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26일,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은 ‘2018년 예술인 복지 사업설명회’를 열고 올해 재단이 진행할 다양한 복지사업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2012년 설립한 이후 본격적으로 운영 6년차를 맞이하는 재단 사업은 큰 변화 없이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고 있지만, 2018년에는 창작준비금과 예술인 파견지원, 예술인 산재보험 등 주요 사업들에서 몇 가지 작년과 달라진 몇 가지 있다. 그동안 예술인의 의견을 경청하고 반영한, 대부분 예술인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나타난 긍정적인 변화이다.
예술인의 꿈과 열망을 ‘응원’ 합니다. “예술인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친구가 되겠습니다”
2018. 4
업무보고 차 모인 직원들이 직책과 이름을 밝히는 것으로 조금 어색하게 자기소개를 한다. 직원들의 이름과 얼굴을 연결하고 기억하기 위해 고개를 들어 직원들과 눈을 맞추는 정 대표. 정식 출근한 지 보름이 채 되지 않은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정희섭 신임 대표와 새 대표를 맞은 직원들 사이에 풋풋한 긴장이 느껴진다. 재단 설립과 초기 정책 부분에 관여한 바 있는 그에게 재단 자체는 그리 낯선 곳이 아니지만 대표로서 느끼는 책임감과 각오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글 편집부 사진 이현석)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은 예술인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친구가 되어야 한다. 예술인 복지 사업으로 예술인의 꿈과 열망을 응원할 것이다.”
극단 현장 대표,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정책실장, 국립극장 공연과장 등을 지내고 한국문화정책연구소 이사장을 역임한 정 대표는 취임사에서 평소 고민해온 예술인 복지에 대한 관점을 밝히고 재단이 앞으로 지향해야 할 태도를 분명히 했다. 예술인과 예술인 복지, 재단 모두를 의미 있게 포용한 취임사에는 그동안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열심히 일해온 직원들의 노고에 대한 존중과 격려도 담겨 있었다.
먼저, 취임을 축하드립니다. 재단 첫인상은 어땠나요?
대표 임명을 받고 첫 느낌은 ‘아, 정말 이 일을 하게 되는구나’였습니다. 이 기관에서 일을 하고 싶었다기보다 평소 재단에서 하는 예술인 복지 관련 일이 반드시 필요하고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 왔는데 이제 그 일을 제가 직접 하게 된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습니다.
예술인복지재단이 처음 설립될 무렵에 정책적으로 조금 관여를 했기에 재단의 업무 자체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바는 아니지요. 가끔 이런저런 일로 드나들기도 했고요. 그래서인지 특별한 첫인상이랄 것까지는 없었습니다. 다만 아무래도 직원들에 대해서는 낯설 수밖에 없었지요. 직원들과 첫대면을 어떻게 할까는 신경이 쓰일 수밖에요. 그런데 그 첫 대면에서 재미있는 일이 있었어요. 2월23일에 취임식을 한다는 연락을 받은 게 3일 전이었습니다. 저는 15년 동안 야인 생활을 했기에 마땅히 입을 옷이 없었지요. 그래서 급히 옷을 사서 수선을 맡겼는데 취임식 당일 아침에야 찾을 수 있었어요. 입어보지도 못하고 헐레벌떡 옷을 챙겨 들고 재단 1층 사무실에 들어서니 한 직원이 “어떻게 오셨어요?” 하는 거예요.(웃음) 제 차림새가 그럴 만했어요. 본부장 자리를 물어 찾아가 잠시 같이 있다가 취임식 장소로 이동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맨 처음 눈이 마주친 사람이 하필 저한테 어떻게 오셨냐 물었던 바로 그 직원이었어요. 그 직원은 당황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저로서는 첫 만남에서 있을 수 있는 직원들과의 긴장감이 자연스럽게 사라져버린 셈이지요. 그 별일 아닌 에피소드 덕분에 직원들을 대하기가 무척 편해졌습니다.
대표 취임 후 다양한 채널을 통해 재단의 부족한 점, 아쉬운 점을 전해 들었다고 하셨는데, 기존 정책에서 어떤 면을 가장 아쉬워하던가요?
여러 이야기를 들었지요. 먼저 우리 재단을 가난한 예술인들을 지원하는 곳으로 많이 알고 있더라고요. 물론 예술인복지재단이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만, 저는 ‘가난한’이 아니라 ‘예술인’에 방점이 찍혀야 한다고 생각해요. 가난해서 지원하는 게 아니라 예술가라서 지원하는 겁니다. 재단 직원들도 그렇게 생각했으면 합니다. 다만 우선순위는 상대적으로 더 어려운 분이 되겠지만요. 그래서 발언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재단이 하는 일은 후원이 아니라 응원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고 최고은 씨 사건과 재단 설립이 연결되어 있어서 재단 성격을 가난과 연결 짓는 분들이 많고 관점 역시 그쪽으로 쏠려 있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사실은 그 전에 고 구본주 씨 일이 있었어요. 구본주 조각가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후 보험회사에서 보험금 산정을 놓고 갈등이 있었지요. 이미 미술계에서 충분히 인정받은 조각가를 도시 일용 노동자로 간주했어요. 또 예술가의 정년 문제도 대두되었지요. ‘예술인이라는 신분과 직업이 사회적 쟁점이 되었지요. 직업인으로서의 예술인에 대한 객관적 인정과 그에 따른 권익을 보호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는 여론이 형성되었습니다. 그 동안은 정부의 문화예술정책에서 이 부분에 대한 관심이 많지 않았다고 봅니다. 예술을 하나의 직업으로 인정하고 존중받을 수 있도록 사회적으로 예우하는 일, 직업인으로서의 예술인을 객관적으로 공인하는 일을 예술활동증명이라는 절차를 거쳐서 재단이 하게 된 것이죠.
얼마 전 마포에 있는 예술인 자녀 돌봄센터 1주년 행사에 다녀왔어요. 거기서 기존 다른 시설은 예술인들이 이용할 수 없다는 말을 들었어요. 다른 시설은 맞벌이 부부 대상으로 운영하고 있어서 재직증명서가 있어야 아이를 맡길 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예술인들은 그걸 발급받을 수가 없잖아요? 이 문제는 사실 해결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고 생각해요. 재단에 예술인으로 예술활동증명이 되어있다면 그것으로 재직증명서의 기능을 할 수 있도록 관계부처와 협의해서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말하자면 그런 겁니다. 그동안 예산이나 여러 가지 문제 때문에 재단이 해야할 일들을 제대로 못하는 경우가 많았죠. 그리고 예산이나 인력 문제는 사실 풀기가 쉽지 않고요. 하지만 이런 제도적인 문제는 가능하지 않을까 해요. 그러니까 이런 문제들, 제도나 절차의 개선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을 푸는데 좀 더 치중하고 싶어요.
극단 현장 대표이기도 하셨죠. 직접 경험하신 예술계 복지는 어땠나요?
연극뿐 아니라 예술계 전반으로 확장해 말씀드리면, 직업인으로서 자신을 세우는 문제와 저소득 문제가 있습니다. 일단 직업인으로 인정이 되면 그 다음은 고용 문제가 있고요. 대통령 공약으로 예술인 고용 보험이 언급되기도 했지만 당연히 역점을 두고 추진해야 할 사업입니다.
한국 예술시장이 작은 것도 예술인 저소득의 원인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절대적인 저소득도 문제지만 ‘필요한때 필요한 만큼의 지원’이 없다는 점도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예술인 역시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야 하고, 다치면 병원에도 가야 해요. 사회적 인간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비용과 그 비용이 드는 시기가 있습니다. 필요한 만큼 비용을 지원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사실 예산 문제가 있어서 그럴 수는 없겠지요. 그래도 ‘필요한 시기’에 대해서는 정책적 관심이 두어져야 할 것같아요. 머지않아 예술인 복지금고가 운영되게 되는데, 그 금고가 바로 꼭 필요한 시기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운영 방안을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표로서 조직 운영을 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게 있다면요?
결국 일하는 사람들의 뜻을 모으고 그들이 단순한 직장인으로서가 아니라 자기가 하는 일의 의미와 가치를 스스로 발견해서 서로 조화롭게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거겠죠. 제가 밖에서 듣고 보기에, 그리고 들어와서 가까이에서 구체적으로 보기에도 우리 직원들이 일을 열심히 잘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술계의 어떤 분이 제게 말하기를 예술인 복지 못지 않게 예술인복지재단 직원들의 복지도 중요하다고 하시더군요. 직원들 정말 수고가 많아요. 그리고 안타깝게도 예술인들과 접촉하면서 ‘감정노동’도 하더라구요. 직원들의 복지를 진작하고, 보람을 느끼면서 신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고민하고 신경 쓰려고 합니다.
지난 호 칼럼에서도 언급하셨지만 “롱패딩을 원한다는 청소년의 말에 후원을 끊었다는 한 후원자에 대한 보도”를 접하고 대표직 수행을 결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생각하시는 예술의 의미와 예술인 복지 방향에 대해 좀 더 말씀해주세요.
예술의 가치나 의미, 중요성 등에 대해서는 많은 공감대가 이뤄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아직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예술은 예술인이 자기가 좋아서 하는 자기만족적 일이라는 인식이 남아 있습니다. 예술은 어차피 돈 안되는 일인데 예술가 스스로 그 길을 가겠다고 선택했으니 그에 따르는 가난은 감수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고요. 그런 인식을 극복하기 위해 그동안 예술의 가치, 사회공헌을 많이 이야기해왔습니다. 물론 필요한 일이지요. 하지만 예술은 무엇보다 자발적인 행위이거든요. 예술인으로 하여금 가시적으로 사회공헌적 예술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보다는 예술인이 자기 세계에 몰두해 작업을 할 수 있는 환경과 여건을 조성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토대 위에서 나오는 예술이라야 사회적으로도 의미를 갖습니다.
특히 생계 문제로 인해 창작 열망이나 의욕이 꺾이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게 중요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 재단에서 하는 창작준비금 지원 사업은 문자 그대로 창작 준비에 도움이 되도록 하는 사업입니다. 그런데 창작 준비라는 단어를 글자 그대로만 해석해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신청하는 분들 중 어떤 분은 그 지원금으로 우선 생계에 지출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면 원래 지원 취지와 맞지 않는 것일까요? 예컨대 지금 어떤 예술가의 가장 큰 고민이 아이의 학자금이라면, 그 문제가 그 분의 창작 열망에 발목을 잡는 게 아니겠어요? 그럴 때 그 예술가가 학자금 걱정을 덜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면 그것이 그 분의 창작에도 도움이 되는 것이죠. 그렇다면 창작준비금은 예술가의 창작의지와 열망이 그런 걱정으로 소모되지 않게 돕는 역할을 하는 거죠. ‘창작준비’의 의미를 폭넓게 봐야 합니다. 예술인 역시 생활인입니다. 그렇게 보지 않으면 창작준비금으로 아이 학자금을 해결했다고 사회적 비난이 쏟아질 수도 있습니다. 후원을 끊은 후원자 일화처럼 말입니다. 예술인의 창작 의욕이나 열망을 가로막거나 소모시키는 생계 및 생활 문제를 우리가 조금이나마 보조함으로써 예술인의 창작 의욕과 열망을 북돋을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 시사 잡지에서 서울시 ‘청년수당 사업’ 관련 기사를 봤는데, 서울시 청년수당 홍보 포스터 문구가 ‘청년에게 시간을 드립니다’였어요. 청년들이 그 돈으로 당구장을 갔다, 생맥주를 마셨다 등 비판이 있었거든요. 청년들이 그 수당을 받는 기간만큼은 걱정을 덜고 자기 시간을 가지면서 자기 단련을 하는 겁니다. 취업 준비 수당이니까 전부 학원 다녀야 하고 반드시 실질적으로 취업 관련 지출만 해야 하는 건 아니거든요. 청년으로 자기 삶을 누리며 덜 불안한 상태에서 자기 삶을 설계할 수 있는 시간을 주는 겁니다. 사업의 취지를 적확하게 표현한 홍보 문구였던 셈이죠. 마찬가지로 겉으로 보면 우리가 예술인의 생계를 지원하는 것 같지만 그걸 통해서 예술인의 창작 열망을 응원하는 겁니다. 이 점은 꼭 강조하고 싶습니다.
예술 현장과 행정 경험을 다 하셨죠. 경험과 연결하여, 예술인 복지 정책이 지금보다 더 실효를 거두기 위해 선행되어야 할 게 있을까요?
장르별 특성과 예술가의 생애주기가 반영된 복지정책이 필요합니다. 지금은 예술계 일반으로 전 장르 공통으로 적용되고, 청년부터 원로 예술인까지 생애주기와는 무관하게 사업을 수행해온 측면이 있습니다. 각종 사업과 정책이 장르별 특성과 예술가의 생애주기를 반영하여 더 촘촘하고 세심해져야 한다고 봅니다.
재단에서 운영 중인 여러 사업 중 개선했으면 하는 사업이 있다면요?
70세 이상을 원로 예술인으로 봅니다. 현재 재단에 등록한 분들 중 90세 이상도 있어요. 이 분들 중 혹시 돌아가신 분들 파악이 가능한지 직원들에게 문의한 적이 있습니다. 사망자를 파악하는 일이 쉽지 않더라고요. 보통 사망 정보가 금융이나 보험회사 쪽에는 전달이 되지 않습니까? 국가 행정시스템에 사망 정보를 알려줄 수 있는 시스템이 있을 거고 우리가 그 시스템에 접근만 가능하면 사망자 파악이 수월해지겠죠. 제가 그런 문제를 제기한 이후에 관련된 기관들과 협의를 통해 어느 정도 해결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분명히 방법이 있더라구요. 안 그래도 할 일이 많은 터에 직원들에게 뭔가 더 요구하는 게 미안한 일이긴 합니다만 조금만 더 관심을 가지고 찾아봤으면 합니다. 당장 큰 변화를 가져오진 못해도 예술인에게는 실질적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게 사실 큰 변화일 수 있고요.
최근 미투 운동과 관련해 재단 차원에서 어떻게 대응하고 있나요?
예술계 권력관계 속에서 나온 문제들을 대상으로 불공정행위 신고상담센터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재단에서 접수를 받고 문제 해결을 위해서 노력하겠지만 사실 이 문제는 불공정행위의 원인이랄 수 있는 권력관계와 젠더 문제가 얽힌 아주 어려운 문제입니다. 중요한 문제이고 그만큼 전문적인 도움이 필요한 일입니다. 피해자의 안전도 보장되어야 하고요.
전문기관에서 1차 신고를 접수하고, 해결하는 과정에서 예술인들이 법적 공방을 하게 되거나 사후적으로 심리치료를 한다거나 할 때 재단이 도움을 주는 역할 분담이 필요하지 않을까 합니다. 피해자의 혼란을 막고, 신고 과정에서 2차 피해를 입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니까요.
지금까지는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가 예술계 내에 있었습니다.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피해자가 예술인이 아닌데 가해자는 예술인이거나, 반대로 피해자가 예술인인데 가해자가 예술인이 아니거나 하는 사례가 있을 수 있습니다. 현재 가해자가 예술인인 경우 피해자가 예술인이 아니더라도 예술계의 문제로 취급합니다. 반면 피해자가 예술인이고 가해자가 예술인이 아닌 경우는 어떻게들 볼까요? 우리 재단이 주력해야 할 건 후자 사례라 생각합니다. 피해자 예술인을 지원해야 합니다. 예술계 성폭력 문제를 피해자를 중심에 두고 바라보고 풀어 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가해자를 비난 하면서 선정적으로 소비하는 데 초점을 맞추기보다 피해자를 보호하고 치유하는 일이 최우선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대표로서 꼭 실현했으면 하는 사업 혹은 사업 방향이 있다면요?
제가 예술인 복지재단 대표로서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이런 겁니다. 무명으로 활동하는 예술인들이 부모나 본인 상(喪)을 당하면, 대부분 상가 풍경이 참 쓸쓸합니다. 상대적으로 더 초라해 보여서 제가 운 적도 많아요. 비록 잘 알려지지 않았고 가난을 벗어나지 못한 예술인이더라도 마지막 가는 길에 초라하지 않게 조화라도 준비해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술인복지재단이 예술인을 응원한다는 건 이런 의미이기도 하니까요. 말하자면 가장 어려운 시기에, 그래도 우리 복지재단이 마지막으로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드릴 수 있는 일을 꼭 하고 싶습니다. 이런저런 행정적 제약이 있더라도 예술인들에게 우리는 그런 일을 하는 기관이었으면 합니다.
예술인 복지 향상을 위해 예술인과 정책 운영자(재단), 정부가 해야 할 각각의 역할이 조금씩 다를 텐데요, 끝으로 각각에 기대하는 바를 말씀해주세요.
아직 적응 중이고, 큰 틀에서는 재단 업무를 파악하고 있지만 대개 그렇듯이 조금씩 알아갈수록 궁금한 게 많아지고 있어요. 섣불리 어떤 기대나 요구를 하기가 아직은 좀 조심스럽습니다만, 정부에게는 예술인 복지 정책을 잘 펼칠 수 있게 예산이나 제도적 배려를 좀 더 바라게 되죠. 그건 공공기관이면 다 바라는 걸 겁니다. 예술인복지재단만의 특성을 살려 말한다면, 예산문제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하는 사업이 고용노동부나 여성가족부, 보건복지부 등의 문체부 이외의 부처들과 다양하게 연계되어 있으니 그런 특성을 반영한, 관련 부처들을 가로지르는 제도와 행정적 절차 등을 설계해줄 것을 부탁하고 싶습니다. 예술계에는 예술인들끼리 서로 돕는 노력을 기대하고 싶습니다. 공공의 도움에 의존하는 예술인 복지를 넘어서서 예술계 내부의 힘을 모으고 예술인들끼리 서로 돕고 의지할 수 있는 관계나 연대체를 만들어갔으면 합니다. 그 안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분명히 있으니까요.
여러 번 강조한 것처럼 재단이 하는 주요한 일은 예술인을 응원하는 겁니다. 현장의 예술인들은 한 분 한 분 모두 소중한 분들이고, 섬세한 응원이 필요한 분들입니다. 그동안 현장에서 경험해 온 우리 직원들이 저보다 더 잘 알고 있을 거라고 짐작합니다. 원래 응원은 선수들이 잘하고 있을 때보다 그렇지 못할 때, 지치고 힘들어 하는 선수에게 더 필요한 법입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 예술인복지재단은 말하자면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지는 상황, 예술인복지, 아니 국민 전체의 복지가 갖춰져서 궁극적으로는 재단이 필요 없어지는 세상을 지향하는 게 아닐까요? 역설적으로 말하면 우리 재단의 사명은 재단이 필요 없는 환경을 만드는 거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커뮤니티 스페이스 리트머스’ 송지은 대표
경계가 만드는 긴장, “다른 세계를 느낀다는 의미죠”
2017. 10
런던에서 유학 후 다양한 공공예술 프로젝트와 협업 프로그램을 진행해 온 송지은 작가에게는 대표, 기획자, 퍼포먼스 아티스트 등 여러 수식어가 붙는다. ‘커뮤니티 스페이스 리트머스’ 운영과 진행 중인 공동 프로젝트, 예술관 등으로 이어지던 인터뷰 말미에 그는 수식어 없는 아티스트, 그냥 ‘예술가’이고 싶다고 말했다. < 김지승 사진 <응옥의 패턴>, 유품 정리사와 참여자 워크숍, 2016>
주목받고 있는 〈응옥의 패턴〉은 그에게도 가장 기억에 남는 작업이다. 2015년에 리서치를 시작해, 2016년 첫선을 보이고 현재 제주에서 진행 중인 〈응옥의 패턴〉은 세월호 참사 희생자 중 한 명인 베트남 이주여성을 위한 작업으로 그가 고민하는 지점과도 많이 맞닿아 있다고 했다. 보통 내용적인 것을 고민한 후 형태가 만들어지는데, 이 작업은 형태보다 프로젝트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관계, 이주여성에 대한 그의 감정, 베트남의 가족들을 방문하는 과정, 그 가족들과의 지속적인 관계가 중요했다. 타 장르 예술인들과 일종의 프로덕션 스타일로 실험하는 작업이 거듭될수록 〈응옥의 패턴〉은 매번 새로운 고민과 관계가 결합해 같은 이름의 새로운 작품이 되고 있다.
너무 막연한 질문일 수 있겠지만, 본인이 생각하는 예술은 어떤 것인가?
거대담론이라 누구든 짧게 얘기하긴 어려울 것 같다. 지금 내가 하는 작업의 방향에 국한해 답할 수는 있겠다. 어떤 사회에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어쨌든 개인과 사회는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다양한 예술의 형식과 방법보다 내가 느낀 것, 사회에서 보는 것, 생각하는 것들 안에서 나오는 질문들을 예술로 다시 던져볼 수 있다. 지금 하는 작업에서 보면 그게 예술이란 생각이 든다.
〈응옥의 패턴〉도 그런 예술관이 투영된 작품인 듯하다. 작업 과정에서 몰두했던 부분이 있다면?
처음에는 ‘응옥’이란 여성에게 집중했다. 그러다 보니 작업하면서 공포감이 들었다. 그 여성이 지금, 여기 존재하지 않아서였다. 그 여성과 내가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지 고민이 깊었다. 그 여성이 느꼈던 죽음에 대한 공포를 고민하면서 두려움과 마주했다. 이 과정이 나를 움직이게 했다. 사비를 털어 응옥의 베트남 본가로 갔다. 응옥이 가족을 위해 지어준 집이었다. 거기서 죽음이 삶과 괴리된 것이 아니라 삶 안에서 공존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현대 사회에서는 죽음이나 부정적이라고 판단되는 것들을 삶에서 배제하지 않나. 하지만 응옥은 집 안에, 내가 마신 차 속에, 앉았던 소파에, 숟가락에 있기도 했다. 죽음은 그런 것이란 걸, 삶과 분리되어 괴리가 큰 감정을 불러내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이 경험을 사람들이 〈응옥의 패턴〉에서 가져갔으면 좋겠다고 협업 건축가와 얘기했다. 설치물이 아니라 매개체가 되길 바랐다.
10월 중에 제주에서 〈응옥의 패턴〉을 다시 볼 수 있다고 들었다.
원래 똑같은 것을 반복해서 보여주거나 재현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형태나 내용적 재현보다 그 안에서 끌어내고 싶은 이야기들이 있었는데 미처 다루지 못했던 것들이 아직 있다. 도달하지 못한 곳의 이야기를 상상력을 결합해서 풀어보고 싶었고. 주제에 대한 고민을 다양한 장르 예술인들과 나누고 싶어서 계속 새로운 관계를 만들게 된다. 예술인 파견지원 사업에서 만난 무용가 두 분에게도 이번 제주 작업 참여를 요청했다. 여러 예술인들이 다양한 온도 차를 가지고 〈응옥의 패턴〉을 해석해줬다. 제주 작업은 처음과는 다르게 작가들 각각의 작업이 서로서로 기대어 있다. 누구 하나 빠지면 존재하기 어려운 작업이다. 서로 비스듬히 기대어 있는 구조랄까. 보는 분들이 다양한 차이와 결에서 흥미를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경험한 세계의 연장선, 안산 원곡동현재 ‘커뮤니티 스페이스 리트머스’(이하 ‘리트머스’) 대표로 있다. 공간의 정체성과 작업의 지향점은?
‘리트머스’는 동시대 미술 공간이다. 2007년 경기도 안산 원곡동에서 시작되었고 나는 2015년부터 대표를 맡아 운영하고 있다. 원곡동은 아시아 이주노동자 밀집지역이다. 이 지역 특성적 맥락을 주제로 ‘리트머스’에서 전시와 프로젝트, 교육, 포럼 등을 진행하고 있다. 이전 대표들의 생각과는 조금 다를 수 있겠지만 내게 그곳은 지역과 예술을 매개하는 공간이다. 예술인들이 지역을 읽기도 하고, 지역 사람들이 공간에서 예술을 만나기도 한다.
2011년부터 ‘리트머스’에서 작업을 했다. 6년간의 영국 유학은 내게 단기 이주 경험과 마찬가지였다. 이방인의 소외감, 아시아 여성으로서의 불편함 등 내내 이물감이 있었다. 한편으로는 그곳에서 받은 미술 교육의 장점이 한국 시스템과는 맞지 않아서 돌아와 한동안 방황도 했다. 그런 간극들을 안고 만난 안산 원곡동은 내가 경험한 세계의 연장선이었다. 어떤 맥락에서 편안함이 있었다. 사회적 시선이 만드는 개인의 소외감과 여타 감정들에 서로가 공감하기 어렵지 않았다. 공감은 예술이 가진 힘일 수 있고, 작업에도 크게 작용한다. 그래서인지 내가 ‘리트머스’와 함께 성장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공감하고 공감받는 과정이 작업의 시작점이 되기도 하는가?
작업 재료가 뭐냐고 물으면, 나는 대화라고 대답한다. 이 사람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이 사람이 바라보는 것을 느꼈을 때 세상에 관한 질문이 많이 나온다. 그래서 20대의 내 경험이 안산에서 작업으로 연결되는 것 같다. 〈소셜스킨〉이란 프로젝트도 그런 의미가 담겨 있는데, 사회적 시선에서 소외되는 것들이나 그 시선이 제멋대로 규정한 정체성을 해체하는 작업에서 그 소외는 남의 것이 아니었다. 내가 느낀 것이고, 내 것이었다. 미약하지만 그런 목소리를 내면서 지금까지 작업하고 있다. 내게는 지속적으로 영감을 주는 이 지역이 서울과 멀리 동떨어진, 갇혀 있는 곳이 아니라는 걸 사람들이 알길 바란다.
예술인 파견지원 사업 참여 경험은 어땠는지? 이후 작업에 영향을 받은 바가 있다면?
사업 원년부터 매년 참여하고 있다. 사업의 본래 목적인 예술인 복지나 사회적 인식 개선, 사회 참여 기회 연결 등도 중요하지만 예술인들이 모일 수 있는 장이 마련된다는 게 내게는 가장 매력적이다. 함께 팀을 이루는 구성원들 자체가 중요했고, 타 장르 예술인들을 만나 새로운 작업을 모색하는 게 좋았다.
작년 사업에서는 두 무용가, 배우, 미술가, 사진작가와 함께 대학로 소나무길에서 야외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아무래도 야외 전시는 비용이 많이 들고 7, 8월 야외활동이 힘들긴 했지만 또한 즐거웠다. 참여예술인들끼리 친해졌고 사업이 끝난 후에도 서로의 전시, 공연에 관심을 가지고 협업할 기회를 만들어가며 관계가 이어지고 있다. 이렇게 사람들과 연결되는 게 좋다. 넓게 퍼지는 과정에서 관계가 형성되고 여러 장르의 예술인을 만날 수 있어서 흥미롭다. 이런 부분이 내가 지향하는 예술과도 닮아 있다.
관계장으로서의 예술인 파견지원 사업사업에 꾸준히 참여하면서 예술인 복지에 대해 어떤 시각과 의견을 갖게 되었을 것 같다.
예술인 복지는 특수한 복지다. 창작자 개인을 지원하는 개념이 아니라, 예술활동에서 수익을 만들 수 없는 사회 구조를 개선하는 의미 아닌가? 그래서 예술인 복지가 다른 복지와 어떻게 달라야 하는가는 복지재단이나 정책입안자가 고민해야 할 문제다. 그 과정에서 실제 복지 대상자인 예술인들과의 대화와 협의가 있어야 하고. 그래야 예술인의 현장 상황에 기반하는 복지 사업이 가능하다. 가령, 예술인을 위한 행사나 세미나, 정책설명회 등을 오전 10시에 시작하는 건 예술인 생태를 너무 모르는 기획이다. 예술인들이 생업하는 시간, 작업하는 시간, 자기 몰두가 필요한 작업 과정 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사업에 여러 예술인들이 고마움을 갖고 있다. 여타 문화재단과 달리 예술가를 파트너로 생각하는 건 재단의 큰 장점이다. 하지만 현재 정책으로는 여러 상황의 예술인들을 다 끌어안기 힘들다. 예술인들의 현실과 생태를 연구하고 정책을 기획하는 전문 부서가 필요하고, 예술인들의 의견을 충분히 묻고 수렴할 수 있는 창구가 상시 열려 있어야 한다.
예술, 예술인에 대한 사회 평균 인식은 어떻게 느끼나?
예술인들 노동시간을 따지면 일반 직장인에 비해 결코 적지 않다. 누가 나를 구속하지 않지만 자기 주도적 활동이니 시간을 의식하지 못한 채 계속 붙잡고 있다. 그런데 보통은 예술인들이 힘든 일 안 하고 노는 사람들인 줄 안다. 이 사회가 이주노동자를 보고 대하는 방식도 이와 다르지 않다. 예술을 소비자 마인드로 대하는 일이 흔하고, 더 무서운 건 예술 정책조차도 그런 방식으로 예술을 인식하는 경향이 강해진다는 점이다. 점점 할 말이 없어진다.
언젠가 인터뷰에서 ‘삶과 예술 사이의 긴장’에 대해 언급한 걸 봤다. 평소 이 긴장을 어떻게 느끼고 작품에 반영하는가?
삶과 예술 사이에는 긴장이 필요하다. 내 삶과 예술은 그리 동떨어져 있지 않다. 하지만 예술작업이 어떤 다른 삶과 맞닥뜨렸을 때 여러 갈래에서 긴장이 확 생긴다. 예를 들어, 작업이 위치하게 된 야외 공공 공간과 예술 사이의 경계, 대중과 예술이 만났을 때의 긴장감, 타자를 만났을 때의 긴장감 등이 계속 있다. 내 경우 뭘 하든 평소에 그 긴장이 늘 존재한다. 야외 작업을 지향하고, 공공 안에 파고드는 걸 더 재밌게 느끼기 때문일 거다.
공동체 속 긴장감은 무척 중요하다. 긴장된 상태라는 건 서로를 계속 느끼는 상태라는 의미이다. 긴장감이 없으면 경계 없이 융화되고, 타자를 인식 못하면서 내 존재도 흐려진다. 예술은 경계를 계속 두면서 삶에 긴장의 모서리를 만들어주는 일이기도 하다. 삶의 일부분으로 스며드는 게 아니라 삶의 전체 판을 흔드는 것. 그럴 때 뒤통수를 맞는 느낌이 드는데 그게 재미있는 것 같다. 좀 더 실천적이고 실행적인 걸 좋아한다. 물론 아름다움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에 협업하는 분들과 미적인 것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눈다. 아름다운 것 안에 내가 고민하는 게 담겨야 하고, 그 안에서도 계속 긴장이 만들어진다.
비우고 버리는 작업 과정협업에는 타 예술 장르와의 긴장, 타자와의 긴장도 작동하지 않나?
누군가 작업에 참여하게 되면 내 안에 꾸준히 쌓인 걸 비운다. 비워야 그 사람이 와서 그 자리에 위치할 수 있다. 내 안에 무언가 꽉 들어차 있으면 누가 들어올 수가 없다. 그래서 버리는 과정이 있다. 작업 과정 전반이 그렇다. 꽉 채워서 내용을 보여주는 순간 참여예술인들은 스스로 생각할 수가 없다. 예술인이 자기가 쌓아올린 개념을 어떻게 버릴 수 있나 반문할 수 있지만 그걸 버릴 수 있어야 타인이 들어올 수 있는 예술의 여백이 생긴다. 이게 가능해지려면 작업이 몇 년에 걸쳐 장기적으로 진행될 수 있어야 한다. 한 번 리서치해서 단기간에 끝낼 수밖에 없는 상황 때문에 작품이 찍어내는 형태가 되는 경우가 많다.
그 버리고 비우는 과정이 프로젝트에서 중요한 부분일 수 있겠다.
내가 생각하는 개념 예술은 작가가 제시하는 개념과 별개로 관객이 하는 개념에 대한 질문이 계속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 개념의 공백을 만들려면 내 걸 버려야 하는 순간이 오고, 또 공동체나 커뮤니티로 예술인들이 결합할 경우 저자성도 내려놔야 할 때가 있다. 즉, 나의 것도 너의 것도 아닌 상태가 되는 거다. 그렇게 예술만 남는 것이 가능할까 하는 질문이 이어진다. 예술인이 저자성을 내려놓는다는 건 분명 싫고 어려운 일이다. 100% 되지 않는 부분도 있고, 완전히 실패하기도 하고, 내 의도와 달리 가는 경우도 있다. 그게 작업이고, 프로젝트의 특성이 된다.
기획하고 있는 프로젝트나 앞으로 작업하고 싶은 주제가 있다면?
두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다. 하나는 〈어느 이방인의 죽음〉이라고, 알려지지 않은 이주민들의 죽음을 책 형태로 아카이빙할 예정이다. 사전에 가까운 결과물이 나올 것 같다. 〈응옥의 패턴〉을 마무리한 후 이 프로젝트로 정리해 보고 싶은 다양한 형태의 삶과 죽음 들이 있다. 다른 하나는 〈풋 프린트 인 중림동〉. 서울 중림동에서 사람들과 투어하는 프로그램을 준비 중이다. 개요는 나온 상태고 진행을 앞두고 있다.
주변에서 매일 “바쁘지?”라고 물어본다. ‘리트머스’ 운영을 하고 있으니 흐름을 놓칠 수 없고 나 개인의 예술 실천도 중요하다. 지금 즐겁기 때문에 남들보다 좀 덜 쉬면 되지 않나 한다. 바쁠 땐 바쁜 게 좋은 거니까.
송지은 기획자, 아티스트 현 커뮤니티 스페이스 리트머스 대표2009 Goldsmith, University of London BA Visual Art and Critic study 2011 커뮤니티 스페이스 리트머스 〈다섯 개의 플롯, 그리고 그 이상의〉 2012 커뮤니티 스페이스 리트머스 〈지구가 부른다_다르게 사유하기〉 2013 아이공 〈서울국제뉴미디어 페스티벌〉 2014 커뮤니티 스페이스 리트머스 〈아시아 예술 축전〉 2015 175 갤러리 〈유랑; Site Explorers〉 2016 커뮤니티 스페이스 리트머스 〈응옥의 패턴〉 2017 안산국제거리극축제 [안산리서치] 〈응옥의 패턴〉
〈예술인 창작준비금 지원〉 사업은 예술인이 예술 외적 요인으로 창작활동을 중단하는 상황에 이르지 않도록 지원하는 사업으로, 2013년 이후 2016년까지 총 11,214명이 이 사업의 지원을 받았다. 예술인 창작준비금은 예술인의 창작에 어떤 영향을 줄까? 2016년 창작준비금을 받은 피아니스트·클라리네티스트 은성호 씨, 연극배우 백대현 씨, 소설가 전혜성 씨를 만나 창작준비금과 창작활동, 예술인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인터뷰·사진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정리 김지승
<<인터뷰 #1평생 예술인으로 살아가는 꿈피아니스트·클라리네티스트 은성호>>
올해 7월 발달장애인 연주자로는 처음으로 독주회를 개최한 은성호 씨는 〈2005년 전국 장애인 종합예술제〉에서 대상을 받으며 음대에 진학, ‘하트하트’ 오케스트라 수석으로 10년간 517시간의 봉사 연주를 하기도 했다. 앙상블 활동과 솔로 연주활동을 지속하면서 음대에 진학, 꾸준한 노력으로 성적 장학금을 받으며 음악적 재능을 인정받았고, 현재 국내 최초 발달장애 전문 연주단체 ‘드림 위드 앙상블’의 수석단원으로 활동하며 아름다운 꿈을 펼치고 있다.
* 인터뷰는 은성호 씨의 어머니가 대신했다. 음악을 시작한 계기가 있었나?
어렸을 때 성호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즐겨 듣곤 했다. 음악을 좋아한다는 걸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초등학교 음악 시간에 선생님을 따라 오르간을 치더라는 말을 전해 듣고 동네 피아노 학원에 부탁해 처음 피아노를 접하게 했다. 그리고 정말 우연한 기회에 성호의 절대음감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피아노 건반 10개를 누르면 10개의 음을 다 맞춘다. 이조, 전조가 몹시 어려운데 피아노 악보를 보고 클라리넷을 연주하는 걸 보고 모두가 성호의 음악적 재능을 언급했다.
성호의 경우 음악을 통해 감정 표현을 배우고, 서투르던 감정 표현이 좋아지고 있다. 아무래도 표현이 기계적이고 딱딱한 경우가 많은데 앙상블 활동을 하면서 표현 능력이 많이 좋아진 것 같다.
첫 독주회의 의미가 남다를 듯하다. 무엇보다 두 악기를 동시에 연습하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성호는 현재 ‘드림 위드 앙상블’이라는 곳에서 일하고 있다. 1달에 약 75시간 이상을 근무한다. 보통 1주일에 5일 정도, 5시간 이상 일하는 셈이고 연습은 또 따로 해야 한다. 집에서는 소음 민원 발생 때문에 연습이 어려워 남아서 연습을 하고 1주일에 2회 이상 레슨도 꾸준히 받고 있다. 다른 연주자들은 독주회를 진행하기 위해 최소 3개월간 몰두한다고 하던데 성호는 그럴 수 없는 상황이었다. ‘드림 위드 앙상블’에 성호의 피아노, 클라리넷 파트가 있어서 지방 공연도 빠질 수 없었다. 체력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아주 힘들었다.
또한, 경제적인 부분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 성호는 최저 임금을 받고 있다. 어떨 땐 이렇게 힘들게 고생하고 고작 최저 임금이라니 하는 자괴감이 들 때도 있지만, 돈보다 소중한 가치가 있는 삶을 보상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밥 세 끼는 먹으니까. 여러 가지 이유로 힘들지만 성호를 통한 사회적인 인식개선 효과도 크다고 본다. 언젠가는 예술인으로 당당하게 대우받으리라는 희망을 품고 있다.
2014년 파견지원 사업에도 참여한 것으로 안다. 재단과의 인연은 언제 시작되었나?
성호가 음악을 시작할 즈음 경제적으로 어려워졌다. 그런저런 고민을 하던 중이었는데 미국의 지인이 재단을 소개해주며 도움이 될 만한 게 있을지 문의해보라고 하길래 무작정 찾아갔다. 예술활동증명을 받으라고 해서 성호 경력을 이력서로 제출했고, 한 달 정도 후 예술활동증명이 완료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게 시작이었다.
2014년 파견지원 사업 때는 ‘하트하트’ 오케스트라에서 6개월간 활동했다. 당시 파견지원 사업 면접을 보고 워크숍에 참석했는데 참석자 중 성호만 장애가 있는 것 같아서 사업 참여 자격 등에 대해 우려가 되었다. 그때 담당자에게 “예술 활동을 이렇게 많이 했는데 당연히 예술인이고 자격이 되죠”라는 말을 들었다. 편견 없이 대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 그 후 창작준비금 사업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창작준비금 지원으로 달라진 점이 있다면?
지금도 성호는 항상 이어폰을 꽂고 산다. 전자파가 걱정되어서 말릴 정도이다. 자폐의 경우 꾸준하게 하지 않으면 실력이 늘지 않고, 더구나 성호는 악기를 2개나 다루기 때문에 힘들 수밖에 없다. 창작준비금 지원으로 경제적 부분이 해결되면서 음악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지속적으로 레슨을 받아야 하는데 창작준비금 덕분에 그 부담이 줄었고, 성호의 연주 실력이 나아질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좀 더 프로로 다가갈 수 있는 밑거름이 된 것 같아 개인적으로 너무 감사하다. 가뭄의 단비 같았다.
창작준비금 지원 사업에 대한 주변 반응은?
도움이 된다는 반응이다. 연주하는 예술인들에게 경제적으로 굉장히 큰 지원이 된다. 성호가 직업 연주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나, 독주회를 할 수 있었던 것, 연주를 계속할 수 있었던 것 모두 정부의 지원 사업이 힘이 되었다. 성호처럼 연주 활동을 활발하게 펼치는 후배들도 예술활동증명을 완료하여 재단 사업을 지원받고 있다. 성호를 통해 재단을 알게 되어 예술활동증명 절차를 받은 친구들도 있다.
앞으로 이루고 싶은 꿈이나 바람이 있다면?
발달장애를 가진 아이들의 부모들은 공통적으로 한 가지 바람을 가진다. 내가 내 자식보다 하루 더 사는 것. 그런데 성호가 음악을 시작하면서 바람이랄까 목표가 달라졌다. 먼 훗날 내가 세상에 없더라도 성호가 이 분야의 연주자로서, 예술인으로서 평생 살아갈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장애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지금보다 더 전문적인 연주자가 되길 바란다. 성호에게 예술이 직업이 되고, 성호가 비장애인 예술인처럼 인정받는 것. 그게 최종 목표다.
<<인터뷰 #2시간을 초월해 소통하는 연기로연극배우 백대현 씨>>
타이베이 공동제작 〈탈북자〉, 한일 공동제작 〈모든 것은 갑자기 온다〉, 아시아 5개국 협력 프로젝트 〈Asia Meets Asia in Busan〉 연출 등 백대현 씨는 아시아를 넘나들며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연기를 시작한 지도 19년이 넘어간다는 그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일을 연극에 있어 주요한 힘으로 꼽는다.
연극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나?
지금 돌아보면 정말 우연한 기회에 시작한 것 같다. 예전부터 연기에 관심은 있었고, 극단 한강에서 〈교실이데아〉라는 작품으로 데뷔하면서 연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시기에 연기가 무엇인지, 연극의 매력은 무엇인지 많이 생각하고 배울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지금까지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연극을 하면서 많이 배운, 어쩌면 내 연기 생활을 바꿔 놓았다 해도 과언이 아닌 작품이 있다. 〈엄마 안녕〉이라는 작품인데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극단 쉼의 대표 작품이고, 전태일 열사가 분신하러 가기 직전 상황과 분신 이후 어머니의 기억이 연결되는 이야기와 대화가 있었다. 전태일 열사의 영혼이 어머니에게로 오는, 굉장히 시적인 작품이었다. 움직임도 많지 않아 처음에 연기하기가 너무 힘들었던 작품이기도 했다. 연출은 자꾸 다른 것을 원했지만 어떤 식으로 연기를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던 중 전태일 열사가 유언하는 장면에서 역할을 소화하다 보니 순간 다리가 떨리면서 눈물이 났다. 그때 깨달았다. 연기란 테크닉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별거 아닌 듯하지만 그걸 몸소 느낄 수 있게 해준 작품이라서 가장 기억에 남는다.
재단을 알게 된 계기와 창작준비금 사업에 대한 주변 반응은?
재단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것 아닌가?(웃음) 특별히 알게 된 계기가 따로 있지 않다. 재단이 설립된 시기부터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던 것 같다. 주변에서 이런 곳이 설립될 예정이니 도움이 많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해주기도 했다.
창작준비금의 경우 신청한다고 다 주는 것은 아니지 않나. 동료들 중 몇몇이 사업을 신청하면, 그중 누군가는 받고 누군가는 받지 못한다. 아무래도 뭔가 좀 미안한 마음에, 또 받지 못한 사람들을 배려하는 의미에서 지원금을 받아도 말을 하지 못하는 것 같다. 지원금이 도움이 되니까 그 도움을 못 받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창작준비금을 신청하면서 힘들었던 점이나 보완했으면 하는 점이 있다면?
이 사업에 연속성과 지속성이 있으면 더 좋지 않을까 싶다. 2년에 한 번씩 사업에 참여 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느 때는 받고, 어느 때는 못 받으면 예술인들의 불규칙한 경제 상황과 다를 바가 없다. 1년에 한 번씩이라든가 좀 연속적으로, 훨씬 안정적으로 이어지길 바란다.
창작준비금 지원자 중 많은 분들이 서류 절차가 힘들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시작도 하기 전에 망설이는 분들이 많은 이유다. 내 경우는 걱정했던 것보다는 신청이 어렵지 않았다. 다만 나이가 있는 분들, 컴퓨터 사용이 어려운 분들은 이런저런 서류 준비가 어려울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 분들도 신청할 수 있도록 서류 준비에 도움받을 수 있는 창구가 곳곳에 있다면 좋을 듯하다.
창작준비금 지원이 가져온 변화가 있다면?
연극으로만 생활하기에는 금전적으로 많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아이들을 대상으로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투잡을 뛰는 셈이다. 아이들 강의 준비하랴, 연극 공연 준비하랴 정신없이 지내다 보면 내 본업인 연극에 충실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다가 창작준비금을 받고 적어도 2~3달 정도는 안정적으로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큰 변화를 만들지는 못했지만 정말 오직 작품에만 전념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앞으로 이루고 싶은 꿈이나 바람이 있다면?
연극은 그것만으로 생계유지가 가능한 직업이 아니다. 내 형편도 다르지 않다. 하지만 연극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하고 싶다. 돈을 얻지 못한다면 그것 말고 얻을 수 있는 것, 의미 있는 다른 것을 찾아야 한다. 인간과 세상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히는 것 같은. 옛 제사장이 하늘과 땅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했듯이 나는 연기를 통해 시간을 초월하여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관객과 소통하고 싶다. 배우로서 끊임없이 고민하는 부분이고 또한 가장 어려운 지점이기도 하다. 많은 관객들이 내 무대 위 모습에 한없이 빠져들었으면 한다. 그래서 언젠가는 누구나 믿고 보는 배우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인터뷰 #3소박하지만 단단하게소설가 전혜성 씨>>
잊히고 사라진 줄 알았던 꿈이 거기 있었다. 오랜 꿈인 소설가가 되고 싶어서 늦깎이로 국문학과에 덜컥 입학한 게 시작이었다. 학·석사 과정을 거쳐 『울산문학』 수필 신인상을, 2013년도에는 『문예운동』에서 소설 신인상을 수상했으며 지난해 발간한 첫 장편소설 『강변의 자전거』로 마침내 자신이 원하는 소설가의 자리에 우뚝 섰다는 전혜성 씨는 소설가가 되었다는 자부심과 함께 뭔지 모를 책임감이 무거우면서도 흡족하다고 말했다.
어렸을 때 꿈이 소설가였나?
그렇다. 박경리, 박완서, 이문열, 오영수 등과 같은 작가들의 작품을 보며 꿈을 꿨다. 막연하지만 언젠가는 내 이름으로 발간될 소설책을 갖고 싶었다. 하지만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다 보니 현실은 꿈과 너무 멀었다. 마음속으로만 꿈을 간직하고 살았던 것 같다. 아들이 군에 갈 즈음 비로소 시간적으로도 심적으로도 좀 여유가 생겼고 소설에 대한 꿈이 다시 꾸물꾸물 올라왔다. 처음에는 국문학과에 진학해야 소설가가 되는 줄 알고 진학했다. 나중에야 글을 쓰기 위해 꼭 국문학과를 졸업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았다. 학사 과정 후 2002년부터 내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고 테크닉적인 부분을 더 배우고 싶어서 문예창작학과에 다시 진학했다. 거기에서는 소설보다 수필을 더 쓰게 되었다. 그때 써온 수필로 수필 신인상을 받고 굉장히 기분이 좋았다. 나도 조금씩 인정을 받는 것 같아서. 그 후로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대학원에 진학해 공부를 더 하기도 했다.
2016년에 나온 첫 장편 『강변의 자전거』는 어떤 작품인가?
강변에서 자란 철부지 소녀 초희의 시선에서 마을 사람들과 친구들의 이야기를 소소하게 담아낸 성장소설이다. 『강변의 자전거』는 나에게 첫 장편소설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내가 소설을 쓸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준 작품이어서 의미가 있다.
원래 제3자의 입장에서 풀어나가려 했던 이야기인데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쉽지 않았다. 한걸음 뒤에서 바라보는 이야기를 신선하게 다루고 싶은 욕심이 있었지만 제3자의 입장에서 설명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결국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쓰게 되었다. 여전히 부족하고 소설에 대해 알면 알수록 목마름이 심해진다. 앞으로 내공을 더 쌓아야 한다.
창작준비금을 통해 책을 발간했다. 재단을 만난 계기가 있다면?
현재 울산문인협회 회원, 소설협회 회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울산시에서 예술인들에게 지원하는 지원금이 있는데 장르별로 소수 인원 대상으로 지원하는 거라 경쟁률이 높다. 지인이 이 지원금을 받아서 나도 지원해봤으나 경력이 짧아 떨어졌고 그러던 중 다른 지원 사업을 찾다가 재단을 알게 되었다.
예술활동증명을 완료해야 재단 사업에 참여할 수 있다고 해서 그간의 활동내역들을 제출했고 20일 후쯤 예술활동증명이 완료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 후로 재단 사업이나 소식 등을 이메일과 문자로 받아보고 있다. 그 통로로 재단 사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창작준비금 신청 시 어려운 점이 있었다면?
제출할 서류가 많아서 복잡한 절차가 있었다. 소득증명서를 발급받기 위해 갔던 일이 가장 어려웠던 것 같다. 서너 군데 정도 다녔다. 하지만 지원금을 받는 데 이 정도 수고도 없다면 너무 양심이 없는 것 아닌가 싶었다. 이 정도 발품을 팔고 시간을 써서 지원금을 받아 소설집을 낼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쁠까 하는 생각에 힘들 줄 몰랐다.
창작준비금에 대한 주변 반응은 어떤가?
아직 재단을 잘 모르는 울산 지역 예술인들이 많은 것 같다. 『강변의 자전거』를 발간하며 출판 기념회를 열었는데 그때 재단 지원금을 통해 책을 발간하게 되었다고 언급했다. 대부분이 그런 곳이 있었냐는 반응으로, 재단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이후 재단에 대해 관심과 질문이 이어졌다. 창작준비금의 경우 소득과 건강보험료 중심으로 심사를 하기 때문에 해당되지 않는 예술인들도 많지만, 그 외에도 재단의 다양하고 좋은 사업들이 있어서 나뿐만 아니라 다른 예술인들의 기대가 크다.
창작준비금 지원 이후 변화가 있다면?
가장 큰 변화라면 창작준비금을 통해 작품을 발간하고, 내 이름으로 된 책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지원금을 받기 전에는 주변 몇몇 지인들만 아는 ‘소설 쓰는 사람’이었는데 책을 발간한 이후로는 인지도가 급격하게 상승했다.(웃음) 내가 소설가가 되었다는 자부심과 함께 뭔지 모를 책임감도 생겼다. 무엇보다 어릴 적 꿈을 이뤄서 너무 흡족하다.
앞으로 이루고 싶은 꿈이나 바람이 있다면?
큰 바람은 없다. 계속 쓸 수 있길 바란다. 그러다가 소설집 한 권을 더 집필하고 조금씩 소설가로 자리를 잡아가는 것. 바라는 건 그 정도다. 그냥 편안한 소설가가 되고 싶다. 어떤 예술 분야든 마찬가지겠지만 소설가로 생계를 유지하거나 이름을 알리는 일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현실적으로도 그렇지만 수많은 작가들과 보이지 않는 경쟁을 하면서 자기 세계를 지켜야 한다. 욕심이라면 그런 상황 속에서도 소설가로 인정받아 인세로 한 달에 30만 원씩만 받았으면 좋겠다.(웃음)