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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한복음 19장 23-30절
다 이루었다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관련해 빌라도가 가진 자세는 할 수만 있다면 놓아주려고 했습니다. 강도 바나바와 비교해서라도, 또 비록 죄가 없지만 죄인 취급해서 채찍질하고 모욕을 줘서라도, 그렇게 함으로 유대인의 환심을 사서라도 놓아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예수를 놓아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라는 외침 앞에서 그는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놓아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요구대로 십자가 처형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빌라도의 자세도 악하다고 할 수 있지만, 더욱 심각한 죄의 모습은 유대인들에게 있습니다. 그들은 빌라도가 여러 번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죄를 찾아볼 수 없다고 하는 판결에 대하여 반대했습니다. 반대만 한 것이 아니라 없는 죄목을 붙여 처형하기를 바랐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한번도 정치적 메시아임을 나타내신 적이 없지만,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마친 그런 분으로 자처한 것처럼 말하면서 죄인 취급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소리 지르기를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라고 외쳤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처형하기 위해 그들은 소위 그들 입장에서 원수와 다를 바 없는 가이사조차 자신들의 왕임을 말했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길 원치 않았던 사무엘 시대 이스라엘 백성과 다를 바 없는 모습입니다. 하나님만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왕이었지만, 동일하게 하나님과 동일본체요 그런 분이 인성을 취하심으로 자기 백성이라고 하는 유대인들에게 오셔서 하나님 나라의 왕이심을 나타내셨지만, 구약에서도 신약에서도 저들은 하나님이 왕이심을, 또한 그리스도가 왕이심을 철저히 거절했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만 왕이 아니면 된다, 그리스도만 왕이 아니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아니면, 그리스도만 아니면 그 자리에 누가 와도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원수라고 할 수 있는 그런 대상조차 괜찮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확하게 이것이 사람의 본성입니다. 여러분, 인류의 첫 조상 아담의 타락은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한 것입니다. 먹지 말라고 한 열매를 먹음으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어떤 정신이 들어 있는가 하면 먹지 말라한 열매를 먹음으로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자리까지 넘보고자 한 인간의 악함이 그들 마음 가운데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어떤 사람입니까? 우리와 같이 타락한 사람이 아닙니다. 타락하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상태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결국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먹지 말라고 한 열매를 먹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타락 이후 인간의 본성은 어떠하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사람들의 이런 본성이 그대로 드러내는 자리입니다. 하나님만을 진정한 왕으로 여기지 않으려고 하는 인간의 죄악 된 본성이 나타나는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인간들을, 그러나 모두가 아니라 영원 전부터 택하신 자기 백성을 구원하여 하나님만이 진정한 왕이심을 인정하도록 하기 위해 십자가 사건을 허락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는 이방인, 빌라도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만왕의 왕심을 드러내십니다. 일반적으로는 십자가 위에 패를 써 붙일 때 그들의 죄목을 쓴다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죄목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쓴 것입니다. 대제사장들은 이렇게 쓴 것이 수치스럽게 생각하여 바꾸길 원했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길 원치 않았습니다. 그때는 빌라도의 마음을 굳건히 붙들어 예수 그리스도가 유대인의 왕이심을, 좀 더 엄밀하게 말하면 영적 유대인의 왕이심을 드러내고자 하셨던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히 죽으시는 과정 속에서 세 가지 내용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는데, 하나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군인들이 예수님의 옷을 나눠가지는 내용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님의 제자 요한에게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그리고 난 뒤 마지막으로 목마른 예수님에게 신포도주를 마시게 하는 내용입니다.
우선 첫 번째 내용은 23절과 24절입니다. “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인들은 이런 일을 하고” 일단 군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고 난 뒤 예수님의 옷을 나눠 가졌는데,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을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또 속옷도 취하였다고 하면서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우리말 번역은 속옷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헬라어 ‘χιτών’[키톤]이라고 해서 상의의 일종인 ‘튜닉’입니다. 이 옷은 성경이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호지 아니한’, 다시 말해 바느질할 때 헝겊을 여러 겹 겹쳐서 땀을 성기게 꿰매지 아니한, 통으로 짠 것입니다. 이 옷을 다른 옷처럼 네 등분 하려고 하다가 서로 말하기를 찢지 말고 누가 얻는지 제비를 뽑자고 하는 내용입니다.
사실 이것 자체로만 보면 크게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죄인으로 죽는 자의 겉옷, 그리고 그 겉옷 안에 입는 겉옷의 일종인 또 다른 옷을 나눠 가지려고 하다가 ‘튜닉’의 경우는 통으로 되어 있어서 찢어 나누기보다는 제비 뽑자고 하는 내용일 뿐입니다. 사소해 보일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24절은 바로 이것이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이 내용은 시편 22편 18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입니다. 이때도 ‘속옷’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의복 혹은 겉에 입는 옷의 일종입니다. 아마도 그런 측면에서 오늘 본문은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로 번역하고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어쨌든 사소하게 보이는 그 일조차 사실은 성경이 예언하고 있었다는 것이고, 예언된 말씀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말씀이 응했다는 것은, 그것이 신약 시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가 성취된 것이든, 아니면 오늘 본문처럼 구약 시대 구약의 어떤 인물(다윗)을 통해 말한 바가 성취된 것이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안에 있었다는 것이고, 영원 전에 작정하셨다면 창조 후 그의 섭리 안에서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중요한 일만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사소해 보이는 일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이 장차 일어날 모든 일에 대한 것이라면 거기에는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 할지라도 예외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모든 작정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시편 22편은 다윗의 시편인데, 다윗이 기록했다고 해서 그가 예언의 주체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윗은 당시 자신이 당한 일에 대하여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했을 뿐입니다. 어쩌면 그 자신은 자신이 표현한 것이 예언의 성격으로 있게 되는지 몰랐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상황이 그리스도를 예표 하는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거기에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을 담았습니다. 실제로 시편 22편은 18절만이 아니라 1절부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을 담고 있는데, 그 내용은 이것입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가 잘 아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입니다. 마태복음 27장 46절에 기록한 것처럼 십자가상에서 죽으시기에 앞서 외쳤던 말씀입니다. 바로 이 말씀의 성취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다윗으로 하여금 악인들로 인하여 어려움에 빠지게 하신 것이고, 심지어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는 것처럼 그를 몰아가셨던 것입니다. 누가 그렇게 하셨는가?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모든 일의 주체라고 해서 악인의 악행을 악행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악인의 악행 때문에 의인이 고난을 받을 때 그가 받는 고난이 고난이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 것은 아닙니다. 악인의 악행은 악행이고, 의의의 고난은 고난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영원 전부터 정하셔서 실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모든 일을 작정하시면서 실행하실 때 자신의 속성에 따라 항상 선을 나타내십니다. 악인의 악행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가운데서 선을 나타내십니다.
성경 안에 기록된 내용만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의 모든 인생 가운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하나님의 작정은 장차 일어날 모든 일에 대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성경의 기록된 것도 있지만 성경에 기록된 내용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은 하나님의 작정에서 볼 때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일부의 내용이 분명 택한 백성의 구원을 위해 매우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고, 그것이 구속사의 내용이지만, 하나님의 작정은 그것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잘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그 자신의 뜻의 가장 지혜롭고 거룩하신 의논에 의해 장차 일어날 일은 무엇이든지 자유롭게 정하시되 불변토록 정하셨습니다(3장 1항).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인생은 하나님의 작정 안에 있으며, 작정하신 그대로 실행되는 역사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어떤 기계를 만들어 정보 값을 넣으면 그 정보 값 그대로 반복되는 그런 모습과는 다릅니다. 오히려 우리를 인격적인 대상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기도 하며 때로는 낙심하고 슬퍼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작정하심의 내용을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항상 기뻐하고 즐거워하도록 하지만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시편에서 보는 것처럼 악인으로 인하여 괴로워하는 일도 있게 하십니다. 그럼 악인으로만 인해 괴로워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때로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괴로워하기도 합니다. 인간관계 속에서 어려워하는 일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 속에서 보자면 다양한 일이 우리 가운데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에 대하여 하나님은 모르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일을 그렇게 정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럼 왜 그렇게 정하셨는가? 모든 작정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3장 3항인데 예정, 다시 말해 선택과 유기를 말하는 부분에서 “하나님의 작정에 의해, 그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그 모든 것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선택이든 유기든, 선택하신 자를 구원의 서정으로 부르시든 유기하신 자를 유기의 서정으로 부르시든, 그 모든 일을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하셨다는 겁니다. 그러나 택하신 자기 백성에 한해서 하나님은 로마서 8장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위해서 그 일을 하십니다(롬8:28). 달리 말하면 하나님은 모든 일을 정하셔서 정하신 그대로 우리에게 실행하신다고 할 때, 그리고 그런 실행이 항상 기쁘고 즐거운 일로만 있는 게 아니라 때로는 힘들고 어렵고 낙심하게 되는 일도 있다고 할 때, 그 모든 일을 통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우리로 하여금 유익하도록 할 뿐만 아니라, 그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실 목적으로 그렇게 하신다는 겁니다.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우리는 힘들고 어렵고 낙심할 수 있는 그런 일들 앞에서도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그 일을 그렇게 정하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시편 22편에서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시22:1)라고 부르짖습니다. 즉 그의 상황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느낄 만큼 어려움 가운데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 기도하였습니다. 어렵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움을 구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는 것처럼 있더란 것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졌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기도하다가 멈추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이 인용하고 있는 18절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라고 한 뒤 곧바로 이렇게 말합니다.
조금 길지만 19절 이하 읽어드리겠습니다. “여호와여 멀리 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내 생명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나를 사자의 입에서 구하소서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들소의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 가운데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지어다 야곱의 모든 자손이여 그에게 영광을 돌릴지어다 너희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여 그를 경외할지어다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큰 회중 가운데에서 나의 찬송은 주께로부터 온 것이니 주를 경외하는 자 앞에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이다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예배하리니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 세상의 모든 풍성한 자가 먹고 경배할 것이요 진토 속으로 내려가는 자 곧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도 다 그 앞에 절하리로다 후손이 그를 섬길 것이요 대대에 주를 전할 것이며 와서 그의 공의를 태어날 백성에게 전함이여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 할 것이로다”(시22:19-31)
다윗은 계속해서 기도합니다. 또한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으로 인하여 찬송하리라고 말하고 있으며, 자신만이 아니라 주의 모든 백성에게 동일하게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에게 모든 영광을 돌릴 것을 권면합니다. 분명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지만 하나님의 도움이 우리가 보기에 더딘 것처럼 보이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의인의 간구를 멸시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분명한 확신으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낙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낙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힘을 낼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하신 자들입니다.
실제로 오늘 본문에서 그리스도의 옷이 벗겨져 군인들이 나눠가졌다고 할 때 칼빈은 그리스도의 옷이 발가벗겨진 것은 그가 그의 의를 우리에게 옷 입혀주시려는 뜻에서 그런 역사가 일어났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사소해 보이는 바로 그 일조차 사실은 사소한 일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있는 역사로 있었던 겁니다. 우리의 생의 모든 일이 그렇습니다.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면 우리 생은 평범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래서 늘 반복되는 일상의 삶을 삽니다. 그런데 그런 일상의 삶 가운데도서 얼마나 많은 일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일을 하나님께서 정하셨습니다. 정하시고 정하신대로 이끄십니다. 그리고 바로 그 일을 통해 목적하시기를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실 목적으로 그렇게 하고 계시다는 겁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위해 바로 그 일을 이끌어 가고 계시다는 겁니다.
이런 역사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나타내야 하겠습니까? 우리를 향해 가지신 목적,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로 나타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의 성품에 참여한 자로 나타나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육체의 일이 아닌, 성령의 열매를 맺는 자로 나타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로 이 일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옷이 벗겨져 조롱 받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계속해서 두 번째 내용은 25절 이하 27절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여기 보면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와 ‘사랑하시는 제자’ 즉 사도 요한에게 말씀하시는 내용인데,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는 누구도 예외 없이 다 주를 버리고 도망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사도 베드로가 몰래 주를 따라 간 것처럼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사도 요한도 뒤따랐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그에게 지금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부탁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 내용은 조금 있으면 확인하게 되겠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 아버지께 철저히 순종하는 자로 있었지만, 그와 동시에 육신의 어머니에 대한 인간적인 의무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칼빈). 이것은 십계명을 통해 분명히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 네 계명을 통해 하나님 사랑의 의무를, 다음 여섯 계명을 통해 이웃 사랑의 의무를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우선순위에 있어서는 처음 네 계명이 우선합니다. 하나님 사랑, 다시 말해 하나님의 명령과 예배 및 존경을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이후 우리는 합법적인 내용 안에서 우리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마10:37)라고 말씀하기도 하셨던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있어서 헌신하고자 할 때 하나님께 대한 예배와 순종이 방해를 받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의무 안에서 이웃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성실하게 행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를 향한 편지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3:23)는 권면도 한 것입니다. 사람을 대할 때 주께 하듯 하라는 것은 분명 주께 하는 일이 우선된 일이라는 것이고, 그 안에서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주께 하듯 하는 모습으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지금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모든 뜻을 온전히 다 이루시는 가운데서 자신의 육적 부모를 챙기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이것이 십자가 위에서 부탁하고 있는 내용이라는 것도 우리가 주목해야 합니다. 자신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나오지 않지만, 죽으시기에 앞서 시편 22편 1절을 외치십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줄 알고 십자가에 달려 계신 것이고,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다 준행하시는 과정 속에서 고통의 극심함 가운데서 자신의 모친에 대한 의무를 실행하고 계신 겁니다.
우리는 우리가 힘들면 하기 싫어합니다. 하기 싫어도 억지로 하는 면이 있기도 하지만, 부모와 자식 사이 마음이 힘들면 억지로 하는 것도 사실은 싫어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유일한 모범이라고 할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런 자세를 통해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몸서리치는 모독이 그리스도에게 안겨준 고통은 어느 정도였으며, 영원한 죽음과 마귀에 대한 무서운 투쟁은 어느 정도였겠는가? 그러나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이겨내시고 모친에 대한 관심을 두셨다.
그러므로 부모 공경 혹은 이웃 사랑에 있어 하지 않는 것보다 억지로 하는 것도 잘하는 것이지만, 억지로 하는 마음을 부드럽게 하여 진심으로 주의 뜻을 따라 실천하는 것이 더 잘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되도록 우리는 주의 말씀 앞에서 우리를 살피셔야 합니다.
더불어 예수님께서 자신의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사도 요한에게 부탁할 때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자신에게 육신의 부모가 있었을 텐데도 그렇게 하였습니다. 이런 모습도 우리는 깊이 새기셔야 합니다. 그만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는 자로 있어야 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내용은 28절 이하 30절입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이 내용도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신 말씀으로 소개합니다. 특히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다시금 성경을 응하게 하려고 말씀하신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때 이미 이루어진 줄 아셨다는 것은 30절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는 내용에까지 가까이 왔다는 것이고 요한복음 내용으로 하자면 마지막 내용까지 이루시고 난 뒤 ‘다 이루었다’고 하실 만큼 지금까지 행한 모든 것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셨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전체를 통해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은 하나도 빠짐없이 다 이루신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럼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신 마지막 내용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내가 목마르다”고 하시면서 신 포도주를 마시는 내용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죽음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것도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면서 죽으십니다.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다는 것은 그만큼 고통스러운 일이요, 때문에 목이 마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목마르신 것도 말씀의 성취를 위해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시편 69편 21절인데, 거기 보면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입니다. 이때 ‘초’가 식초를 의미합니다. 신 것입니다. 이것에 빗대어 신 포도주를 마시게 한다는 것입니다.
목마를 때 신 포도주를 준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매튜 풀 주석을 참고 하면 신 포도주는 사형수에게 주기 위하여 관례대로 미리 준비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 용도에 대하여 설명하기를 사형수의 감각을 마비시키기 위한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사형수의 목숨을 더 연장시켜서 더 많은 고통을 당하게 하려고 한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단지 사형수의 갈증을 해소시켜 주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고 합니다. 혹은 십자가에 달리는 비참한 사람들이 고통을 충분히 맛보았을 때 죽음을 재촉하는 뜻에서 주는 음료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응하게 한다고 할 때 시편 69편 21절의 의미를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 즉 지금 시편의 기록자인 다윗은 대적자들이 배고픈 자신에게 먹을 것으로는 쓸개를, 마실 것으로는 물 대신 신 것을 주어 먹고 마시게 했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시편 69편 19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대적자들은 다윗에게 비방과 수치와 능욕을 이런 식으로 하고 있는 겁니다.
이런 말씀이 성취된다는 것은 목이 마르다고 하실 때 신 포도주를 주심으로 그의 갈증을 해소하도록 할 목적으로 주셨다기보다는, 또한 앞서 말한 이런 저런 이유에서 신 포도주를 주었다기보다는, 신 포도주를 주는 것 자체가 예수님을 비방하고 수치스럽게 만들고 능욕하는 행위로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누가복음 23장에 보면 “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눅23:36-37)는 말씀을 하십니다. 신 포도주를 주는데 그것이 어떤 용도이든 희롱하는 모습으로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다 이루셨다고 말씀하시고 죽으시기까지 고난 가운데 있었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서냐? 택하신 자기 백성을 위해서입니다. 자기 백성을 위하여 받지 않아도 될 모든 고난의 내용을 마지막까지 철저히 받으신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을 응하게 하신 다음, 본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고 죽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과 마태복음 27장 34절을 비교할 필요가 있는데, 33절부터 보시면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거기 앉아 지키더라”(마27:33-36) 여기서 쓸개 탄 포도주는 분명 일종의 마취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 처형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목 마르다고 하실 때 신 포도주를 준 것은 그런 용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마취를 위한 것으로 쓸개 탄 포도주를 주었을 때 마시지 않았다는 것은 그것으로 받아야 할 고통을 경감시키지 않으려고 한 것이고, 오늘 본문에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것은 단순히 고통을 줄여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충분한 고통을 받기 위한 내용으로 있다는 것을 정리해 두셔야 합니다.
택하신 백성과의 관계 속에서 보자면 우리가 얼마나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고통을 받아야 할 자들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죄가 비참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 죄를 대신하여 예수님께서 인성을 취하여 오실 때부터 낮아지셨다가 십자가에 달리는 더 낮아지심을 친히 다 겪으신 것입니다. 십자가 자체도 고통이지만, 그런 고통이 죽으실 때까지 계속해서 있었다는 것이고, 그런 고통을 결코 피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다른 복음서를 통해 보면 시편 22편 1절의 고백처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란 외침까지 하십니다. 육체적인 고통만이 아니라 영혼의 고통까지 당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는 고통, 적어도 인성으로서는 실제로 그것을 경험하는 고통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심으로 그 영혼이 떠나가셨던 겁니다. 영혼이 떠나가셨다는 것은 죽었더, 실제로 죽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런 죽음과 관련해 이사야 53장을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4절 이하에 보시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53:4-5) 이 말씀처럼 지금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보면서 대부분이 그가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은 것이요, 고난을 당하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그러하고, 또한 유대인들이 그러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한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우리’라고 할 때 모든 사람이 아닙니다. 열 두 제자라고 할 때 가룟 유다를 위해 예수님은 찔리시고 상한 것이 아닙니다. 가룟 유다를 제외한 11명의 제자를 위해서입니다. 모든 사람이 아니라 유기자를 제외한 택하신 자기 백성을 위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 결과 그의 징계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립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누구의 뜻인가? 10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한 구원의 길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두신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그런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예수님은 억지로 그 길을 걸어가신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계속되는 이사야 53장 11절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기꺼이 순종하셨습니다. 자발적으로 순종하셨습니다. 그래서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 이루셨다는 것 안에 이런 만족이 있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인성을 취하실 때부터 그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행하신 모든 일에 있어 부족함이라는 것이 있는가? 없습니다. 다 이루셨다는 것은 율법의 모든 내용을 다 이루셨다는 것이고, 거기에는 오늘날 누군가 말하는 것처럼 수동적 순종만이 아니라 능동적 순종까지를 다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담의 타락은 결국 하나님이 주신 율법에 대한 불순종이었고,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런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이고, 우리의 의를 위하여 예수님은 그의 모든 생애를 통해 모든 율법에 순종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죄가 완전히 사함을 받은 것, 다 이루었다는 여기에 있습니다. 죄 사함만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시는 것, 다 이루었다는 여기에 있습니다. 의롭다 하심만이 아니라 거룩하게 하심, 또한 견인의 은총을 통하여 결국 영화롭게 하심까지 다 이루었다는 여기에 모든 근거가 있습니다. 역으로 말하면 우리로부터는 죄를 사할 힘도, 의롭다고 할 힘도, 거룩하다고 할 힘도, 영화롭게 할 어떤 능력도 나올 수가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나옵니다. 즉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그의 모든 생애를 통해 낮아지신 신분으로 계신 것은 낮은 우리를 높은 자리에 앉히기 위한 것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그리스도께서 앉아계신 왕좌에 우리까지 앉히시고자 낮아지시고 낮아지신 것입니다.
때문에 이런 그리스도의 은택을 입은 자라면 이제는 좀 높아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상적으로 높아지라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적으로 잘 먹고 잘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수준이 그러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세상과 구별되게, 세상 앞에서 좀 더 거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하셨는데, 그런 의에 합당함이 우리에게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결코 헛되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결코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교훈적인 측면에서 말씀드리면, 그만큼 우리를 돌아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그 은혜가 우리의 모든 삶 가운데 거룩함으로 나타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