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박봉애( 朴奉愛) - 세상 것 돌아보지 않고 1. 자각과 배움의 길에서
1 1955년 2월 22일은 내가 이 세상에 세 번째로 태어난 날이다. 이날은 바로 하늘과 인연을 맺고 뜻길에 들어선 날이며 이날을 기점으로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가치 추구를 위해 몸 바치며 살 수 있게 된 날이기에 나는 이날을 새로 태어난 날이라 부르는 것이다. 무상하리만큼 쉬 지나가 버린 70년의 생애를 더듬으면서 지금의 나로 성장시켜준 부모님과 하늘 앞에 조용히 감사를 드리는 것이다.
2 나는 1908년 9월 경남 진주시 평안동 45번지 기독교 가정에서 넷째 딸로 태어났다. 장로교회 목사인 부친과 신앙으로 깊이 다듬어진 내성의 모친 사이에서 세상의 어지러움이나 불편한 것을 모르고 자랐다.
3 하지만, 신심(信心)에 눈 뜨인 나는 일제하의 불쌍한 민족을 의식하게 될 때마다 촉석루에 올라 굽이쳐흐르는 남강물을 바라보며 나라 없는 슬픔에 잠겨 언니들과 같이 남강변 백사장을 거닐면서 내가 왜 이 세상에 태어났는가를 생각해 보는 습성을 길러왔다. 내가 교육가로서, 그리고 정치가로서 살 수 있게 한 정신적 바탕은 이미 이 무렵부터 싹터왔던 것이다. 4 봉건주의적 사고방식이 지배하는 그 당시였지만 나는 부모님의 개화사상에 힘입어 서울에 올라와 배화여고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1학년 시험을 치르려 학교에 찾아간 나는 마침 3학년 보결시험이 있어 응시했고 그 결과 무난히 합격을 하게 되어 2년 만에 여고를 졸업하였다. 5 나는 청운의 뜻을 품고 일본으로 유학의 길을 떠났다. 조국이 없는 슬픔 속에서 온갖 굴욕과 수모를 받으면서 조국이 얼마나 귀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체험하며 공부했다. 체육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한 후 10년 동안 중앙보육학교, 진명여자고등학교, 이화여자전문학교 등 사립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6 ‘나는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이냐? 조국을 찾는 길, 그것은 바로 무지(無知)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나는 일제의 탄압 밑에 신음하는 동포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연약한 가슴을 불태웠다.
7 민족혼을 불러일으킬 선구자로서의 사명감을 인식하고 밤이면 학생들과 대화를 나누기 그 얼마였던가! 역사를 얘기하고 철학을 논하면서 조국과 자유, 평화를 찾기 위한 진지한 방향 제시를 나 나름대로 펴 보는 것이었다. 8 ‘한국 여성의 의지와 노력은 2천만 우리 겨레의 저력이다. 여성의 힘이 배제된 민족에게서 그 어떤 결과도 기대할 수 없다. 우리는 힘을 길러야 한다. 힘이란 그 어떤 불의 앞에서도 꺾이지 않는 인격과 실력과 노력이다’ 뜻있는 학생들을 모아놓고 얘기하다가도 절망의 벽에 부딪칠 때 너무도 공허하고 초라한 나를 의식했고 가슴이 미어져 올 땐 조용히 교회를 찾아가 하늘을 향해 애절한 기도를 올렸다. 9 ‘주여, 이 민족을 불쌍히 여기소서. 어느 때 이 땅에 광명을 주시겠습니까?’ 나는 미력하나마 해방될 때까지 여성교육에 정열을 쏟았다. |
첫댓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