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20]배인철의 흑인시
흉탄에 그가 죽던 날
흑인시의 싹도 죽었다
2015 세계 책의 수도 인천
정진오 기자
경인일보 2014-06-12 제9면
해방후 흑인병사들과 가깝게 지내며 작품 5개에 '약소민족' 아픔 녹여
1947년 남산서 총격 피살… 우익테러 의혹 속 치정관계로 몰아 수사종결
사후 시세계 비평·회고 줄이어… 인천서 '흑인시' 태동시켜 문학사 의미
여전히 낯설기만 한 '흑인시'라는 장르가 이 땅에 생겨난 것은 1945년 해방과 함께였다.
그 흑인시는 미군의 첫 상륙지점인 인천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흑인시라는 씨앗을 우리 땅에 처음으로 뿌린 이는 흑인이 아니라 '인천 사람' 배인철(裵仁哲, 1920~1947)이다.
인천은 흑인시의 개척도시이고, 배인철은 흑인시의 선구자이다.
배인철이 정체 모를 흉한의 총탄에 죽던 날, 이 땅에서 갓 돋아난 흑인시의 싹도 그만 죽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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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인철의 삶과 시 작품을 볼 수 있는 책자들. '현대문학' 1963년 2월호, 1967년에 나온 산문집 '명동-세월따라 바람따라', '창작과 비평' 1989년 봄호, '학산문학' 1991년 창간호, '명동야화', '명동시대', '명동 20년', '김광균 연구'(사진 왼쪽부터). |
# 흑인시의 기원, 인천과 배인철
지금까지 드러난 배인철의 흑인시 작품은 5개다. 맨 처음 나온 것은 1947년 1월 1일 '독립신보'에 실린 '노예해안'이다.
아프리카 연안 SLAVE COAST는 아직도 울고 있는가//깊은 바닷속 물결이 일 때마다 네들의//울음소리 내고 있는가
이렇게 시작하는 이 작품은 흑인 노예의 역사를 꿰고 있는 작가의 의식이 깊이 녹아 있다.
그렇다//1619년 열두의 黑奴가//和蘭船에 이끌린 다음 첩첩이 쌓인 헤아릴 수 없는 검은 송장이//고향 잃은 몸들이 노예선의 바닷길//바닷길을 지은 것이다 …(중략)… 흑인들이여//젊은 몸 붉은 피 이기지 못하여//파리로 모스크바로 달리는 동무들이여//또한 내 黑人部隊여//이 고장 떠난 자유로운 내 땅에서도//또다시 새로운 奴隸商//아니 낯 설은 손님마저//SLAVE COAST를 그리고 있다
흑인노예무역의 역사적 배경과 그 세부 상황까지 생생히 떠올리게 한다. 특히 '새로운 노예상'이란 시어에 다다르면 흑인 노예의 상황은 미군과 소련군이란 새로운 '점령군'을 맞은 한반도의 현실에 와 닿는다. 배인철이 그리는 흑인시에는 약소민족이라서 겪어야 했던 우리의 아픔까지 투영되어 있었던 것이다.
배인철은 1940년부터 1942년까지 일본 니혼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영문학도였다. 배인철이 본격적인 흑인시를 쓰게 된 것은 해방 이후 인천에 진주한 미군부대의 흑인병사들과 가깝게 지내면서다.
배인철은 일본 유학 중에는 위의 '노예해안'에서 흑인혁명에 빗대어 노래한 프랑스 혁명이나 러시아혁명에 심취할 정도로 좌편향적이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배인철과 일본 유학 중 공동생활을 했다는 이경성(1919~2009) 초대 인천시립박물관장의 회고록 '아름다움을 찾아서' 등에 따르면 배인철은 유학 당시에는 블레이크(William Blake)와 워즈워드(William Wordsworth) 등 신비주의나 낭만주의 쪽에 심취했다고 한다.
배인철은 일본 유학 시절 "아름다운 것은 모든 것에 앞선다"면서 까만 양복에 빨간 장미를 꽂고 다녔던 오스카 와일드를 흉내낼 정도였으며, 고베 출신의 여성과 아주 열렬한 사랑에 빠지기도 했다고 한다.
이경성 관장은 또 "그(배인철)는 인천 만석동에 있는 미군 부대에 자주 들러 흑인 병사들과 만났다. 나도 한번 그 부대에 들러 그가 가까이 지내고 있는 많은 흑인 병사와 인사한 적이 있다. 이 무렵 배인철은 흑인 문학에 심취해서 '흑인 권투 선수 조 루이스에게 바치는 노래'라는 시를 써서 중앙문예지에 발표하기도 하였다"고 회고했다.
'쪼 루이스에게'는 배인철이 1947년 3월 '문화창조'에 발표한 시다. '세계권투선수권 쟁탈전 쪼 루이스 대 빌이 콘:6월 22일 양키 스타디움'이란 다소 긴 부제를 붙인 이 시는 1937년부터 1949년까지 장장 12년간이나 헤비급 세계타이틀을 보유하며 일명 '갈색 폭격기'로 불렸던 흑인 권투선수 J. 루이스(1914~1981)에게 바치는 '헌시'이다. 배인철 자신도 일본에서 권투를 배웠다.
배인철이 남긴 작품은 '노예해안'과 '쪼 루이스에게' 이외에도 1947년 1월 '백제'에 발표한 '흑인녀', 1947년 나온 '1946년판 조선시집'에 실은 '人種線-흑인 쫀슨에게', 그리고 언제 썼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조병화 시인이 '현대문학' 1963년 2월호에서 소개한 '흑인부대'가 있다.
이 '흑인부대'란 제목의 시 때문인지 일부 연구자 중에는 인천 월미도에 미군 흑인부대가 있었고, 배인철이 그 부대에 드나들었던 것으로 기록하기도 하는데, 주한미군 당국은 역대 주한미군 중에는 흑인부대가 단독으로 존재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이경성 관장의 증언대로 미군정 당시 미군부대가 만석동 쪽에 있었고, 그 부대원 중 흑인병사들이 꽤나 되었는데 배인철은 그 흑인병사들을 통칭해 '흑인부대'로 명명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월미도에 있던 미군부대는 1950년에 가서야 터를 잡은 주한미군 인천항사령부였다. 해방공간 미군정기 인천주둔 미군들의 일상과 흑인 병사들의 상황을 엿보기 위해 1950년대 후반 월미도 미군부대에서 카투사로 근무했던 김두호(79·인천 강화군 교동읍)씨를 어렵사리 만났다.
김두호씨는 "미군 사령부 사병 중에 흑인도 많았고, 가깝게 지낸 흑인 친구들도 많았다"면서 "미군들은 일과가 끝나면 당시 인천항 주변으로 외출 나가 술집 등에서 노는 게 일상이었다"고 전했다. 그 10여 년 전인 해방공간에서의 인천 주둔 미군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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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 9월 8일 해방 후 한반도 첫 상륙부대인 미 육군이 인천항 잔교에 올라서고 있다. 바다에 떠있는 미 함선들도 보인다. |
# 배인철과 어울린 사람들
배인철을 찾아 나서면 어김없이 만나게 되는 문인들이 있다. 박인환, 김기림, 오장환, 김광균, 현덕, 함세덕, 임호권, 이병철, 정지용들이다. 모두가 우리 문학사의 보석같은 존재들이다. 이들은 하나같이 배인철과 깊은 교유의 정을 나눴다.
사실감 넘치는 해방 전후의 문단 이야기로 평가받는 안도섭의 실명소설 '명동시대'는 박인환과 배인철 얘기로 시작한다. 1946년 봄 박인환이 문을 연 서점 '마리서사'에 배인철이 들러 책을 사는 장면이다.
이렇게 첫 페이지를 연 '명동시대'는 배인철에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 배인철은 해방직후 2년여의 짧은 시기를 보냈지만, 우리 문단을 주도했던 젊은 문인들 가슴 속에 굵직한 자취를 남겼다.
배인철은 1945년 10월 '신예술가협회' 결성을 주도하면서 문단에 알려졌고, 당시 인천중학교(현 제물포고교) 영어 교사를 맡기도 했다. 또한 1947년 2월 1일 인천에서 문을 연 해양대학교 영어 교수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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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인철이 총격을 받아 숨진 사흘 뒤에 이 사건을 보도한 1947년 5월 13일자 동아일보. 동아일보는 당시 경찰의 정보대로 이 사건을 치정에 얽힌 질투심에 의한 테러인 것처럼 보도했다. 무엇이 진실인지 아직도 이 사건의 실체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
# 탕! 탕! 남산의 총소리, 그리고 기억
1947년 5월 10일 오후 6시 30분께 서울 남산 장충단공원 산책로에서 총성이 울렸다. 데이트 중이던 젊은 남녀 한 쌍이 쓰러졌다.
머리를 맞은 남성은 즉사했고, 여성은 옆구리 관통상을 당했지만 목숨에는 지장이 없었다. 배인철과 김현경이었다. 김현경은 당시 이화여대 2학년 영문과에 다니고 있었다. 김현경은 나중에 시인 김수영과 결혼했다.
'자유신문'과 '동아일보' 등 당시 신문들은 이 사실을 보도하면서 묘한 차이를 보였다. 자유신문은 5월 13일자에서 '모젤 권총 난사, 시인 배인철씨 피살'이란 제목의 팩트 위주 사건 기사를 실었는데, 동아일보는 역시 5월 13일자 기사에서 '3각 관계? 질투의 총탄 백주에 남녀를 살상'이라는 제목으로 치정관계 쪽으로 몰아갔다.
동아일보는 당시 경찰이 흘린 정보를 그대로 실은 것으로 보인다. 우익단체에 의한 테러라는 말이 많았는데, 당시 경찰은 배인철, 김현경과 얽혀 있던 박인환, 김수영 등 수많은 문인들을 용의자로 보고 수사했으나 범인을 색출하지 못하고 서둘러 종결했다.
배인철 사후 68년, 우리로 하여금 배인철의 흔적을 살필 수 있게 하는 것은 조병화, 이봉구, 김차영 등이 당시를 회상하고 기록한 여러 작품들을 통해서다.
배인철 사망 이후 발표한 김광균과 임호권의 조시(弔詩)가 남아 있고, 1947년 12월 오장환은 '남조선의 문학예술'이란 산문 말미에 '끝으로 이 수기를 1947년 5·1절이 지난 며칠 후 남산 미군 사격장 부근에서 알 수 없는 죽음을 한 시인 배인철 동지에게 주노라'라고 덧붙이면서 다시 한 번 고인의 명복을 빈 바 있다.
본격적으로는 조병화가 '현대문학' 1963년 2월호에 배인철 얘기와 배인철의 흑인시 2개 작품을 선보이면서 기록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작가 이봉구가 1967년에 '명동-세월따라 바람따라'란 산문집을 내면서 배인철의 활달했던 모습이 자세히 드러났다. 이후 명동 일대와 관련된 문화인들의 일화를 엮은 책자에 배인철은 단골 격으로 등장한다.
배인철의 흑인시와 그의 시세계가 비평의 대상으로 떠오른 것은 1989년 봄이다. 당시 인하대 윤영천 교수가 배인철의 작품 5개와 그 시세계에 대한 평론을 '창작과 비평'에 실은 것이다.
그리고 1991년 한국문인협회 인천지회의 '학산문학' 창간호 좌담회에서 배인철과 함께 활동했던 김차영 시인이 비교적 상세한 회고담을 풀어 놨다. 인하대 최원식 교수도 '배인철 묘비명' 등의 글을 짓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 '제3세계 문학'의 길을 처음으로 시도했다는 차원에서 배인철을 새롭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배인철의 흑인시를 태동시킨 인천 땅과 미군 진주에 얽힌 사연들도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국에서의 흑인문학에 대해 본격 연구를 시작한 김재용 원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배인철 사후에도 흑인문학이 한국에 많이 소개되었고, 그 흐름은 대단히 강력한 것이었다"면서 "인천이라는 지역 속에서만, 또는 흑인시 5편에만 국한해서 보면 오히려 배인철을 작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배인철은 한국의 흑인문학 전체 흐름 속에서 살펴볼 때 오히려 더욱 빛나는 존재가 될 것이라는 게 김재용 교수의 얘기다. 앞으로 있을 배인철 연구에서 빼놓지 말고 새겨야 할 지적이다.
글 = 정진오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