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꽃의 시학, 영혼의 낱말
정형국론
권대근
문학평론가,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Ⅰ.
시는 특수한 방법의 진술을 요구한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시간 단순한 리듬의 언어라거나 함축적 언어표현이라거나 현대적 해석인 회화적 언어, 사물언어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엄격한 의미에서 존재를 창조 내지는 생성한다는 차원에서 하이데거가 이야기했지만 ‘언어의 집’이라고 할 수 있다. 언어가 곧 존재가 되는 차원에서 언어는 존재나 사물 자체로도 인식된다. 따라서 시를 쓰는 데 있어서 무엇을 그려내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있다. 현대문학은 러시아 형식주의를 거쳐 프랑스 구조주의 영미의 신비평에 도달하기까지 내용보다도 형식을 더 중요시하고 있는 편이다. 그러므로 시인에게는 남다른 능력이 요구된다. 무엇보다도 사물에 대한 남다른 인식능력과 관찰력. 통찰력이 필요하다.
시를 쓴다는 것은 시적 대상의 이면에 감춰진 의미와 사유를 통해 우리의 삶과 세계를 탐문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문학이 진실하려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비화해적이고 적대적이며 분열된 파편들의 모습으로 드러내어야 한다. 물론 시창작에서는 전이의 시학, 치환의 미학이 적용된다. 다른 한편으로 그런 일을 해내기 위해서 문학은 그렇게 갈가리 찢겨진 것들을 비폭력적 구성으로 다시 종합함으로써 현실을 화해의 빛 속에 드러내어야 한다. 이때 변용의 시학은 우회적 양상의 언술 양식을 전면에 내세우게 된다. 따라서 눈앞에 펼쳐진 시적 이미지를 통해 시적 의지를 제시하는 묘사는 시적 언술의 주요한 표현 양상일 수밖에 없다. 이중의 층위는 이미지를 통해 감각화된 세계를 제시함으로써 시에 감각적 특성을 부여한다. 그럼으로써 정형꾸의 시는 우리의 감각과 감수성을 극대화하며 매혹적인 세계를 펼쳐놓는다.
정형국은 ‘시인의 말’에서 ‘예술의 극치 그 끝자락에서 마른 수건을 비틀듯 영혼의 낱말을 이끌어 내는 것이 문학이기에 부단한 노력 없이는 좋은 결실을 맺기가 어렵다. 고장 난 시계처럼 멈추어버린 감성이 되지 않기 위해 시의 세계에 뛰어들어 거친 물살을 가르는 연어들처럼 힘차게 뛰어보겠다’는 의지를 수놓고 있다. 시인이라고 해서 특별한 능력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다만 시적 관심을 집중하다 보면 정서의 표출이나 정서반응을 남달리 하게 되는 특수한 능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시인의 말을 종합해서 분석해 본 결과 정형국 시인은 현대시가 요구하는 의도적 제작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고 하겠다. 제작성이란 영감이나 타고난 능력으로 시를 쓰는 게 아니라 기술을 연마, 제작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시를 쓰다’라고 할 때, 영어로 왜 ‘writw a poem’ 하지 않고 ‘make a poem’하는지 알아야 한다. 여기서 ‘make’는 강렬한 제작성을 의미한다. 시를 쓰는 능력은 연마하고 수련하기에 따라 개발되고 성숙되며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거친 물살을 가르는 연어들처럼 힘차게 뛰어야 기술적으로 좋은 시를 쓸 수 있다’는 시인의 언명과 통한다. 시에 집착하고 도전하며 물고 늘어지는 부단한 시 쓰는 노력만이 좋은 시인을 탄생시키는 조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정형국 시인은 2017년 여천포럼 문예대전 시 부문 입상하고, 연이어 2018년에도 같은 상을 수상하였다. 2019년 현대자동차 사보H-스토리 독자문예 시를 투고하고, 2021년에는 울산시문학상 작품상을 수상하였다. 2022년 울산 민주노총 노동조합 체험수기 공모전 시 부문에서 입상하는 등 누구보다도 열심히 연어처럼 시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Ⅱ.
시는 자고로 그 본질이 변한 것은 없다. 그러나 주어진 시대마다 그 표현 방법이 각기 다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마치 각 시대마다 인생관이나 세계관이 달랐듯이 시 전개방식도 시론도 시대마다 달랐다. 2000년대 이후 등장한 새로운 시적 경향과 감수성의 혁명은 그동안 여러 논쟁을 불러일으켰지만, 그 평가는 저마다 다를 것이다. 분명한 것은 2000년대 이후의 새로운 시적 감수성이 우리 시의 스펙트럼을 확장시켰다는 것이다. 사물의 본성이란 잘 변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 해석하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서 달리 해석되고 이해될 뿐이다. 그렇다면 어떤 경로로 어떻게 시가 각기 달리 표현되어 왔던가 하는 점을 조명했을 때 오늘의 시가 이렇게 표현될 수밖에 없었다는 필연성을 깨닫게 되고 또 이 깨달음은 오늘의 시작법에 결정적 보탬이 될 것이다. 물론 이런 작업들이 정형국 시를 분석하고 이해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선언 이후로 우리 시는 이성우월주의의 시대적 배경으로써 이성에 의한 통제의 질서가 요구한 시대적 산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자유와 해방의 방종을 질서화하기 위한 통제의 원리를 이성으로 보았던 데서 제기된 질서의 원리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문학도 이성의 원리가 발상차원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이러한 이성중심주의는 지금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여러 분야에서 아직도 맹위를 떨치고 있지만, 그 세력이 약화일로에 있는 건 사실이다. 이러한 이성주의는 낭만주의에 의해 거부되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시인은 이성과 함께 감성을 천성으로 부여받고 있다. 달리 말하면 이성과 감성의 공존적 관계, 이의 조화로운 화해의 원리가 정형국 시를 관통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제 정형국 시의 시적 감수성과 구성원리를 파악해 보고자 한다. 특히 지성과 감성이 조화롭게 작동하고 있는 정형국 시의 구조와 양상을 밝혀보기로 하겠다.
떠나보면 안다
손때 묻은 보금자리 소금빛처럼
태양에 눈부신 찬란한 그때가
좋은 시절임을
뭍으로 내몰린 언저리에
휑한 바람만 분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민둥산 고목나무처럼
비바람 맞으며
오롯이 걸어야 할
혼자만의 길이다
- <혼자만의 길> 전문
정형국 시인은 왜 시를 쓰는 것일까 또는 시를 쓰고 싶은 마음이 어디로부터 기인되는 것일까 하는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정형국의 <혼자만의 길>이란 시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왜냐하면 인간은 어떠한 존재인가 하는 존재론이나 본성론에 입각해서 시 창작의 욕구 충족의 문제를 확인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시를 쓰고자 하는 욕구는 아름다움의 창조 내지는 기쁨의 창조를 의미한다. 비투겐슈타인은 말하기를 ‘어느 예술가도 다른 사람들의 영향을 받고 있으며, 그 영향의 자국은 그들의 작품에 나타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술가의 개성이다. 남에게서 이어받은 영향은 알의 껍질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는가 하면 반 다이크는 ‘개인주의는 치명적인 독극물이다. 그러나 개성은 일반 생활의 소금이다. 사람은 군중 속에서 살아야 할지 모르나 군중이 사는 것처럼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남에게 도움이 되려면 자기 자신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모두 개성의 확립을 강조한 말이다.
‘손때 묻은 보금자리 소금빛처럼/ 태양에 눈부신 찬란한 그때가/ 좋은 시절임을’ 시인은 ‘떠나보면 안다’고 말한다. 우리는 떠나면서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고, 자신과 거리를 두고 관찰자 입장에서 투명하게 자신을 조명할 수 있다. 그리고 한 자리에서 다른 자리로 이동하면서 지나가는 시간을 느릿느릿 음미하고 전에 알지 못했던 장소들과 얼굴들을 발견한다. 그러하기에 혼자-되기는 시간과 공간을 전혀 새로운 환희의 세계로 바꾸어 놓는 가장 아늑한 방법이 된다고 시인은 말하는 것이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민둥산 고목나무처럼/ 비바람 맞으며/ 오롯이 걸어야 할’ 혼자만의 길은 현대문명의 이기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영혼의 순결과 희열을 담보하는 일이며 보다 근본적이고 철학적인 일이다. 그리고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시간을 누리며 자신의 감각을 살려내는 수단이 된다.
니체는 "나는 손으로만 쓰는 것이 아니다. 내 발도 항상 한몫을 담당해 왔다. 때로는 들판을 건너질러서, 때로는 종이 위에서 걸으면서 견실한 발의 역할을 당당히 감당하려 애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 혼자 가는 길은 자신을 밝히는 일이며 자신을 더 넓히고 깊게 하는 정신활동이다. 자기 자신의 내면을 확장하고 정화하는 과정을 수반하는 것이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니코스 카잔차키스도 봄이든 여름이든 작은 배낭 하나 짊어지고, 가을이든 겨울이든 비바람을 맞으며 이탈리아의 이 끝에서 저 끝으로 혼자 걸어서 여행한다는 것, 순례자의 길을 떠난다는 것, 이보다 더 큰 행복은 도저히 바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인가?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등 보다 근원적인 물음과 질문을 품을 수 있는 것은 혼자 가는 길위에서 가능하다. 시혼을 불러오는 시간도, 시적 발상이 반짝 스쳐와 그것을 메모하는 일도, 물가에 오래 앉아 물소리와 청옥의 물빛에 빠져 잠기는 일도 모두가 혼자 가는 길에서 얻을 수 있는 일이다. 혼자 가는 길은 침묵을 건너는 일이다. 혼자-되기는 외롭고 고독한 자기 자신의 내면에 귀 기울이는 시간이며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다독이고 위로하는 영적 활동이다. ‘민둥산 고목나무’와 ‘비바람’은 고독한 시인의 길이 어떠 해야 하는지를 잘 말해주고 있다. 하버드대 쿠퍼랜드 교수의 말처럼 훌륭한 작가는 방랑자와 구경꾼이어야 한다. 혼자가 아니고서 어떻게 방랑의 길을 떠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시인은 순례자요, 단독자여야 하는 것이다.
밤새 어둠을 물고
뜬눈으로 새벽을 달린다
떠나지 못한 그리움
하얗게 삭아버린
영혼의 방황
그대 향한 그리움은
열병으로 타오르고
빛의 덫에 걸린 낮달처럼
그대 곁을 맴돈다
<낮달> 중에서
시적 화자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그리운 누군가가 분명 존재한다. 그래서 그는 ‘뜬눈으로 새벽’을 달린다. 얼마나 사랑했기에 그리움이 그의 곁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걸까. ‘하얗게 삭아버린 영혼’에 더하여, ‘방황’까지, 시적 화자의 ‘그대 향한 그리움은 ’열병‘으로 타오른다. 이 시의 압권은 ’빛의 덫에 걸린 낮달‘에 있다. 그대 곁을 맴돌 수 밖에 없는 입장을 ’덫에 걸린 낮달‘로 멋지게 묘사했다. ‘낮달’ 은 ‘그리움’이란 보이지 않는 관념을 구체화하는 아주 적절한 객관적 상관물이다. 이 시는 ‘어둠을 물고’ ‘떠나지 못한’ ‘하얗게 삭아버린’ ‘열병으로 타오르고’ ‘빛의 덫에 걸린’ 등의 어둡고 그늘진 이미지를 통해 도저히 거둬 들일 수 없는 그리움을 잘 형상화하고 있다. ‘낮달’은 ‘하얗게 삭아버린 영혼’을 잘 나타내는 적재가 아닐 수 없다. 제어장치가 없어 사그러들지 않는 그녀에 대한 그리움은 ‘낮달’에서 절정을 이룬다. 그러므로 그는 열병을 앓는다. 인간 존재의 순수한 본 모습을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도 그녀에 대한 그리움을 버리지 못하는 안타까운 미련이 독자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사람들은
높게만 오르려 한다
높은 산을 정복하고
남보다 높은 위치에 서야만
행복할 수 있는 걸까
욕망은 끝이 없다
이런 마음이 더할수록
삶은 메마르고 굳어져버린다
낮게만 낮게만 흐르는
저 강물을 보라
- <강물> 전문
이 시를 통해 시적 화자는 세속적 욕망의 헛됨을 비판하려고 한다. 끊임없이 타자의 욕망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은 현대인의 욕망은 자신의 자유의지가 아닌 외부로부터 주입되는 것이라 말한다. 소비사회를 사는 현대인은 타인의 욕망을 맹목적으로 따라 하는 성향이 있다. 인간 욕망을 제어하지 않고자 하는 시대, 이에 대한 성찰을 촉구하는 시적 화자의 삶 바로 세우기가 눈길을 끈다. 시인이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잘못되어가고 있는 현상을 비판하는 것은 당연하다. 부조리한 현실을 질타하고 그로부터 건강한 메시지를 도출해내고자 하는 시인에게 박수를 보낸다. 시인은 사람들이 시장경제 체제에 전적으로 동참하는 것이 삶을 배반한다고 여긴다. 상승 욕구를 누리기 위해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 르네 지라르는 현대인의 욕망은 저절로 생기는 게 아니라 타인의 욕망을 모방하기 때문에 나타난다고 설명한다. 욕망의 주체인 내가 욕망의 대상인 무언가를 갈망하는 이유는 내가 동경하는 사람 혹은 욕망의 매개자인 경쟁자가 그것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욕망의 삼각형’ 이론이다. 시적 화자는 ‘높은 산을 정복하고 남보다 높은 위치에 서야만 행복할 수 있는 걸까’하면서 경쟁사회의 문제를 지적한다.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도 현대인의 욕망은 타인에 의해 주입된 것이며 타인의 욕망이 없다면 나의 욕망도 없다고 강조한다. 이런 관점에서 시적 화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욕망의 대상에 대한 사회문화적 쏠림 현상이 심하다는 걸 말한다. 특히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황금만능주의가 심화하면서 사회적 가치는 물질로 환산되고 모방과 경쟁의 대상도 단순해졌다.
욕망의 본질은 필요한 욕구나 요구를 넘어서는 형이상학적인 심리 상태다. 욕망은 부정적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지만 욕망 덕분에 인류는 야만의 시대를 넘어 문명사회를 열고 문화를 꽃피우며 산다. 미진선을 모방하려는 욕망을 품은 사회는 휴머니즘을 지향하기 마련이다. 문제는 욕망부터 형이하학적 물질에서 형이상학적 가치로 변해야 해결될 것이다. 과연 가능할 것인가. 시적 화자는 ‘낮게만 낮게만 흐르는 저 강물을 보라’고 해법을 내어놓는다. 정 시인의 절실한 요구가 가슴에 와닿는다. 이 시의 제재인 ‘강물’은 그것 자체로 비유와 상징이라는 시적 본질에 접근하는 것이기도 하다. ‘마지막 개인’으로서의 자기를 확인하고 그걸 증명하기 위해 시 쓰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시인은 이 거대 도시가 요구하는 온갖 제도와 가치로부터 이탈해서 살 수 없는 사람이다. 이 반인간적인 문명과 팽팽한 긴장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다시 말해 늘 깨어 있기 위해 시를 쓴다.
그해
풋내기 십대였던
나의 친구도 그렇게 떠났다
민주를 외치던 함성
포성과 총알받이가 된 시민들
아비규환 혼돈의 시대
그때를 기억하십니까
민주화 성지
금남로 전일빌딩 245 건물에는
245개의 탄흔의 흔적이 남아있다
우연의 일치일까 기막힌 일이다
쓰러진 넋들은
망월동 동산에 꽃이 되어 피었고
민주화 물결은
시대의 강물 따라 흐르고 있다
- <오월의 광주> 전문
‘오월’ 하면, 피천득의 ‘오월’이라는 수필보다 민주화항쟁의 성지 ‘광주’가 생각나는 건 어쩔 수 없다. 오월의 피천득과 오월의 광주는 천지 차이다. 제목을 보면, 시를 쓰는 순간, 시를 읽고 시를 생각하는 시간만큼, 시인은 이 부서진 세상 안에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시적 화자의 시는 현실인식에 대한 치열성을 드러내는 데 그 특성이 있다. 이 시에는 시인의 이런 시정신이 잘 드러난다. “금남로 전일빌딩 245 건물에는 245개의 탄흔의 흔적이 남아 있다” 는 진술 속에는 그날의 비극이 피로 얼룩져 있는 것이다. 이 시는 ‘그해 풋내기 십대였던 나의 친구도 그렇게 떠났다’로 시작한다. 비장하면서도 가슴 아픈 친구의 비극적 최후‘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되겠기에 시의 제일 앞부분에 배치했을 것이다. 이런 사실적 경험은 경험 그 자체로 가시적 세계인 이미지를 재현하여 시적 감각을 우리에게 전달하며, 진술은 시인의 음성을 통해 가청적 세계를 제시한다.
오월의 광주를 잊지 않음으로써 시인은 인류의 교사임을 선언한다. 이런 저항적 사고는 작가정신을 표상이 아닐 수 없다. 진압군은 어디서 왔는가? 어떻게 해서 시민에게 총을 쏘았는가? 누가 발포명령자인가? 광주 오월의 영령들 앞에서 지성인이라면 스스로 이러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영원히 존재할 수 없는 유한한 생명을 유지하는 피조물이다. 목숨보다 더 중요한 건 없다. 어떻게 시민에게, 국민에게 총을 겨눌 수 있는가. ‘쓰러진 넋들은 망월동 동산에 꽃이 되어 피었고’라는 말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한 목숨을 바친 영령들의 넋을 기리는 이 시로 인해 광주정신은 다시 민주주의 가치를 드높인다. 묻힐 수 없는 역사적 진실을 다시 한 번 더 공고히 하고자 하는 시인의 깨어있는 의식은 높게 평가되어야 하리라 믿는다. 증언자로서 구원의 사자로 나서는 모습이 정말 성스럽다고 하겠다.
기다림은
아직 오지 않은 새벽을 열고
푸른 강물을 헤엄쳐
가는 것이다
기다림은
아직 피지 않은 꽃잎을 피우려
멀어져 간 뒷모습에
가늘어지는 그림자를
투명으로 새기는
기나긴 아픔이다
떨림으로 우는 가슴앓이다
- <기다림> 전문
우주는 원하는 시간에 주지 않고 왜 항상 사람을 기다리게 할까. 이 시를 감상하면서 드는 생각이다. 그런데 시적 화자도 마찬가지인가보다. ‘떨림으로 우는 가슴앓이다’라고 멋지게 명명하지만, ‘기다림의 미학’이라는 말이 있듯이 늦게 주어지는 것이 당연하다. 그래서 시적 화자는 ‘기나긴 아픔’으로 기다림을 정의한다. 그것은 우주가 계획해 놓은 세상의 작동원리다. 물론 자신이 설정한 시간에 결과를 얻는 사람도 있고, 그보다 더 당겨서 얻는 사람도 있다. 다만, 그것은 시간의 상대적인 흐름이라는 것이 작동한 결과로써 우주가 적정한 타이밍에 준 것이다. 우주는 우리가 계획한 것에 필요하고 유익한 변형을 가하기 위해 ‘기다림’이라는 것을 부여한다. 그런데 그 기다림은 수동적으로 앉아서 기다리는 것은 아니다. 목적의식을 갖고 미래를 준비하는 시간을 주는 것이다. 마치 ‘아직 오지 않은 새벽을 열고 푸른 강물을 헤엄쳐 가는 것’과 비견된다.
성장을 위한 준비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어떤 결과가 만들어지는 시간은 인간이 설정하는 것처럼 생각된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우주원리는 그 일의 속성에 맞추어 ‘적당한’ 시간을 설정해놓았다. 그 과정도 사람이 계획하지만, 실제로 일이 되어가는 과정은 우주원리에 따라 결정된다. 한 번이라도 우리가 계획한 방법과 시간에 따른 결과가 나온 적이 없다. 그래서 시적 화자는 기다림을 ‘아직 피지 않은 꽃잎을 피우려 멀어져 간 뒷모습에 가늘어지는 그림자를 투명으로 새기는 기나긴 아픔’이라고 한 것이다. 기다림의 시간은 우리의 내적 성장과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는 시간이다. 시적 화자는 현실에서 변형을 가한 것에 대한 결과가 주어지는 타이밍과 상황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주는 이루어지는 과정과 결과를 알고 있다. 지체되는 동안 우리는 목표 현실화 열망을 강화하고, 특정한 기회가 오는 것을 알아차릴 능력을 기르게 한다. 기회들은 스스로 계획된 타이밍에 모습을 드러낸다.
잘 가라 내 사랑
너를 만날 때부터 나는
네가 떠나는 꿈에 시달렸다
지는 해가 다시 뜨기까지
그 고통의 시간
다시는 생각조차 않기를 맹세하면서
내 가슴에 못 하나를 박는다
잘 가라 내 사랑
너를 보내고 햄버거를 먹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잘 가라 내 사랑
네가 가고 없으니
나도 나를 버린다
- <추억에 못을 박다> 전문
사랑이 아름다운 것은 그 과정 속에 지나온 세월과 아름다웠던 추억들이 떠오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시적 화자는 추억에 못을 박으면서, ‘잘 가라 내 사랑’으로 시작하는 헤어짐의 변을 아프게 토로하고 있다. 꽃이 할 일은 그곳이 어느 곳이든 뿌리를 내려 아름답게 꽃을 피우는 것이고 연인 둘이 할 일은 어느 곳이든 발이 닿는 그곳에서 아름다운 사랑의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겠는가. 시적 화자도 삶에 모든 어려움을 뚫고 긍정의 자세로 삶의 소박하고 단순한 진리를 알아갔으면 좋겠다. 진행 중일 때는 그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잘 느끼지 못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천천히 미소로 바뀌면서 재미있는 추억이 되는 게 사랑일진데, 시적 화자는 ‘너를 만날 때부터 나는 네가 떠나는 꿈에 시달렸다’고 고백하고 있다.
고생이 심할수록 이야깃거리는 많아지게 마련이건만, 시적 화자는 ‘네가 가고 없으니 나도 나를 버린다’ 며, 고통의 시기이지만 지나고 보면 다 아름다운 추억으로 다가오는 법이련만 시적 화자는 아픈 추억에 못을 박고 있다. 청춘은 다시 되돌아갈 수 없다. 극복할 수 없는 사랑은 ‘다시는 생각조차 않기를 맹세’한다는 데서 절정을 이룬다. 시적 화자는 시 속에서 ‘잘 가라 내 사랑’을 세 번이나 내지른다. ‘내 사랑’이라고 한 걸 보니, 둘 사이에 사랑은 있었던 것 같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감을 잡을 수가 없다. 우리는 ‘불신의 시대’에 살고 있다. 시는 이별 통보로부터 출발했지만, 이제 시인은 자신과 맞서 싸워야 한다. 이별 통보를 먼저 받았을지도 모른다. ‘미움, 분노 공포 슬픔’ 이 드러난 이 시는 정서의 유로적 표출이라는 워드워즈의 언급을 떠오르게 한다. 주관적 체험을 통한 고조된 감정의 직접적 표출이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시적 화자는 ‘추억에 못을 박다’라는 구체적 진술을 통해 시적 대상에 내재한 기의의 세계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시적 성공을 거두고 있다.
어릴 적 텃밭에
감나무 세 그루
숨바꼭질할 때면
감나무 등 뒤에 숨기도 했고
하늘과 맞닿은 꼭대기에
빨갛게 익은 홍시는
까치밥으로 남겨도 놓고
홍시가 떨어지면 그릇에 주워 담아
건네주던 우리 할머니
아련히 떠오르는
홍시의 달콤한 그 맛
따스했던 할머니 손길
세 그루 감나무는
해마다 내 가슴에
별처럼 영롱한 감꽃으로 핀다
- <감나무 세 그루> 전문
이순신에게 12척의 배가 있었듯이, 비록 사랑하는 여인을 보내는 아픔을 겪은 시적 화자이지만 그에게는 감나무 세 그루에 얽힌 할머니의 추억이 있다. 추억 속에 있는 할머니의 목소리를 그대로 드러내려 한다는 점에서 이 시에는 이미 사물의 신성이 내재되어 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사물의 신성을 문자로 표현하는 과정이 여전히 시인의 기억 속에서 재구성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정 시인은 이처럼 기억을 재구성하는 존재를 시인보다는 에이전트, 요컨대 사물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보조자로 인식한다. 감나무는 추억의 상징이 되고 있다. 이 시의 압권은 ‘해마다 내 가슴에 별처럼 영롱한 감꽃으로 핀다’라는 표현으로 감꽃의 식물성적의 사랑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감나무 세 그루와 감꽃이 잘 어울리면서 펼쳐내는 할머니의 무한 사랑을 구체적으로 구현함으로써, 시골 정서에 둔감한 세대의 사유양태를 잘 겨냥하고 있다고 하겠다.
나는 낮보다
밤이 좋다
달과 별,
어둠을 헤매는
길 잃은 새들도
나의 친구가 된다
가끔씩 술잔을 들고 다가와
건배사도 외친다, 위하여
나는 밤을 걷는 모든 이들을
빛살로 감싸 안고 사랑한다
힘들었을 하루, 그대를 위하여
- <가로등> 전문
시인은 사물의 시선으로 세상을 본다. 시적 화자는 사람이 아니라 ‘신호등’이다. 이 정도면, 정형국 시인의 시적 역량은 기본을 넘어선다. 가로등의 일생을 사람의 일생에 견주어낸 까닭으로 그는 무정물을 인격화하는 데 성공했다. 이 시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나는 밤을 걷는 모든 이들을 빛살로 감싸 안고 사랑한다’는 대목이다. 가로등은 ‘가끔씩 술잔을 들고 다가와 건배사도 외친다, 위하여’ 밤을 잊은 그대들을 위하고자 하는 시인의 속내에 감춰진 가로등의 꿈은 자신처럼 힘든 사람들을 위한 기도다. ‘밤을 걷는 이’는 장시간 근무에 노출된 직장인이 아닌가. 힘든 야간작업은 자신이 원해서라기보다 가족을 위한 가장의 불가피한 선택이지만, 그래도 지켜봐주고 응원하는 존재가 있어서 세상은 살 만한 것이다. ‘가로등’ 역시 적절한 제재가 아닐 수 없다. ‘건배사’는 그가 얼마나 주변부 타자를 생각하는지 알 수가 있게 해주는 것 같다.
노동자의 삶으로 산다는 것
운명이자 숙명이다
강한 자는 약한 자를
언제든지 먹이사슬로 후려친다
이윤만을 추구하는 자본의 세계
그 절벽에 선 나약한 노동자여
시대의 변화에 설자리는 좁아져
거리로 내몰리는 우리들의 현실
슬픔과 한숨은 안개처럼 뿌옇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끌어안고
사랑해 주는 그날
봄이 오면 꽃이 피듯
노동자가 꽃이 되는
그날이 어서 왔으면 좋겠다
- <노동자의 눈물>
사람은 누구나 예측 가능한 삶을 갈구한다. 어느 대선 후보가 외친 ‘저녁이 있는 삶’은 그래서 많은 공감을 얻었다. 정해진 시간에 출근해 건강하게 일하고 정해진 시간에 퇴근해 가족과 친구와 함께 할 수 있는 삶은 분명 소중하다. 지옥 같은 공장을 벗어나도 편히 쉴 보금자리를 빼앗긴 노동자는 갈 곳이 없다. 1년 농사를 준비하는 농민을 보면서, 봄과 함께 찾아온 흐드러진 꽃들의 향연에도 마음을 빼앗길 수 없는 이유다. ‘이윤만을 추구하는 자본의 세계’ 하에서 노동자들은 ‘거리로 내몰리는’ 현실이다. ‘슬픔과 한숨은 안개처럼 뿌옇다’고 시적 화자는 노래하고 있다. 땀 냄새와 함께 삶의 애환이 배어 있는 우리 산업화의 시발점을 이룬 이들이 노동자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노동자들에게는 한없는 연민과 함께 예의를 차려야 한다. 장시간 저임금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자신을 희생했던 이 땅의 누나, 여동생들이 흘린 눈물에 대해 시적 화자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끌어안고 사랑해 주는 그날’이 오기를 기다린다.
‘봄이 오면 꽃이 피듯 노동자가 꽃이 되는’ 그런 세상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이 시가 노동시로서 성공하고 있는 것은 노동자의 날을 꽃의 개화를 통해 구체화함으로써 개성적 표현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이 시의 압권은 ‘강한 자는 약한 자를 언제든지 먹이사슬로 후려친다’라는 말에 있겠다. ‘강한 자’는 기업이라고 생각되겠지만, 입장에 따라서는 노동자보다 기업 친화적인 정부가 될 수도 있다. 시인은 이 시를 통해서 노동자의 현실은 어떠하며, 노동자는 어떤 존재인지 묻고 답하는 것이다. 시인은 대상을 날카롭게 관조하고, 인식한 것을 형상언어로 표현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한다. 구체어를 통해 시적으로 형상화하려는 노력도 보인다. 시는 사물의 모방이지만, 현실보다 더 리얼리티를 지닌다. 시인은 이 시를 통해 노동의 척박한 현실을 속살까지 드러내어 보여주고자 한다.
별을 보고
바람을 안고
때론 천둥소리에
가슴도 쓸어내린다
비에 젖은 몸
기댈 곳 없지만
어둠을 걷어내고
파란 하늘이 열리면
해맑은 영혼
한 송이 꽃으로
곱게 피어난다
- <들꽃> 전문
현실인식의 치열성에 대한 존재론적 의미를 표방하고 있는 이 시의 또 다른 특징은 ‘나는 사물의 발신음을 들으리라’는 질문을 부제로 달고 있다는 것이라 하겠다. 적어도 시인이라면 작가정신으로써 시가 현실과 유리되지 않아야 하고, 시는 시대를 비추는 거울로서 기능해야 한다. 이 시에는 현실의 모순을 타개하려는 작가의 적극적인 의도가 드러나 있어 좋다. ‘들꽃’이란 식물의 소리를 직접 목소리로 들려주지 않고 시적 형상화로는 담아내었다는 데에 이 시의 문학적 가치를 높이 평가할 수 있겠다. 정형국은 자연 속으로 들어가 직접 대상에 빙의되어 그 목소리를 인간에게 들려주려고 한다. 그의 시는 머리로 쓰는 관념시가 아니고 발로 뛰어서 쓰는 현장시다. 제목을 통해 그 내용을 유추할 수 있겠지만, 이 시에는 곳곳에 상징과 비유가 있음으로 한층 확장된 시적 맥락이 살아난다. 이루고자 하는 생각대로 시를 완성하려면 그 의도한 만큼 표현이 뒤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들꽃을 보면서 ‘파란 하늘’을 생각하고, ‘해맑은 영혼’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시창작에서 구체적 형상화란 불가결한 것이다. ‘별을 보고 바람을 안고 때론 천둥소리에 가슴도 쓸어내린다’는 진술에는 들꽃의 내면을 읽어내는 시인의 직관이 담겨 있다. 여기에는 많은 암시성과 입체성이 있다. 상징적인 언어가 우회화되어 있어 문학적 성취가 빛나는 것이다. ‘지’와 ‘정’ 그리고 ‘의’로 결합된 시인의 욕구는 ‘들꽃’ 안에 내재된 진리와 아름다움, 그리고 선을 추구하는 방향성을 갖는다고 하겠다. 이 시에는 식물성의 생태와 인간적 현실의 충동과 그 갈등이 우회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시적 자아는 이 시에서 들꽃의 꿋꿋함을 발견하고 있다. 시인이 이 시를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견딤’과 ‘희망’이라 하겠다. 정형국의 시는 중층묘사법으로 직조된다는 차원에서 믿음직하다.
Ⅲ.
사람도 인생도 그냥 얻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시인은 시를 쓰면서 깨우치고 있다. 때문에 시인은 순환되는 자연의 이치를 온전히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에게 시의 언어는 ‘발언’이다. 그래서 희망과 긍정의 시학이 ‘들꽃’에서 피어난다. 사랑했던 사람을 보내는 아픔이 있었지만, 시인의 푸른 꿈이 초록과 만나는 신선한 사유를 보여주는 게 이 시의 멋이다. 그는 자연의 순리를 삶의 조건으로 변주한다. 따라서 순수의 노래는 자연을 본받고 배우라고 부르는 외침으로 봐도 무방하겠다. 그는 산으로 들로 발걸음을 옮기며 ‘들꽃’를 보고, 인간의 본성과 세태를 풍자하기도 한다. 또한 과거, 현재 미래를 생각하면서, 점점이 뻗어가는 자신의 꿈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시로 수놓기도 한다. 자연과의 친화성을 수놓는 데 있어서도 추상성과 구체성을 같이 향유한다. 온몸으로 발열시킨 오감의 언어들을 숲길에 뿌리면서 정형국 시인은 우리들을 자연의 질서로 인도한다. 복잡한 인생의 단면을 시로 의미화하여 우리를 인생의 본질 이해에 도달시키는 데도 성공하고 있다. 이는 그의 시적 기량을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