서 일제가 단군을 의도적으로 말살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자존심을 없애고 그리고 일본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는 의도 하에서 단군조선의 역사를 없애려고 했던 것입니다.” (박성수)
일제에 의해 발행된 『조선소사』1)라는 교과서를 보자. 조선의 역사를 서술하면서 시조인 단군의 이야기를 ‘전설’로 표현하고 있다. 『조선사천년사』2)라는 또 다른 교과서. 조선의 역사는 4000년이라고 전제하고 있으면서도 그 장구한 역사 자체가 ‘전설’에 불과한 것이라고 적고 있다. 이렇듯 일제강점기 35년을 거치면서 단군의 역사는 신화나 전설로 변조되었고, 그 역사마저 축소되었다.
“우리나라 역사를 제대로 보면 반만년 대륙민족의 영광사입니다. 그것을 일제는 2600년보다 줄이기 위해서 뿌리를 없애고 일본에 동화시키기 위해서, 말하자면 일본 제국주의의 마수에 우리가 걸려든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고준환 회장 / 국사찾기협의회)
실제 일제의 사이토 총독은 단군과 고대사를 없애는데 주력했다.
“먼저 조선 사람들이 자신의 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하라. 그럼으로써 민족혼, 민족문화를 상실하게 하고 그들의 조상과 선인(先人)들의 무위(無爲), 무능(無能), 악행(惡行)을 들추어내 그것을 과장하여 조선인 후손들에게 가르쳐라. 조선인 청소년들이 그들의 부조(父祖)들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여 하나의 기둥으로 만들라.”(사이토가 발표한 ‘교육시책’ 중에서)
“이마니시 류 이런 사람들은 『단군사』라든지 『단군고사』라든지 이런 글을 통해 그것은 신화다 또 승려 일연이 만든 망발이다 이런 식으로 봤고, 그것을 이어받아서 이병도 박사가 『삼국유사』를 해석할 때 고조선 부분을 신화로 몰아버린 것입니다. 1938년부터 본격화되어서 해방될 때까지 몇 년간 한 것이 전국에 퍼져서 단군조선 2000년 역사가 전부 신화인 것처럼 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 역사의 뿌리가 없어져버리는 위기에 와 있다고 말할 수 있죠.” (고준환)
식민사관 벗지 못한 대한민국 역사교과서
모든 배움의 근본이 되는 교과서. 그것은 역사의식이 없는 학생들이 왜곡된 역사를 여과 없이 받아들이는 통로가 되어왔다. 해방 후에도 교과서는 일제 잔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단군이 세운 고조선의 역사가 상당 부분 축소되는가 하면 여전히 신화라는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고조선에 관한 역사왜곡은 크게 봐서 두 줄기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고조선의 역사, 시간을 단축시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공간을 축소시키는 것입니다. 시간을 단축시킨다는 의미는 단군조선의 실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공간을 축소시킨다는 의미는 고조선의 강역을 한반도 내 평안도 일대에 국한시키려는 움직임을 뜻합니다. 청동기 유적을 전부 한반도로 국한시켰는데, 우리 상고사의 본무대는 만주지역의 광활한 이쪽 지역이었지 한반도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계속 우리 상고사의 무대를 좁은 한반도에 갇혀있었던 것처럼 (국사교과서 내 청동기시대) 지도를 통해 설명하고 있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이덕일)
실증사학의 거두 이병도 박사. 그는 단군조선을 신화로 생각한 대표 주자다. 그러나 그런 그도 지난 1986년 한 신문을 통해서 단군의 실존에 대해 인정을 하기에 이르렀다.
단군의 진면목을 찾아야 겨레의 미래도 보인다
단군의 역사를 확신하며 새로운 시도를 모색하는 이가 있다. 바로 김산호 화백. 그는 우리 상고사의 현장인 만주를 오가며 역사 속 단군의 모습을 복원하고 있는 중이다. 실물을 보진 못했어도 옛 기록을 통해 잃어버리고 왜곡된 역사의 복원을 붓끝으로 실천하고 있다. 단군은 한 사람이 아니라 모두 마흔 일곱 명이다.
“단군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옛날(신라시대) 솔거가 그려준 할아버지의 모습만 놓고 하는데, 우리가 기마민족 아니에요! 말을 타고 적들을 하나하나 정복을 해서 거대 제국을 세울 수 있는 영웅의 모습은 절대로 아닙니다. 씩씩한 기상에 맞고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복장으로 바뀌어야 하고 그 모습도 바뀌어야 합니다.” (김산호)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광대한 영토를 차지했다고 밝혀지고 있는 치우천황. 전쟁에 나서면 절대 패하지 않는 불패의 왕으로 이미 2002년 월드컵 때 붉은 악마의 상징으로 되살아나기도 했었다. 화가로서 우리의 상고사가 그림으로 정리되지 못한 것이 못내 안타깝다고 한다.
93년 단군릉 발견으로 체계적인 연구를 시작한 북한. 그렇듯 단군은 남과 북을 잇는 다리가 돼가고 있다. 오늘날 단군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지금 우리나라의 가장 큰 문제는 구심점이 없다는 거요. 어떤 구심점이 있어서 우리 국민이 하나로 화합을 해야지 지금처럼 열두 쪽 나서 잘 될 건 아무 것도 없어요.”(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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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젊었을때 단군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올곧이 역사를 관통한 학자의 일생 최태영 박사님 | |||
스스로 강사가 돼 학도병 권유 연설피해 70세 상고사 연구시작, 100세 때 책발간 | |||
고대신문 kunews@kunews.ac.kr | |||
개교 100주년을 맞이해 한국인 최초의 법학 정교수이자 본교의 첫 한국인 정교수였던 최태영 박사를 만났다. 1900년생인 최 박사는 현재는 노환으로 병원에 입원해 간병인의 도움을 받고 있었지만 병실안에 가지런히 놓인 책들과 박사의 온화한 말씀은 올곧은 학자의 일생(一生)을 웅변하고 있었다.
깨끗하게 옷을 갈아입고, 의자에 앉아 기자를 맞은 최박사는 보성전문학교의 정교수가 된 과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최 박사는 경신학교를 졸업한 뒤 영미법을 배워오라는 부친의 말씀에 따라 1918년 메이지(明治)대 법학부 예과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법학과 영어·철학 등을 공부하고, 1924년 귀국할 당시에는 교수로 임명받을 자격을 가진 조선인 유학생은 그 밖에 없었다. 귀국 한 뒤 일제하 경성법전의 교수직을 마다하고 바로 보성전문 법과의 정교수가 됐다. 최박사가 정교수가 될 때까지 보성전문의 교수들은 모두 일본인 이었다. 최 박사는 보전에서 한국 최초로 ‘뉴욕 유가증권법’을 강의하는 등 상법·민법·행정법 등을 가르쳤다.
최박사는 보성전문의 교수시절 경신학교의 교장을 겸하면서 혹독한 일제하에서도 배일(排日)의 자세를 견지했다. 최박사는 몇 가지 에피소드를 들며 일제치하를 회고했다. 일제하 모든 학교들은 사사건건 일본인의 간섭을 받아야 했지만, 최박사는 신사참배를 단 한번도 하지 않았다. 신사참배를 피치못해 가야 할 때는 일본인을 대신 내세웠다.
또한 당시 전임강사 이상은 학도병연설을 해야 된다는 명령이 내려졌을 때 학도병 연설을 피하기위해 아무도 몰래 정교수직에서 강사직으로 내려앉았다. 그래서, 학도병 연설 요구에 비켜설 수 있었다. 하지만 학도병에 끌려가는 제자들이 생기면 직접 찾아가 실탄사격 방법과 청나라 말(淸語)을 몰래 가르쳐주었다. 최전선 접전지대에 배치될 때 기회를 엿보라는 무언의 가르침이었다. 그래서, 많은 제자들이 만주 중국군 부대로 탈출해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 바로 그 학생들이 몇 해 전까지는 최박사를 찾아왔다고 한다.
1945년에 총독부에서 ‘일어 상용 촉진회의’ 가 있었을 때 다른 조선인 교장들이 일본어 상용에 찬성했을 때 최 박사는 총독부 고관들이 있는 공개석상에서 일본어 상용을 공식 반대했다. 이로 인해 죽음의 위협을 맞았지만, 그 며칠 후 히로시마에 원자탄이 떨어져 조선은 광복을 맞이했다. 최 박사는 이 때를 회상하며, “원자탄이 나를 살렸다. 사실 나는 피하기 선수다”라며 몇 개 남지 않은 이를 보이며 소년처럼 웃으신다.
최박사는 보성전문 시절을 돌아보며, 일제 강점기간 중에도 인촌 김성수 선생과의 밀약으로 최초의 대학학술지인 보전논집(普傳論集)을 한글로 발표한 일을 중요한 성과로 꼽았다.
쉽지 않은 말씀 끝에 본교생에게 한마디 말씀을 부탁드린다는 기자의 청(請)에 “ 고려대학교 100주년을 축하합니다. 학생들은 한국역사의 위기가 많은 이 때에 남에게 속지 말고 바른 역사의식을 갖길 바란다”며 고대와 자신의 깊은 인연을 강조하신다.몸이 불편한 가운데 아직도 밤에 수 시간씩 책을 읽고, 지난 4월 1일자 학술원통신에 글을 기고하며 한국의 근현대사를 관통한 학자의 꼿꼿한 자세를 지키고 있는 최태영 박사. 최근에 찾는 이들이 드물다는 병원 관계자의 말에 괜시리 부끄런 생각이 기자의 마음에 일었다. 오는 6일(금)은 음력 3월 28일로 최박사의 연치(年齒)가 106세가 되는 날이다. 최 박사는 자신의 인생을 이렇게 자평한다. “구원산 밑의 조그만 애가 시방 백살이 넘었다. 영감이 악의가 하나도 없는 사람인데 벼슬은 절대로 않고 살면서 그동안 공부를 열심히 해서 법학과 단군에 관한 책도 몇 권 남겼다.” 개교 100주년이 되는 이 때, 고대의 방명(芳名)을 누군가에게 고마워한다면 최 박사의 학자정신을 결코 놓쳐서는 안될 것이다. 인사를 깊이하고 병실 문을 나설 때 고대인의 한 사람으로서 옷깃이 저절로 여며졌다. | |||
2005년 05월 02일 |
출처 : 고대신문
최태영 박사님 저서
■식민사학자 이병도를 회개시킨 최태영박사 이병도는 이마니시 류의 수서관보가 되어 ‘조선사 편찬’이라는 거대한 역사왜곡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광복 후에는 서울대 역사학과 교수, 문교부 장관까지 지냈다. 그는 『조선사』 편집에 참여하여 일제의 식민사관 수립 사업에 직접 기여하였고, 일제가 유포시킨 식민사관을 해방 후까지 이어주는 중대한 역할을 했다. 오늘날 한국사학계에는 직접간접으로 이병도의 제자 아닌 사람이 드물다. ![]() 일본은 한국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한국 역사는 주체적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라 주변국에 의해서만 유지되어 왔다는 요지의 이른바 반도사관론을 대량 유포시켰으며, 우리 역사 사료들을 전부 빼앗아가고 불태우고서는 증거가 있어야만 인정한다는 식의 소위 실증주의 역사방법론을 채택하였던 것이다. 1920년대 ‘조선사편수회’의 학풍을 이어받은 이병도는 나중에 고대사 연구에 “일본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바 적지 않았다”고 스스로 회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병도는 죽기 직전, 단군은 신화가 아니라 우리의 국조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반성문을 발표한다. 그간 최태영 박사, 송지영 KBS 이사장, 국문학자 이희승 박사 등의 설득으로 과거 자신의 역사관을 크게 수정하여 결자해지(結者解之)의 심정으로 조선일보 1986년 10월 9일자에 논설을 게재하였다. 그런데 아이러니칼하게도 이를 바라보던 제자들의 시선은 싸늘했다. 어떤 이는 ‘노망 드셨네’ 하며 비웃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한때 그와 더불어 『한국상고사입문』(1989년)을 발간했던 상고사연구가 최태영 박사는 다음과 같이 증언한 바 있다. “내가 젊었을 때만 해도 한국땅에서 단군을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실증사학을 내세워 단군을 가상인물로 보기 시작한 것은 이승만 정권 때부터이지요. 그리고 이미 세상을 떠난 친구이지만 이병도 박사의 잘못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이박사는 말년에 건강이 나빴는데, 어느 날 병실에 찾아갔더니 죽기 전에 옳은 소리를 하겠다며 단군을 실존인물로 인정했어요. 그 사실을 후학들이 모르고 이박사의 기존학설에만 매달려 온 것입니다. 그리고 한민족이면 누구나 어린아이 때부터 배웠던 ‘동몽선습’이나 ‘세종실록’ 등 각 고전에도 단군기록이 나옵니다. 수백년전 기록을 어떻게 믿겠느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역사기록이란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닙니다. 판소리할 때도 그 긴 내용을 한자도 바꾸지 않고 노래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역사기록은 더욱 정확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서울대법대 초대학장을 역임한 상고사연구가 최태영 박사, 2000년 1월3일자 문화일보 특별대담) |
![]() [한국상고사] |
이땅의 역사앞에 비분강개하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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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와 콧날이 반듯하고 눈빛이 형형하신 단재 신채호 선생의 사진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선생께서 이 땅의 조선 민중들, 배달의 후예들, 韓의 백성들에게 전하고자 하셨던 애끓는 절규가 느껴질 듯 하다.
일제 치하의 어둠 속에서도 선생께서 일평생 밝히고자 하셨던 우리 겨레의 호방한 역사는 선생께서 서거하신 지 근 백년도 안지났건만 한낱 호외 기사 일부처럼 잊혀지고 있다. 이같이 부당한 역사의 현실을 마주하는 이 땅의 젊은이로서 나는 울분을 금할 수 없다.
더욱이 대한민국 정부는 역사의 가치관을 세워나갈야 할 고등학생들에게 [국사]를 선택과목으로 편입하여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응시하기 위한 기타 사회탐구 과목의 하나로서 [국사]를 옵션화하는 기가 찬 결정을 내리고 이를 시행중임을 생각해보면 우리 앞날은 암울하기만 하다.
선생께서 이 사실을 아신다면 죽은 혼이라도 벌떡 눈을 뜨고 분개할 노릇이며 이미 한 줌 흙으로 돌아간 선생의 육신마저 다시금 발버둥치실 일 아니겠는가.
선생께서 만주땅의 칼날같은 바람과 모진 일제의 압박을 견디며 한 계단 한 계단 밝혀나가셨던 우리 역사의 정체성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었단 말인가.
선생께서 일평생 겪어야 하셨던 숱한 고난과 고통은 누굴 위한 희생이었단 말인가.
역사의 소중함을 모르는 젊은이여.
그대는 진정으로 무식하고 무책임한 인간이다.
뿌리를 모르고 어찌 줄기를 뻗고자 하며 열매를 맺고자 하는가.
단재 선생의 절규가
이 겨울 모진 바람 속에서 다시금 울려퍼지는듯 하다.
韓의 후예여,
간도 쓸개도 모두 다 내던진 이 땅의 역사 앞에서 비분강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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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박삭(剝削)치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조선혁명선언-중에서
민족을 버리면 역사가 없을 것이며,
역사를 버리면 민족이 자기 나라에 대한 관념이 없어질 것이니.
아, 역사가의 책임이 또한 무겁구나.
-독사신론- 중에서
자신의 나라를 사랑하려거든 역사를 읽을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 나라를 사랑하게 하려거든 역사를 읽게 할 것이다.
많은 희망과 큰 슬픔을 아울러 하여,
너를 이 세상에 보내노라.
원하노니, 장수하라.
큰 소리치라. 유수같을지어다.
천문기록에 담긴 한국사의 수수께끼 -국내최초 천문기록을 사료로 끌어들여 단군조선의 실존여부와 삼국의 강역, <삼국사기>진위여부 등을 파헤친다. <EMBED src=http://www.scjnet.co.kr/INT/chan/fla/hwan2_800k.wmv width=500 height=500 type=video/x-ms-wmv invokeURLs="false" autostart="true" AllowScriptAccess="never"> 고대사 문제를 사서에 수록된 천문기록을 사료로 끌어들여 단군조선의 실존 여부와 『삼국사기』의 진위 여부를 파헤친 역작. 저자는 『단기고사』와 『환단고기』에 기록된 오행성(五行星) 결집과 썰물 기록을 분석, 그것이 실제로 일어난 현상임을 밝힌다. 『단기고사』와 『단군세기』에 나타난 “13번째 단군(BC 1733년)에 다섯 행성이 루 별자리에 모였다”는 기록을 토대로 계산한 결과, 1년 뒤인 1734년에 실제 현상이 빚어졌음을 증명한다. 또한 『삼국사기』의 천문기록을 분석한 후 고구려 백제 신라의 주된 천문 관측지가 모두 한반도가 아닌 만주 몽골 양쯔강 유역에 이르는 중국 지역이었다며, 삼국의 위치가 이 지역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너무나 충격적인 이 내용들은 국내 최고의 천문학자의 실제 실험결과에서 나온 결과여서, 역사학계에 큰 파문을 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
단군은 신화속의 인물인가? 아니면 역사적 실존인물인가?
여기에 두 가지 근거가 있습니다.
첫째는 단군이란 고조선 시대에 69대까지 단군이 제정일치시대에 통치자로 내려왔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료가 있었습니다. 초대 단군부터 69대 단군에 이르기까지 이름들까지 다 올라와 있었지요. 그 사료들을 일제시대에 일본의 학자가 강탈해 갔고 그의 조수로 있던 한국인이 그 내용들을 발췌해서 인터넷으로 올린 적이 있는데 어느 날 사라졌더군요.
둘째는 단군 신화입니다.
단군신화가 기록된 삼국유사의 작성자가 일연이라고 하는 불교의 승려입니다.
기록 의도는 불교가 고려시대의 정신적 지주였고 불교가 고려를 정신적으로 지배하려는 목적에서 작성한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그 내용을 보면 단군의 아버지가 환웅이며, 환웅의 아버지가 환인입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가 제석신입니다.
불교의 두 번째 가는 신으로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단군신화를 통하여 고려시대에 불교가 나라의 정신적 지주로 있을 때에 나라를 불교로 완전히 채색하려는 시도에서 기록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지요.
우리나라에서 80년대 초반에 불교도였던 전두환 전 대통령이 단군을 국조로 모시자는 운동이 일어날 때에 불교계가 조용했던 이유도 바로 단군을 국조로 모시면 단군의 증조 할아버지격인 제석신이 드러나게 되고 한국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사상으로 불교가 자리하려는 시도였다고 보는 것이지요.
첫댓글 단군사상 이제 진실로 받아들임이 애국임을 개신교인들도 이제 알고 정신차려야 합니다.
단군을 부정하는자들은 대한국인이 아니지요.
이웃과 함께하며 주말 보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