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원급제길
제6회 작품상
최수룡
어버이날을 앞두고 큰아들과 작은아들이 왔다. 살아생전에 늘 사랑으로 보살펴 주시던 부모님과 장인장모님 산소를 찾아보기로 했다. 매년 어버이날을 맞이하는 5월이면 그분들의 사랑과 고향산천을 잊지 않기 위해 손자들과 함께 찾는다. 경부선 고속도로를 타고 내려가다가 황간IC에서 빠져나와 추풍령 쪽으로 2km 즈음 좌측에 봉대산 자락에 자리 잡은 부모님 산소와 김천 천주교공원묘지에 안장된 장인장모님을 찾아뵙고, 가까이에 있는 직지사에 둘러서 장원급제길로 돌아올 생각이다. 그 동안은 자연이 너무나 아름다워 달도 머물다 간다는 월류봉과 백화산자락에 있는 고찰 반야사 찾았는데, 이번에는 신록의 계절에 아름다운 직지사를 찾아서 함께하는 시간은 멋진 가족나들이가 될 것이다. 직지사를 관람하고 돌아오는 길에 늦은 점심은 괘방령掛榜嶺을 넘어 황악산 자락에 위치한 천덕 송어회집에서 점심을 먹고 돌아올 계획이다.
석가탄신일을 앞둔 직지사는 꽃보다 아름다운 신록으로 멋진 풍광을자랑한다. 많은 관람객들이 산사의 아름다움을 찾아 사진 찍기에 여념이없다. 특히 사찰에 화려한 연등이 설치되어 자연과 어우러져 아름다움이 더욱 돋보이게 한다. 중학교 때 소풍을 황간역에서 3등 열차 화물칸을객실용으로 만든 기차를 타고 직지사역에서 내렸다. 황간역에서 추풍령역, 신암역, 다음이 직지사역이다. 직지사역에서 내리면 직지사까지 걸어서 멀고먼 길을 다녀왔던 원적 소풍이 가물거린다.
그 후 가끔 들리던 직지사도 중건을 하면서 가람배치도 많이 바뀌었으나 옛 모습을 아직 간직하여 찾는 즐거움은 변함이 없다. 황악산에서 내려오는 계곡물을 이용하여 가람배치한 곳을 고루 연결하여 더욱 아름다운 풍치로 사진애호가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되었다. 가끔은 정겨움을 안겨주면서도 그윽한 차향기에 젖어 고즈넉한 사찰 풍광이 그리워 단풍이 곱게 물들 때면 일부러 산책 겸 사진을 찍으러 찾던 직지사다.
직지사에서 3km 정도 내려오면 충북 영동군 매곡면으로 가는 장원급제길을 만나게 된다. 장원급제길은 영남일원의 선비들이 과거시험을 보러 한양으로 올라갈 때 추풍령으로 가면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 하여 추풍령으로 가지 않고 괘방령을 넘어서 가면 장원급제를 한다는 길이다. 이는 추풍령이 가을바람에 떨어지는 낙엽을 연상하여 과거시험에 낙방한다는 이미지 때문에 추풍령을 넘어서 가는 길을 꺼려했다. 그래서 영남내륙지방 선비들은 추풍령이 아닌 괘방령으로 우회하여 시험을 보러 가면 장원급제한다는 의미의 길을 이용하는 지혜를 발휘한 것이다.
괘방령掛榜嶺 즉 걸을 괘에 붙일 방자로 합격자 발표 때 붙이는 방과 같다는 의미를 함축하기에 장원급제길이라 명명한 것일 게다. 경상북도 김천시 대항면에서 충청북도 영동군 매곡면으로 가는 장원급제 길에는 나들이마당, 괘방령 주막, 합격기원 쉼터, 장원급제길 공원, 장원급제 합격기원돌탑, 주차장 등으로 꾸며져 대학수능을 앞둔 부모들이 자식들의 합격기원을 위해 즐겨 찾고 있단다.
뒤늦은 오늘 점심은 천덕송어회집에서 다양한 송어요리를 먹었다. 이곳은 매곡면 천덕리로 내가 어릴 때 살던 곳에서 멀지 않은 곳이기에 고향의 아름다운 고향산천에 대한 이야기로 아이들이 지루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물한 계곡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에서 어린 시절 미역을 감고, 뒷동산에서 맘껏 뛰놀던 산촌에서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다니던 아련한 동화의 세계가 펼쳐지던 매화골이다. 뻐꾸기와 소쩍새의 청아한 소리가 온 골짜기에 메아리치면 꽃가루와 은은한 꽃내음 속에서 젖어 살던 아름다운 고향이다. 이웃집과 다정하게 살던 아련한 그리움이 새록새록 솟아오르는 고향 나들이는 아름다운 신록의 계절에 어울리는 가족여행임에 틀림이 없다.
천덕송어회집에서 점심을 먹고 내려오면 유전리라는 곳이 있다. 유전리 핏들은 내가 어릴 때 어머니 아버지가 논농사를 지을 때 와 본 곳이다.
쌀쌀한 가을 날 해질녘에 춥기는 한데 농사일로 바쁜 부모님은 언제 집에 가시려는지 기약이 없다. 집에 가자고 보채면 조금 있다가 가자고 하여 조금이라는 것이 엄청 긴 시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친구와 내기를 했다. 오래 있는 것이 긴 시간인지 아니면 조금 있는 것이 긴 시간인지 이기는 사람이 귀뺨을 때리기로 한 것이다. 이웃집 놈이 어머니한테 물어 보았더니 허탈하게 웃으면서“이 놈들아 오래 있는 것이 긴 시간이지 조금 있는 것이 긴 시간이냐?”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는다. 동시에 친구는 내 귀뺨을 번개같이 후려 갈겼다. 눈에 번갯불이 번쩍하면서 소리도 요란했다. 놀란 눈으로“엄마!.”하고 큰 소리로 울고 있는데, 마침 담 넘어 내려다보면서 친구를 혼내주던 어머니 모습이 그립다. 그 이후 나는 둔자라는 별명을 오래도로 달고 다녔다.
고등학교 시험 보는 날이다. 시험 보는 날은 고등학교에 수험생이나 가족이 점심을 먹을 수 있도록 좌판을 펴고 천막을 치고 음식을 파는 사람들이 있었다. 오전 시험이 끝나고 점심을 먹기 위해 음식을 파는 곳으로 갔다. 먹을 것이 마뜩치 않았다. 또한 주머니 사정도 넉넉지 않았다. 한 쪽에 솥을 걸어 놓고 수제비를 파는 곳이 있었다. 미역국에 새알 수제비를 넣어서 먹을 수 있도록 한 음식이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입학시험 보는 날 시험에 미끄러져서 낙방하려고 미역국을 먹는 놈들도 있다면서 킥킥거리면서 지나간다. 내 딴에는 음식도 싸고 새알수제비를 먹으면 든든할 것 같아서 먹게 되었는데 듣고 보니 기분이 언짢았다.
며칠 후 입학시험이 발표되는 날이다. 요즈음처럼 인터넷이나 전화로 알려주는 시대가 아니었다. 직접 찾아가서 눈으로 확인해야 하는 때이었다. 그야말로 고등학교 붉은 벽돌 건물에 붓글씨로 쓴 합격자 명단이 길게 붙어 있었다. 합격자 명단에 또렷하게 내 이름이 있었다. 내가 간 길이 추풍령을 넘어서 김천으로 갔고, 올 때에도 추풍령을 넘어서 왔다. 또한 미끄러져서 합격하기가 어렵다는 속설이 있는 미역국도 먹었는데 말이다. 기쁜 소식을 가지고 한달음에 달려온 집에는 어머니가 부엌에서 저녁밥을 짓고 계셨다. 함께 간 친구들은 다 낙방을 하고 나 혼자 합격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어머니, 살아생전에 그렇게 환한 미소를 지으며 기뻐하셨던 모습은 지금도 잊지를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