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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허조(許稠·1369~1439) ^^
*'송골매 재상' -*수응(瘦鷹)재상
지구상 날짐승 가운데 가장 빠른(수직 낙하時 - 시속:300 Km) 새: 송 골 매 ^
*해동청(海東靑)으로 불리기도 하는 '*송골매'는 몽골어에서 차용(借用)되어
쓰이게 된 말이다. 몽골어로는 숑홀(songhol)이다.
*수응(瘦:파리할수,鷹매응) 재상(宰相):
눈매가 송골매처럼 날카롭고 얼굴이 깡마르고 파리하다고 해서..
대왕 세종에게 쓴소리 마다치 않은
재상 경암(敬庵) 허조 ^^
“아랫 사람이 고소로써
지방의 수령을 처벌하면
존비(尊卑)의 질서가 무너져”
이조 · 예조판서 18년간 맡으면서
유교 국가 초석을 놓고
세종 태평성대(太平聖代)를 보좌^^
본인은 ~
좌의정을 역임하고 천수(天壽)를 누렸지만,
그 아들과 손자는 단종사화로
멸문(滅門) 당하게 되~
"전(前)에는 본국 예제(禮制)가 갖춰지지 못해
태종께서 허조(許稠)를 예관(禮官)에 임명하여
국휼(國恤,왕실의 장례)을 제정하고 조의(朝儀,조정의 의식)를
세우며 제례(祭禮)를 만들었다.
허조(許稠)가 옛날 예문(禮文)을 참고해
조의와 제례는 제정했으나
국휼(國恤)은 원고를 만들어 놓고 올리지 못했는데
두 차례 국상(國喪)을 관장하면서
민간 풍습을 고치고 옛 제도를 따르게 했다.”
조선 세종실록(世宗實錄)
권(券문서권)16의 내용이다.
1422년(세종 4) 7월 사관(史官)은
허조(許稠)가 예제와 의식을 만들어
그때까지 시행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세종은 훈민정음 창제(創製)뿐만 아니라
조선 개국(開國) 이후 ~
수많은 제도(制度)를 만들고 정비했다.
신생(新生) 왕조(王朝)의
유교적 의례도 예외가 아니었다.
세종은 이 일을 예조와 의례상정소 ·
집현전(集賢殿)에 맡겼다.
여기서 나온 성과물이
1444년(세종 26) 집현전을 중심으로 편찬된
오례의주(五禮儀注)이다.
이것을 30년에 걸쳐 보완한 게
성종 시기 완성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다.
조선 유교 정치의 한 축이 정립(定立)된 것이다.
스승 양촌(陽村) 권근(權近) 따라
'소학(小學)'을 보급하고 장려
세종을 도와 이 일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신하(臣下)는 세종실록(世宗實錄)에서 보듯
허조(許稠)라는 인물이다.
본관은 하양(河陽).
경산 대구가톨릭대학교에서 대구로
들어가는 대경로 한쪽에서
‘금호서원(琴湖書院)’이란
문화재 이정표(里程標)와 마주쳤다.
위치는 경북 경산시 하양읍 부호리.
큰길에서 마을로 300m쯤 들어가니
언덕에 금호서원(琴湖書院)이 있었다.
토요일 오후~ 서원(書院)은 비어 있었다.
입구(入口) 안내문에는
“세종 시기 좌의정을 지낸 ~
허조(許稠)는 조선 시대 초기(初期)
유학자이자 정치가로서
황희(黃喜)와 함께 세종 30년을
태평성대(太平聖代)로 이끈 재상(宰相)“
으로 적혀 있었다.
도서관(圖書館)에 들렀다.
관련 자료 7권에서
경암(敬庵) 허조(許稠, 1369~1439) 선생의
자취를 탐색했다^^
선생은 의례(儀禮) 제정과 함께
소학(小學) 교육을 장려했다.
주자(朱子)가 편찬한 소학(小學)은
쇄소(灑掃) · 응대(應對)를 비롯해
애친(愛親) · 경장(敬長) · 충군(忠君) 등의 글을
여러 경전(經典)에서 뽑아 편집(編輯)했다.
경암의 생애(生涯)를 연구한
고(故)이수건 영남대 교수는
“소학 교육과 주자 가례(家禮)에 따른
상례(喪禮) · 제례(祭禮) 권장은
고려(高麗) 불교 사회를
조선(朝鮮) 유교 사회에로
바꿔 나가는데 필수적이었다”며
“경암은 스승 권근(權近1352 ~ 1409)을 따라
그것을 보급하고 장려하는 정책을
강력히 추진했다”고 정리했다.
성균관과 4부 학당, 향교 등이 중심이 돼
[소학] 등 성리학을 보급한 것이다.
경암 자신도 부모상(父母喪)을 당했을 때
종래의 불교의식(佛敎儀式)을 취하지 않았다.
남수문(南秀文1408~1442)은
허조(許稠)의 묘지명(墓碑銘)에
“새벽닭이 울면 단정히 앉아 날마다
[소학]과 [중용]을 암송(暗誦욀송)하고
정일(精一)한 사념(思念)으로 힘써 실천했다”
고 썼다.
또 그는 경(敬)을 중시해 거실(居室)에는
’경암(敬庵)‘이란 편액을 걸었다.
그는 이렇게 조선(朝鮮)의 정체성 확립에
앞장섰다.
경암을 만나면서 궁금증이 생겼다^^
그가 세종 시기(時期) ~
태평성대를 일군 주역(主役)인데
역사책은 물론 지역에서도 널리
알려지지 않은 건 무슨 까닭일까?
동시대(同時代)의 재상
황희(黃喜) · 맹사성(孟思誠)과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금호서원 경덕사 안 ‘문경공경암허선생’ - 위패位牌 - & 최근에 제작된 선생의 - 초상화 -.
11월 22일 금호서원(琴湖書院)을 다시 찾았다.
경암(敬庵)은 사후(死後)에
문경공(文敬公)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하양 허씨 문경공파 종친회 허광열(73) 회장을 만났다.
허 회장은 하양향교 전교(典校)를 겸하고 있었다.
하양(河陽)이라는 지명(地名)은
1018년(고려 현종 9) 처음 붙여졌다.
벌써 1000년이 지난 이름이다.
하양(河陽)은 한때는 경주에,
한때는 대구에 포함됐다가
지금은 경산시(慶山市)의 한 읍이 됐다.
허 회장은 경암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까닭을
“경암의 후손(後孫)들이 나서서
그 어른을 알리는 게
도리가 아닌 것으로 본 것 같다”고 운을 뗐다.
그중 하나가 경암(敬庵)이 건의하고 실시한
‘부민고소금지법(部民告訴禁止法)’이다.
그가 예조판서 또는 이조판서로 있을 때다.
세종은 중앙(中央) 못지않게
지방(地方)을 통치하는 데도
좋은 시책(施策)을 많이 폈다.
세종은 기존 군현제(郡縣制)를 근간으로
지방제도(地方制度)를 정비,
위로는 8도(道) 체제와
아래로는 면리제(面里制)를 확립한다.
지방행정은
감사와 수령(守令)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군현은 규모에 따라 주·부·군·현으로 구획되고
수령은 종2품에서 종6품까지
부윤(府尹)·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목사(牧使)·
부사(府使)·군수(郡守)·현령(縣令)·현감(縣監)이
파견됐다.
세종은 한나라 선제(宣帝)를 본받아
지방 수령을 일읍(一邑)의 군주(君主)와 같이
나라를 통치하는 왕(王)의 분신(分身)으로 생각했다.
조선 초기 지방에는 유향소(留鄕所)가 있었다.
그 지역 출신 전직(前職) 관리들이 악질 향리(鄕吏)를
규찰(糾꼴규察살필찰)하기 위해 만든 자치기구다.
이 기구가 곳곳에서 도리어 수령守令을 비방하고
진퇴를 좌우하는 등
중앙집권과 수령守令의 권위 확립에
걸림돌이 된 것이다.
갑(甲)질이다^^
태종은 마침내 유향소(留鄕所)를 폐지하고
토호세력의 횡포를 규제하는 법(法)을 만들었다.
이후 수령守令의 권한 강화가 절실해졌다.
그때 경암(敬庵)이 세종에게
부민고소금지법(部民告訴禁止法)을
건의(建議)한 것이다.
치국(治國)의 근본은
상하(上下)를 엄격히 구분하는 것이니
부민(部民)이나 아전 등이
고을 원(員<守令>)을 고소(告訴)해도
종사(宗社)나 살인(殺人) 등이 아니면
불문(不問)에 부치자는 법안이었다.
세종은 받아들였다.
시행 9년 뒤에는
황희 · 변계량까지 가세(加勢)해
부민고소(部民告訴)에 관한 처벌을 강화한다.
하지만 만인(萬人)을 만족하게 할 수는 없었다.
이 법이 수령守令의 권위를 세우는 데는
기여하지만 한편으로
수령守令의 비행을 조장하고
특히 부민(部民)은 억울함을 풀 수 없게 됐다.
애민(愛民) 군주(君主)인
세종이 지나칠 리 없었다.
세종은 대안으로 중앙 관리를 내려보내
백성의 어려움을 탐문하고
관찰사가 수령守令을 철저히 감독하며
백성은 억울함을 소장(訴狀)으로 호소하는
길을 열었다.
하지만 경암(敬庵)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세종의 조치가 옳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다.
경암이 곧바로 세종에게 아뢴다.
“부민(部民)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소장(訴狀)을
수리한 뒤 관리의 오판(誤判)을 처단하게 하는 것은
존비(尊卑)의 구분을 없애게 할까 두렵습니다.
원컨대 소신(小臣)이 건의한 것을 따르게 하소서.”
세종이 답한다.
“고금(古今) 천하에 약소한 백성이 억울함도
말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이치에 맞겠는가.
경(卿)의 뜻은 알겠지만 실행키엔 온당치 않다.”
경암(敬庵)이 물러가자
세종이 옆의 신하에게 말한다.
“허조는 고집불통이야.”
그러면서
세종은 경암의 생각을 부분적으로 받아들인다.
이튿날 세종은 형조(刑曹)에 이렇게 지시한다.
“지금부터는 억울함을 호소하는
부민(部民)의 소장(訴狀)을 수리해서
바른 대로 판결(判決)만 하고 ~
관리(管理)의 오판(誤判)은 처벌(處罰)을 없게 하라!
존비(尊卑)의 분수(分數)를 보전하게 하라!”
절묘한 세종의 대응(對應)이다.
그 대목에서 종친회 허문환(64) 총무는
“성품이 강직한 경암 선조는 요즘으로 치면
융통성이라고는 없는 원리원칙 공무원”
이라고 표현했다.
서거정(徐居正)의 [필원잡기筆苑雜記]에는
경암을 묘사(描寫)한 이야기가 나온다.
경암은 척추(脊듬성마루척椎몸치추)가 굽은 장애인이었으며
식사도 허기(虛氣)를 면할 정도로만 먹은 탓에
늘 깡마른 체격을 유지해 말라깽이 재상
또는 수응재상(瘦鷹宰相, 송골매재상)으로 불렸다.
임금에게도 쓴소리 마다치 않은 ‘고집불통’
경암(敬庵)은 태종을 18년간 보필했다.
그는 태종의 총애를 받으면서
예조와 이조에서
의례 개정과 인사정책을 주로 맡았다.
태종은 경암(敬庵)을
“이 사람이야말로 참 재상(宰相)”이라고 표현한다.
그런 바탕에서 세종이 즉위하자
경암(敬庵)은 태종의 천거(薦擧)로
예조판서와 이조판서를 18년간 번갈아 지낸다.
또 과거시험을 관장하는 지공거(知貢擧)를
맡는 등 7회(回)에 걸쳐
신숙주 · 하위지 등 많은 인재를
발탁(拔뺄발擢뽑을탁)했다.
종친회 허광열 회장은
경암(敬庵)은 세종 시대(時代)를
대표(代表)하는 공신(功臣) 5명
(황희·최윤덕·허조·*신개·*이수)에 포함되어
종묘(宗廟)의 세종묘정에 배향(配享)돼
있다고 설명했다.
조선 왕조(王朝)의 신하(臣下)로서
가장 영예(榮꽃譽기릴예)로운 평가(評價)를
받은 것이다.
이어 문묘(文廟) 이야기가 나왔다.
문묘(文廟)는 공자(孔子)를 비롯해 중국과
우리나라의 명현(明賢) 위패(位牌)를
성균관과 향교에 모신 묘우(廟宇)를 가리킨다.
종묘(宗廟)와 문묘(文廟)는
*배향(配아내배享누릴향) 기준이 다르다.
유림(儒林)의 경암(敬庵)에 대한 평가는
한마디로 호의적이지 않다. 이유(理由)는 이렇다.
경암(敬庵)이 고려(高麗)에서
*벼슬살이(공양왕2 문과에 급제)하고
두 왕조(王朝)를 섬겼기 때문에
올곧은 선비는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유림(儒林)에서는
여말(高麗末) 충절(忠節)을 지킨
삼은(三隱, 목은이색·포은정몽주·야은길재)을
높이 평가한다.
허 회장은
“경암(敬庵)은 그의 스승 권근(權近)을 비롯해
당대(當代)에 관계한 인물(人物)들이
조선의 개국(開國) 쪽으로 섰기 때문”
이라고 설명했다.
금호서원(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49호)을
둘러봤다.
유림(儒林)은 1653년(효종 4)
지금의 경산시 하양읍 금락리에 처음으로
사당(祠堂)을 짓는다.
경암이 세상을 떠난 지 214년 뒤다.
그로부터 137년이 지나서 ~
정조(正祖)는
금호서원(琴湖書院) 편액을 써서 내린다.
다시 81년 뒤 ~
대원군(大院君)은 금호서원을 철폐했다.
지금의 자리에 복원된 것은 1923년.
금호서원(琴湖書院)은 자그마하다.
사당(祠堂)인 경덕사(景德祠)로 올라갔다.
사당 오른쪽에 최근 그려진
경암의 대형 초상화가 놓여 있었다.
예(禮)를 올렸다 ^^ .
위패(位牌)에는
‘文敬公敬庵許先生(문경공경암허선생)’
이라 쓰여 있다.
강당(講堂)인 수교당(修敎堂) 앞면에
금호서원(琴湖書院) 편액이 보였다.
서원은 경상북도에서 함께 중수를 계획 중이다.
문중(門中)은
2007년 [금호세고] 책판과
고문서(古文書) 등 총131점을
한국국학진흥원(韓國國學進興院)에
기탁(寄託)했다.
경암(敬庵)이 세종 시기 뛰어난
명재상(名宰相)이면서도
황희 · 맹사성 만큼 널리 알려지지 못한 데는
또 다른 사연(事緣)이 있었다.
바로 경암의 아들 · 손자와 관련이 있다.
경암 가문(家門)은 본래
위로 10대까지 과거에 급제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던 가문(家門)이 경암 대(代)에 이르러
꽃을 피운다.
경암(敬庵)이 문과에 급제했고,
아들 허후(許詡)와
손자 허조(許慥, 할아버지 이름과 발음이 같다)가 代를 이어
과거에 합격한 것이다.
아들도 관운(官運)이 순탄했다.
1447년(세종 29)
아버지 경암(敬庵)에 이어서
예조(禮曹)판서에 발탁돼
문종이 즉위할 때까지 재직했다.
[세종실록]에는 ~
허후(許詡)가 사형수(死刑囚)를 많이
구제(救濟)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러나 시절은 수상(愁시름수傷상처상)해졌다.
짧은 문종 치세(治世)가 끝나고
‘단종사화’[세조정변,丙子士禍,단종복위]피바람이
불어 닥친 것이다.
문중(門中)은
‘단종사화(端宗士禍)’로 표현했다.
경암의 아들과 손자는
수양대군의 왕위찬탈 과정에서
충절(忠節)을 선택(選擇)한다.
영남대 이수환 역사학과 교수는
“허후(許詡)는 단종(端宗) 초기
김종서·황보인 등과 함께 의정부(議政府)를
대표하는 대신(大臣)으로
계유정난(癸酉靖難1453 단종1) 뒤에 ~
수양대군이 손을 내밀지만
그들 행위를 불의(不義)로 간주하고
죽음을 선택(選擇)했다”고 규정했다.
손자 허조(許慥)도 허후를 이어
사육신(死六臣) 등과 함께
단종 복위를 모의하다 사전(事前)에
발각되자 자결(自決)한다.
형벌(刑罰)은 자결(自決)로 끝나지 않았다.
손자 허조(許慥)는 다시 사육신과 함께
팔과 다리를 찢기는 거열형(車裂刑)을
당한다.
아들 허후(許詡) · 손자 허조(許慥)가
단종사화(端宗士禍)에 맞서면서
경암(敬庵) 가문(家門)은 세조 측의
가혹한 보복으로 멸문(滅門)의 화(禍)를
입었다.
아들·손자 단종사화 연루돼
멸문(滅門)의 길로..
금호서원(琴湖書院)을 나와 마을 입구
대로변에 세워진 ~
허후·허조(許珝·許慥) 부자(父子)의
정충각(旌忠閣)을 찾았다.
▎금호서원 아래 하양(河陽)읍 `대구가톨릭대학교`에서 대구로 들어가는 4차선(車線)국도변(國道邊)-대경로에 세워진
허후(許珝)·허조(許慥)의 정려문이 새겨진 - 정충각(旌忠閣) -
허광열 회장은
“허후(許珝) 선조(先祖)는 당시 ~
문종(文宗)의 최측근 3인(人)으로서
다른 선택(選擇)을 할 수 없었을 것”
이라고 애틋해 했다.
정려(旌기정閭마을문여)가 내려진 것은
1792년(정조 16).
화(禍)를 입은 지 336년이 지나서다.
그 긴 세월 가문(家門)은 명맥만 겨우 유지했다.
허후(許珝)·허조(許慥)는 경암의 후광(後光)을 업고
부귀영화(富貴榮華)를 누릴 수도 있었지만
충(忠)과 의(義)로
절의(節義)와 지조(志操)를 지킨 것이다.
여기서 경암(敬庵)과 황희(黃喜)
두 가문(家門)은 서로 다른 길을 갔다.
황희(黃喜)의 자손은
세조 시기에도 훈구(勳공훈舊옛구) 대신(大臣)으로
가세(家勢)가 보존됐다.
정충각(旌忠閣)을 나와 한 곳을 더 답사했다.
하나 더 있는 금호서원이다.
그곳에서 2.8㎞ 떨어진 하양읍 금락리
금호서원이다.
담장은 높고 문은 잠겨 있었다.
입구 안내판에는
경암과 허후·허조(許慥) 3인을
배향한다고 쓰여 있었다.
후손들이 서원 훼철 이후 복원 때
의론이 맞지 않아 한 지역에 금호서원
둘이 들어선 것이다.
후손들이 다퉈가면서
경암 선조(先祖)를 모신 결과다.
경암의 마지막 임종(臨終)도 놀랍다^^
그는 눈을 감기 직전
승정원(承政院) *도승지(都承旨)
김돈(金墩)을 보고 싶어 한다.
세종의 윤허(允許)를 받아서~
김돈(金墩)이 도착하자
경암은 자제(子弟)를 물리치고
국사(國事)에 관한 유언(遺言)을 남긴 뒤
임금께 전(傳)하라고 당부한다.
“우리나라는 북쪽에 야인(野人)이 있고
동·남쪽에 왜(倭)가 있는데
만약 일시에 남북이 함께
난리(亂離)를 일으키면 나라가 위태로워진다.
사람들은 모두 태평성대라 하지만
위태하기 전(前)에 난리(亂離)를 근심하는 자가
과연 있겠는가.
원컨대 성상(聖上)께서 남북 변경(邊境)을
더욱 철저히 방비하소서.”
그는 죽음을 앞두고도 나라 안위(安慰)를
걱정한 것이다.
태평성대(太平聖代)을 일구고
웃으면서 세상을 떠나다^^
경암은 좌의정에서 물러난
1439년(세종 21) 12월 병상에 누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둔다.
“태평한 시대에 나서
태평한 세상에 죽으니
천지간(天地間)에 ~
굽어보고 쳐다보아도
홀로 부끄러울 것이 없다.
내 나이 이제 일흔이 넘었고,
지위가 상상(上相,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성상(聖上)의 은총(恩寵)을 만나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이날 ^^
형(兄) 허주가 들어가 보니
경암은 혼자 웃고 있었고,
아내가 들어가 보아도 역시
빙그레 웃고만 있었다.
아들 허후가 옆에 앉아 보고 있어도
웃기만 할 뿐 아무 말이 없었다.
이상하게 여긴 가족(家族)들이
자세히 들여다보니
허조(許稠)는 웃음을 띤 채 죽어 있었다.
현주(賢主 현명한 임금)와 양신(良臣뛰어난 신하).
하늘이 도운 만남이다.
빼어난 군주(君主) 세종대왕과
원칙주의 신하 허조는 서로 의존적이었다.
허조는 세종이 선정(善政)을 베풀 수 있도록
쓴소리를 마다치 않았고
세종은 그런 고집불통 신하(臣下)를 품어 안았다.
허조(許稠)는
조선의 태평성대(太平聖代)를
충직(忠直)과 수법(守法)으로 떠받친
세종(世宗)의 인재(人材)였다.
(끝)
- 글 송의호
대구 한의대 교수
/ 사진 백종하 객원기자
월간중앙(2019.12.17) 202001호
[선비 정신의 미학(46)]
*시호(諡號)
예전에, 임금이나 정승, 유현들이 죽은 뒤에
그들의 공덕을 칭송하여 주던 이름.
*배향(配享): 주신(主神)의 제사에 다른 신(神)을 병행하여 제사함.
임금이 생전에 총애하던 신하(臣下)나 공로(功勞)가 있는 신하를
종묘(宗廟)에 부제(祔祭)하거나 학덕이 있는 사람을 문묘(文廟)나
서원에 부제함.
*신개(申槩1374~1446): 이조판서로서 북쪽변방에 침입이 잦은
야인(野人)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1447년 좌의정에 이르렀다.
*이수(李隨1374~1430): 1429년 예문관 대제학·이조판서에
재 등용되었고, 이듬해에는 병조판서가 되었으나 취중(醉中)에
말에서 떨어져 낙사(落死)하였다. 시호(諡號)는 문정(文靖)으로
[배우기를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함이 문(文)이요,
몸을 공손히 가지고 말이 적음이 정(靖)]이다.
*도승지(都承旨):
승정원의 으뜸 벼슬.
왕명(王命) 전달하거나
신하들이 왕에게 올리는 글을
상달(上達)하는 일을 맡는 오늘날의
대통령비서실장의
역할 ^^
*송골매(falcon):
몽골의 국조(國鳥),
칭기즈칸의 새: 송골매
몽골어로 숑홀(songhol)이다.
*해동청(海東靑)으로 불리기도 하는
'*송골매'는 몽골어에서
차용(借用)되어 쓰이게 된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응방(鷹坊)'이 있었다.
매를 사냥(hunting)용으로 길렀는데
길들인지 일 년 된 것은 '갈지개',
이 년 된 것을 '초지니',
삼 년 된 것을 '삼지니'라고 불렀다.
송골매. 보라매를 비롯하여
수지니, 날지니, 쿽친, 익더귀, 따위의
매 이름은 몽골어에서 유래한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송골매
*매 [ 鷹 ] 는 ~
조류(鳥類) 중에서도 단연
최고의 시력(視力)을 자랑한다.
인간의 보다 8배나 멀리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인간의 5배가 넘는
시세포(視細胞)가 눈의 황반(黃斑얼룩반)에
분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매의 눈”이라는 말도 ..
*수지니 - 새끼 때부터 사람이 키운 매
*날지니 - 야생(野生)매
*산(山)지니 - 산(山)에서 자라 여러 해 묵은 매
*해동청(海東靑) - 깃털 푸른 `수지니`
*보라매:
1살 채 안 된 새끼를 포획(捕獲) 후 키운 매.
'보라'는
몽골어로 '바람'이라는 뜻이다
*초(初)지니- 한해 묵은 2살 된 매
▎금호서원 사당인 경덕사(景德祠) 앞에 선 하양허씨 문경공파종친회 허광열 회장(왼쪽)과 허문환 총무.
▎단종사화에서 충절을 지킨 경암의 아들 정간공(貞簡公) 허후(許珝) 정려문.
▎단종사화에서 충절을 지킨 경암의 손자 허조(許慥) 정려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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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죽을 것인가!
作家 김훈(1948/05/05 ~ )
망팔(望八)이 되니까
오랫동안 소식이 없던 벗들한테서
소식이 오는데, 죽었다는 소식이다.
살아 있다는 소식은 오지 않으니까,
소식이 없으면 살아 있는 것이다.
지난 달에도
형뻘 되는 벗이 죽어서
장사를 치르느라고 화장장에 갔었다.
화장장 정문에서부터
영구차와 버스들이 밀려 있었다.
관이 전기 화로 속으로 내려가면
고인의 이름 밑에 '소각 중'이라는
문자등이 켜지고,
40분쯤 지나니까 '소각 완료',
또 10분쯤 지나니까 '냉각 중'이라는
글자가 켜졌다.
10년쯤 전에는
소각에서 냉각까지 100분 정도 걸렸는데,
이제는 50분으로 줄었다.
기술이 크게 진보했고,
의전을 관리하는 절차도 세련되었다.
'냉각 완료'되면 흰 뼛가루가
줄줄이 컨베이어 벨트에 실려서 나오는데,
성인 한 사람분이 한 되 반 정도였다.
직원이 뼛가루를 봉투에 담아서
유족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유족들은 미리 준비한 옹기에
뼛가루를 담아서 목에 걸고 돌아갔다.
원통하게 비명횡사한 경우가 아니면
요즘에는 유족들도 별로 울지 않는다.
부모를 따라서 화장장에 온 청소년들은
대기실에 모여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고 있었다.
제 입으로 "우리는 호상(好喪) 입니다"라며
문상객을 맞는 상주도 있었다.
그날 세 살 난 아기가 소각되었다.
종이로 만든 작은 관이 내려갈 때,
젊은 엄마는 돌아서서 울었다.
아기의 뼛가루는 서너 홉쯤 되었을 터이다.
뼛가루는 흰 분말에 흐린 기운이 스며서
안개 색깔이었다.
입자가 고와서 먼지처럼 보였다.
아무런 질량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물체의 먼 흔적이나 그림자였다.
명사라기보다는 '흐린'이라는
형용사에 가까웠다.
뼛가루의 침묵은 완강했고,
범접할 수 없는 적막 속에서
세상과 작별하고 있었다.
금방 있던 사람이 금방 없어졌는데,
뼛가루는 남은 사람들의 슬픔이나
애도와는 사소한 관련도 없었고,
이 언어도단(言語道斷)은
인간 생명의 종말로서
합당하고 편안해 보였다.
죽으면 말길이 끊어져서
죽은 자는 산 자에게 죽음의 내용을 전할 수 없고,
죽은 자는 죽었기 때문에 죽음을 인지할 수 없다.
인간은 그저 죽을 뿐, 죽음을 경험할 수는 없다.
화장장에 다녀온 날 저녁마다
삶의 무거움과 죽음의 가벼움을 생각했다.
죽음이 저토록 가벼우므로
나는 남은 삶의 하중을 버티어낼 수 있다.
뼛가루 한 되 반은
인간 육체의 마지막 잔해로서
많지도 적지도 않고, 적당해 보였다.
죽음은
날이 저물고,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것과 같은
자연현상으로써,
애도(哀悼)할 만한 사태가 아니었다.
뼛가루를 들여다보니까,
일상생활하듯이, 세수를 하고 면도를 하듯이,
그렇게 가볍게 죽어야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돈 들이지 말고 죽자,
건강보험 재정 축내지 말고 죽자,
주변 사람을 힘들게 하지 말고 가자,
질척거리지 말고 가자,
지저분한 것들을 남기지 말고 가자,
빌려 온 것 있으면 다 갚고 가자,
남은 것 있으면 다 주고 가자,
입던 옷 깨끗이 빨아 입고 가자,
관은 중저가가 좋겠지.
가면서 사람 불러 모으지 말자,
빈소에서는 고스톱을 금한다고
미리 말해두자…
가볍게 죽기 위해서는
미리 정리해놓을 일이 있다.
내 작업실의 서랍과 수납장,
책장을 들여다 보았더니
지금까지 지니고 있었던 것의
거의 전부(!)가 쓰레기였다.
이 쓰레기더미 속에서 한 생애가 지나갔다.
똥을 백자 항아리에 담아서
냉장고에 넣어둔 꼴이었다.
나는 매일 조금씩, 표시가 안 나게
이 쓰레기들을 내다버린다.
드나들 때마다 조금씩 쇼핑백에 넣어서
끌어낸다.
나는 이제 높은 산에 오르지 못한다.
등산 장비 중에서 쓸 만한 것들은
모두 젊은이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나머지는 버렸다.
책을 버리기는 쉬운데,
헌 신발이나 낡은 등산화를 버리기는 슬프다.
뒤축이 닳고 찌그러진 신발은
내 몸뚱이를 싣고 이 세상의 거리를 쏘다닌,
나의 분신(分身)이며 동반자이다.
헌 신발은 연민할 수밖에 없는
표정을 지니고 있다.
헌 신발은 불쌍하다.
그래도 나는 내다 버렸다.
뼛가루에게 무슨 연민이 있겠는가.
유언을 하기는 쑥스럽지만
꼭 해야 한다면
아주 쉽고 일상적인 걸로 하고 싶다.
- 딸아, 잘생긴 건달 놈들을 조심해라.
- 아들아, 혀를 너무 빨리 놀리지 마라.
정도면 어떨까 싶다.
오래전에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는 스스로
'광야를 달리는 말[馬)'을 자칭했다.
아버지는 집 밖으로 나돌면서
평생을 사셨는데,
돌아가실 때 유언으로
“- 미안허다“ 를 남겼다.
한 생애가 4음절로 선명히 요약되었다.
더 이상 짧을 수는 없었다.
후회와 반성의 진정성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이것은 좋은 유언(遺言)이 아니다.
이미 돌이킬 수 없이 늦었고,
대책 없이 슬프고 허허(虛虛)로워서
어쩌자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퇴계 선생님은 죽음이 임박하자
- 조화를 따라서 사라짐이여,
다시 또 무엇을 바라겠는가
라는 시문(詩文)을 남겼고,
임종의 자리에서는
“- 매화(梅花)에 물 줘라“
하고 말씀하셨다고 제자들이 기록했다.
아름답고 격조 높은 유언이지만
생활의 구체성이 모자란다.
내 친구 김용택 시인의 아버지는
섬진강 상류의 산골 마을에서
평생 농사를 지으며 사셨다.
김용택의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김용택을 불러놓고 유언을 하셨는데
“- 네 어머니가 방마다 아궁이에 불 때느라고
고생 많이 했다. 부디 연탄보일러를 놓아드려라“
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이 이야기를 김용택의 어머니
박덕성 여사님한테서 직접 들었다.
몇 년 후에 김용택의 시골집에 가봤더니
그때까지도
연탄보일러를 놓지 못하고 있었다)
나의 아버지, 퇴계 선생님, 김용택의 아버지,
이 세 분의 유언 중에서
나는 김용택 아버지의 유언(遺言)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이 유언(遺言)은 건실하고 씩씩하고
속이 꽉 차 있다.
김용택 아버지는
참으로 죽음을 별것 아닌 것으로,
아침마다 소를 몰고 밭으로 나가듯이
가볍게 받아들이셨다.
그리고 숨을 거두는 순간에도
인생의 당면 문제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이 정도 유언이 나오려면,
깊은 내공(內功)과 오래고 성실한
노동의 세월이 필요하다.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삶은 무겁고 죽음은 가볍다.
죽음과 싸워서 이기는 것이
의술의 목표라면
의술은 백전백패(百戰百敗)한다.
의술(醫術)의 목표는 생명이고,
죽음이 아니다.
이국종처럼,
깨어진 육체를 맞추고 꿰매서 살려내는
의사가 있어야 하지만,
충분히 다 살고 죽으려는 사람들의
마지막 길을 품위 있게 인도해 주는
의사도 있어야 한다.
죽음은 쓰다듬어서 맞아들여야지,
싸워서 이겨야 할 대상이 아니다.
다 살았으므로 가야 하는 사람의
마지막 시간을
파이프를 꽂아서 붙잡아놓고서
못 가게 하는 의술은 무의미(無意味)하다.
가볍게 죽고, 가는 사람을 서늘하게 보내자.
단순한 장례 절차에서도
정중한 애도를 실현할 수 있다.
가는 사람도 보내는 사람도, 의술(醫術)도
모두 가벼움으로 돌아가자.
뼛가루를 들여다보면 다 알 수 있다.
이 가벼움으로
삶의 무거움을 버티어낼 수 있다.
결국(結局일이귀결되는마당)은 가볍다.
- 끝 -
<시사 플러스>
‘골방서생’ 김훈이 말하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
김승혜 기자 |
2019.10.25. 금요일
<골방서생이라 자평하던 그가 최근
<어떻게 죽을 것인가>란
짧지 않은 글을 SNS를 통해
지인(知人)에게 보냈다.
시사플러스에서 해당 글을 소개한다.>
作家
김훈(1948/05/05 ~ ) :
고려대학교 영문학 중퇴
휘문고등학교
휘문중학교
돈암초등학교
소설(小說) :<칼의 노래>, <남한산성>,
<화장 reviver, REVIVRE (프) 火葬 , 化粧> 등
발표
- 소설(小說) <칼의 노래>,
<남한산성>,<화장> 등을 쓴
작가 김훈의 글입니다. -
|
첫댓글 [허규택] [오전 6:19] kakao talk
다산 정약용^^
혼인 60주년 회혼일 아침인
1836년 4월 7일(음력 2월 22일)에
한강변 마현리(경기도 능내, 마재리)
자택에서 꼿꼿한 자세로
이승을 마감했다^^
75세였다.
그가 유배지에서
아들 학연과 학유에게
보낸 편지가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다.
거기에 ‘남자의 길’이 쓰여 있다.
아침에 햇볕을 받는 쪽은
저녁에 그늘이 먼저 들고,
일찍 핀 꽃이
일찍 진다는 것을
명심하라고 했다.
운명의 수레바퀴는
쉬지 않는다고도 했다.
대장부는
언제나 가을 하늘에
매(鷹)가 솟구쳐 오르는
기상(氣像형상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쇄소(灑掃) · 응대(應對)
옛날 어린이들이 소학에서 가장 먼저 배우던
'쇄소응대(灑掃應對)'가 떠올랐다.
아침에 일어나면
마당에 물을 뿌리고 비질을 하게 한
옛 선현들의 가르침이었다.
훌륭한 공부보다도
사람이 가져야할 가장 기본적인 자세를
익히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겼던 말이었다.
수백 년 전에 퇴계에게 보낸
남명 조식의 편지를 읽으면서도
가슴이 뜨끔해졌다.
"물 뿌리고 비질하는 법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하의 이치를 말하고
헛된 명성을 훔쳐서 세상을 속인다."고 했다.
비질만 잘해도 마땅히 깨달음을 얻는다고 한
부처의 말과 일맥상통했다.
어느 고전학자는
'청소란 공간에 대한 배려'라는
멋진 정의를 내리기도 했다.
돌이켜보니 믿음이 가는 사람은
자신과 주변이 잘 정돈된 사람들이었다.
결국 그들은 자신과 남들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내 얼굴을 잘 보기 위해서
먼저 거울을 깨끗이 닦아야 하듯이,
나 자신과 주변을 단정하게 살피고
보살피는 일이 자신과 주변을 아끼고
배려하는 것일 터였다.
(아래에 계속)
(위에서 계속)
청명이 지나니 말 그대로 하늘이 점점 맑아졌다.
봄을 재촉하는 빗방울이 그치니
그사이 꽃샘추위가 찾아왔다.
산책길에 얼굴을 부딪치는 찬바람으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
- 쇄소응대(灑掃應對) 중에서
장정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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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출고시간2013.04.10. 14:35:54
최종수정2013.08.04 00:4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