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 비가 내린다. 스트라스필드 식당가를 지나는데 고소한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뭘 좀 먹고 갈까. 이 시간만 되면 나는 날마다 갈등이다. 뱃속에서는 벌써 꼬르륵 소리가 난다. 집에까지 가려면 아직 멀었다. 비가 오는 날은 버스가 자주 연착되기 때문에 평소보다 30분은 더 걸릴 수도 있다. 핑계를 찾아낸 나는 결국 가던 길을 돌아 뒤를 살핀다. 튀긴 닭, 왕만두, 김밥, 떡꼬치, 어묵…. 누가 여기를 이국이라고 하겠는가. 한국 가게의 음식들은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돈다. 이것도 저것도 다 한입에 꿀꺽 넘길 것만 같다. 이리저리 둘러보는데 음식 그릇이 빼곡한 중국집 메뉴가 눈길을 끈다. 아! 탕수육. 바삭하게 튀긴 탕수육을 한 입 베어 무는 상상만으로 입에 침이 가득 고인다. 그리고 탕수육에 얽힌 웃픈 사건 하나가 자동으로 따라 올라온다.
1976년,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는 호주로 일하러 떠나셨다. 집에는 엄마와 우리 4남매만 살았다. 엄마는 아버지가 멀리 외국에서 힘들게 일해서 보내주는 돈을 허투루 쓸 수 없다고 뭐든 아꼈다. 엄마가 우리에게 만들어 주던 별식은 요리라고 이름 붙일 만큼 세련된 것은 아니었다. 양푼 가득 만들어 놓은 과일 샐러드, 찐빵, 도너츠 정도였다. 아버지 없이 우리끼리의 외식은 감히 생각하지도 못했으니 그때까지 내가 아는 중국요리는 짜장면뿐이었다.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며 비로소 그 동안 못해보던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 무렵 유행하던 경양식집에는 친구들과 어울려 자주 갔다. 나중에 사람을 사귀게 되어 양식을 먹을 때를 대비해서 미리 익혀야 한다는 이유였다. 새로운 음식을 먹는 즐거움이 있었다.
어느 날 함께 일하던 남자 동료들이 나누는 이야기 중에 ‘지동관’ 탕수육이 일품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옆자리에 있던 친구와 한번 가서 먹어 보자고 약속을 했다. 의정부 시내에 화교가 하는 ‘지동관’은 꽤 알려진 중국집이었다. 벼르고 벼르던 약속의 날이 다가왔다. 월급을 타던 그 주 일요일 낮이었다. 친구와 나는 한껏 치장하고 지동관 앞에서 만났다. 일요일 낮이라서 그런지 홀은 휑하니 넓었는데 손님은 우리뿐 이었다. 테이블에 앉자 주문을 받는 소년이 와서 물을 따라주며 뭘 먹겠냐고 물었다.
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명랑한 목소리로 “탕수육 두 개 주세요.” 소년은 잠시 멈칫하더니 알았다고 했다. 그때는 그의 멈칫하던 동작이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우리는 그저 맛있게 먹을 기대로 잔뜩 부풀어 있었다. 드디어 주문한 탕수육이 우리 앞에 놓였다. 커다란 둥근 접시에 수북이 쌓인 탕수육 두 접시.
‘한 접시의 양이 이렇게 많아?’
그것은 산 두 개가 놓여 있는 것만 같았다. 우리는 할 말을 잃고 잠시 멍하니 탕수육을 바라봤다. 기가 막혀 웃음이 나왔다. 순간, 저쪽 구석 주방에서도 킥킥 웃는 소리가 났다. 주방의 커튼 사이로 우리를 훔쳐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창피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애초에 주문 받을 때, 두 사람이 먹기엔 한 접시도 충분하니 짜장면이나 짬뽕과 함께 먹으라고 알려줬더라면 좋았을 텐데. 소년은 우리가 중국집에 처음 온 ‘촌닭’이란 걸 알고 설명도 안 하고 우리 하는 꼴을 바라본 것이다. 골려줄 셈이었는지, 아니면 장사도 안되던 날이라 탕수육 한 접시라도 더 파는 게 급했던 걸까? 여자애들 둘이 와서 각자 탕수육 한 접시씩 놓고 먹는 광경은 그들에게도 재밌는 구경거리였을 것이다. 당황한 중에도 익숙한 것처럼 새침을 떨면서 먹었지만, 아무리 먹어도 탕수육은 줄어들지 않았다. 눈으로 이미 많은 양에 질려서 제대로 맛을 음미할 수도 없었다. 처음에 바삭하던 탕수육이 소스에 불어서 찐득해졌다. 입에 넣을수록 들큼하고 느끼하기만 했다. 지금 같으면 남은 음식은 싸달라고 했을 텐데, 바보처럼 그런 말도 못 했다. 반도 못 먹고, 얼굴이 빨개져서 비싼 음식값을 치르고 도망치듯 음식점을 빠져나왔다.
탕수육은 그렇게 내게 부끄러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었는데, 얼마 전 가족들에게 “있잖아, 내가 옛날에…” 하며 탕수육에 얽힌 이야기를 했다. “와! 엄마 정말 스무 살에 탕수육을 처음 먹어봤어?” 아들이 말하자, 남편은 “내가 촌닭을 구제했네.” 하며 놀려댔다.
호주에 살면서 여전히 새로운 음식에 대한 호기심이 많다. 새로운 음식을 먹다보면 기대와 영 다른 음식을 만난 적도 있지만, 그때의 탕수육 사건만큼 충격적인 것은 없었다.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서 자꾸 부풀어 오르는 것인지 그때의 접시는 쟁반만 하게 더 커지고 산더미 같던 탕수육이 눈앞에 다시 어른거린다.
비 오는 저녁, 가게마다 사람들로 왁자하다. 중국집 앞에서 선뜻 문을 밀고 들어가지 못하고 주춤거린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식당에 혼자 들어가서 탕수육을 시켜 먹을 수 있는 용기는 없다. 나는 역시 촌닭이 맞구나 생각하며 돌아선다. 옛날 그 중국집은 지금도 3대째 영업을 하고 있다던데, 다음에 한국에 가면 할아버지 적에 왔던 촌닭이라고 하며 찾아 가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